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501 - Chapter 510

604 Chapters

제501화

주기훈이 말했다.“좋아하는 우상을 보니까 좀 들뜬 거지. 걱정 마, 수빈이 그런 사람 아니니까.”한지원은 조용히 조종실 안을 바라봤다.그 안에서는 최수빈이 전문적인 손길로 각종 데이터를 비교 분석하고 총괄 시스템을 관리하고 있었다.기자들의 생중계 화면에도 최수빈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한 나라의 과학 기술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는 건 실험실과 조종실 안에 앉아 있는 이들이 대부분 늙은 얼굴이 아니라 젊은 얼굴이라는 사실이다.신세대의 힘이 이렇게 강력하다는 건 곧 그 나라의 미래가 유망하다는 뜻이기도 했다.그리고 이는 세계를 향한 하나의 강력한 신호이기도 했다.주민혁은 행사장을 둘러보며 조용히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현장은 숨 돌릴 틈 없이 분주하게 돌아갔다.1시간 전, 30분 전, 10분 전...카운트다운이 가까워질수록 전 국민의 눈이 발사 시점에 쏠려 있었다.심지어 해외에 있는 화국 사람들까지 휴대폰으로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을 정도였다.현장의 음성이 울렸다.“3.”“2.”“1.”“점화.”“이륙 시각: 오후 3시 30분 25초.”모두의 시선이 로켓에 꽂혔고 위성은 성공적으로 발사됐으며 전 국민이 환호했다.박하린은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지만 온몸에 한기가 도는 듯 서늘했고 입술은 단단히 다문 채 굳어 있었다.조종실 안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모두의 마음이 극도로 긴장돼 있었고 오늘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는지 작은 오류 하나로 실패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계속 따라다녔다.하지만 위성이 무사히 올라간 것을 보자 모든 이들이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최수빈도 마찬가지였다.“축하해. 또 하나의 큰 성과를 이뤘네.”육민성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자 최수빈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그동안 바삐 지낸 것들이 이 순간 모두 결실을 맺어 돌아오는 듯했다.자신의 현재 이 일에서 빛을 내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박하린의 얼굴은 유독 어두웠다.사람들은 모두 기뻐하고 있었고 진승우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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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2화

진서령은 주나연을 보며 비웃듯 말했다.“너도 예전엔 박하린이 네 올케 되는 거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왜 싫어하게 된 거야?”주나연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엄마, 우리 가족끼리 말은 좀 조심합시다.”사실은 둘 다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누가 가장 빛나는 존재인지, 누가 주상 그룹에 이익이 되는 사람인지 속으로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지금의 박하린은 그저 재판에 휘말린 데다 남의 결혼을 깨뜨린 상간녀로 낙인찍혀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일 뿐이었다.진서령과 주나연은 그제야 깨달았다. 예전에는 눈이 멀어 이 여자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걸.그런데도 주민혁은 여전히 박하린을 감싸는 듯했다.주나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주민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저 여자 빚을 갚아주고 있으니... 진짜 저 여자한테 뭔가 가치가 있는 걸까요? 우리 다음에는 또다시 잘못된 사람 밀어주면 안 돼요.”실패는 한 번 한 거로 이미 충분했다.진서령이 입을 열었다.“지금 이 업계에서 최수빈보다 더 젊고 더 뛰어난 사람이 있긴 해? 말도 안 되는 소리지.”젊은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은 나이 많은 세대조차도 밀려나는 상황이었다.주나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이제는 엄마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탐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제 예전의 그 애가 아니라고요. 더 이상 우리한테 아무런 존중도 주지 않을 안 보일 겁니다.”최수빈은 이제 찬란하게 빛나는 과학자였다.항공우주 공학의 핵심 멤버로, 단순히 천공연구원 프로젝트의 수석 엔지니어가 아닌 그 이상이었다.주상 그룹의 며느리도, 주민혁의 아내라는 타이틀도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다.그런 이름 없이도 최수빈이 받는 모든 영예는 이제 주상 그룹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진서령은 곁눈질로 주민혁을 바라보았다.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함부로 표출하지 못해 결국 이를 악문 채 쓴웃음을 삼켰다.“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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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3화

