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의 모든 챕터: 챕터 361 - 챕터 370

604 챕터

제361화

찻잔이 주민혁의 얼굴을 스치고 나서 바닥에 세게 떨어졌다.깨지는 소리가 가슴을 때릴 만큼 날카롭게 울려 퍼졌고 도자기 조각들이 사방에 흩어졌다.원금영의 얼굴은 처음부터 끝까지 싸늘했다. 그녀는 찻잔에 맞은 주민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붉게 달아오른 자국을 보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말끝마다 수빈이는 신경 안 쓴다더니, 그게 사실인지 지금 당장 전화해서 물어볼까?하린이 그 아이가 잘나가고 있는 거 보니까 마음이 변한 거야?”원금영의 시선이 차갑게 그를 꿰뚫었다.“수빈이는 너 때문에 학업까지 포기하고 결혼한 아이다. 그런데 네가 이렇게 배신해? 내가 나중에 황천에 가서 걔 외할머니한테 뭐라 설명해야 하니!”숨이 가빠진 원금영은 가슴을 두드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정말이지 이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다.그 기사를 보지 않았다면 오늘 반드시 최수빈을 위해 직접 나섰을 것이었다.그녀의 얼굴에 비친 괴로운 표정을 보고 주민혁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할머니.”그러고는 다가가 원금영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화내시면 건강만 상하십니다.”하지만 원금영의 얼굴은 여전히 얼음장 같았다.최수빈은 그녀가 손수 지켜보며 키운 아이였다.그 아이가 주씨 가문에 시집오면 자신이 보호막이 되어줄 거라 믿었는데 이렇게 많은 서러움을 받았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더구나 최수빈은 강단 있는 성격이라 어떤 억울한 일도 내색하지 않고 언제나 차분하고 단정했다.하여 원금영의 가슴은 더욱 답답하고 아팠다.“넌 정말 나를 미치게 만드는구나. 이 일, 알아서 처리해. 수빈이는 다투지도, 빼앗지도 않는 아이야. 그런 애가 네 곁에서 이렇게까지 억울하게 살아야 하니?”주민혁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눈빛 속의 모든 감정을 가라앉혔다.“너랑 하린이가 어려서부터 같이 자랐으니 감정이 깊은 건 안다. 예전에 송지훈이란 아이가 살아있을 때는 너희 셋이 은산시 트리오라 불렸잖니. 그때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하지만 지훈이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몇 년이냐.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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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2화

...최수빈은 요즘 맡은 프로젝트들로 정신이 없었다.2단계 공정이 시작된 뒤로는 운상 쪽에도 자주 들락거렸다.육민성은 그런 그녀를 보며 매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팽이 같다고 생각했다.결국 보다 못해 그녀를 사무실로 불렀다.“왜요?”최수빈은 손에 태블릿을 들고 3D 모델을 살피며 말했다.“할 말 있으면 짧게 해주세요. 곧 테스트하러 나가야 해서요.”육민성은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언제쯤이면 너 스스로한테 휴가를 줄 거야? 좀 쉬어야 하지 않겠어?”단호하지만 걱정스러운 말투였다.“천공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됐어. 연말쯤에는 시범 비행이 있을 예정이고 그다음은 기술팀에 맡겨도 충분해. 문제가 생기면 그때 회의 소집하면 되잖아.”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이렇게 일만 파고들다가는 언젠가 몸이 먼저 무너질 거야.”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렸다.“저...”“요즘 스스로도 느끼지 않아? 자주 감기 걸리고 조금만 추워도 금세 열나잖아.”게다가 한 번 걸리면 오래 가는 거라 쉽게 낫지도 않았다.그 말에 최수빈은 잠시 멈칫했다. 사실이었으니 말이다.바쁠 때는 늘 몸을 돌보지 못했다.“알아요.”그녀는 짧게 대답했다.일이 조금만 비면 다시 현장으로 달려가야 직성이 풀렸고 그게 곧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것이었다.“그래서?”육민성이 눈썹을 추켜올렸다.“회사를 이끄는 사람으로서 일은 아랫사람들한테 분배할 줄 알아야지. 모든 걸 네가 직접 챙기다가는 버티질 못해. 적당히 권한을 위임해.”최수빈은 태블릿을 덮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알겠어요. 노력해볼게요.”육민성의 걱정은 진심이었다. 최근 들어 그녀의 일정은 도를 넘을 만큼 빽빽했다.한재준도 여러 번 돌려서 그에게 말했다.“수빈이 좀 쉬게 해라.”그녀는 회사일 뿐 아니라 논문 준비에 집에서는 딸까지 챙겨야 했다.육민성은 늘 자신이 가장 바쁜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최수빈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24시간을 마치 48시간처럼 쓰는 여자였으니 말이다.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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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3화

