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841 - Chapter 850

1010 Chapters

제841화

장성훈의 목젖이 가볍게 움직였다.아직 그녀의 아랫배 위에 얹힌 그의 손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고 그 온기가 지금 두 사람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적나라하게 느껴졌다.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한층 낮은 목소리였다.“잠깐 누워 있어요. 배를 좀 어루만져주면 한결 나아질 겁니다.”하지만 강지안은 그의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더 세게 붙잡았다.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억울함과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살짝 서려 있었다.“배 어루만져주지 않아도 돼. 그보다 지금 네 마음에... 난 여전히 아가씨일 뿐이야?”차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귓가에 들리는 건 에어컨 바람 소리뿐이었다.장성훈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고 한순간 숨을 멈췄다.심장이 무언가에 툭 하고 부딪힌 듯 조용히 울렸고 손끝마저 살짝 저릿해졌다.이러면 안 된다는 걸 장성훈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강지안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처음으로 이성의 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그래도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몸을 뗐다.“몸이 안 좋은 거면 병원으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그러자 강지안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집으로 가.”...해온시의 아침 공기는 촉촉하고 서늘했다.최수빈은 심플한 흰색 셔츠에 노트북을 들고 항공우주 연구원 정문 앞에 서 있었다.눈앞의 위엄 있는 건물을 바라보며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서울을 떠난 뒤, 정식으로 시작하는 첫 출근이었다.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복도를 오가는 직원들 모두 통일된 파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낯선 얼굴이 눈에 띄자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그녀에게 쏠렸다.인사팀 직원이 입사 절차를 도와주며 안내하던 중, 어딘가 익숙한 환영의 인사가 들려왔다.“혹시 이번에 새로 오신 엔지니어님이신가요? 환영합니다! 국제 우주 정착 설계 대회에서 만든 드론, 진짜 대단했다던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최수빈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 따뜻한 기운이 조금씩 번지기 시작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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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2화

최수빈이 언급한 특허와 프로젝트는 사실 그들도 내부 자료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다만 명문대 출신이 아닌 사람이 자기들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주변에 서 있던 동료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최수빈을 바라보는 눈빛에 서서히 신뢰를 담기 시작했다.아까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풀이 죽어 자리를 떠난 뒤에야 인사팀 직원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수빈 씨, 아까 하신 말씀 진짜 속이 다 시원했어요! 다만... 앞으로 연구원 생활에서는 너무 직설적이지만은 않으시는 게 좋아요. 괜히 사람들한테 미움 살 수도 있거든요.”최수빈은 가볍게 웃었을 뿐,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입사 절차를 마친 뒤, 최수빈은 곧바로 원장실로 안내됐다.백발이 성성한 노신사인 원장은 이름이 진호성으로 말투는 온화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함을 기했다.“수빈 씨, 우리 연구원에 온 걸 환영해. 이력서 봤어. 무인기 응급 구조 분야에서의 경험이 상당히 풍부하더군. 마침 우리 연구원에 중요한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수빈 씨에게 맡기고 싶어.”진호성은 컴퓨터를 켜 프로젝트 자료를 띄웠다.“프로젝트명은 도심 화재 대응 무인기 시스템이야. 고층 건물 화재 상황에서 불이 난 지점을 정확히 탐지하고 실시간 영상을 전송하며 초기 진화를 위해 소형 소화탄까지 탑재할 수 있는 무인기를 설계하는 게 목표지. 도심 화재, 특히 고층 화재는 구조 난도가 높아. 소방대원이 즉각 진입하기도 어렵고.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구조 효율을 크게 끌어올리고 인명 피해도 줄일 수 있을 거야.”최수빈은 자료를 찬찬히 살폈다.그건 바로 그녀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그려왔던 연구 방향이자 자신의 기술적 강점을 살릴 수 있으면서도 실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그래서 최수빈은 고개를 들고 또박또박 말했다.“원장님, 저 이 프로젝트 맡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팀을 꾸리고 구체적인 설계안을 내놓을게요.”“좋아.”진호성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기술팀 인력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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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3화

