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91 - Chapter 100

170 Chapters

제91화

“부인은 남편을 따른다 하지 않습니까? 그가 가지 않는데 제가 혼자 가면 괜히 시비만 부를 뿐입니다.”그녀의 말이 귀에 가시처럼 박히자 이도현은 코웃음을 흘렸다.“네가 그를 따라오게 하고 싶다면 본왕이 허락하지. 다만 잊지 말거라. 네가 본왕에게 맹세했던 그 말, 네 몸은 본왕을 위해 지켜야 한다. 앞으로 다시는 그 자가 네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하거라.”신수빈은 몸을 일으키려다 피부 곳곳에 남은 푸른 멍이 스치며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속으로 이를 갈며 그를 저주했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내가 이렇게 큰 손해를 봤으니 반드시 그에게서 이자를 받아내야지.’“그렇다면 왕야께서는 저에게 응하신 약속을 지키실 수 있습니까?”이도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가 대체 무슨 약속을 했다는 말인가? 기억이 선명치 않았다.“무엇을 약속했다는 건지 말해 보거라.”“왕야께서 저에게 응하셨지요. 제 셋째 오라버니를 천거해 조정에서 나아가게 하겠노라. 이번 강회 치리에도 함께 나서게 하겠다고요.”이도현은 그제야 서재에서 잠깐 언급된 일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정작 그는 뚜렷이 허락한 적도 없는데 이 작은 여인은 마치 이미 약속을 받아낸 듯 태연히 말하고 있었다.신 가의 셋째 도련님을 천거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 그의 생각은 공부에 배속시켜 하천을 다루게 하며 서너 해쯤 수련을 쌓게 하는 것이었으니.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곧바로 강회 치리라니... 이건 곤란한 문제가 될 수 있었다.게다가 태후가 이미 최문호를 추천한 바 있다. 그 인물은 재능을 믿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자라 만약 신 가의 셋째 도련님과 함께 가게 된다면 반드시 충돌이 생길 터였다.이도현은 그를 다른 곳에 배치할 방도를 떠올리며 막 입을 열려던 순간, 시선에 들어온 것은 침상 위에 있는 여인의 몸이었다. 하얀 피부 위에 흩뿌려진 붉은 자국들. 그는 순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방금 전 욕망에 취해 손아귀의 힘을 잊고 그녀의 연약한 살결에 이런 흔적을 남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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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화

신수빈의 귀에는 그 말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이도현의 눈빛은 더욱 매서워졌고 그 안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강압이 번뜩였다.“너는 이제 본왕의 것이다. 네 모든 것이 본왕의 것이니 본왕은 네 배가 저 불경스러운 씨앗으로 점점 불러오는 꼴을 눈뜨고 볼 수 없구나. 지금은 아직 달수가 적으니 없애기도 쉽다. 하나 만약 본왕이 그가 점점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면… 어느 날, 본왕이 직접 그 애의 목숨을 끊을지도 모른다!”신수빈의 눈동자에는 점점 공포가 번져갔다. 이도현은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낳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또 다른 사내의 아이 역시 용납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침상 위의 노리개로, 욕망을 해소하는 장난감으로만 두려는 것. 그 사실에 신수빈은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모욕감과 두려움에 휩싸였다.“왕야, 이러셔서는 안 됩니다!”신수빈은 두 팔로 스스로를 감싸안았다. 본능적으로 뱃속의 아이를 지켜내려는 어머니의 몸짓이었다. 이도현이 그녀에게 다가와 팔을 스치려는 순간, 신수빈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그를 거칠게 밀쳐내고는 침상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이도현은 잠시 멈칫했으나 곧바로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신수빈은 마치 새끼를 지키는 암사자처럼 몸을 웅크리고 손톱을 세워 그의 뺨을 향해 손을 내리쳤다. 짤막하면서도 날카로운 찰싹 소리. 두 사람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도현은 살아오며 수많은 상처를 입었고 수없이 많은 피를 흘려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뺨을 맞아본 적은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고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움켜쥐며 침상 위로 거칠게 눌렀다. 칠흑 같은 눈빛은 전장의 사냥꾼처럼 날카롭고 잔혹했다.“본왕이 너를 아꼈기에 잠시 체면을 세워준 것뿐이다. 감히 본왕 앞에서 총애을 믿고 제멋대로 흥정하려 드는 것이냐?”신수빈은 눈물을 머금은 채 절망적으로 떨렸다. 그 안에는 두려움과 간절한 애원이 뒤섞여 있었다. 