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631 - Chapter 1640

1766 Chapters

제1631화

다음 날.강지안은 최수빈과 만나기로 한 카페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약속 시간보다 몇 분 일찍 도착한 그녀는 단정한 미색 린넨 셔츠에 청바지, 낮은 굽의 신발을 신고 있었다. 특별한 장식 하나 없이 머리는 대충 뒤로 묶어 올린 채였다. 덕분에 희고 갸름한 옆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장성훈의 숨 막히는 별장을 떠난 뒤, 강지안은 한결 차분해졌다.하지만 그 차분함은 이전과는 달랐다.더 이상 남의 집에 얹혀사는 사람처럼 눈치를 보지 않았고 장성훈을 마주할 때처럼 온몸에 힘을 주고 경계하지도 않았다. 기억을 잃은 뒤 느꼈던 막막함과 불안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그저 조용히 자리에 앉아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두 손으로 감싼 채, 평온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곧게 편 허리는 마치 이제야 자신의 땅에 뿌리를 내린 한 그루의 나무 같았다.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강지안이 고개를 들었다. 최수빈이 카페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연한 브라운색 트렌치코트를 걸친 그녀는 부드러우면서도 확고한 분위기를 풍겼다. 멀리서부터 강지안을 발견한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천공연구원에서 보여주는 냉철하고 추진력 있는 ‘수빈 씨’와는 달랐다.강지안을 대하는 최수빈에게는 친구를 향한 다정함과 여유가 묻어났다.“오래 기다렸어요?”“아니요. 방금 왔어요.”강지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최수빈은 처음부터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먼저 커피 두 잔을 주문한 뒤, 가볍게 근황부터 물었다.“새로 구한 곳은 좀 익숙해졌어요?”“네.”강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작긴 한데... 마음은 편해요.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고 계속 긴장하고 있을 필요도 없어서요.”그 말을 들은 최수빈의 눈빛에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스쳤다.그동안 강지안이 겪은 일은 너무나 힘겨웠다.독에 중독되고 기억을 잃고 자신이 있을 곳도 아닌 별장에 갇힌 채 살아야 했다.장성훈의 집착과 민채영의 괴롭힘을 견뎌야 했고 어렵게 살려낸 작은 고양이조차 끝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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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2화

강지안은 멍하니 최수빈의 말을 듣고 있었다. 심장이 가볍게 떨렸다.‘나만의 병원이 있다고? 나만의 일이 있다고? 뼛속 깊이 새겨진 나만의 능력이 있다고?’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었다.누군가의 보호 아래 갇힌 사람도 아니었다.강지안, 그녀는 의사였다.“나...”강지안은 목이 메인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나는... 내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은 한 번도 못 했어요.”“지안 씨는 단순히 평범한 환자들만 치료한 게 아니에요.”최수빈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을 꺼냈다.“주민혁, 그 사람도 한때는 지안 씨의 환자였어요.”강지안이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주민혁, 그는 차분하면서도 압도적인 분위기를 지닌 사람, 거대한 정보망을 쥐고 누구보다 높은 곳에 서 있는 남자, 최수빈의 남편이자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그런 사람이 심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고? 그것도... 나한테?’“그 사람의 경우는 조금 특별했어요.”최수빈은 숨기지도, 그렇다고 위험한 부분까지 억지로 건드리지는 않았다.“어릴 때부터 많은 일을 겪었고 감정 조절이나 수면 문제, 극심한 스트레스 반응까지 여러 문제가 있었죠. 국내외 유명한 전문가들도 많이 찾아갔지만 쉽게 안정되지 않았고 그러다 지안 씨를 만났어요.”강지안의 숨이 순간 멎었다.“지안 씨가 조금씩 그 사람을 무너져 내리기 직전의 상태에서 끌어올렸어요.”최수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지안 씨가 직접 치료 계획을 세웠고 가장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도록 곁에서 함께했어요. 그렇게 결국 민혁 씨가 평범한 가정과 안정된 감정, 평범한 삶을 되찾을 수 있게 만든 것도 지안 씨에요. 나에게도, 민혁 씨에게도 지안 씨는 단순한 친구가 아니에요.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나 다름없죠.”강지안은 의자에 앉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창밖의 햇살이 그녀의 손등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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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3화