“석진 씨, 먼저 기존 무인기 하드웨어 전반을 테스트해서 어떤 부품을 개선해야 할지 정리해 주세요. 다인 씨는 최근 5년간의 도시 화재 데이터를 분석해서, 특히 고층 건물 화재의 특징과 구조상의 어려움을 집중적으로 정리해 주시고요. 우선 기초 작업부터 탄탄하게 다져봅시다. 초안이 나오면 그때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하면 돼요.”최수빈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눈빛에서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망설이는 기색이 서서히 사라졌다.임우영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네, 수빈 씨. 오늘 안으로 문헌 정리 보고서까지 만들어 보겠습니다!”오석진도 가슴을 한 번 두드리며 말했다.“하드웨어 테스트는 저한테 맡기세요. 내일까지 결과 드리겠습니다.”장다인 역시 웃으며 말을 보탰다.“데이터 분석은 오늘 오후부터 바로 시작해서 사흘 안에 1차 통계 결과 내볼게요.”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최수빈의 마음에는 온기가 번졌다.편견을 바꾸는 데 지름길은 없기에 결국 하나하나 결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최수빈은 노트북을 켜고 무인기의 초기 설계 스케치를 그리기 시작했다.날개는 접이식 구조로 좁은 복도나 실내에서도 이륙이 가능해야 했다.기체 외장은 고온에 견딜 수 있는 소재로 보강해 화재 열기로 인한 손상을 막아야 했고 센서는 적외선과 가시광을 결합한 이중 모드로 업그레이드해 짙은 연기 속에서도 불이 난 지점을 정확히 포착할 수 있어야 했다.창밖의 햇살이 유리창을 통과해 도면 위로 쏟아지며 잔뜩 집중한 최수빈의 옆얼굴을 환하게 비췄다.그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오가고 화면 속 설계도는 점점 형태를 갖춰갔다.한편 회의실 밖, 기술팀 사무실 한켠에서 이문성은 자리에 앉아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러다 회의실이 텅 비어 있었다는 동료의 메시지에 그는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책상 위에 놓인 커피를 들어 올리며 그는 속으로 확신했다.‘최수빈은 아마 일주일도 못 버틸걸? 그러고 나면 그 프로젝트는 결국 다시 내 손 안에 들어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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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4화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종연과 주선웅이 쉽게 물러날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다만 이렇게 ‘협력’이라는 형태로 다시 그녀의 삶에 끼어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진호성을 바라봤다.“원장님, 이 협력 건은...”하지만 진호성은 그녀의 말을 부드럽게 끊어냈다. 표정은 진지했고 말투도 솔직했다.“걱정하는 부분이 뭔지는 알아. 하지만 플라잉 테크는 무인기 핵심 부품 분야에서 기술력이 상당히 검증된 회사야. 그쪽의 지원을 받으면 프로젝트 속도를 훨씬 끌어올릴 수 있어. 연구원에서도 이미 검토를 마쳤고. 이번 협력은 프로젝트에 득이 되면 됐지, 손해가 될 요소는 없어.”최수빈은 잠시 말이 없었다.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항공우주 연구원 내부 자원만으로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었다.때문에 플라잉 테크의 참여는 분명 여러 난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다만 심종연과 주선웅의 이름이 머릿속에 스치는 순간, 두피가 서늘해질 만큼 거부감이 밀려왔다.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협력에 동의하겠습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 협력 과정에서 모든 기술적 의사결정은 저희 쪽이 주도합니다. 플라잉 테크는 지원 역할에만 충실하고 연구 개발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에요.”플라잉 테크 측 담당자인 장태한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문제없습니다. 수빈 씨의 기술적 판단을 전적으로 존중할게요. 저희는 요청하시는 부분에 최대한 맞춰 지원만 하겠습니다.”원장실을 나섰을 때는 이미 하늘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집으로 향하는 길, 밤바람이 불어오자 가슴에 눌려 있던 긴장감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최수빈은 휴대폰을 꺼내 송미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플라잉 테크가 내가 맡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더라. 심 대표님 쪽에서 결국 다시 엮고 들어왔어.]곧바로 답장이 왔다.[진짜 질기다, 질겨. 너 혼자서 다 감당하려 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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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5화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온 거지? 민혁 씨가 보낸 건가?’려운 역시 최수빈을 발견하고는 곧장 다가왔다. 손에는 정교하게 포장된 분홍색 상자를 안고 있었는데 여전히 공손한 태도였다.“수빈 씨, 안녕하세요.”주예린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최수빈의 뒤에 숨은 채, 고개만 빼꼼 내밀어 려운을 바라봤다.“엄마, 저 아저씨 누구예요?”려운은 몸을 낮춰 주예린의 눈높이에 맞추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상자를 내밀었다.“예린이 안녕? 나는 려운 아저씨라고 해. 이건 대표님이 너를 위해 준비하신 입학 선물이야. 1학년 되는 거, 진심으로 축하한대.”“아빠요?”주예린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바라봤다.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엄마, 이거 아빠가 보낸 거예요? 그런데 아빠는 왜 안 왔어요?”그 말에 최수빈의 심장은 무언가에 가볍게 움켜쥐어진 듯했다.그러나 이내 상자를 받아 들고 려운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려운 씨, 일부러 와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앞으로는 안 그래도 돼요. 예린이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려운은 잠시 미소를 거뒀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대표님께서 오늘이 예린이의 입학일이라는 걸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중요한 회의도 미루고 이 선물을 오래전부터 준비하셨는데 오늘은 몸이 불편해서 직접 오시지 못했어요. 그래서 꼭 제 손으로 예린이에게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상자를 쥔 최수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끝으로는 상자에서의 온기가 전해졌다.려운이 말한 ‘몸이 불편하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최수빈은 알고 있었다.주민혁은 아직 병원에 있었고 그 교통사고가 그녀와 전혀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최수빈은 걱정 한마디조차 건넬 수 없는 입장이었다.“알겠습니다.”최수빈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선물은 제가 예린이한테 전할게요. 이제 돌아가셔도 돼요.”려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떠나기 전, 주예린을 한 번 더 바라보고는 차로 향했다.그가 차에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주예린이 최수빈의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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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6화