주민혁의 시선이 진서령의 얼굴에 가닿았다.눈빛은 어둡고 깊었으며 속내를 알 수 없는 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그러다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말했다.“엄마가 원하는 건 며느리예요? 아니면 권력이에요?”진서령의 속내는 이미 너무나도 뻔히 얼굴에 다 드러나 있었다.그렇게 무자비하게 본심이 들춰지자 그녀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둘이 그렇게 오래 함께 지냈는데 아무 감정도 없니? 지금처럼 최수빈이 이렇게 빛나는 걸 보면... 조금도 후회되지 않아?”진서령은 길게 숨을 들이쉬며 주민혁을 바라보았다.“네가 최수빈만 다시 붙잡아온다면 내가 정말 잘해 줄 거야. 다시는 박대하지 않을 거라고.”주민혁은 헛웃음을 흘렸다.“그럼 이전에는 박대한 거네요?”진서령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런 의미는 아니야! 나 그 애 미워한 적 없어. 이번에 돌아온다면 진짜 잘해줄 거야.”주민혁은 고개를 돌려 인터뷰 중인 최수빈을 바라보았다.차분한 얼굴, 담담하고 평온한 분위기, 질문 하나하나에 막힘 없이 또렷하게 답하는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그들이 알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수빈이는 주씨 가문을 떠나 훨씬 잘살고 있어요.”그 말이 귀에 들어온 순간, 진서령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주민혁은 벌써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너...!”진서령이 부르려던 찰나 주나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엄마가 그렇게 구니까 일이 더 꼬이죠. 지금은 우리가 부탁하는 입장이잖아요. 그렇게 고압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요.”주나연이 이어서 말했다.“도와달라고 하면서도 엄마는 어떻게든 위에 서서 말하려고 하잖아요.”진서령은 평생 강자의 자리에서 살아왔다.집안에서도, 사모님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중심이었다.주씨 가문이라는 어마어마한 배경 덕분에 누구나 그녀와 인연을 맺고 싶어 했으나 지금, 진서령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지금껏 누려온 부와 권력을 포기할 수 없었고 동시에 앞으로 잃게 될 모든 걸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아들 주민혁은 탄탄한 입지 위에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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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4화

‘도덕성의 문제라니? 지금 그 말, 설마 최수빈 씨를 두고 한 얘기인가?’현장에 있던 모두가 순간 놀라 눈을 크게 떴다.당황과 의아함이 섞인 분위기 속에서 최수빈의 눈빛이 차갑게 가늘어졌다.그녀는 그 기자를 똑바로 바라봤다.낯선 여자였다.분명한 건 그 여자의 목적은 단 하나, 이 자리를 흔들기 위해 온 것이 분명했다.최수빈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싸늘했다.“죄송하지만 업무와 무관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습니다.”말을 끝낸 그녀가 단호하게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그 기자는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최수빈 씨, 온라인을 한 번이라도 보셨나요? 지금 이 시간에도 뉴스로 온통 떠들썩합니다. 물론 최수빈 씨와 주 대표님은 이미 이혼하셨지만 누군가 실질적인 증거를 제시했어요.”“최수빈 씨와 주 대표님이 혼인 중에 낳은 딸 주예린 양, 사실 주 대표님의 친딸이 아니라는 겁니다. 혼인 중 외도해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는 거죠. 그래서 주 대표가 최수빈 씨와 이혼했고 결국 주씨 가문에서 쫓겨난 거라는 겁니다. 사실인가요?”오늘 같은 날은 국가적 행사로 전 국민의 이목이 쏠린 자리였다.그런 자리에서 기자가 이렇게 대놓고 뛰어들어 이딴 질문을 던질 정도면 철저히 준비된 각본이 있다는 뜻이었다.진실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이런 자극적인 인터뷰 한 번만 퍼지면, 최수빈의 명성은 단박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육민성의 얼굴에도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들어온 거네. 이 타이밍에 이 질문은 분명 의도된 공격이야.’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언론 대응도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딱 한 가지, 주상 그룹 측이 직접 나서서 해명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이혼이 정말 평화롭게 이루어졌고 단지 각자의 길을 간 것뿐이라면, 주상 그룹은 늘 도의적 책임을 다해온 집안이었기에 아무리 전처라 해도 이런 식으로 끌어내리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무엇보다 주예린은 주씨 가문의 피붙이였다.그 점에서 보더라도 주씨 가문에서 누군가는 나서야 했다.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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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5화

