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831 - Chapter 840

1010 Chapters

제831화

최수빈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와 차분히 짐을 정리했다.캐리어 앞에 쪼그려 앉아 가지런히 접어 둔 옷들을 하나씩 넣으며 손끝이 천을 스칠 때도 마음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엄마, 이거 봐요!”맑은 목소리와 함께 주예린이 자기의 작은 캐리어를 끌고 달려오더니 얼굴 가득 들뜬 표정을 지었다.“제 옷 다 넣었어요! 토끼 인형도 챙겼고요!”최수빈은 고개를 들어 딸을 향해 웃어 보였다.“우리 예린이 대단하네. 이제 혼자서 짐도 다 싸고.”그러고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덧붙였다.“서울을 떠나면 우리 다 행복해지는 거야, 그렇지?”주예린은 눈빛을 반짝이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네! 새로운 곳에서 새 친구도 사귈 수 있고 엄마도 좋아하는 일 할 수 있잖아요. 이제 속상한 일은 안 생각해도 돼요!”최수빈의 마음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서울을 떠난다는 건, 단순히 장소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과거와의 완전한 작별이었다.서럽던 날들과의 이별, 주민혁과 얽혀 있던 관계의 끝,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를 위험까지 모두 내려놓는 일이었다.주민혁이 과거에 무엇을 겪었는지, 왜 그렇게 냉담했는지, 이제는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송미연’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전화를 받자 송미연의 활기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수빈아, 천공 연구원 동료들이 모임 하나 잡았어. 너 떠난다니까 송별회 겸해서. 예린이랑 같이 와. 다들 보고 싶어 해.”최수빈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금방 갈게.”같이 오래 일했던 사람들이니 좋게 만나 좋게 헤어지는 게 맞았다.그렇게 전화를 끊고 주예린에게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준 뒤, 둘은 함께 집을 나섰다.약속한 식당의 룸에 들어서 보니 자리는 이미 꽉 차 있었다. 최수빈과 주예린을 보자 모두들 반갑게 인사했고 주예린이 좋아하는 탕수육과 딸기 푸딩까지 따로 주문해 둔 뒤였다.식탁 위에서는 함께 보냈던 날들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으며 때로는 웃기도, 때로는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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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2화

최수빈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손끝이 서서히 식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주민혁에게 위험이 닥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과연 그에게 경고를 줘야 할지 마음이 쉽게 정해지지 않았다.‘이미 완전히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는데 이제 와 그 사람의 일에 끼어드는 게 맞을까?’하지만 조금 전에 들은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주민혁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가슴 한쪽이 무언가에 단단히 붙잡힌 듯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그때, 문제의 룸 문이 열렸다.안에 있던 사람들은 주민혁을 보자 순간 공기가 얼어붙듯 조용해졌다.그러다 한 덩치 큰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잔뜩 날이 선 웃음을 띠었다.“주 회장님, 오래 기다렸습니다.”주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차갑게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 서린 냉기가 주변 공기마저 굳게 만들었다.그의 뒤에 선 려운은 허리께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언제든 돌발 상황에 대응할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복도 모퉁이에 숨어 있던 최수빈은 당장이라도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망설이고 있던 순간, 송미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수빈아, 왜 아직도 안 와? 다들 기다리고 있어.”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금방 갈게. 조금만 더 기다려.”전화를 끊고 굳게 닫힌 그 룸을 한 번 더 바라본 뒤, 결국 그녀는 몸을 돌려 자신이 있던 룸으로 향했다.‘이건 민혁 씨의 일이야. 나랑은 상관없어. 이제 남남인데 그 사람의 생사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잖아.’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룸 앞에 다다르자 끝내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그쪽을 바라보고 말았다.원래 그녀가 있던 룸 안에서는 여전히 왁자지껄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주예린은 최수빈을 보자마자 달려와 손을 붙잡았다.“엄마, 어디 갔었어요? 엄청 기다렸잖아요.”최수빈은 몸을 낮춰 딸을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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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3화

