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511 - Chapter 520

604 Chapters

제511화

그녀는 이미 마음속으로 다 짐작하고 있었다.그들이 왜 줄줄이 나서서 입을 모으는지, 그 속셈이 무엇인지 이제는 뻔히 보였다.육민성도 그 분석을 들으며 일리가 있다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그 기자한테는 끝까지 책임 물을 거야?”최수빈은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눈빛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주민혁 쪽을 흘긋 바라보았다.“자연스럽게 처리될 거예요.”앉아서 이득을 볼 수 있을 때는 굳이 나설 필요는 없다.그 일의 배후가 자기에게 흙탕물을 뒤집어씌우려는 의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주씨 가문 자체를 수렁에 빠뜨리려는 계략일 수도 있다.대중들은 이미 그들 사이의 결혼과 이혼을 다 알고 있으니 이 사건이 단순히 최수빈 개인의 문제로만 보일 리는 없었다.주민혁은 재벌가의 자식으로 자라 그런 더러운 물속의 사정이 얼마나 복잡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주상 그룹이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쌓아 올린 위상은 어지간한 거로는 흔들리지 않지만 누군가 약점을 쥐기만 한다면 언제든 물속으로 끌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그리고 오늘 벌어진 일이야말로 가장 좋은 구실이었다.설령 이번 사건이 최수빈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해도 주민혁은 반드시 진실을 밝혀낼 것이었다.왜냐하면 그건 곧 주상 그룹과 직결된 문제였고 싹부터 잘라내야 할 위협이었기 때문이다.그들은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한 치의 허술함도 없이 모든 걸 완벽하게 처리해왔다.그리고 최수빈 역시, 주씨 가문에서 함께해온 세월 동안 그의 일 처리 방식과 생각의 출발점이 어떠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 모든 걸 떠올리고 나니 주민혁의 반응이 충분히 납득되었다.육민성도 곱씹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잠시 주민혁이 정말 성격이 달라진 줄로 착각했을 정도였다.곧 주민혁이 돌아오더니 자리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었다.이런 자리에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는 게 처음이라서일까 최수빈은 묘하게 낯설고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이전에는 이런 걸 기대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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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2화

“어떻게 보면 너도 이 업계의 하나의 길잡이 별 같은 존재지.”최수빈은 막 생수를 마시던 참이었는데 육민성의 그 한마디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천천히 마셔.”“길잡이 별은 너무 과한 표현 아니에요?”최수빈이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이 업계에 들어오는 사람은 정말 이 일에 흥미가 있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일 뿐이다.“가끔은 우상이라는 존재가 상상 이상으로 강한 영향을 주기도 해. 그걸 너무 가볍게 보지는 마.”육민성의 말에 최수빈도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 작은 소녀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을.아까 기자들 앞에서 자신을 두둔해준 사람 역시 그 아이였다.‘올곧고 마음도 바른 아이이네.’...한편, 박하린 쪽.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샤워를 마쳤지만 얼굴에 맺힌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기분 좋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오늘쯤이면 그 여자 하나쯤은 제대로 끌어내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흐름이 많았다.설마 주민혁이 그 자리에서 나설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으니 말이다.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역시 둘의 미래를 위해 움직인 것일지도 몰랐다.조윤미와 이야기를 나눈 뒤, 박하린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과 계산을 정리해가고 있었다.장미꽃을 띄운 뒤에는 반신욕을 하며 온몸에 은은한 향기를 입혔다.모든 준비를 마친 뒤, 그녀는 주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상대편은 한참을 받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주민혁은 요즘 정말이지 바빴다.하지만 서로 만날 때면 그는 단 한 번도 박하린을 대충 대한 적이 없었다.어떤 이야기든 들어주고 모든 일에는 응답이 있었고 해결책도 있었다.그건 명백하게 박하린을 좋아한다는 증거였다.그래서 박하린도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고 조금 더 여유 있게, 전화를 몇 번 더 걸었다.예상대로 곧 전화는 연결되었다.“지금 바빠? 꽤 오래 걸려서야 전화를 받네.”그녀는 살짝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주민혁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깔끔했다.“무슨 일이야?”“나 오늘 좀 몸이 안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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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3화