모든 건 최수빈이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이처럼 거창한 자리에서 이런 식의 돌발 인터뷰가 터져 나오자 현장에 있던 주요 인사들의 표정도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모든 시선은 온통 최수빈을 향해 쏠려 있었다.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딸까지도 ‘사생아’라는 모욕적인 꼬리표가 붙어 거센 여론의 중심에 서 있었다.한지원은 얼굴이 굳더니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오늘 막 우상으로 모시겠다고 다짐한 사람인데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다니 그녀는 도무지 믿고 싶지 않았다.최수빈이 그런 비열한 짓을 할 사람일 리 없다고 그건 절대 아니라는 걸 직감처럼 느꼈다.주씨 가문의 이야기들은 그녀 역시 여러 번 들은 바 있었기에 진실이 어떤지는 몰라도 얼추 어떤 그림인지 감은 잡고 있었다.한지원은 망설임 없이 기자 앞으로 나아가 박하린을 정면으로 마주했다.그녀는 이 여자가 참으로 뻔뻔하다고 생각했다.‘이런 상황에서도 감히 얼굴을 들이밀어?’“해외 어느 명문대 출신이라 하셨죠?”한지원의 시선은 매섭게 박하린을 향하고 있었다.“천공연구원은 새로 세워진 회사지만 지원자들의 학력 수준은 매우 까다롭게 봅니다.”그녀는 조금도 피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그쪽 이력서 봤어요. 두 가지 전공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던데 사실 듣보잡 대학이잖아요. 돈만 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그런 데. 아주 고생 많으셨겠네요?”박하린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그녀는 눈앞의 낯선 젊은 여자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누구죠? 근거도 없이 남을 모욕하다니, 명예훼손이라고 아세요?”그 순간, 주변에서 작은 웅성임이 일었다.“저 사람 한지원이잖아.”“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엘리트 교육 받은 거로 유명하지 않았어? 그러니 박하린이 다닌 대학 수준이 어떤지는 저 사람이 잘 안다 할 수 있지.”“저 정도면 진짜 신뢰도 있지.”한지원처럼 학벌과 배경 모두 탄탄한 인물이 나서서 박하린의 학력을 정면 반박 하자 그 영향력은 상당했고 그 자체만으로 이미 ‘사실 확인’처럼 보였다.한지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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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6화

그녀는 오늘 최수빈이 신화급 위치에서 어떻게 추락하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작정이었다.“이런 소문들, 도대체 어디서 들은 거죠?”갑작스레, 차가우면서도 맑은 남자의 목소리가 군중 사이에서 또렷하게 들려왔다.순간, 공기가 멈춘 듯 고요해졌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난 쪽으로 쏠렸다.검은색 정장을 입은 주민혁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최수빈에게로 다가왔다.최수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미간을 좁히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이 타이밍에 대체 왜 그가 나선 건지 알 수 없었다.주민혁은 천천히 그녀의 곁에 섰다.점차 가까워지자 최수빈은 좌우로부터 은은히 풍겨오는 그의 체취를 느꼈다.박하린은 몸을 굳힌 채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그가 최수빈 곁으로 향하는 모습을 바라봤다.기자는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긴장감이 배가됐다.“주 대표님, 이렇게 나서신 건 혹시... 전처의 외도 의혹을 인정하러 나오신 겁니까?”남자는 표정 하나 없었지만 조용하면서도 단단한 기운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딱히 무슨 말을 하지도 않았으나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자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그는 최수빈에게 깊고 어두운 눈빛을 가만히 내리꽂았다.이에 최수빈은 눈살을 찌푸렸다.도대체 지금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 눈빛은 너무나 짙고도 깊어 도무지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한참이 흐른 뒤, 주민혁은 마침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최근의 허위 소문에 대해 명확히 밝힙니다. 저와 제 아내는 혼인 기간 동안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 수많은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이혼 또한 충분한 대화를 거친 후, 서로 합의하에 평화롭게 마무리한 결과예요.”“예린이는 우리 가족의 소중한 구성원입니다. 주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말은 전혀 사실무근이며 명백한 악의적 루머입니다. 때문에 저는 끝까지 법적 책임을 물을 거예요. 부디 더 이상 사실과 다른 내용을 유포하지 말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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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7화

