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851 - Chapter 860

1010 Chapters

제851화

주민혁은 주기훈이 올 거라는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다만 문을 열고 들어와서조차 단 한마디의 안부도 없이, 곧장 주선웅을 대신해 따져 들 줄은 몰랐다.“아버지는 참 직설적이시네요.”주민혁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분명한 거리감이 느껴졌다.“들어오시자마자 제 상태가 어떤지, 사고가 어떻게 난 건지는 묻지도 않으시고 바로 형 몫부터 챙기시네요. 참 공평하신 분이에요.”주기훈의 얼굴이 굳어졌다.“나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온 거야. 네 몸 상태는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네 형이 추진하는 사업이 시 전체 경제 지표와도 연결돼 있다. 넌 인맥도 넓은데 좀 도와서 조율해 주면 어디가 덧나? 가족끼리 꼭 그렇게 선을 긋고 가야겠어?”“가족이요?”주민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눈빛은 순식간에 식어 있었다.“예전에 주상 그룹 핵심 사업을 전부 형에게 넘기실 때는, 왜 그때는 가족이라는 말을 안 하셨습니까? 외부 사람들과 손잡고 제 권한을 모조리 빼앗아 갈 때도, 그때는 왜 가족이 아니었죠? 아무리 제가 형 대신 회사를 운영해왔다고 해도, 지금 제가 쥐고 있는 자금이든 인맥이든 전부 형 것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능력이 있으면 본인이 직접 와서 가져가라고 하시죠.”주기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자 주민혁은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저도 아버지처럼 체면을 중요시합시다. 그래서 일은 늘 원칙대로 하죠. 자원이 필요하면 스스로 협상하든지, 행정 쪽으로 정식 절차를 밟든지 해야지 왜 제게 손을 벌립니까? 게다가 지금 아버지는 서울시의 거물이시잖아요. 인맥도 권한도 저보다 훨씬 넓은 분이시잖아요. 형이 그렇게 안쓰러우면 직접 도와주시면 될 일입니다. 왜 굳이 저를 압박하시죠?”주기훈은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때문에 예전 주씨 가문과 회사가 가장 힘들었을 때조차, 그는 한 번도 앞장서 돕지 않았다.그 모든 시간은 전부 주민혁이 이를 악물고 버텨낸 것이었다.“너...!”주기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주민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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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2화

지금의 그는 정말이지 입맛이 없었다....퇴원하는 날.차에 다가선 주민혁의 시야에 조금 떨어진 화단 옆에 서 있는 진서령의 모습이 들어왔다.손에는 정성스럽게 포장된 보온 도시락통 가방이 들려 있었는데 주민혁을 바라보는 표정이 꽤나 복잡해 보였다.“여긴 왜 왔어요?”진서령은 급히 다가와 보온 도시락통 가방을 내밀었다. 그리고 애써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퇴원한다길래, 몸보신 좀 하라고 국 끓여 왔어. 다쳤는데 곁에서 제대로 챙겨주는 사람도 없고... 엄마가 다시 알아봐 줄까? 성격 온순하고 살뜰한 사람으로. 이번에는 잘 지낼 수 있게 말이야.”“저더러 재혼하라는 거예요?”주민혁의 눈빛에는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 목소리 역시 감정이라곤 빠진 채 비웃음만 얹혀 있었다.“예전에 저한테 수빈이랑 결혼하라고 밀어붙였던 결과, 벌써 잊으셨어요? 그 길을 또 가보라는 겁니까?”진서령의 손이 순간 굳으며 보온 도시락통 가방이 떨어질 뻔했다. 표정도 단번에 굳어졌다.“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네가 수빈이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버티다 쫓아낸 거지, 그게 왜 내 탓이니? 이제 혼자 남았다고 다른 사람 탓까지 할 생각이야?”“제가 수빈이를 안 사랑했다고요?”주민혁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엄마, 솔직하게 말해 보세요. 엄마랑 아버지 두 분 다 진심으로 수빈이를 며느리로 받아들인 적 있으세요? 출신이 평범하다고, 주씨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셨잖아요. 박하린만이 이상적인 며느리라고 여기셨고 엄마가 지킨 건 늘 체면뿐이었어요. 제 의사는 한 번도 묻지 않으셨고 수빈이가 얼마나 애써 이 집에 스며들려 했는지도 보지 않으셨죠.”진서령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사실이었다. 그녀가 최수빈을 진정으로 인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집 세고 아부할 줄 모르고 박하린처럼 말 잘하고 분위기 맞출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도, 결국은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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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3화