박하린은 깊게 숨을 들이켠 뒤,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문을 열러 갔다.“민혁 오빠, 나...”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눈앞의 사람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문 앞에는 주민혁이 아닌 려운이 서 있었다.려운도 그녀의 노출이 심한 옷차림을 보고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박하린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얼른 돌아서 옷을 걸치더니 다시 몸을 돌려 애써 태연한 척 물었다.“그 사람은요?”“대표님은 지금 바쁘십니다. 하린 씨가 몸이 안 좋다니까 마침 근처에 있던 저보고 병원에 데려가라고 하셨어요.”박하린은 축 늘어진 손을 꽉 움켜쥐었다. 표정에는 민망함이 어릴 수밖에 없었다.이 모든 상황을 본 려운은 아픈 건 핑계일 뿐, 박하린에게는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걸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정말 무슨 일 있으면 다시 연락하세요.”려운은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만 말하고는 더 이상의 말도 없이 돌아섰다.박하린은 그가 돌아가는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눈빛은 점점 차가워지며 깊게 가라앉았다.‘민혁 오빠 비서인 주제에 감히 나한테 저따위로 말해?’이번 계획은 실패였다.곧 박하린은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꺼내더니 주민혁에게 문자를 보냈다.[갑자기 몸이 좀 괜찮아져서 려운 씨는 돌려보냈어.][오빠는 언제 시간 돼? 우리 둘이 식사 한번 하자.]문자를 보내고 난 뒤, 그녀는 조용히 화면을 응시했다.하지만 상대편은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녀는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살짝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조만간 주선웅이 귀국할 예정이고 주민혁 역시 이 시점에서 입지를 다지느라 한창 바쁠 것이었다.원래는 오늘 밤 모든 걸 털어놓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려 했다.이제는 도저히 더 미룰 수 없는 상황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다시 기회를 봐야 한다.‘다음에 더 좋은 때를 골라 다시 이야기하자.’...위성 발사가 성공적으로 끝난 뒤, 모든 데이터도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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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4화

하지만 최근 그녀가 가장 신경 써야 할 일은 외삼촌의 장기 이식 문제와 박하린과의 소송 문제였다.위성 발사 현장에서, 그날 기자가 누구 손에 이끌려 왔는지는 최수빈도 속으로는 짐작하고 있었다.질문들은 죄다 주예린이 친딸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흘리며 그녀의 평판을 흐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말 하나하나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고 그녀의 신분에 타격을 줄 만한 것도 아니었지만 결국에는 기분 나쁘게 만들려는 의도였고 충분히 불쾌했다.그 자리에서 최수빈은 원래 강제 조치를 취할 생각이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주민혁과 주씨 가문 측 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정면으로 해명했다.“수빈 씨, 밖에 누가 찾아왔습니다.”누군가 발걸음을 재촉하며 다가와 최수빈에게 말했다.“이미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바쁘다고 전했는데도 듣질 않네요. 반드시 만나야 한다고, 수빈 씨에게 큰 이득을 안겨줄 거라고 말했습니다.”최수빈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이름은?”“진씨 성을 가진 분이었어요.”그 말에 최수빈은 바로 눈치를 챘다.오래도록 함께 지내오며 그녀는 진서령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파악을 한 상태였다.성격은 강압적이고 제멋대로이고 자신이 정한 방향은 절대 바꾸지 않는 사람이었다.“가볼게요.”최수빈이 곁에 있던 한재준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뜨자 육민성이 그 뒤를 따랐다.“같이 가. 바깥에서 기다릴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불러.”“그 사람이 무슨 맹수도 아니잖아요.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요.”최수빈이 그를 힐끔 보며 말했다.“맹수가 아니라도 사람 질리게 만드는 건 쉽지.”육민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랑 주민혁은 이미 이혼했어. 그런 상황에서 그 집 사람이 널 다시 찾는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는 거지.”“예전에는 널 무시했지만... 이제 넌 감히 손 뻗을 수 없는 존재가 됐잖아.”육민성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진서령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신분이 드러난 이후, 주씨 가문 측의 태도에는 확실히 변화가 있었다.최수빈은 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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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5화