그녀는 문득 예전에 앞으로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는 메시지와 함께 정체 모를 꽃과 생일 케이크를 받은 일이 떠올랐다.‘그것도 아마 민혁 씨가 보낸 거겠지.’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자신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를 그 교통사고가 다시 떠올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그러고는 선물 상자의 뚜껑을 다시 닫고 발치에 내려놓았다.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에는 ‘주선웅’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고 그 세 글자는 마치 가시처럼 조용하던 차 안의 분위기를 단숨에 깨뜨렸다.최수빈은 몇 초간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는 냉담했다.“여보세요.”“수빈아, 일은 다 끝났어?”주선웅의 목소리가 일부러 다정하게 바꾼 듯했다.“항공우주 연구원 프로젝트가 플라잉 테크랑 협업한다는 얘기 들었어. 우리 협업 관련해서, 시간 좀 내서 따로 이야기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그는 웃으며 덧붙였다.“봐봐, 너 서울 떠났는데도 우린 이렇게 또 만나게 되잖아. 인연이지.”그러자 핸들을 잡은 최수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프로젝트 관련 건은 선웅 씨의 비서와 제 비서가 일정을 잡으면 됩니다. 평일에 항공우주 연구원에서 미팅 잡으세요. 개인적으로 만날 시간은 없습니다.”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주선웅이 말하는 ‘협업 이야기’라는 건 결국 핑계 삼아 또 엮이려는 수작일 뿐이라는 걸.휴대폰 너머에서 주선웅이 잠시 말을 멈췄다. 이윽고 약간 서운함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수빈아, 정말 나한테 이렇게까지 거리 둘 거야? 우리 예전에는...”“주선웅 씨.”최수빈은 단호한 말투로 그의 말을 끊어냈다.“저희는 지금 단지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에요. 모든 건 공적으로만 처리하죠. 예전 얘기 꺼낼 필요 없습니다.”주선웅은 그녀가 이렇게까지 선을 그을 줄 몰랐는지 몇 초간 침묵하더니 이내 말을 돌렸다.“혹시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니야? 지난번 식사 자리에서는...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 너한테 실례되는 일, 내가 할 리가 없잖아. 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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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7화