차는 결국 한 채의 하얀 건물 앞에 멈춰 섰다.간판도 없고 특별한 표식도 없었다.겉모습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단순하고 담백했지만 이상하게도 깨끗하고 전문적이며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느껴졌다.“도착했어요.”최수빈이 조용히 말했다.강지안은 차 문을 열고 내려서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하얀 건물을 올려다봤다.그 순간,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낯설지도, 신기하지도 않았고 그저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건물의 선 하나하나, 창문의 위치, 벽돌의 모양, 햇빛이 내려앉는 각도까지...모든 것이 마치 강지안의 마음속 가장 편안한 곳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듯했다.강지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에 이끌리듯 천천히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문을 여는 순간, 익숙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은은한 색감의 인테리어, 눈부시지 않고 부드러운 조명, 조용히 이어진 복도, 과하지 않은 벽면의 질감, 상담실의 구조, 휴게 공간에 놓인 소파, 그리고 공기 속에 은은하게 퍼지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향까지...모든 것이 그녀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지점에 정확히 맞춰져 있었다.그때 안쪽에서 인기척을 들은 간호사가 걸어 나왔다.강지안을 본 순간, 그녀는 잠시 얼어붙더니 곧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고는 감격과 존경이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강 선생님... 돌아오셨군요.”강 선생님, 그 한마디에 강지안은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내가 정말... 의사였구나.’“전... 그쪽을 기억하지 못해요.”강지안이 미안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간호사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돌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모두가 계속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병원은 계속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어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상담실도, 사무실도, 선생님 물건들도... 전부 원래 모습 그대로 두었어요.”강지안은 아무 말 없이 안쪽으로 걸어갔다.최수빈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재촉하지도, 방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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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4화

“지안 씨는 환자를 치료할 때 그림을 활용해서 상태를 평가하는 습관이 있었어요.”최수빈이 옆에서 조용히 설명했다.“많은 환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못하거나,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하죠. 하지만 지안 씨는 선의 흐름이나 구도, 명암만 보고도 그 사람이 숨기고 있는 감정을 정확하게 파악했어요. 그건 지안 씨만의 능력이었어요. 다른 사람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재능이기도 하고요.”강지안은 손에 쥔 목탄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가 이렇게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과거의 내가... 이렇게 강한 사람이었다고?’그녀는 천천히 목탄을 내려놓더니 최수빈을 바라봤다.차분한 눈빛이었으나 그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그것은 의사로서의 냉정함과 전문성,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었다.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사라질 수 없는 뼛속 깊이 새겨진 강지안의 모습이었다.“수빈 씨, 주민혁 씨의 병력 기록을 보여줘요.”최수빈은 순간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전체 기록을 확인한 뒤에...”강지안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다음에 주민혁 씨를 데려와 줘요. 다시 한번 제대로 평가해볼게요. 예전의 내가 치료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도 할 수 있을 거예요.”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확신을 얻기 위해 묻는 것도 아니었다. 한 명의 의사로서 자신의 전문성을 믿는 말이자 몸에 새겨진 책임감에서 나온 말이었다.최수빈은 그런 강지안을 바라보며 눈빛을 조금 누그러뜨렸다.기억을 몇 번이나 잃어도, 많은 상처를 받아도, 강지안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타인을 향한 선함, 끝까지 버티는 강인함, 그리고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의사의 마음, 그 무엇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다만...“지안 씨.”최수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자신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도 알아요. 민혁 씨를 돕고 싶은 마음도 알아요. 하지만 지금 지안 씨의 몸은 겨우 회복된 상태예요. 감정도 아직 완전히 안정된 건 아니고요. 고양이 일도, 민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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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5화