최수빈은 원금영의 태도를 보며 점차 상황을 깨닫기 시작했다.그 기사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원금영이 그 소식을 보고 자신을 대신해 억울함을 풀어주러 온 것 아닐까 생각했다.할머니는 늘 자신을 귀하게 여겨주었고 자식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못 보는 사람이었다.곧 최수빈이 입술을 다물고 말했다.“할머니, 그런 일 없습니다.”자신과 주민혁 사이 일은 이미 정리했기에 더 큰 소동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번복하면 해가 될 뿐이었고 계약대로 숨기기로 한 약속도 지켜야 했다.일이 커지면 최수빈 본인에게도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원금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네가 억지로 이를 깨물고 삼킬수록 더 가슴이 아프구나.”원금영은 그녀가 너무 얌전하고 주민혁한테만 신경 쓰는 게 안타까웠다.“가끔은 그렇게 얌전할 필요 없어. 좀 소리라도 내 봐라. 내가 못 봐줄 줄 알았니? 어릴 때 뻔뻔하게 굴던 그 성미는 다 어디로 간 거야? 컸다고 속으로만 삼키면 안 돼.”“네가 주씨 가문에 시집온 건 편안한 삶을 누리라고 그런 거지 억울함을 하나하나 삼키라고 온 게 아니란 말이다.”그 말투는 엄숙하고 단호했다.최수빈은 입술을 깨물고 대답하지 못했다.원금영은 한숨을 쉬며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이전에는 네가 민혁이를 좋아한다고 들었으니 내가 연결해 준 거다. 그런데 만약 네가 이제 민혁이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거라면... 네가 말만 하면 내가 나서서 정리해 줄 거다.”“할머니는 네가 억지로 붙들고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과거의 최수빈은 분명 주민혁을 좋아했다. 24시간이라도 붙어 있고 싶어 했고 원금영도 그것을 알았기에 두 사람을 속히 이어주고는 했다.최수빈 역시 할머니의 주선 덕분에 주민혁과 더 오래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을 즐겼다.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달랐다.“할머니, 무슨 소식 들으신 거예요?”최수빈이 묻자 원금영은 차를 따라 그녀 앞에 내밀었다.“내 태도를 살피는구나. 내가 알고 싶은 건 하나, 네가 괴롭진 않으냐는 거다.”최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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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4화

오늘 원금영이 그녀를 부른 건 결국 어떤 ‘공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하여 박하린은 오늘따라 유난히 공을 들여 차려입었다. 평소의 중성적이던 스타일을 벗고 흰색 롱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한층 우아하고 단정했다.하이힐을 신고 서 있는 그녀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경멸이 섞여 있었다.진서령과는 원래부터 가까웠고 앞으로의 시어머니가 될 사람은 이미 그녀의 웨딩드레스까지 직접 골라줬다.게다가 오늘은 원금영까지 따로 불렀으니 가슴속에는 들뜨고 설레는 감정이 감춰지지 않았다.“할머니가 왜 날 불렀는지는 수빈 씨도 알겠죠?”박하린이 턱을 들며 말했다.“수빈 씨는 이제 주씨 가문에서 버려진 여자예요. 앞으로는 그 집안 사람들 앞에서 되도록 얼굴 비추지 마요. 그쪽에서도 수빈 씨를 반가워하지 않을 테니까요.”그녀는 주시후의 친모이기에 주씨 가문으로 들어가는 건 단지 시간문제라고 확신하고 있었다.최수빈은 박하린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하나를 들으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눈빛에는 차가운 냉소만이 떠올랐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을 내려다보듯이 말이다.원금영이 이런 시점에 박하린을 부른 건 누구라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주씨 가문에 들이려는 속셈이시겠지.’안쪽 룸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은 원금영의 목소리가 들렸다.“수빈아, 하린이 왔니?”“네.”“다 같이 들어오렴.”박하린은 비웃듯 최수빈을 흘겨보고는 턱을 치켜든 채 안으로 들어갔다.최수빈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주민혁에게 짧은 문자를 남겼다.그가 오지 않으면 오늘의 자리는 분명 ‘심문하는 자리’가 될 게 뻔했다.그렇게 되면 두 사람이 이혼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리 없었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원금영은 자리에 앉은 채 웃는 눈빛으로 박하린을 살폈다.박하린은 재빨리 다가가 공손히 차를 따랐다.“할머니, 오늘 저를 왜 부르신 거예요?”원금영은 장난스레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몇 년 만에 보는 거냐. 돌아온 지도 꽤 됐다던데 어째 한 번을 안 오더라?”박하린은 고개를 숙였다.“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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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5화