목이 조여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그녀는 겨우 손을 뻗어 그가 목을 조른 손을 움켜쥐며 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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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예.”은보의 대답에 신수빈은 멍하니 옷을 걸쳐 입었다. 은보는 옆에서 그녀에게 빗질을 해주고 얼굴을 정갈히 씻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마님, 왕야께서 마차를 준비하셨습니다. 마님을 친히 보내시라 하셨어요.”신수빈은 짧게 응답한 뒤, 후부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자 비로소 지옥에서 빠져나온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어둑한 서재에서의 기다림은, 마치 온몸의 팽팽한 현이 끊어질 듯 조여드는 공포였다. 혹여 이도현이 사람을 시켜 낙태약 한 그릇을 들여오게 하지 않을까... 그 두려움 속에 숨조차 편히 쉴 수 없었다. 이제 왕부를 떠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가슴을 적셨다.창란원에 다다르니 청하는 이미 문 앞에서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신수빈을 보자 하늘에 감사라도 드리듯 다급히 부축하며 안으로 모셨다. 어릴 적부터 곁을 지킨 청하는 신수빈의 창백한 얼굴과 드러난 피로감, 목덜미에 일어난 햇볕 물집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신수빈이 또다시 태후에게 괴롭힘을 당해 돌아온 줄만 알고 감히 시비를 논하지 못한 채 조심스레 연고를 발라주었다.“마님, 앞으로는 입궁해야 할 일이 있다면 되도록 피하세요.”신수빈은 그 말을 듣고 입가에 서늘한 조소를 그렸다.“사람이 도마 위의 고기라면, 칼날과 흥정을 할 자격이 어디 있겠느냐?”청하는 그 깊은 의미를 다 알지 못지만 신수빈의 피곤한 기색이 걱정스러워 그녀를 재우려 했다.씻을 준비를 하던 중, 청하는 신수빈의 몸 곳곳에 남은 멍 자국을 발견했다. 특히 가슴 위에 남은 지배적이고도 거만한 흔적이었다. 그제야 신수빈이 왜 그렇게 지쳐 있고 얼굴빛이 우울한지 알 수 있었다. 청하는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그녀를 재우고 장막을 드리운 뒤 소리 없이 퇴장했다.그날 밤, 신수빈은 도무지 편히 잠들지 못했다. 몇 번이나 악몽에 시달리다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몸을 옆으로 돌린 그녀는 조심스레 뱃속의 아이를 어루만졌다. 더는 잠들 수 없었기에 깊은 어둠 속에서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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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신수빈은 고개를 떨구었다. 전생의 일을 다시 입으로 내뱉는다는 것은 마치 서슬 퍼런 강철 칼날이 뼛속을 긁어내는 듯한 고통이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치맛자락을 적시더니 그녀는 고개를 들어 신현민을 바라보았다.“며칠 전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보니 형수님께서 이번 달에 아이를 낳으시더군요. 여자아이였는데 오라버니께서 그 아이에게 유진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신유진.”신현민의 두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유진이라는 이름은, 지난달 그가 집을 떠나기 전 아내와 은밀히 나눈 이야기였다. 만약 딸이라면 유진, 아들이라면 희진이라 하자고. 아내가 자신의 누이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린 적이 없고, 자신 역시 단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신수빈이 알 수가 없는 이름이라는 뜻이었다.“저는 꿈에서 많은 것을 보았어요. 섣달에는 제가 윤가의 장자를 낳고, 이듬해 정월에는 주서화가 둘째 아들을 낳아요. 그 뒤로 저는 주서화와 내실에서 대립하며 수많은 세월을 드러내고 또 숨겨가며 싸웠지만 결국 윤서원의 눈길 한 번 받지 못했습니다.”신수빈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말의 흐름은 느릿느릿 흘러갔다. 그러나 그 말마다 전생의 상처를 끌어올리며 그녀를 찌르고 있었다.신현민은 들으면 들을수록 경악과 공포에 휩싸였다. 특히 단오에 윤서원이 그들 모자를 잔혹하게 불태워 죽였다고 말했을 때는 숨이 막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물이 얼굴 가득 적셔내려왔지만 신수빈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그 꿈에서 깨어난 이후로 제 눈앞에는 언제나 핏빛 안개가 드리워져 있었어요. 남들은 보지 못했고 제가 의원에게 물어도 진단조차 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그 피안개는 매 순간 저에게 그 뼈를 도려내는 기억들이 실제로 있었음을 일깨웠습니다.”이런 괴이하고 황당한 이야기를 만약 다른 이가 했다면 신현민은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누이의 눈 속에 깊게 고인 슬픔, 그리고 얼굴 가득한 눈물 자국이 이미 그의 마음을 흔들어버렸다.