검은 세단이 천천히 주씨 가문 저택 단지 안으로 들어와 한 단독 별장 앞에 멈춰 섰다.이곳은 주민혁과 최수빈이 함께 살던 신혼집으로 두 사람이 이혼한 뒤로는 주민혁이 줄곧 혼자 머물러 온 곳이기도 했다.려운이 안전벨트를 풀어 주며 내려오라고 손을 뻗자 주민혁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그는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벽에는 최수빈과 주민혁, 두 사람의 웨딩 사진이 걸려 있었다.사진 속 최수빈은 눈이 초승달 모양이 될 만큼 환하게 웃으며 그의 곁에 기대어 있었다. 눈빛에는 믿음과 의지가 가득했다.소파 위에는 주예린이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봉제 토끼 인형이 놓여 있었는데 귀 끝이 닳아 있었지만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이 넓은 집 안에 울리는 소리는 주민혁의 발소리뿐이라 유난히 고요했다.그는 소파에 앉아 웨딩 사진 속 최수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무의식중에 소파 팔걸이를 손끝으로 문질렀다.“아직도 보고 있어?”문 쪽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와 주민혁은 생각을 멈췄다.고개를 들어보니 약 봉투를 든 강지안이 들어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표정은 단호했다.“왔어?”주민혁은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강지안은 테이블 앞에 서서 약 봉투를 내려놓고 안에서 약과 미지근한 물을 꺼냈다.“회복 단계에서 먹어야 할 약이야. 하루에 세 번, 식후에. 절대 잊지 마.”주민혁은 약을 받아 포장을 뜯고 손바닥에 알약을 덜어 물과 함께 삼켰다.“알겠어. 고마워.”강지안은 주민혁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늘 이렇듯 자신의 몸을 너무 가볍게 여겼다.“주민혁, 너 지금 상태 정말 위험해. 심리 평가 결과도 그렇고 불안 증세랑 우울 경향이 이전보다 훨씬 심해졌어. 교통사고 후유증도 아직 남아 있는데 계속 이렇게 버티기만 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무너져.”주민혁은 소파에 기대 눈을 감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강지안의 말이 틀린 게 아니라는 건 그 역시 알고 있었으나 멈출 수 없었다.주선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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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4화

주민혁은 테이블 위에 놓인 약 봉투를 바라보다가 다시 벽에 걸린 웨딩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가슴 한쪽이 무언가에 꽉 붙잡힌 것처럼 조여 왔다. 아프고 텅 빈 느낌이었다.하지만 사람은 대부분의 순간에 선택권 같은 걸 갖지 못한다....해온시 항공우주 연구원 회의실, 최수빈은 기술팀을 이끌고 프로젝트 데이터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수치를 훑어보며 말했다.“현재 센서 정밀도가 기준에 못 미칩니다. 상공 협회에서 공급업체 쪽을 조율해서 최신 적외선 모듈을 우선 배정받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다음 달 현장 테스트에 차질이 생깁니다.”아래쪽에 앉아 있던 임우영이 곧바로 손을 들었다.“어제 상공 협회 담당자분이랑 연락해 봤는데 자원이 부족해서 순번을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최수빈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제가 직접 상공 협회 쪽이랑 얘기할게요.”연락처에서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며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빠르게 계산하고 있었다.그런데 통화가 연결되자 순간 그녀의 심장을 멎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늘 그렇듯 낮고, 차분하고, 서늘한 주민혁의 목소리였다.최수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표정도 미세하게 굳어졌다.그러나 애써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마음을 다잡았다.“해온시 항공우주 연구원의 최수빈입니다. 무인기 프로젝트 자원 배분 문제로 상공 협회 쪽과 조율이 필요해서...”“알고 있습니다.”주민혁이 감정이 실리지 않은 담담한 말투로 말을 끊었다.“구체적인 요구 사항은 이미 려 비서에게 정리시켜 두었습니다. 오후에 제가 직접 갈 테니 만나서 이야기하죠.”“직접 오신다고요?”최수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번거롭게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고 담당자분이...”“번거롭지 않습니다.”주민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수빈 씨의 일은 번거로운 적이 없었어요.”그 말과 함께 통화는 그대로 끊겼다.최수빈은 통화가 종료된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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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5화

