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111 - Chapter 120

168 Chapters

제111화

이도현은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늘 태연히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슬며시 올라가려던 입꼬리를 애써 눌러 내리고, 다시 시선을 주서화에게로 돌렸다.“너도 따라왔느냐?”주서화는 그의 말투 속 불만을 알아차리고는 사소한 투정을 섞어 말했다.“왕숙, 저는 태후께서 내리신 삼품 고명입니다. 당연히 함께 올 수 있지요.”그러나 이도현은 애초에 그녀와 말을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바로 그때, 마차 안에 있던 윤서원은 갑작스러운 소유욕에 사로잡혀 신수빈의 무릎 위에 놓인 손을 억지로 잡아버렸다.그러자 이도현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굳게 다문 턱 선에 울컥 이는 분노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번져갔다.주서화는 그 기세에 질려 황급히 말했다.“왕숙, 저는 이미 태후께 고했습니다.”그녀는 이도현이 자신이 따라온 것을 못마땅해한다고 생각했다.신수빈은 윤서원이 벌이는 짓을 보며 속으로 욕설이 치밀었다. 이도현은 성질이 그리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그를 자극해 화라도 돋운다면 화살이 자신에게로 돌아올지도 모를 일. 게다가 이도현은 연우의 안전을 은근하게 손에 쥐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신수빈은 자신의 아들을 걸고 모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녀는 얼른 손을 빼려 했으나 윤서원의 악력에 쉽게 빼지 못했다.이를 악물고 손목을 있는 힘껏 뿌리치고 나서야 간신히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그녀의 행동에 윤서원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남자로서의 체면이 발밑에 짓밟힌 듯했다.처음에는 신수빈을 바쳐 한 자리라도 얻겠다는 속물스러운 마음이었으나 결과는 부인도 잃고 기회도 잃은 채 무시만 당하는 신세가 되버리고 말았다.그에 반해 이도현의 얼굴에서 맴돌던 분노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신수빈의 명백한 거절이 그의 기분을 만족스럽게 어루만진 것이다.주서화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희미하게 웃음까지 더해졌다.“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태후 곁에서 잘 도와드리거라. 곧 본왕이 내관에게 말해두마. 평양 후부는 춘진각에 머물도록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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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너희가 이런 사치스러운 전각을 본 적 없다 해도 이상할 건 없지. 여기에는 태후와 왕숙께서 머무는 전각도 있는데 모두 목재로 지어진 곳이다. 게다가 촉의 목재까지 사용했으니까. 그 나무 하나를 운반해 오는 데만 해도 얼마나 큰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니 조심들 하거라. 부딪히거나 상처라도 낸다면 나는 너희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금자와 은보는 듣다 못해 표정이 굳어버렸다.그들은 신수빈의 짐 상자를 하나씩을 들고 동쪽 익실로 걸음을 옮겼다.주서화는 그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수빈 곁의 두 시녀가 그저 덩치가 좋은 아이들이라 생각했는데 이토록 큰 힘을 가졌을 줄이야.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주서화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의 끝없는 재잘거림을 듣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자, 동쪽 익실로 들어온 금자와 은보는 나란히 눈을 굴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하지만 금자는 성질이 급해 그 자리에서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내뱉었다.“행궁이 뭐 대수라고. 우리가 남쪽을 함락했을 때, 그쪽 궁성의 조각과 단청은 여기보다 몇 배는 더 훌륭했는데. 유난 떨기는…”“금자!”은보가 급히 그녀를 끊었다. 설명을 하려는 찰나, 신수빈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그분께서 이미 말해 주셨다. 너희가 그의 명으로 온 사람이라는걸!”은보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고 금자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그가 말하지 않았어도 나 역시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러자 잠깐의 침묵 끝에 은보가 낮게 물었다.“마님, 저희가… 숨기지 못한 부분이 있었사옵니까?”“군영에서 지낸 사람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몸에 밴 기세가 남지. 네가 온 이튿날부터 바로 드러나던데.”은보의 얼굴에 깊은 자책이 번졌다. 그때 신수빈은 차분히, 그러나 솔직히 털어놓았다.“이번에 너희를 데려온 건, 알려주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을 쓸 때 절대로 믿지 못하는 자를 쓰지 않는다. 너희 두 자매가 한때 왕야를 따랐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너희에게 선택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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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이틀을 쉼 없이 달려온 여정 끝에 행궁의 전각들은 모두 일찍이 등불을 거두고 고요 속에 잠들었다. 저녁이 지난 뒤부터 은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신수빈은 그녀가 어디로 향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 무렵, 은보는 조용히 돌아와 침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마님 곁에 남고 싶사옵니다.”신수빈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정말 생각을 다 한 것이냐? 내 곁의 일들을 누군가에게 흘리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땐 절대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이미 생각을 마쳤사옵니다.”“좋다. 이만 물러가거라.”신수빈은 자신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남의 눈에 비치는 것도, 누군가의 손 안에서 조종당하는 것도 싫었다. 그녀가 하려는 일들은 이도현조차 알아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으니까.백관들은 하루 동안 거처를 정돈한 후,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다시 조정에 섰다. 이 피서 행궁은 황성 못지않게 크고 복잡했다. 정자와 누각이 굽이지고 인공 산과 숲이 겹겹이 서 있어 강남의 정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백관들이 조회하러 떠난 사이, 태후는 호수 한가운데 작은 섬에서 여름 연회를 열었다. 푸른 연꽃 향기는 물결 따라 퍼지고 섬 위의 수각은 서늘한 바람에 젖었기에 누구라도 오래 머무르고 싶어지는 곳이었다.신수빈은 태후가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모퉁이에서 조용히 앉아 최대한 자신의 존재를 낮추었다. 누가 말을 건넨다고 해도 그저 가벼운 미소로만 응답해 줄 뿐이었다.