“지금 너한테 제일 중요한 건 너랑 예린이를 잘 챙기는 거야. 더는 그런 일들에 휘말리지 마.”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발치에 놓인 선물 상자를 바라보자 마음이 복잡해졌다.주민혁이 지금 무슨 생각으로 뭘 하고 있는 건지, 왜 모든 위험을 혼자 감당하려 드는 건지, 그리고 그들 사이의 오해가 과연 언젠가 풀릴 날이 올지...그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다음 날 아침, 최수빈은 평소처럼 정시에 항공우주 연구원에 도착했다.그녀가 사무실에 막 들어서자마자 비서 임우영이 다급하게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플라잉 테크에서 주선웅 씨라는 분이 오셨어요. 지금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협력 자원 관련해서 직접 뵙고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하시네요.”최수빈은 마우스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주선웅 씨요? 본인이 직접 왔다고요? 분명히 비서끼리 조율하라 했을 텐데?”“이건 중요한 문제라 꼭 직접 만나서 얘기해야 한대요. 그리고 상공 협회 회장님이랑 조율해야 하는 자원 문제도 있어서 수빈 씨가 나서야 편하다고 하셨어요.”임우영은 그녀에게 서류를 건넸다.“이게 그쪽에서 가져온 협업 제안서입니다. 먼저 한번 보세요.”최수빈은 서류를 받아 몇 장을 빠르게 넘겼다.확인해보니 실제로 핵심 부품 몇 가지가 언급되어 있었고 그 공급은 항공우주 상공 협회 차원에서 조율이 필요한 내용이었다.그리고 그 항공우주 상공 협회의 회장은 다름 아닌 주민혁이었다.순간, 그녀는 모든 걸 깨달았다. 주선웅은 일부러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였다.그녀가 주민혁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걸 뻔히 알면서 상공 협회 자원을 핑계 삼아 그녀가 직접 마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알겠습니다. 지금 가볼게요.”최수빈은 문서를 내려놓고 옷깃을 정리하며 깊게 숨을 들이쉰 뒤 회의실로 향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도망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란 걸.마주해야 할 문제는 결국 정면으로 부딪는 수밖에 없었다.회의실 문을 열고 보니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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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8화

말을 마친 최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들고는 그대로 회의실을 나왔다.문이 닫히자 주선웅의 날 선 시선은 문 너머로 차단되었고 최수빈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하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복도 끝에 서 있던 진호성과 마주쳤다.그는 손에 오래된 법랑 컵을 들고 있었는데 컵 가장자리에는 말린 찻잎이 붙어 있었다.최수빈을 본 그가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수빈 씨, 내 방에서 잠깐 차나 한잔하지 않을래?”최수빈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곧 조용히 따라 들어갔다.진호성은 따뜻한 물을 그녀의 앞에 따라주고 나서야 천천히 말을 꺼냈다.“복도에서 소리가 좀 들리던데... 주선웅 씨가 혹시 무례하게 굴진 않았지?”최수빈은 고개를 저으며 말없이 컵을 감싸 쥔 손에 힘을 줬다.그녀는 알았다. 진호성이 물어보려는 건 따로 있다는 걸.서울의 과학기술계에서 그녀와 주민혁의 관계는 비밀이 아니었기에 진호성이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역시나, 진호성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수빈 씨랑 주민혁 씨의 얘기, 나도 조금은 들었어. 그런데... 두 사람 이혼한 거, 정말 감정이 다 식어서 그런 거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야?”최수빈은 시선을 떨어뜨린 채 잔 속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만 멍하니 바라봤다. 입을 다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수많은 오해들과 뒤엉킨 감정들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아, 오해하지 마. 사생활을 캐려는 게 아니라, 그냥...”진호성이 재빨리 덧붙였다. 조심스러운 말투에는 아쉬움이 짙게 남아 있었다.“주민혁 씨 말인데, 예전에 업계 회의에서 몇 번 본 적 있어. 항공우주계에서 아주 유망한 인재였지. 구교진 원사 밑에서 연구하던 시절에는 정말 앞길이 창창했는데, 안타깝더군.”그 이름을 듣는 순간, 최수빈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구교진 원사님이요?”“그래. 초기 위성 개발에 참여했던 구교진 원사 말이야. 나라에서 훈장까지 받은 분이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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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9화