그 순간, 강지안은 완전히 깨달았다.더 이상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그 어떤 별장도, 그 어떤 보살핌도, 그 어떤 보호도, 손에 쥔 자신의 집 한 채, 자신의 능력, 그리고 스스로를 지탱할 자신감만큼 값질 수는 없었다.강지안은 망설임 없이 휴대폰을 꺼냈다.그리고 전에 살던 월셋집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세요. 저 재계약은 하지 않으려고요. 이틀 안에 짐 정리해서 전부 빼겠습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해요.”갑작스러운 연락에 집주인은 조금 놀랐지만 흔쾌히 알겠다고 답했다.전화를 끊은 강지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위층 자신의 아파트로 이어지는 보안문을 열었다.한 걸음씩, 천천히, 진짜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것이었다.복도는 깨끗하고 조용했다.은은한 조명 아래 불필요한 소음 하나 없었고 곳곳의 작은 디테일까지 모두 그녀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졌다.강지안은 자신의 집 앞에 멈춰 섰다.그런 다음 열쇠를 자물쇠에 꽂아 넣고 천천히 돌렸다.“찰칵.”문이 열리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렸다.문 안쪽의 공간은 고요하면서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곳만의 온전한 세계가 있는 것이었다.장성훈의 별장처럼 차갑고 화려한 공간이 아니었지만 따뜻하고 간결하며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집이었다.거실에는 연한 회색 카펫이 깔려 있었고 커다란 창문 너머로는 도시의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베란다에는 그녀가 좋아하던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서재는 상담실과 연결되어 있었고 책장에는 심리학, 의학, 인물 전기, 문학 작품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모든 것이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이었다.모든 분위기가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었다.강지안은 현관에 선 채 눈시울을 붉혔다.자신에게는 집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잠시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집에서 떨어져 있었을 뿐이었다.그녀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더니 손끝으로 벽을 쓸고 소파를 만지고 책상과 창가를 지나갔다.모든 곳에 익숙한 감촉이 남아 있었다.마치 깊이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조금씩 깨어나는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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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6화

강지안은 장성훈을 떠난 뒤, 오히려 더 잘 살아가고 있었다.강지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주변의 공기마저 몇 도는 내려간 듯 싸늘해졌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잔뜩 거리를 두는 듯한 눈빛으로 차갑게 장성훈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눈앞의 사람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낯선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장성훈은 마른침을 삼키며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갔다. 곧 낮고 쉰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아가씨.”강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화난 거 알아요.”장성훈은 한껏 자세를 낮췄다. 평소의 날카로운 기색은 모두 내려놓은 채 그녀의 앞에서는 자존심마저 접은 듯했다.“밖에서 지내지 마요. 저랑 같이 돌아가면 안 돼요?”“돌아가요?”강지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어디로 돌아가라는 거예요? 민채영 씨가 언제든 돌아와서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걸 망가뜨릴 수 있는 그 별장으로요? 아니면 날 위해서야라는 말로 나를 가둬 두던 그 감옥으로요?”그녀는 뒤에 있는 문을 가리키더니 확신과 자부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장성훈 씨, 똑똑히 봐요. 여기가 내 집이에요. 나한테는 집도 있고 클리닉도 있고 일도 있어요. 그리고 내 인생도 있고요. 그런데 내가 왜 성훈 씨한테 돌아가야 해요?”“전 아가씨가 아가씨의 인생을 살지 못하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장성훈이 다급히 해명했다.“그저 아가씨를 돌봐주고 싶었어요. 지금 아가씨는 기억도 잃었고 몸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잖아요.”“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된 건 아니에요.”강지안이 차갑게 장성훈의 말을 끊었다.“내 몸 하나는 챙길 수 있어요. 내 힘으로 살아갈 수도 있고 나 자신도 지킬 수 있어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날 곁에 묶어 두려고 하지 마요.”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장성훈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차가운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울렸다.“다시 말하지만 난 성훈 씨랑 안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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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7화