“할머니가 지금 나랑 민혁 오빠 사이를 오해하고 계시잖아요. 제발 도와서 설명 좀 해줘요.”박하린이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최수빈의 손을 붙잡았다.하지만 최수빈은 눈을 내리깔며 냉정하게 손을 빼냈다.“얘기할 게 있다면 하세요. 하지만 감정에 호소할 필요는 없어요. 저랑 하린 씨 사이에는 아무런 정이 없으니까.”손끝이 닿는 것조차 불쾌했기에 최수빈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표정은 누가 봐도 두 사람 사이가 가깝지 않다는 게 티 났다.원금영은 그 둘을 바라보며 눈빛을 좁혔다.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은 이미 무언가를 간파하고 있었다.“정말 나 못 믿어요?”박하린은 억울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날 못 믿더라도 민혁 오빠는 믿어야 하잖아요. 저희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밖에서 떠도는 말들은 전부 헛소문이에요. 그 말들 때문에 괜히 가족 간의 정이 깨지면 안 되죠.”원금영은 자리에 앉은 채, 찻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굴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최수빈은 그 모든 해명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눈빛은 잔잔했고 입가에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결백한 사람은 굳이 해명할 필요 없어요.”말은 부드럽게 했지만 묘하게 단호했다.그 문장은 여러 뜻으로 들릴 수 있었다.정말 아무 일도 없다면 말로 해명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고 반대로 이미 해명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결백하지 않다’는 뜻으로도 읽혔다.당황한 박하린이 눈을 크게 떴다.‘설마 나도 안 믿고 민혁 오빠도 안 믿는 거예요?”“그만.”원금영이 냉랭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세상에 헛소문이 왜 돌겠니. 하린아, 네가 남의 남편과 너무 가까이 지내니 그런 말이 나오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런 소문이 생기겠어?”박하린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할머니도 아시잖아요. 저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남의 가정에 끼어드는 일, 절대 안 합니다.”“말은 참 번지르르하구나.”원금영이 옅게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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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6화

그 말을 듣자마자 박하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표정도 굳었다.“저더러 사과하라고요?”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으나 이내 이를 꽉 물고 말했다.“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왜 제가 사과해야 하죠?”원금영은 눈빛 하나로 사람을 제압하듯 평온하지만 위압감 있는 시선으로 박하린을 바라봤다.“그럼 민혁이가 너한테 내준 회사, 주씨 가문의 자산으로 다시 회수하겠다.”박하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넥스트 테크는 그녀의 마지막 보루였고 이미 자신이 가진 돈도 꽤나 투자한 상태였다.이 시점에 회사가 회수된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셈이었다.하여 그녀는 주먹을 꼭 쥐었다.“할머니, 그건 사업 문제입니다. 집안일과는 무관해요.”“네가 뒤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원금영의 시선이 매섭게 날아왔다.“오늘 널 불러 이야기하는 건 아직 정이 남아 있어서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기를 바란다. 네가 저지른 일에 대해 반드시 수빈이한테 사과해야 한다.”박하린은 숨이 막히는 듯 답답했다.도무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곧 그녀의 시선이 싸늘하게 최수빈을 향했다.‘참 대단하네 이혼까지 했으면서도 여전히 할머니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이렇게 날 몰아세우다니...’“수빈 씨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박하린이 최수빈을 향해 물었다.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검은 정장 차림의 주민혁이 들어섰다.금테 안경 너머로 차가운 눈빛이 번뜩였다. 회사에서 막 넘어온 듯 피로가 묻은 얼굴이었다.최수빈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반사된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낯설 만큼 냉담했다.그의 시선은 잠깐 최수빈을 스쳐지나 곧장 원금영에게 향했다.“할머니, 밤늦게 무슨 일이세요?”“민혁 오빠!”박하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안도한 듯 외쳤다.“할머니랑 수빈 씨가 우리 사이가 부적절하다고 의심해서 나를 불러다 추궁하셨어.아무리 설명해도 안 믿으셔. 심지어 수빈 씨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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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7화