일 이야기를 할 때면 그녀의 눈빛은 유난히 집중돼 있었고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그 안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어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호감이 생겼다.사무실로 돌아오자 최수빈은 프로젝트 자료를 육강민에게 건넸다.“우선 지금까지 진행 상황부터 살펴보세요. 소프트웨어 알고리즘 쪽을 중점적으로 보고 오후에 최적화 방향을 논의하죠.”“알겠습니다.”육강민은 자료를 받아 들었지만 바로 넘기지는 않고 책상에 기대 선 채 웃으며 말했다.“수빈 씨, 오전 내내 바쁘셨잖아요. 오늘 저녁에 같이 밥 한번 드시죠? 해온시는 처음이시라면서요. 맛집은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최수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오늘은 어려워요. 딸을 데리러 가야 해서요. 다음에 하죠.”“딸이요?”순간 육강민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굳으며 놀란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수빈 씨, 아이가 있으세요?”이렇게 젊은데 이미 아이가 있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최수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초등학교 1학년이에요. 이번에 해온시로 전학 왔어요.”잠깐 놀라긴 했지만 육강민은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그럼 더 같이 식사해야죠! 아이도 데리고 해온시 놀이공원에 가면 좋잖아요. 막 이사 오셨으니까 주변 환경도 아직 익숙하지 않으실 테고요.”최수빈은 그를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러자 육강민이 서둘러 덧붙였다.“오해 마세요. 그냥 새로운 동료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그러는 김에 아이도 잠깐 봐주면 수빈 씨도 좀 편해지실 테고요.”그의 말을 들으며 최수빈은 잠시 망설였다.해온시에 온 뒤로 아직 마땅한 지인도 없었고 주예린 역시 계속 또래 친구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던 참이었다.“그럼... 알겠습니다.”결국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오후 다섯 시에 아이 데리러 가니까 여섯 시에 학교 근처 식당에서 만날까요?”“그러죠.”육강민이 환하게 웃었다.“다섯 시 반쯤 가서 기다릴게요. 아이 선물도 하나 준비하고요.”오후 업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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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6화

특히나 육강민이 주예린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주민혁의 눈빛에는 살을 에는 듯한 서늘함이 스쳤다.최수빈은 걸음을 멈추며 손에 들고 있던 가방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설마 여기서 그를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분명 오늘 오후에는 항공우주 연구원 일정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사실 주민혁 역시 예상치 못한 장면을 마주하게 된 참이었다.상공 협회 일정을 예상보다 빨리 마친 그는 최수빈을 조금이라도 일찍 보기 위해 항공우주 연구원으로 향했다.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 이미 최수빈은 퇴근해서 딸을 데리러 간 뒤였다.그러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주민혁은 무작정 내비게이션을 따라 최수빈이 자주 간다는 식당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마주한 광경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최수빈은 어떤 남자와 다정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또한 그 남자는 주예린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누가 봐도 단란한 한 가족처럼 보이는 모습에 주민혁의 가슴 한쪽은 먹먹해졌다.“엄마, 왜 그래요?”주예린이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이 역시 시선을 돌려 주민혁을 발견했다.“아빠...”아이는 육강민의 손을 뿌리치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말없이 옆에 서 있기만 했다.육강민 역시 시선을 돌려 주민혁을 바라보았다.‘아빠... 확실히 닮았네. 특히 눈매가.’마음이 복잡하게 뒤엉켰으나 최수빈은 애써 감정을 다잡고 주민혁의 앞으로 걸어갔다.“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 오후에 항공우주 연구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주민혁의 목소리는 담담한 것이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일이 일찍 끝났어. 너랑 예린이 좀 보고 싶어서 왔고.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야?”그러자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육강민이 먼저 손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안녕하세요. 저는 육강민이라고 합니다. 수빈 씨와 같은 팀에서 일하는 동료이자 친구입니다.”주민혁은 언제나 외부인 앞에서는 깔끔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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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7화