화면에는 ‘메시지 전송 실패’라는 붉은색의 안내 글이 계속해서 깜빡였다.최수빈은 손끝에 힘을 주어 몇 번이나 전송 버튼을 눌렀다.그러나 ‘그 룸에 민혁 씨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어요. 조심해요’라는 메시지는 끝내 전송되지 못한 채 입력창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왜 이러지?”최수빈은 입술을 깨물며 미간을 찌푸렸다.메시지창을 나와서 다시 주민혁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지만 휴대폰 너머로 돌아온 건 차갑고 기계적인 음성이었다.“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없는 번호?’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목에 무언가가 막힌 듯 숨이 반 박자 늦게 쉬어졌다.이내 조금 전 스쳐 지나가던 주민혁의 무심한 눈빛과 그 방 안에서 들려왔던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말이 겹쳐 떠올랐다. 그러자 등줄기를 따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치고 올라왔다.“나 전화 좀 하고 올게.”최수빈은 송미연에게 급히 한마디를 남겼다.그러고는 대답을 기다릴 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룸을 빠져나왔다.복도에는 누런 조명이 깔려 있어 벽에 걸린 그림들마저 흐릿해 보였다.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울리는 가운데 최수빈은 주민혁이 들어간 룸을 향해 서둘러 걸어갔다.그러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안에서 나오던 려운과 정면으로 부딪쳤다.“최수빈 씨?”려운은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말투에는 분명히 거리를 두려는 기색이 느껴졌다.“무슨 일로 오셨어요?”그는 무의식중에 몸을 옮겨 룸 쪽을 가로막았다. 경계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태도였다.최수빈은 걸음을 멈춘 채 려운의 어깨너머로 굳게 닫힌 문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목소리는 어느새 다급해졌다.“민혁 씨... 괜찮죠? 안에서 무슨 일은 없었나요?”그 말이 끝나자마자 려운은 표정을 굳히더니 말투도 한층 딱딱해졌다.“대표님의 일은 최수빈 씨와 무관합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그 말은 보이지 않는 벽처럼 그녀를 밀어냈고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을 정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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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4화

최수빈은 주예린을 차에 태워 어린이 안전벨트를 꼼꼼히 채워준 뒤, 작은 담요까지 덮어 주고서야 운전석으로 돌아왔다.시동을 걸고 나서는 무심코 주민혁이 있던 식당 방향을 한 번 바라봤다. 그쪽의 불은 이미 꺼져 있었는데 사람이 떠난 건지,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생각을 끊어 냈다.‘이제 그만. 그 사람의 일은 더 이상 내 일이 아니야.’...다음 날 아침 막 동이 튼 무렵, 최수빈은 일어나 마지막 짐을 정리하고 현관 앞에 캐리어를 세워 두었다.그런 다음 아직 졸려 눈을 비비고 있는 주예린을 안아 차에 태웠다.차 문을 닫기 전, 그녀는 몇 년을 살았던 집을 마지막으로 바라봤다.웃을 때도 있었고 울 때도 있었고 주예린과 단둘이 버텨 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과 이제 정말로 작별이었다.“엄마, 우리 새집에는 언제 도착해요?”주예린은 토끼 인형을 꼭 안은 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금방 도착해. 새집에 도착하면 엄마가 맛있는 거 사 줄게.”최수빈은 웃으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 차에 오르려다 멀지 않은 가로등 아래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주선웅이었다.손에 봉투 하나를 든 채,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일찍 떠나는 거야? 인사라도 하려고 왔어. 예린이 가는 길에 심심하지 말라고 간식이랑 장난감도 좀 샀고.”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발 물러서더니 그가 내미는 봉투를 피하고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마음만 받을게요. 저희는 저희끼리 잘 갈 수 있습니다.”그녀는 더 이상 주씨 가문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특히 주선웅만큼은 더더욱.주선웅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조금 옅어졌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왔다.“솔직히 잘 모르겠어. 왜 나랑 민혁이한테까지 이렇게까지 벽을 세우는 거야? 예전에 너 민혁이랑 살 때도, 우리 사이 나쁘지 않았잖아. 혹시 오해라도 있는 거야?”“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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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5화