주민혁이 이미 그들의 미래를 위해 자존심을 굽히고 최수빈 같은 여자에게까지 사과했는데 그녀라고 못할 이유가 있을까.박하린은 이를 악물고 최수빈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미안해요. 앞으로는 언행에 더 신경 쓸게요.”원금영은 곁눈질로 최수빈을 바라봤다.그 시선에는 ‘이 정도면 됐느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최수빈은 굳이 이 자리에서 더 날을 세울 생각이 없었다.할머니가 자신을 위해 나선 것이고 그걸로 충분했다. 지금의 자신의 위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하여 차분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할머니, 괜찮아요.”그 한마디는 ‘용서한다’도 ‘용서하지 않는다’도 아니었다.그저 이 난처한 자리를 마무리하기 위한 담담한 마침표였다.박하린은 더 이상 버틸 이유가 없었다.“오해가 풀렸으니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저랑 민혁 오빠 사이에 그런 일 없으니까 제발 오해하지 마세요.”그녀는 감정을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할머니, 전 이만 가볼게요.”그녀가 떠나자 원금영은 곧장 주민혁을 바라보았다.“가서 메뉴판 좀 가져오거라.”주민혁이 살짝 눈썹을 움직였다.“뭐 드시게요? 직원 불러서 시키면 되잖아요.”“네가 직접 가져오면 된다.”결국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나가자마자 원금영은 다시 최수빈 쪽으로 몸을 돌렸다.“사과가 마음에 들었니? 만약 부족하다면 다시 불러오면 된다. 아니면 네가 원하는 대로 처리하게 하마.”하지만 최수빈은 그런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이제 그녀와 주민혁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고 오늘의 이 자리는 그저 연극일 뿐이었다.“괜찮아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이 집 음식이 맛있다던데 그거 한번 먹어보고 싶어요.”그날 저녁, 세 사람은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식사가 끝나자 원금영은 전용차로 돌아갔고 떠나기 전 직접 최수빈을 주민혁의 차에 태워 보냈다.차 안.두 사람은 나란히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차는 부드럽게 움직였고 밀폐된 공간 안은 묘하게 조용했다.최수빈은 옆자리에서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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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8화

주민혁은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하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눈을 낮추더니 손안의 라이터를 굴렸다.빛이 깜빡였다 사라지자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아직은 때가 아니야.”‘아직은 때가 아니야?’최수빈은 미묘하게 입꼬리를 비틀뿐, 대꾸하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너무나 잘 알았다.이미 이혼 합의서에 서명했지만 ‘기한을 앞당기자’는 제안을 거절한 이상, 주민혁은 결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었다.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걸 어쩌면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잠시 후, 최수빈은 비웃듯 웃었다.그러나 그 웃음에는 온기가 없었다.“그렇게 내가 미워요?”그녀는 조용히 물었다.“그렇게까지 나를 못 놓겠어요?”‘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왜 여전히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는 걸까...’주민혁은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천천히 최수빈을 바라봤다.“무슨 뜻이야?”밤바람이 창문 사이로 스며들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차 안의 공기는 차가웠고 최수빈의 웃음은 더욱 쓸쓸했다.그는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그 의미를 이해하려는 의지조차 없었다.이야기를 끝내고 서로 완전히 정리하자는 뜻조차 주민혁에게는 닿지 않는 것이다.아니, 최수빈의 말은 주민혁에게 언제나 통하지 않았다.잠시 후, 차는 최수빈의 월세방 앞에 도착했다.주민혁은 창밖을 힐끗 보고는 무심하게 물었다.“이사할 생각은 없어?”이혼 당시, 그녀에게 이미 여러 채의 아파트가 넘어간 상태였다.때문에 그녀가 이런 좁고 낡은 집에 남아 있는 이유를 주민혁은 이해하지 못했다.최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릴 뿐이었다.그와 한마디라도 더 주고받는 건 이제 낭비였기에 뒤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계단을 올라갔다.운전석의 려운이 룸미러로 그 모습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대표님, 이제 어디로 모실까요?”주민혁은 짧게 대답했다.“회사로 가.”...집 안으로 올라온 최수빈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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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9화