진서령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막 카드라고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게다가... 너희 둘 사이에는 아이도 있잖니. 아이를 위해서라도 생각을 좀 해봐야 하지 않겠어?”그 말을 듣자 최수빈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눈빛도 어느새 한층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딸’을 언급하는 순간, 그건 그녀에게 있어서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상처였다.그녀는 진서령을 내려다보며 한 단어 한 단어 또렷하게 뱉었다.“꿈도 적당히 꾸셔야죠. 주씨 가문이 저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생각하면... 제가 지금 그걸 일일이 따지고 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대한 겁니다.”주씨 가문이 곤경에 처했을 때, 자신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은혜를 베푼 거라는 뜻이었다.‘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다시 그 집안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하는 거지?’주씨 가문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제멋대로에 자기 위주였다.진서령은 최수빈에게 정말로 돌아올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느끼자 얼굴에 당황과 놀라움이 섞인 기색이 떠올랐다.“만약 우리가 너한테 잘못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사과할 수 있어. 게다가 위성 발사 당일에도 우리가 다 나서서 네 편을 들어줬잖니.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배은망덕할 수가 있어? 우리가 나서주지 않았으면 지금쯤 너는 온갖 비난을 뒤집어썼을 거야.”진서령은 최수빈이 조금의 감사함을 느끼고 있을 줄 알았으나 돌아오는 건 차가운 침묵뿐이었다.최수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만약 그쪽들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저는 훨씬 더 깔끔하고 빠르게 처리했을 겁니다.지금처럼 질질 끌리지도 않았을 거고요.”그녀의 말투, 표정, 온몸에서 풍기는 기운까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진서령은 그 냉기에 눌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목이 막힌 듯한 답답함 속에서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저는 그 사람과 이미 아무 관계없습니다. 그리고 그쪽들과는 더더욱 상관없고요.주씨 가문에서 선을 지켜줬으면 좋겠네요.”이 말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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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6화

만약 모든 걸 주선웅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땐 이미 너무 늦을 것이었다.지금 당장, 최수빈을 주씨 가문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야 한다.‘원하는 대로 다?’진서령의 의도가 뻔히 보이는 그런 말을 들으며 최수빈은 그저 비웃음만 흘러나올 뿐이었다.그제야 그녀는 확실히 깨달았다.사람과 사람 사이란 결국 ‘이익’으로 얽힌 관계일 뿐이라는 걸.당신에게 가치가 있을 때 모두는 당신에게 다가오려 하고 당신에게서 얻을 게 없을 때는 그 누구도 곁에 머물지 않는다.최수빈은 그 차가운 주씨 가문에서 딸 주예린을 품에 안고 수년을 버텨왔지만 그들이 그녀를 외면한 이유는 단 하나,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었다.자신을 희생하고 가정을 위해 헌신했지만 그런 진심은 재벌가 앞에선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진심 따위 번지르르한 명함 하나만도 못했고 우스울 정도였다.‘원하는 대로 다라니... 나랑 예린이가 겪은 그 모든 고통을 주민혁이 목숨을 내놓는다 해도 보상할 수 있을까?’최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돌아서더니 그대로 자리를 떴다....육민성이 문밖에 서 있다가 나오는 최수빈을 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무슨 일 있었어?”최수빈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아뇨, 그냥... 가끔은 모든 게 마치 꿈처럼 느껴져서요. 아주 오래, 길게 꿈을 꾼 것 같아요.”이제야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그 고통스러운 꿈에서 마침내 빠져나온 것이다....국제 우주 정착 설계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와 박하린도 대회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이건 그녀에게 있어서 절호의 기회였기에 꼭 우승해야만 했다.하지만 우승을 원한다면 뛰어난 사람들로 팀을 꾸려야 했고 혼자만 잘한다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최수빈은 송미연, 육민성과 함께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고 장소는 운교가였다.예전엔 자주 가던 곳이었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가는 것이었다.“아, 여기 음식 진짜 먹고 싶었어.”송미연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전에는 찜찜한 사람들 만날까 봐 피했었지만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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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7화