최수빈은 더 이상 그런 생각들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차는 세 시간 넘게 달려서야 해온시에 도착했다.최수빈은 미리 마당이 딸린 작은 월셋집을 마련해두었는데 딸과 둘이 지내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짐을 간단히 풀고 나니 어느덧 해가 질 무렵이었다. 최수빈은 주예린의 손을 잡고 근처 마트로 생활용품을 사러 나섰다.그런데, 한 보육원 앞을 지나던 주예린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문 앞 계단을 가리켰다.“엄마! 저기 봐요! 저 아이 오빠 아니에요?”최수빈은 딸이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계단 위에 웅크리고 있는 한 작은 아이가 보였다. 옷은 때로 얼룩져 있고 여기저기 헤져 있었으며 머리는 엉켜 있었고 얼굴에는 흙 자국이 남아 있었다.주시후였다.이런 곳에서 아이를 마주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최수빈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조윤미의 회사가 망한 뒤, 주시후는 당연히 조윤미를 따라 떠났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조윤미는 아이를 데리고 가지도 않았고 이렇게 복지시설에 맡겨 버린 모양이었다.“오빠?”주예린은 최수빈의 손을 놓고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늘 반듯하고 말끔하던 오빠가 이렇게 변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듯, 아이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과 연민의 기색이 동시에 떠올랐다.곧이어 주예린은 주머니에서 방금 산 딸기 과자를 꺼내 주시후의 앞으로 내밀었다.“오빠,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야. 먹어 봐. 되게 달아.”하지만 주시후는 고개를 번쩍 들더니 경계심과 적의가 가득 찬 눈빛으로 과자를 쳐냈다.과자가 바닥에 흩어지자 아이는 일부러 몇 번 더 밟으며 소리쳤다.“누가 네 거 먹는대? 너랑 네 엄마, 나 불쌍한 꼴 보러 온 거잖아? 난 동정 같은 거 필요 없어!”최수빈은 급히 다가가 주예린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바닥에 짓밟혀 부서진 과자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5년을 키운 아이, 진심을 다해 보살폈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줬었다.그럼에도 아이는 아무리 꼭 쥐어도 따뜻해지지 않는 돌처럼 끝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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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6화

주예린은 보육원 쪽을 한 번 돌아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오빠는... 나중에 괜찮아질 수 있을까요?”최수빈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그럼.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젠가는 꼭 좋아질 거야.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을 잘 살아가면 돼. 알겠지?”주예린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네! 엄마, 저 새집 좋아요. 우리 이제 다시는 안 떨어지는 거 맞죠?”...밤은 깊어가고 곤히 잠든 주예린의 숨결이 베개 위로 잔잔히 흘렀다.최수빈은 거실 책상에 앉아 내일 항공청에 제출할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방 안에는 펜 끝이 종이를 스치며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그때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했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민성 선배’였다.최수빈은 손끝에 아직 잉크 자국이 남아 있는 채로 펜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해온시에 도착했어?”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온화했다.최수빈은 흩어진 서류를 가지런히 모으며 담담히 답했다.“네, 잘 도착했고 짐도 다 정리했어요.”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벼운 농담을 덧붙였다.“왜요?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전 동료가 그리워진 거예요?”그러자 휴대폰 너머에서 육민성이 웃었다. 다만 그 웃음에는 어딘가 무거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그리운 건 사실이고... 그보다 할 말이 하나 있어. 넌 언제든 천공 연구원의 주주야. 그건 변하지 않아.”서류를 정리하던 최수빈은 순간 손을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요? 천공 연구원에 무슨 일 있어요?”불안함이 스며들었다. 육민성은 원래 돌려 말하는 사람이 아닌지라 이런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잠시 침묵이 흘렀다. 창밖의 어두운 밤공기가 그대로 휴대폰을 타고 전해지는 듯했다.육민성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네가 서울을 떠난 뒤에... 주민혁이 교통사고를 당했어.”그 한마디가 돌덩이처럼 최수빈의 가슴으로 떨어졌다.서울을 떠난 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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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7화