주민혁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한 채 최수빈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침착하려 애쓰며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랑 육강민 씨, 이제 막 알게 된 사이예요. 프로젝트 때문에 같이 일하다가 가끔 밥 먹고 얘기 나눈 게 전부고... 잘해준다고 말할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오해는 하지 마요.”주민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주예린을 바라보더니 손끝으로 아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목소리도 조금 전보다 한결 온화해져 있었다.“다른 뜻은 없어. 그냥 너도 이제는 진심으로 널 아껴주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서. 이전처럼 상처받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해.”그 말에 최수빈의 가슴이 묘하게 저려 왔다.그래서 주민혁의 시선을 피해 일부러 식당 안 반짝이는 조명을 바라보며 말했다.“내 일이니까 알아서 잘할게요.”주민혁은 더 묻지 않고 손목시계를 흘끔 본 뒤, 담담히 입을 열었다.“이제 들어가. 육강민 씨 더 기다리게 하지 말고. 식사 끝나면, 차 안에서 잠깐 얘기하자. 일 얘기야. 네 시간 많이 뺏지는 않을게.”강요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거절의 여지를 두지 않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그 말을 끝으로 주민혁은 돌아서서 몇 걸음 떨어진 검은색 승용차 쪽으로 걸어갔다.트렌치코트 자락이 저녁 바람에 살짝 날렸다. 등 뒤로 드리운 그의 그림자는 어쩐지 유난히 외로워 보였다.주민혁의 뒷모습이 차 문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최수빈은 주예린의 손을 잡고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육강민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고 앞에 놓인 스테이크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두 사람이 돌아오는 걸 본 그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우리 꼬마 아가씨, 돌아왔네? 아까 그분이 아빠지?”주예린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린이용 의자에 올라탔다.“네! 아빠가 아까 아이스크림도 사줬어요!”최수빈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칼과 포크를 들었지만 도무지 입맛이 없었기에 형식적으로 스테이크를 한 조각만 잘라내었다.그리고 육강민은 그녀의 속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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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8화

하지만 지금의 그들은 이혼한 상태였고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오해들이 두 사람 사이에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간단한 안부 한마디조차 조심스러워졌다.“예린이... 잠들었어?”주민혁이 다가오며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품에 안긴 아이를 깨울까 봐서였다.최수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주예린을 안은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차에서 기다리지 않고 왜 나왔어요?”“아이를 안고 있어서 문 열기 불편할까 봐.”주민혁은 그녀의 가방을 들어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가방 끈에 손이 닿기도 전에 최수빈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가 이내 천천히 내려왔다.“공적인 얘기는 내일 항공우주 연구원에서 하는 게 어때? 오늘은 많이 피곤해 보여.”주민혁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기에 최수빈은 잠시 멍해졌다.피로가 짙게 깔린 주민혁의 눈가와 아직 회복되지 않은 그의 몸 상태가 떠오르자 마음도 조금 누그러졌다.“괜찮아요. 올라가서 얘기해요. 금방 끝날 거니까.”주민혁은 더 말리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라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계단을 오르자 발걸음에 반응한 센서 등이 켜지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밝게 비췄다.집 문을 열고 들어간 최수빈은 주예린을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작은 이불을 덮어준 뒤 살금살금 문을 닫았다. 그리고 거실 한가운데 서 있는 주민혁을 향해 돌아섰다.창밖의 어둠이 실내로 스며들어 그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너무도 익숙한 윤곽이었다.그 순간 최수빈은 문득 어쩌면 그들의 이야기가 애초에 완전히 끝난 적이 없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녀가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하며 물 한 컵을 따라 건네자 주민혁은 고개를 끄덕인 뒤, 소파에 앉았다.여전히 단정하고 절제된 분위기였지만 눈에 띄게 수척해진 탓에 예전보다 냉랭한 분위기가 옅어져 있었다.최수빈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이 순간만큼은 공적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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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9화