최수빈은 육민성과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논문은 이미 한재준의 검토를 통과했고 큰 문제는 없었다.최종 수정본을 제출하고 나서야 그녀는 모니터 앞에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다음 날, 그녀는 511연구원에 도착했다.복도로 들어서자 기술팀 동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들었어요? 넥스트 테크에서 새 프로젝트를 내놨대요. 완성되면 독점 특허로 등록된다고 하던데요?”“정말요? 그 회사 이제 막 세워졌잖아요, 벌써 그렇게 대단해진 거예요?”“넥스트 테크는 원래 신세계 그룹 계열사잖아요. 항공우주 쪽에서는 국내 최고고설립 후 모인 인재들도 어마어마하대요. 그 정도면 빠르게 결과를 내도 이상하진 않죠.”새 세대의 아이디어는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다.그들은 고개를 돌려 최수빈을 보며 물었다.“수빈 씨, 넥스트 테크 쪽 잘 아시죠? 천공하고도 협력 관계라던데요.”최수빈은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잘 모르겠네요.”실제로 넥스트 테크는 최근 협력사 두 곳이 연달아 부도나면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는 소식은 그녀에게도 뜻밖이었다.‘박하린한테 진짜 그 정도 역량이 있었나?’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물론 인재들이 많고 아이디어가 넘치는 회사라면 새로운 성과를 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다만 지금처럼 기대치를 하늘 높이 끌어올리는 건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이번 프로젝트가 천공에서 개발 중인 신형 전투기와 직접 경쟁한다더라고요. 제작비가 훨씬 저렴하고 효율성도 높대요.”최수빈은 커피를 따르며 미묘하게 미소 지었다.“그럼 좋은 일이죠.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야, 성공을 빌어야죠.”만약 넥스트 테크가 정말 그런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면 이는 국가적인 자랑이었다.그녀는 연구에 사적인 감정을 섞지 않았고 누구를 이기려는 경쟁심도 없었다.지금 맡은 일에 몰두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오후, 데이터 정리에 집중하던 중 육민성이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넥스트 테크 신사업, 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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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0화

육민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논문도 이제 막 제출했고 전보다 덜 바쁘잖아. 이럴 땐 좀 쉬어도 돼. 사람은 일만 하면 무너지는 법이야. 조금은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야지.”최수빈은 고개를 숙인 채 데이터를 정리하다가 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이건 제 일이잖아요. 제가 안 하면 그대로 쌓여 있을 뿐이에요. 조금이라도 해두면 그만큼 줄어들죠.”일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육민성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가볍게 웃었다.“그런 말 있잖아. 본인보다 뛰어난 사람이 본인보다 더 노력하면 아주 무섭다고. 딱 네 얘기야.”한편, 넥스트 테크의 공개 입찰 설명회는 성대하게 열렸다.현장에는 업계 주요 인사들이 총출동했고 그 가운데에는 주민혁의 모습도 있었다.그가 참석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기업 관계자들이 몰려들었다.행사장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행사가 끝난 뒤, 최수빈은 잠시 뉴스를 확인했다.경제 채널에 관련 보도가 올라왔고 곧 송미연이 캡처한 화면을 보내왔다.사진 속에는 주민혁과 박하린이 나란히 서 있었다.색깔을 맞춘 커플 슈트 차림, 항상 냉정하던 남자의 눈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다들 둘이 천생연분이라고 난리야. 진짜 어이없어.][난 그냥... 그 둘은 천생연분이 아니라 한심한 짝꿍이라 본다.]메시지의 문장마다 분노가 묻어 있었다.최수빈은 피식 웃으며 전화를 걸었다.“지금은 일하느라 정신없을 줄 알았는데?”송미연이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이건 너무 역겨워서 도저히 그냥 못 넘기겠더라. 비즈니스 행사에서 연애 쇼를 하네. 일하러 갔는지 애정행각 하러 갔는지 모르겠어.”최수빈은 차분히 답했다.“그런데 넌 그 뉴스 왜 본 거야? 일이 궁금해서? 아니면 둘이 뭘 하는지 보고 싶어서? 네가 집중한 포인트는 뭔데?”“뉴스를 보면 말이야, 주민혁이 여자가 일하는 걸 반대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송미연이 말했다.“그런데 너는 왜 달랐을까? 그때는 왜 네 일을 전혀 지지하지 않았던 걸까? 단지 사랑이 식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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