“단지 후야의 죽음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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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신현민의 얼굴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여동생이 방금 한 말들이 모조리 진실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신수빈은 옷깃을 살짝 젖혀 전날 햇볕에 데어 생긴 물집을 오라버니에게 보여주었다.“이것은 제가 어제 궁에 들어가 태후께 감사 인사를 드렸을 때, 태후께서 고의로 저를 곤란하게 하시며 태양 아래 두 시진이나 세워두어 생긴 상처입니다. 저는 태후를 고작 두 번 뵈었을 뿐이라 원한을 살 일도 없었지요. 한데 그녀는 높이 군림한 채 저를 개미처럼 여겼습니다. 한 마디 말이면 이렇게도 쉽게 제게 만 갈래 고통을 안겨줄 수 있지요.”그녀는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물빛처럼 희고 가녀린 팔 위에 붉게 패인 자국이 몇 곳에 선명히 박혀 있었다.“꿈속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깨어난 이후 저는 줄곧 이도현과 거짓된 미소를 주고받으며 그의 손아귀에서 모멸을 당해왔다는 것입니다. 지난 두 달 동안 저는 모진 수모를 견뎠고 어제는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제 뱃속의 아이만은 살려달라, 제발 남겨달라. 그가 갑자기 낙태약을 들이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섭정왕부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마치 한 생애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한 마디면 수많은 생명이 오르내리는데 그 차가운 눈빛에는 제 절망과 애원이 단 한 줄기도 비치지 않았습니다.”신수빈은 오라버니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그녀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증오와 무력감은 멈출 길이 없었다.“큰 오라버니, 저는 다시는 도살대 위의 고깃덩이가 되고 싶지 않아요! 다시는 전생처럼 불꽃에 몸을 한 치 한 치 태워가며 후회와 무력 속에서 죽어가고 싶지 않아요! 다시는 연우가 상처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미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그녀는 마침내 무릎을 꿇고 오라버니 앞에 절망과 광기의 눈빛으로 몸을 던졌다. 눈물에 젖은 눈 속에는 권세에 대한 갈망이 타오르고 있었다.“부디 오라버니, 저를 도와주세요. 간절히, 간절히 부탁드립니다!”신현민은 온몸이 서늘해지고 뼈마디가 시릴 만큼 전율이 일었다. 그는 이런 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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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신수빈이 말을 이어갈 때 눈빛은 단단한 빛으로 타올랐다. 그 불꽃같은 시선은 오히려 그녀 본래의 용모를 잊게 만들 정도였다. 신현민은 순간적으로 눈앞의 누이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신수빈은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속내를 숨김없이 털어놓았다.“연우는 결코 누구의 사생자도, 또 서자의 자식도 되지 않을 거예요. 그는 평양 후부의 정당한 후계자가 될 겁니다. 그 길 위의 모든 장애물, 그것이 윤서원이든 주서화든, 제가 반드시 치워낼 겁니다!”그제야 신현민은 깨달았다. 얼마 전 누이가 왜 양주수마(명왕조 시대의 문학작품)를 사들여 윤서원에게에 보냈는지.“하지만 평양 후부는 그저 수많은 세가 귀족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어찌 황권에 맞설 수 있겠느냐?”“평양 후부의 힘만으로는 당연히 불가능하지요.”신수빈의 음성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평양 후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리고 훗날 제가 도모하는 모든 일도 결코 이도현이 눈치채서는 안 되지요.”“그럼 어떻게 하려는 것이냐?”장사에 관해서라면 세상의 어떤 장터에서도 두렵지 않았던 신현민이었지만 조정의 권모술수와 암투는 그에게 전혀 익숙지 않은 길이었다.신수빈은 눈빛을 어둡게 떨구었다.“꿈속에서 신가를 몰락시킨 건 태후의 뜻이었어요. 그녀가 권좌를 잡고 있는 한 우리 머리 위에 드리운 칼날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태후와 오늘의 황제가 기댄 모든 권력은 바로 이도현의 손에 있어요. 태후와 황제를 끌어내리려면 반드시 이도현의 손에서 권력을 떼어내야 합니다. 몇 해 뒤,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야 비로소 조정을 움켜쥘 있습니다. 그래야만이 태후를 제거수하고 황제를 끌어내릴 수 있어요!”신현민은 들을수록 간담이 서늘해졌다. 누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생사에 관한 말들이었으나 마치 하찮은 일처럼 가볍게 토해지고 있었다. 