박하린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최수빈 같은 사람에게 짓밟히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지만 최수빈은 냉소적인 눈빛으로 박하린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하린 씨가 꺾이지 않는 자존심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한 발 한 발 남자한테 기대더군요.”박하린은 순간 굳어버렸고 무의식중에 옆에 서 있는 주민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잠시 숨을 깊게 내쉰 그녀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건 수빈 씨가 판단할 몫이 아니에요.”그러고는 척 허리를 펴고 최수빈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냈다.“설령 내가 의지한 사람이 남자라 해도 그 사람은 나를 위해 기꺼이 세상의 가시를 헤쳐줄 사람이에요.”이 말과 함께 그녀는 얼굴에 달콤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띠었다.그 표정에 송미연은 본능적으로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송미연의 시선은 옆에 묵묵히 서 있던 주민혁에게 곧장 향했다.“이야, 말 참 잘하네요. 그럼 옆에 서 있는 이 하린 씨는 이제 주 대표님 어릴 적 소꿉친구가 아니라 여자친구란 말이죠?”그 말투에는 노골적인 조롱이 섞여 있었다.‘예전에는 둘이 소꿉친구라 그토록 강조해 놓고 이제 와서 입 쓱 닫고 애인 행세하는 거야? 참 가소롭네.’주민혁이 눈을 살짝 좁히며 입을 떼려던 찰나, 송미연이 손을 들어 툭툭 내저었다.“됐어요. 두 사람의 더러운 관계에는 관심 없으니까. 듣다가 괜히 내 귀 더러워질 것 같네요.”그러고는 최수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수빈아, 가자.”진승우가 최수빈 일행이 떠나는 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주민혁을 흘끔 보았다.“형, 두 사람... 진짜 사귀는 거예요?”그 말에 박하린은 곧바로 그를 향해 차갑게 내뱉었다.“바보 같긴.”...송미연은 최수빈과 함께 룸으로 들어섰다.“그날 정부 청사 앞에서 박하린이 주민혁 기다리고 있는 거 봤을 때는 진짜 끝났구나 싶었는데... 이제는 완전 붙어 다니더라? 보기만 해도 역겨워.”최수빈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찻잔에 차를 따랐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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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8화

박하린을 향해 여전히 무관심하게 신경 써주는 주민혁을 보며 송미연은 그제야 완전히 실감했다.최수빈의 정체가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민혁의 태도는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그 남자 마음속에는 애초에 최수빈의 자리가 없었다.최수빈은 그와 5, 6년을 부부란 이름으로 함께 보냈지만 그 모든 시간 동안 외면당해왔고 그 상처는 최수빈의 삶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깊은 골이 되었다.송미연은 그 현실에 가슴이 답답해져 최수빈을 힐끔 바라봤다.길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굳이 아픈 데를 다시 들쑤실 이유가 없었기에 말끝을 흐린 것이다.“수빈아, 요즘 너... 심 대표님이랑은 어때? 연락은 좀 해? 혹시 뭔가 진전될 가능성 같은 건 없어?”“이제 큰일들은 다 정리됐으니까... 슬슬 너도 너 자신을 위한 문제를 생각해볼 때가 된 거 아니야?”‘한쪽에서는 바람 잘 날 없이 요란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 수빈이가 이대로 혼자 늙어 죽을 순 없잖아?’최수빈은 고개를 들어 송미연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라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인생은 자기 거야. 굳이 남이랑 비교하면서 살 이유 없어.”주민혁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 이미 명백한 사실이었다.정체가 드러났다고 해서 혹은 최수빈이 어떤 특별한 존재였다고 해도 그 남자는 단 한 번도 그녀를 눈에 담아준 적 없었다.송미연이 기대하던, 그토록 바랐던 주민혁의 후회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그는 최수빈을 사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쩌면 증오에 가까운 감정까지 품고 있었는지도 몰랐다.송미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최수빈이 이 주제에 대해 더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고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라면 더 이상 파고들어 봤자 상처만 깊어질 뿐이었다.하여 그녀는 깊게 들이마셨던 숨을 길게 내쉬며 내내 마음속을 짓누르던 감정을 다잡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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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9화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최수빈 쪽으로 향하자 최수빈은 눈을 피하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조용히 주민혁을 스쳐 지나가려던 찰나, 그가 최수빈의 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소송, 취하하지? 하린이랑 법정 싸움 해봤자... 설령 네가 이긴다 해도 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하린이는 여전히 하린이니까. 의미 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마.”그 말 한마디에 최수빈의 걸음이 딱 멈춰 섰다.그는 지금 박하린의 편을 들고 있었다.표절, 도용 같은 사안은 판단 기준도 모호하고 법적으로도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그러니까 이 말은 곧 경고였다.‘박하린 건은 내가 직접 챙긴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대놓고 박하린 뒤에 자기가 있다는 걸 선언한 거나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최수빈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했다. 파도 하나 없는 고요한 호수처럼, 무표정한 얼굴에 문득 냉소가 흘렀다.“주 대표님이 뒤를 봐준다고 해서 그 여자가 편히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표절이든 도용이든 그 더러운 짓을 한 이상, 소송이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갈 겁니다.”박하린의 성향이라면 이런 일쯤은 시작일 뿐이었고 앞으로는 더 한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그 여자는 애초에 인성이 글러 먹었어요. 당장은 막아줄 수 있겠지만 평생 지켜줄 자신 있어요? 결국에는 더 비참하게 무너지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혼자만 무너지는 게 아닐 수도 있죠.”주민혁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언뜻 보기에는 무심해 보였지만 그 주변에는 자연스레 위압감이 감돌았다.그는 최수빈의 단단히 다문 턱선을 힐끗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비틀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끝까지 간다고? 그건 내가 할 말이야.”그가 한발 다가서는 순간, 그림자가 그녀를 삼켰고 뒤이어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떤 일은...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이 말에 최수빈은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내가 나설 일이 아니라니... 그럼 머리 꼭대기까지 짓밟히고도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주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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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0화