원장실에서 나온 뒤에도 최수빈의 가슴속은 여전히 조여드는 듯 답답했다. 진호성이 해준 말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구교진의 사고, 강제로 맺어진 결혼, 그리고 주민혁이 포기했던 연구자의 길...그 조각 같은 이야기들이 하나둘 맞춰지면서 그녀가 알지 못했던 주민혁의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났다.그가 주예린에게 늘 무심해 보였던 이유도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결혼 초 그녀가 한밤중에 열이 나 아플 때, 다음 날 아침이면 침대 머리맡에 늘 해열제와 따뜻한 물이 놓여 있었다.이에 대해 물어보면 주민혁은 항상 ‘도우미 아주머니가 준비한 거야’라고만 했었다.주예린이 태어난 뒤에도 그는 아이를 거의 안아보지 않았지만 어느새 집 안의 가구 모서리마다 부드러운 보호캡이 씌워져 있었다.‘갑자기 냉담해졌다고 느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구나...’최수빈은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그 사람이 변했던 시점에 내가 모르는 일이 또 어떤 게 있을까?’최수빈은 휴대폰을 꽉 쥐었다.이제야 알 것 같았다.주민혁이 일부러 차갑게 군 건 그녀가 자신을 완전히 놓게 만들기 위해서였고 또 결국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런 방식은 도리어 최수빈의 마음을 끝없이 흔들어 놓았고 가슴이 먹먹할 만큼 아프게 만들었다.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유도 모른 채 밀려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차가워졌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마음은 그보다 훨씬 더 쓰라렸다.사무실 문 앞에 멈춰선 최수빈은 휴대폰을 꺼내 카톡을 열었다.차단 목록에는 단 한 사람, 주민혁만이 있었다.그 이름을 바라보며 몇 초간 망설이던 최수빈은 결국 그를 차단 해제했다.그러고는 주민혁의 SNS에 들어가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혹시 SNS고 카톡이고... 전부 다 나를 차단했을까?’이윽고 최수빈은 SNS를 나와 카톡 송금 창을 눌러보았다.친구가 아니라면 송금이 불가능한데 제한 메시지가 뜨지 않았다. 그 순간, 최수빈의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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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0화

그는 문득 최수빈이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던 강지안의 말이 떠올랐다.사실 주민혁은 처음부터 일부러 번호를 바꾸고 SNS를 비공개로 전환한 것이었다. 그녀가 더는 기대하지 않도록, 완전히 마음을 접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하지만 어떤 때는 그런 의지도 무너졌다.최수빈을 보면 자꾸만 시선이 가고 자꾸만 안고 싶어지는 마음이 올라왔다.그런 마음은 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일렁였고 그럴 때마다 주민혁은 꾹꾹 눌러야만 했다.“형 쪽 계속 감시해. 수빈이한테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주민혁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려운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그리고... 그 교통사고에 대해서 뭐 좀 나왔어?”사고 얘기가 나오자 려운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네, 확인했습니다. 그때 대표님 차량을 들이받은 건 도용된 차량이었고 차량 등록 정보도 전부 조작된 거였어요. 운전자는 외국인이었고 사건 당일 바로 출국해서 지금은 세르나라는 나라에 머무르고 있습니다.”“세르나?”주민혁이 코웃음을 흘렸다.“참, 이런 우연도 없지.”주선웅은 과거 유학도 세르나에서 했고 그곳에서만 5년이나 지낸 데다 인맥도 상당했다.“형 지금 세르나에 있거든.”려운이 즉시 눈치를 챘다.“대표님, 혹시... 이거 주선웅 씨랑 관련 있는 일입니까?”“혹시가 아니라 확실히 관련 있어.”주민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 인간은 줄곧 주상 그룹을 차지하려고 안달이었어. 전에 수빈이의 곁을 맴돌았던 것도 날 견제하려는 수작이었고. 이번에는 아예 사고로 나를 정리해버리고 주상 그룹과 상공 협회를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이었던 거야.”려운의 얼굴에는 경계심이 더 짙어졌다.“그럼 경찰에 신고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면...”“필요 없어.”주민혁이 그의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안에 담긴 살기는 분명했다.“지금은 명확한 증거가 없잖아. 신고해봤자 소용없어. 그리고 난 이참에 두고 볼 생각이야. 그 인간이 다음에는 어떤 수를 꺼내 들지.”그는 말을 멈추고 시선을 다시 협력 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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