신수빈은 고개를 돌려 오라버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 담긴 충격과 의구심을 읽은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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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제가 도모하는 바는, 신가가 세상 권력의 꼭대기에 올라 스스로를 보전하고 난세 속에서도 가문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의지해야만 살아남는 그런 피동적인 가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운명을 움켜쥘 수 있는 강한 가문 말입니다.”신현민은 비로소 누이의 뜻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신수빈은 눈빛을 한층 더 깊게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선황에게는 아들들이 많았습니다. 오늘의 천자는 그 많은 황자들 가운데 가장 어린 자를 골랐지요. 그가 황좌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태후 덕이었습니다.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이도현이 바로 그 태후와 손을 잡아 어린 황자를 황위에 앉혔으니 천하를 굳건히 잡은 것이지요. 그러나 선황의 다른 아들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제가 깨어난 뒤, 귀를 기울여 살펴본 바로는 그중에서도 셋째 황자 예왕이야말로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어요.”신현민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누이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경청했다.“예왕이 선황의 여러 황자들 속에서 두드러지지 못한 까닭은 단 하나. 그의 출신 때문입니다. 다른 황자들의 어머니가 모두 세가의 귀한 규수들이었던 데 비해 셋째 황자의 어머니는 선황이 밖에서 총애하던 한 과부 농가 여인이었습니다. 뒤늦게 입궁했으나 선황에게는 오점이 되어 늘 부끄러운 존재로 여겨졌고 예왕 또한 궁중에서 존재감조차 미미했어요. 그 탓에 그는 어려서부터 더욱 겸허하게 자랐습니다. 오늘의 천자가 즉위한 뒤, 두각을 드러냈던 둘째 황자와 다섯째 황자는 이도현의 손에 짓눌리거나 유배되었지만 예왕만은 무사히 살아남아 어진 왕자라는 칭호를 얻었지요.”“네 말은… 신가에서 예왕을 지지하자는 뜻이냐?”“맞습니다. 다만 너무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황권 아래에서 감히 욕심을 드러낸 자를 누가 용납하겠습니까? 암중에 세력을 길러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 순간이 오면 예왕이야말로 천명이 내린 선택을 받은 자가 될 것입니다.”신현민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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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가문의 빛을 숨기면서 위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신가에 손을 대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신현민은 잘 알고 있었다.“너에게는 어떤 묘책이 있느냐?”신수빈은 눈빛을 곧게 세우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이 대주 왕조 안에 신가의 상호가 있는 곳마다 땅을 하나 택해 서원을 세우는 것이지요. 고액을 주고 명망 높은 스승들을 모시고 배움의 뜻이 있는 자라면 출신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숙식까지 제공하는 겁니다. 가난한 집 자식이라도 뜻이 있다면 서원이 그들의 일상까지 책임지는 것이지요. 성과가 보인다면 나아가 무예를 익히는 연무장을 세워 글과 무를 함께 가르치면 됩니다. 출신이 무엇이든 나라와 백성을 향한 마음 하나만 있다면 신가는 기꺼이 주머니를 털어 도와주겠다는 뜻을 내비치면 되지요.”신현민은 누이의 말을 들으며 처음에는 의심에서 시작해 이내 놀라움으로 마침내는 존경으로 얼굴빛이 변해갔다. 그제야 그는 왜 누이가 위의 자들이 감히 함부로 신가를 건드릴 수 없게 만들 수 있다고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단기간에는 이 서원들이 그리 눈에 띄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신가는 더 이상 재물이 나라와 맞먹는 거상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신가라는 이름을 건 서원에서 해마다 문무의 인재들이 배출되어 조정으로 흘러 들어간다면 어느새 온 나라에 신가의 그림자가 스며들게 될 것이다. 세가 귀족들은 족내 학당을 지녔고 가난한 집안도 죽을힘을 다해 한 자식쯤은 글을 배우게 하지만 평민 백성들에게는 애초에 배움의 기회조차 없었다. 하지만 먹고 자는 것도 모두 해결해 주고 글을 읽고 무예까지 배울 수 있는 서원이라면 온 천하를 통틀어도 둘도 없는 곳이 될 터였다.신가의 상호가 대주 왕조 곳곳에 퍼져 있는 이상 이 서원들이 하나 둘 세워진다면 곧 추상같은, 보이지 않는 힘이 한꺼번에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는 신가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다.수만, 수십만 명의 학자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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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화