[결국 속이 꼬여서 그래. 예쁘고 유능한 여자가 잘되는 게 꼴 보기 싫으니까 헛소문이나 퍼뜨리는 거지.][어둠 속에 숨어 사는 쥐새끼 같은 인간들, 본인은 대놓고 나서지도 못하고 기자 하나 앞세워 내보내는 수준이 참...]행사가 끝난 후, 사람들은 각자 모여 식사를 하러 갔다.꽤 큰 자리였고 업계 사람들 대부분이 참석한 자리였다.주민혁이 슬쩍 최수빈을 바라봤다.“내 차 타고 갈래?”최수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조차 주지 않고 대답했다.“불편해요.”최수빈의 시선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박하린을 향했는데 그녀는 주민혁을 기다리는 눈치였다.조금 전 말한 불편하다는 말은 꼭 박하린 때문만은 아니었다.이미 이혼한 주민혁과 다시 얽히는 건 여러모로 피곤하고 부적절한 일이었기에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그리고 아까 있었던 주민혁의 해명에 대해 최수빈은 별다른 감사의 표시도, 그 이유를 묻는 말도 하지 않았다.“아까 그 기자, 내가 철저히 조사할 거야.”주민혁이 다시금 말했다.최수빈은 조용히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정의롭고 공정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거면, 난 뭐라 할 말 없어요.”그의 행동은 너무 뜬금없고 납득하기 어려웠다.공이 없는데 덕을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주민혁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건 마치 호랑이와 거래를 하려는 것처럼 위험하고 무엇보다도 불쾌했으니 말이다.최수빈은 육민성과 함께 먼저 자리를 떴다.그제야 박하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는데 얼굴에는 단단한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민혁 오빠, 오늘 행사... 정말 대단했어.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동안 수빈 씨를 너무 얕봤던 것 같아.”주민혁은 비음 섞인 목소리로 짧게 ‘응’하며 대답을 대신했다.“그럼... 나 시후 먼저 데리고 집에 데려갈까?”박하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하지만 방금 있었던 기자 일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지금 같은 민감한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냈다간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는 꼴이었다.주민혁은 똑똑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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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8화

박하린은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그렇다, 생각해보면 이건 자신이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방향이었다.그 거대한 재벌가 안에서 ‘명예와 수치’는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였다.그녀는 그저 주씨 가문을 위해 정의감으로 나섰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들에게 중요한 건 ‘정의’가 아니라 ‘체면’이었다.그리고 남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누구든 아내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수모를 견딜 사람은 없다.심지어 자기 핏줄이 아닌 아이를 위해 5, 6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면 그건 그 어떤 남자에게도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을 것이다.그러니 주민혁이 직접 나서서 해명을 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휴대폰을 쥔 박하린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조금 전 했던 그 질문들, 차분하지만 날카로웠던 말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혹시 뭔가 눈치챈 걸까?’그녀는 비록 주민혁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왔지만 사실상 그의 진짜 내면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다.어릴 적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고 생각했다.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주민혁은 게으르고 장난기 많고 다소 건방지면서도 자유로운, 그야말로 날라리지만 멋진 소년이었다.쾌활했고 잘 웃었고 아무렇지 않게 던진 농담 하나에도 여자애들이 쉽게 마음을 뺏겼다.재벌가의 자제로 타고난 아우라와 기품이 있었고 학생 시절에는 당연하다는 듯 늘 주목받았던 존재였다.그런데 언제부턴가 주민혁은 조금씩 변해갔다.더 이상 잘 웃지도 않았고 그 옛날의 당당하고 빛나던 소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의 미소는 얼굴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그리고 그즈음부터 박하린은 더 이상 주민혁의 속내를 읽을 수 없게 되었다.박하린은 그 모든 변화를 그저 남자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책임이 커지고 짊어진 게 많아지면 누구든 그렇게 변하기 마련이라고.그는 결국 주씨 가문 전체를 등에 짊어진 남자이니 말이다.그런데 조금 전, 주민혁은 기자 문제에 대해 박하린의 생각을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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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9화