굳이 애써 기억을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전문가로서의 판단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그렇게 회의가 한창 진행되던 중, 중간 휴식 시간이 되자 행사장 입구로 낯익으면서도 보기 싫은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바로 민채영이었다.그녀는 공들여 고른 듯한 연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정교하게 꾸민 화장, 우아하게 말린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게다가 사회적으로 꽤 지위가 있어 보이는 한 중년 남성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등장하자마자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었다.민채영 역시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러 온 모양이었다. 곁에는 몇 명의 실무진까지 함께 있었고 여유로운 태도에서는 이미 결과를 확신하는 듯한 자신감이 느껴졌다.강지안은 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순간 머릿속을 스친 것은 차갑게 식어 있던 작은 고양이의 몸이었다.‘이 집의 안주인은 나예요.’민채영이 했던 그 말도 떠올랐다.떠나기 전, 자신에게 쏟아냈던 악의적인 비웃음과 독기 어린 눈빛도 떠오르자 가슴 깊은 곳에서 서서히 분노가 차올랐다.그러나 강지안은 그것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 이곳은 사적인 감정이 오가는 자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그녀는 지금 강지안이라는 의사였지, 사랑과 원망에 휘둘리는 여자가 아니었다.굳이 이곳에서 감정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민채영의 시선은 곧 행사장 전체를 훑었다. 그러다 정확히 강지안에게 멈춰 섰고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처음 민채영은 순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러나 곧 원망, 독기,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거두고 가식적인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그녀는 옆에 있던 중년 남성의 팔을 자연스럽게 놓고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채 강지안에게 다가왔다.우아한 모습이었으나 그 안에는 날카로운 독이 숨겨진 듯했다.마치 아름답게 꾸민 독 있는 공작새 같았다.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도 이쪽 상황을 눈치채고 시선을 돌렸다.민채영은 강지안의 앞에 멈춰 서서 환하게 웃더니 주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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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8화

그때 진행자가 무대 위로 올라와 후반부 시작을 알렸다.이제부터 본격적인 프로젝트 입찰 발표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민채영은 강지안을 매섭게 한 번 노려본 뒤,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이 프로젝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가져가고 말겠어. 사업도 빼앗고 자존심도 짓밟는 거야. 강지안이 업계에서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입찰 발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여러 기관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자신들의 계획안과 데이터, 사례, 인력 구성, 실행 방안을 설명했다.민채영은 중간 순서였다.무대에 오르자 그녀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막힘없는 말솜씨를 뽐냈다.준비한 계획안은 화려했고 수치는 보기 좋게 포장되어 있었다.게다가 뒤에 있는 대형 기관의 지원까지 내세우며 신뢰도를 높였다.발표가 끝날 무렵, 객석 곳곳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보였다.민채영은 내려오기 전 일부러 강지안을 바라봤다. 마치 승리를 선언하는 듯한 눈빛이었다.하지만 강지안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마지막 순서는 강지안이었다.화려한 PPT도 없었고 과장된 홍보 문구도 없었으며 감정을 자극하는 말도 없었다.그녀는 무대 중앙에 조용히 섰다.조명이 그녀를 비추자 차갑고 깨끗한 분위기 속에서 전문적인 기류가 흘렀다.평온한 눈빛, 그러나 그 안에는 누구도 쉽게 흔들 수 없는 힘이 있었다.곧 강지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심사위원 여러분, 저는 개인 상담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는 강지안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가 제안드릴 계획의 핵심은 단 세 글자입니다. 바로 현장성이에요.”군더더기 없이 강지안은 곧장 핵심으로 들어갔다.청소년 심리 선별 검사 체계. 지역사회 기반 상주 관리 모델, 위기 상황 발생 시 신속 대응 시스템, 그리고 장기 추적 관리 체계와 실제 임상 사례 데이터까지...낮은 비용, 높은 접근성, 확장 가능한 구조...그녀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프로젝트가 가장 필요로 하는 부분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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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9화