신수빈은 미소를 머금었다. 신가에 이렇게 원대한 안목을 지닌 이가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안도하게 했다. 만약 전생, 그 비극의 날에 이런 대비가 있었다면… 어쩌면 신가 중 누군가는 그 재앙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리라.그날, 그녀는 천일각에서 신현민과 이야기를 나누다 미시에 이르러서야 자리를 떴다. 오라버니의 배웅을 받으며 앞으로 걸어나가는데 대청 안에서 어린아이가 탁자를 닦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신수빈은 낯익은 얼굴에 잠시 걸음을 멈추어 섰다.“저 아이가 바로 네가 길에서 구해주었던 모자 셋 중의 하나다. 나이는 어리지만 은혜를 아는 녀석이지. 어미는 부엌에서 일하고 아이는 이렇게 앞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있다.”신수빈은 아이의 눈썹과 이마에 더 이상 지난날의 공포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문득 마음이 놓였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아이가 그녀를 발견했다. 그는 두 눈이 환히 빛나며 그대로 달려오더니 신수빈 앞에서 부랴부랴 멈춰 서고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러다 무엇인가 생각난 듯, 옷깃에 두 손을 연거푸 문질러 닦은 뒤 품에서 조심스레 한 조각 옥패를 꺼내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그것은 그리 빛나지 않는, 값도 크게 나가지 않는 옥패였다.“마님, 지난번 제가 거리에서 한 어른께 재주를 보여드렸더니 그분께서 이걸 상으로 주셨습니다. 늘 마님께 드리고 싶었는데 드디어 다시 뵐 수 있게 되었네요.”아이의 하얀 얼굴에는 또렷이 빛나는 눈동자가 박혀 있었다. 그 속에는 사모와 감사가 넘쳐흘렀다. 신수빈은 고개를 숙여 아이의 손 위에 놓인 옥패와, 그것을 정성스레 받쳐 든 손을 바라보았다. 아홉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나이, 부드러워야 할 손바닥에는 이미 얇은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상점주인은 아이가 제멋대로 아씨의 길을 가로막는다 여기고 꾸짖으려 했다. 그러다 대청의 아씨가 오히려 옥패를 받아 들고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네가 재주넘기도 할 줄 안다니 정말 대단하구나.”신수빈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연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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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비단옷을 입은 공자는 가볍게 웃으며 더는 논쟁하지 않고 한마디를 던졌다.“머지않아 조정의 문무백관이 모두 피서산장으로 옮겨갈 것이오. 그곳은 궁궐처럼 층층이 수비가 엄격하지 않아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지.”윤수혁은 두 눈썹을 깊이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는 가득한 반대와 불찬성이 어려 있었다.“내가 그대를 구해낸 건 다시 죽으러 가라는 게 아니었을 텐데.”그러나 공자는 태연히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왜 내가 죽으러 가는 거란 말이오? 준비된 자가 방심한 자를 상대하는 법. 성공하면 내게 이익이고 설사 실패한다 해도 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소.”“이도현은 간단한 인물이 아니네. 그가 그렇게 쉽게 당할 자였다면 지금의 대주 왕조가 있을 수도 없었겠지.”“나는 믿지 않소. 세상에 허점 없는 자가 어디 있겠소?”공자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며 눈동자에는 늑대와 같은 음울한 빛이 스쳤다. 윤수혁은 그저 묵묵히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성정은 누구도 제지할 수 없다는 것을.평야 후부로 돌아왔을 때, 집사 총관이 이미 대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수빈이 마차에서 내리자 그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황급히 다가왔다.“마님, 이제야 돌아오셨군요. 어서 들어가 보셔야 합니다. 큰 마님께서만 벌써 세 번이나 찾으셨습니다.”신수빈은 서씨 부인의 처소로 향하는 길에 총관에게서 그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이방, 삼방이 그녀와 크게 다투고 있다는 것이었다.둘째 마님과 셋째 마님은 창란원에서 신수빈의 수완을 보고 돌아간 후, 서씨 부인의 처소로 몰려가 소란을 피웠다. 지난 십 해 동안 서씨 부인이 장부를 조작해 수많은 은전을 가로챘다며 진상을 밝히지 않으면 장로를 모셔와 공정하게 다시 가산을 나누자고 한 것이었다.이야기를 들은 신수빈은 대략 상황을 짐작했다. 그녀는 갑자기 손을 들어 이마를 짚더니 곁에 있던 청하의 팔을 잡으며 기댔다.“아이고, 이 더위란 참으로 사람을 괴롭히는구나. 나갔다 왔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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