휴대폰 너머의 침묵이 그물처럼 천천히 내려와 최수빈을 감쌌다.휴대폰을 쥔 손끝이 서늘해졌고 귀에서는 자신의 숨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그때, 강지안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상대의 마음을 이미 꿰뚫어 본 듯한, 지나치게 차분한 톤이었다.“수빈 씨, 아직도 민혁이가 그렇게 신경 쓰여요?”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말투였지만 그 말은 가느다란 바늘처럼 망설임이 가득한 최수빈의 마음을 찔러댔다.“제 대답을 듣고 싶고 민혁이의 상황이 궁금하다는 건 아직 완전히 선을 긋고 싶은 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내가 오늘 답을 해주면... 두 사람 또 예전처럼 끝없이 얽히게 되는 거 아니에요?”최수빈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반박하려 했지만 말은 목구멍에서 막혀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분명 신경 쓰고 있었다.‘교통사고’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무언가에 움켜쥐어진 듯했던 감각은 거짓이 아니었다.연락처를 뒤져 강지안의 번호를 찾을 때 손끝이 떨렸던 것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최수빈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주예린을 데리고 서울을 떠난 건 그곳의 모든 것과 작별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민혁이는 제 환자예요. 지금의 민혁이는 무엇보다 자극을 받으면 안 되고요.”강지안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가 의사로서의 단호함을 띠며 이어졌다.“수빈 씨도 알잖아요, 민혁이 아프다는 거. 몇 년 동안 약이랑 상담에 의지해서 겨우 마음을 붙잡아 온 거예요. 그런데 스스로 어떤 관계인지 확실히 하지도 못한 채, 한편으론 선을 긋고 싶다 하면서 또 한편으론 민혁이의 소식을 캐묻고 싶은 거라면... 저한테 다시 전화하지 말고 일단 수빈 씨 마음부터 확인해 봐요. 정말로 끊어 내고 싶은 건지, 아니면 신경 쓰이는 걸 멈출 수 없는 것인지...”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뒤엉킨 감정을 눌러 담으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다시 얽히려는 게 아니에요. 만약 그 사람의 사고가 정말 저랑 관련이 있다면 저도 그 뒤의 일은 알아야죠. 전 책임을 피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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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8화