“나 너무 무서워... 오늘 프로젝트 회의에서 누가 나를 괴롭혔어. 나 정말 억울해. 빨리 와주면 안 돼?”민채영은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흐느끼며 한마디 한마디에 교묘하게 의미를 심었다.마치 자신을 괴롭힌 사람이 강지안인 것처럼 말이다.휴대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곧 장성훈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누가 너를 괴롭혔는데?”민채영은 입술을 깨물며 애써 울음을 참는 척했다.“그게... 지안 씨야. 회의에서 내가 인사했는데도 무시한 건 그렇다 쳐도, 내 프로젝트까지 빼앗아 갔어. 그리고... 그리고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일부러 날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어. 사람들이 전부 보고 있었다고... 나 정말 더는 거기 못 있겠더라.”말 하나하나가 자신은 아무 잘못 없는 피해자로 포장하면서 강지안을 비난하는 것이었다.때마침, 행사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비상구 앞을 지나고 있던 강지안은 그 말을 들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민채영을 바라보았다.차갑고 날카로운 눈빛, 마치 칼날처럼 민채영이 애써 꾸며낸 모든 거짓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민채영은 순간 몸이 굳으며 휴대폰을 쥔 손끝이 떨렸고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강지안은 다가가지 않았다. 그녀의 거짓말을 바로 폭로하지도 않았다.소리를 지르거나 따지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민채영을 바라볼 뿐이었다.그러다 비웃는 듯 마는 듯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눈빛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계속 연기해요. 그쪽이 어디까지 꾸며낼 수 있는지 지켜볼 테니까.”작은 고양이의 빚, 오늘 프로젝트에서 당한 모욕, 그 모든 걸 강지안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절대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었다.민채영은 그 시선을 견디지 못했다.등골이 서늘해지고 마음이 불안해진 그녀는 서둘러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빨리 와줘...”그러고는 황급히 통화를 끊었다.더 이상 강지안과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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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0화

프로젝트 회의장 입구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가로등 아래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바람에 따라 길어졌다 짧아졌다를 반복했다.민채영은 여전히 장성훈의 품에 매달린 채 흐느끼며 한마디 한마디 강지안이 자신을 괴롭혔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하지만 장성훈은 그녀를 내려다보면서도 안쓰러워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싸늘하게 식은 눈빛이 민채영을 꿰뚫고 있었다.잠시 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뒤쪽 어둠 속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곧 두 명의 경호원이 다가왔다.“채영 아가씨 먼저 차에 모셔.”장성훈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 내리지 못하게 해.”민채영은 순간 몸이 굳어서는 장성훈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그러고는 눈가가 붉어진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성훈 씨...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내가 괴롭힘당한 사람이잖아!”하지만 장성훈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말할 뿐이었다.“조용히 있어. 그게 너한테도 좋아.”곧 경호원들이 다가와 민채영의 양팔을 붙잡았다. 몇 번이나 몸부림쳐봤지만 그녀가 상대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결국 반쯤 부축되고 반쯤 끌려가듯 민채영은 차 쪽으로 향했다.강지안 옆을 지나갈 때, 민채영은 그녀를 노려봤다.눈빛에 독기가 가득했지만 더 이상 감히 입을 열지는 못했다.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일단락되는 듯했다.행사장 입구에는 이제 강지안과 장성훈, 두 사람만 남았다.늦은 밤바람이 불어와 마른 낙엽 몇 장을 굴렸다. 한동안 주변은 어색할 정도로 조용했다.그제야 장성훈은 마음껏 강지안을 바라볼 수 있었다.연한 살구빛 정장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차가운 눈매, 흔들림 없는 표정, 분명 자신이 억울한 상황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았으며 당황한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온기가 없었다.장성훈을 바라보는 눈빛 역시 마치 아무 의미 없는 낯선 사람을 보는 듯했다.이에 장성훈은 덜컥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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