최수빈은 잠시 멍해졌다. 그가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의 눈 밑가에 짙게 밴 피로와 조심스러운 기색을 보자 막 올라왔던 거절의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다시 삼켜졌다.“알겠어요. 담요 하나 가져올게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담요를 찾다가서야 자신이 방금 무슨 선택을 했는지 뒤늦게 실감했다.이혼한 지 오래된 전남편을 집에, 그것도 하룻밤 묵게 한 것이다.하지만 창백한 얼굴과 피곤해 보이던 모습이 떠오르자 한밤중에 그를 다시 호텔로 돌려보낼 마음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괜찮아, 외투가 두껍거든.”주민혁은 그녀가 담요를 안고 나오자 급히 일어나며 손사래를 쳤다.“소파도 넓으니까 그냥 하룻밤 대충 자면 돼.”“그래도 받아요. 밤에는 쌀쌀하니까.”최수빈은 담요를 그의 손에 쥐여주며 덧붙였다.“막 퇴원했는데 괜히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죠. 아니면... 침실에서 잘래요? 내가 예린이랑 잘게요.”주민혁은 연달아 고개를 젓더니 담요를 받아 소파 위에 펼쳤다.“아니야. 소파면 충분해. 예린이는 늘 그 방에서 자잖아. 갑자기 자리를 바꾸면 깰 거야.”그는 침실에 있는 주예린을 깨울까 봐 매번 조심스레 움직이며 소파에 몸을 눕혔다. 그러고는 담요를 끌어당겨 덮은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들어가서 자. 내일 아침에 예린이 학교도 보내야 하잖아.”소파에 몸을 웅크린 그의 모습을 바라보자 최수빈은 가슴이 막힌 듯 답답해졌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로 돌아갔다.그러나 침대에 누운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귀는 자꾸 거실 쪽을 향했고 그가 불편하게 자고 있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다가 조금 전의 온화한 말투가 떠오르기도 하며 생각이 뒤엉켰다.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최수빈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방문을 살짝 열었다. 담요를 제대로 덮고 있는지 확인해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그런데 거실이 아닌 베란다 쪽에 불이 켜져 있었다.주민혁은 그곳에 서서 등을 돌린 채 어두운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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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0화

주민혁의 몸이 다시 한번 굳으며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입을 열고 싶었다. 그동안 삼켜온 억울함도 자신을 둘러싼 위험도 전부 털어놓고 싶었으나 그 말들은 끝내 목구멍에서 멈췄다.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최수빈을 다시 공포 속으로 밀어 넣게 될까 봐, 자신 때문에 지금의 평온한 삶마저 무너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베란다에 선 두 사람은 나란히 어두운 밤을 바라보고 있었다.공기 속에 남아 있던 어색함도 침묵 속에서 서서히 옅어져갔다. 주민혁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최수빈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작게 웃으며 말했다.“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 나한테 조금만 가까워져도 그렇게 경계했는데.”최수빈은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더니 손끝을 가볍게 말아쥐었다. 그러고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지나간 일은 지나간 거예요. 사람은 변하고요.”순간 분위기가 조용해지며 멀리 지나가는 차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주민혁은 말없이 서 있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그리고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그 말을 마침내 꺼냈다.“미안해.”아주 가벼운 말이었지만 그 세 글자는 돌처럼 최수빈의 가슴을 내려쳤다.“그때 너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어서 미안해.”눈빛이 짙어진 채 주민혁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알아. 일부러 거리를 두고 상처 주는 게 그 어떤 말다툼보다 더 아프다는 거. 네 의견도 묻지 않고 혼자 결정해 버렸어. 널 밀어내면 나를 둘러싼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너랑 예린이에게는 조용하고 깨끗한 세상을 남겨주고 싶었거든. 그런데... 그런 식의 보호가 오히려 널 더 힘들게 했고 예린이는 어릴 때부터 아빠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었지.”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답답해진 가슴을 풀려는 듯 손을 얹었다.“짊어진 게 너무 많아서 너랑 너무 가까워지는 게 가끔은 무서웠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력적인 감정도, 불쑥 찾아올 위험도... 그걸 네가 보게 하고 싶지 않았고 감당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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