최수빈은 강지안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이제는 정말로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주민혁이 자기 때문에 병원에 누워 혼자서 고통을 견디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알겠어요.”최수빈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다시는 방해하지 않을게요. 이 일에 대해서도 더 묻지 않을 거고요.”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녀는 화면에 떠 있는 ‘강지안’이라는 이름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만 있었다.책상 위에는 내일 항공우주 연구원에 출근하기 위한 절차가 정리된 자료가 그대로 펼쳐져 있었지만 더는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최수빈은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 띄엄띄엄 밝혀진 불빛들을 보자 가슴 한켠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서울을 떠나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그런데도 주민혁이라는 이름은 실처럼 가늘게 그녀의 마음에 묶여 끝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밤은 더 짙어졌고 방 안에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또렷이 울렸다.최수빈은 휴대폰을 꺼내 주민혁과의 메시지창을 열었다. 화면에는 그녀가 끝내 보내지 못했던 짧은 안부 메시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오랫동안 그 화면을 바라보다가 최수빈은 결국 조용히 ‘연락처 삭제’를 눌렀다.‘이미 떠나기로 했다면 다시는 돌아보지 말아야지.’...한편, 병원 병실.주민혁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주상 그룹의 재무 보고서가 떠 있었고 빼곡한 숫자들이 그의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이내 병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강지안이 들어왔는데 손에는 방금 받아온 검사 결과지가 들려 있었다.최수빈과 통화를 막 끝낸 탓에 아직 무거운 표정이 가시지 않았지만 주민혁을 보는 순간 그 감정은 곧 정리되었다.“그 사람한테 전화 왔어?”주민혁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물었다. 다만 키보드 위에 얹힌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강지안은 결과지를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으며 일부러 그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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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9화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참고 견디는 일과 통증에 익숙해져 있었다.냉랭한 태도로 최수빈을 밀어내겠다고 마음먹은 그 날부터, 자신이 선택한 길이 외롭고 험난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주민혁은 가슴에 둘러진 석고를 한 번 쓸어내리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이번 사고에서는 아예 연기할 생각도 없나 보더라. 아예 나를 노리고 들이받았어. 오히려 번거로운 절차는 줄었지.”“그런 말을 하면서 웃음이 나와?”강지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랐다.“의사 말 안 들었어? 이번에는 정말 크게 다친 거야. 조금만 더 심했으면 결과가 어땠을지 모른다고. 왜 그렇게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거야?”주민혁은 마침내 노트북을 닫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눈빛도 한결 누그러졌다.“내 목숨은 이미 내 것이 아니야. 수빈이랑 예린이만 무사하면 이 정도 다친 게 뭔 대수겠어.”그러다 잠시 멈칫하며 그는 저도 모르게 씁쓸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의 난... 그 사람들 곁에 있을 자격조차 없어. 앞으로 수빈이가 누구와 함께하든 상관없어. 수빈이한테 잘 해주고 예린이를 제대로 보살펴 주는 사람이라면... 난 그걸로 충분해.”강지안은 쓸쓸해 보이는 주민혁의 눈빛을 보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가 최수빈과 주예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그러면서도 그는 여러 사정들로 인해 멀찍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다가가는 것조차 이제 사치가 되어 버렸다.“지금은 그 두 사람 모두 신변의 안전이 확인됐어. 국정원에서도 계속 주시하고 있고 더 큰 문제는 없을 거야.”강지안은 옆에 놓인 약통을 집어 들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러니까 이제 네가 할 일은 하나야. 치료에 제대로 협조하고 몸부터 회복하는 거. 기분도 조절해야 해. 이렇게 계속 무리하면 더 악화될 뿐이야.”하지만 주민혁은 무릎 위의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손끝이 또다시 키보드 위에 내려앉았다.“난 나 나름의 속도와 방식이 있어.”주민혁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본 강지안은 그가 또다시 치료를 거부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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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0화

장성훈은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다 말고 강지안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그녀는 배를 두 손으로 꼭 누른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얼굴은 아까보다 한층 더 창백해져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그리고 이를 본 장성훈은 단번에 그날이 왔다는 것을 떠올렸다. 강지안은 매번 이 시기만 되면 심한 생리통에 시달렸으니 말이다.뒤이어 장성훈은 아무 말 없이 뒷좌석에서 보온병을 꺼냈다. 뚜껑을 여는 순간, 따뜻한 생강차 향이 차 안에 은은하게 퍼졌다.그러고는 컵을 강지안의 쪽으로 내밀며 담담하지만 세심한 배려가 섞여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씨, 생강차부터 조금 드세요. 배를 좀 데워야 합니다.”강지안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앞에 내밀어진 보온병을 보고 다시 장성훈의 굳은 옆얼굴을 바라봤다.그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앞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흔들림이 없어 마치 정말 별거 아닌 일을 했다는 듯했다.하지만 강지안은 장성훈이 늘 이런 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장성훈은 그녀의 모든 습관을 기억하고 필요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 두면서도 정작 걱정이나 애정이 담긴 말은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말은 더더욱 없었다.강지안은 보온병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서 시작해 팔을 타고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한 모금 마시자 알싸한 맛과 함께 배 안쪽의 통증이 조금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컵을 내려놓은 그녀는 장성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통증 탓에 목소리에는 다소 힘이 없었다.“조수석 좀 더 뒤로 젖혀. 그리고... 좀 문질러 줘.”장성훈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그래도 제가 남자인데...”그러자 강지안이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내 말도 안 들을 거야?”결국 장성훈은 입을 다물더니 말없이 좌석을 조정해 그녀가 좀 더 편히 몸을 뉘일 수 있게 했다.곧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가는 허리선과 평평한 아랫배를 스쳐 지나갔다. 장성훈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따뜻한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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