한여름이라 그런지 딸아이의 머리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최수빈은 손수건으로 아이의 이마를 살며시 닦아주며 물었다.“덥지 않아?”주예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환하게 웃었다.“하나도 안 더워요! 오늘 공부 다 끝내고 나서 할아버지가 엄마 보러 가자고 해서 나온 거예요! 그리고 오늘 나 완전 잘했어요. 할아버지가 칭찬까지 해주셨다니까요?”딸아이의 얼굴은 햇살처럼 밝고 환했으며 전보다 훨씬 생기가 돌았다.그 미소를 바라보는 최수빈의 가슴은 따뜻한 온기로 가득 채워졌다.“당연히 그래야지, 우리 예린이는 원래 제일 멋지고 똑똑하잖아.”그때 송미연이 아이스크림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우리 예린 공주님 드시라고 사 왔지!”“우와!”주예린은 눈이 반달처럼 휘며 말했다.“고마워요, 언니!”그때 어디선가 지민준이 툭 튀어나오더니 말했다.“예린아, 난 먼저 아빠랑 집에 가야 해. 며칠 뒤에 우리 같이 공부 얘기하자!”함께 따라온 지규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최수빈을 향해 미소 지었다.“오랜만이네요.”최수빈은 그를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인사는 그걸로 충분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그녀가 묻자 지규원이 설명했다.“민준이랑 예린이가 오늘 같은 대회에 참가했거든요. 끝나고 밥 먹으러 왔는데 여기 엄마가 있다고 하니까 무조건 오겠다고 난리였어요.”“예쁜 이모, 저 이제 갈게요!”지민준은 최수빈의 손을 꼭 붙잡았다.“아빠가 말했는데 이모는 진짜 멋지대요. 요즘 일도 다 끝났다면서요? 시간 생기면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아이의 귀여운 초대에 최수빈은 바로 대답하지는 않았고 그저 웃으며 말했다.“초대해줘서 고마워, 민준아.”그때 한재준이 멀리서 이들을 바라보다가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아이고, 다들 잘 아는 얼굴이네?”그는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그런데 식사를 벌써 다 했다니 아쉽구나.”사실 이쪽에 온 김에 제작 공장 쪽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살펴보고 겸사겸사 식사도 하고 간 것이었다.“괜찮아요. 앞으로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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