박하린은 조윤미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알겠어요. 조만간 시간 내서 오빠와 확실히 이야기해볼게요.”조윤미는 그녀의 말보다 더 중요한 걸 물었다.“이혼까지 했는데 너랑 결혼할 생각은 있대? 혹시 그런 얘기를 슬쩍 이라도 흘린 적 있어?”조윤미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이건 단순한 연애 문제가 아니라 그녀의 입장에서는 집안의 ‘명예’가 걸린 일이었다.박하린이 정말로 주씨 가문에 시집을 가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자신들의 삶도 완전히 달라질 터였다.그렇게 되면 앞으로는 먹고사는 문제로 걱정할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지금처럼 결혼도 안 한 상태에서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걸 보면, 결혼을 한 뒤 그는 더 큰 걸 아낌없이 내줄 게 분명했다.박하린은 조윤미의 말을 들으며 조심스럽게 머릿속을 정리해보았다.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해온 행동들을 하나씩 되짚었다.그러다 결국 그녀는 확신했다.“나랑 결혼할 생각이 있는 건 확실해요. 지금껏 계속 나랑 시후의 존재를 정당하게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고요.”박하린은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가 문득 오늘 있었던 일의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오빠가 오늘 그렇게 나서서 해명한 것도...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예요. 두 사람의 결혼이 정상적으로 유지되었고 이혼도 원만하게 이루어진 관계여야 내가 그 사람 곁에 있는 게 흠이 되지 않거든요.”만약 오늘 해명 없이 최수빈의 외도만 부각되었다면, 박하린 역시 상대방 가정을 파탄 낸 여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래서 이 모든 건 미리 준비하고 길을 다듬어놓아야만 했다.박하린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지금까지 자신이 봐온 주민혁이라면 뭐든 치밀하게 계획하고 완벽하게 실행하는 사람이었다.책임감 있고 신중하며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절대 대충하지 않는 남자였다.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아끼고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에 걸맞게 모든 단계를 완벽히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그리고 그 모든 준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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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0화

하지만 그녀가 아직 자리에 앉기도 전에 누군가 먼저 최수빈의 옆자리에 앉았다.주민혁이었다.한지원은 얼굴이 축 처지더니 억울한 표정으로 주기훈을 째려보았다.그러자 주기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좀만 더 기다려. 기회는 많잖아.”주민혁이 자리에 앉자 최수빈은 익숙한 체취를 감지하고 본능적으로 미간을 좁혔다.그러고는 차갑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그녀의 시선과 표정을 읽은 주민혁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그렇게 싫어?”최수빈은 말없이 시선을 피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주 대표님 자리는 여기 말고 딴 데 아닌가요?”“여기 자리가 비었길래 앉은 건데.”그는 가볍게 받아넘겼다.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511연구원의 연구원들이자 이번 위성 발사 프로젝트에 참여한 핵심 엔지니어들이었다.육민성 역시 그중 하나였다.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는 대부분 알지 못했고 주민혁의 등장에 모두가 놀라움과 영광스러움이 뒤섞인 반응을 보였다.하지만 최수빈만은 전혀 달랐다. 표정은 평온했지만 몸에서 풍기는 냉기가 분명했다.그녀의 온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그쪽은 전혀 반갑지 않아요.”주민혁은 작게 말했다.“여론이 막 가라앉은 참인데 우리가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오히려 더 낫지.”최수빈은 젓가락을 쥔 손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그러나 주민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고 말투 역시 조용하고 무덤덤했다.그 말들이 어쩌면 진심으로 자신과 딸을 위하는 듯 들리기도 했으나 이내 그녀는 싸늘하게 입꼬리를 씩 비틀었다.“당신 체면 구기지 않으려고 별짓 다 하네요. 차마 와이프한테 배신당했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남자에게 ‘그런 오명’은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다.자신이 바람을 피울지언정 아내의 외도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세상이 알아버리는 순간, 그건 곧 남자의 수치가 되는 것이다.그렇기에 지금 이 모든 행동들이 최수빈의 눈에는 그저 자기 체면 살리기 위한 쇼로밖에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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