주서화는 지난번 큰 실수로 태후의 얼굴에 먹칠을 하였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냉대만 받아왔지만 오늘은 온갖 애교와 공손함으로 태후의 비위를 맞추며 마침내 한 줄기 웃음을 얻어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그러나 태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주서화가 그렇게 크게 넘어지게 된 것은 모두 신수빈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 입궁했을 때 경고를 주었건만 신수빈은 그 말을 그냥 흘려들으며 여전히 주서화를 곤란하게 만들었다.태후는 본래도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여자들 사이에서만 생겨나는 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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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아이를 돌보는데 이렇게 마음을 두지 않아서야. 어찌하여 늘 남만 믿으려고 하는 것이냐? 만약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땐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명양 장공주는 태후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그 매서운 봉안을 마주하게 되었다. 눈매는 아름다웠으나 그 깊은 곳은 얼어붙은 칼날처럼 서늘했다. 그 기운에 짓눌린 장공주는 감히 한 마디도 보태지 못했다.그녀는 이미 알아차렸다. 오늘의 일은 단순히 난처함을 조성하거나 장난스러운 꾸짖음을 할 수 없다는 것을.예왕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어, 어릴 적부터 명양 장공주를 어머니처럼 의지했다. 오늘 그녀가 이 자리에 온 것도 예왕이 부탁한 대로 신 씨를 챙기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지금 태후는 누구도 이 일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분명히 선을 긋고 있었다. 명양 장공주는 그제야 여기에 음침한 꿍꿍이가 깔려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태후의 시선이 다시 신수빈에게 닿자 그녀의 목소리는 한결 더 차갑고 서늘해졌다.“어찌 된 것이냐? 네가 감히 애가를 거역하겠다는 것이냐?”신수빈은 단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명양 장공주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으나 그는 태후의 위압을 정면으로 감당하며 앞으로 나아가 조용히 절을 올린 뒤 무릎을 꿇었다.“제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다만 태후께서 아시지 못하는 것이 있어 아뢰옵니다. 저는 연잎과 연꽃에 닿기만 해도 온몸이 심하게 가렵사옵니다. 태후께서 그 꽃을 마음에 두셨다면 섬 밖에서 대기 중인 시녀를 불러 따오게 하겠사옵니다.”태후는 높은 자리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지켜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참으로 귀하구나. 애가도 함부로 부릴 수 없다니. 그리도 과민하다면 비단 손수건을 감고 꺾어오면 될 일이지 않느냐? 마음만 있다면 못 할 것도 없지.”이미 반응이 있다고 밝혔는데도 태후는 굳이 그녀를 몰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물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거역하거나 맞받아치면 기껏해야 벌 받는 선에서만 끝나겠지만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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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신수빈은 얼굴에 겸손하고 공손한 표정을 담으며 몸을 낮추었다. 역시나 흠을 잡을 만한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태후는 비록 속이 들끓고 있었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 화풀이할 명분 또한 없었다.주서화는 몸에 아이가 있어 물에 들어갈 수 없었고, 신수빈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아무리 태후가 강압적인 사람이라 해도 문무백관과 귀한 부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신수빈에게 다시 물에 들어가라 말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마음속의 화를 애써 억누르고는, 무릎 꿇고 있는 신수빈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아이를 가진 지 넉 달이 넘었다라...넉 달 전, 이도현은 조정에 없었다. 그는 남쪽 평란에 나가 있었고 두 달 전에야 돌아왔으니 이 아이는 그의 것이 아닐 터.그런 생각이 들자 태후는 비로소 가슴속의 답답함을 조금 누그러 뜨릴 수 있었다.“일어나거라.”“감사하옵니다, 태후 마마.”신수빈은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태후의 시선은 틈틈이 그녀 쪽으로 떨어졌다.신수빈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태후의 적의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설령 그 이유가 주서화 때문이라 한들, 문무백관이 모두 지켜보는 이 자리에서조차 속 좁은 모습을 드러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하지만 이제 태후는 높은 자리에 있고 자신은 아무런 실권도 없는 몸이다.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그저 최대한 존재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태후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끊임없이 신수빈을 주시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저 자신을 닮았다 여겼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볼수록 눈에 거슬리는 것 같았다.남쪽 여인은 대개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정이 많다 했지만 신수빈처럼 풍채가 우아하고 빛나는 미모를 가진 여인은 강남에서도 보기 드물었다.태후는 알고 있었다. 이도현이 그녀에게 마음을 주게 된 것도 자신과 닮은 얼굴 때문이라는 것을.하지만 신수빈은 너무나도 젊고 아름다웠다. 세월이 오래 흐르면 이도현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져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태후의 생각이 깊어질수록 그 눈빛에는 음침한 살기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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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태후를 흘긋 바라보는 그녀들의 마음속엔 모두 같은 의문이 스쳤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태후가 왜 그토록 이 신 씨에게 큰 적의를 품는지, 그들 역시 속 사정까진 모르기 때문이다.정녕 태후가 서화 군주를 그토록 아끼기에 정실 부인인 신 씨의 존재조차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그들이 언덕 위에 서서 바라보니 호수 한가운데서는 이미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얼굴이 하나같이 백지처럼 질려 버렸다.은보와 금자는 원래 호숫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금위군이 갑자기 호수를 둘러싸자 신수빈이 다칠까 염려되어 재빨리 달려왔다.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급해난 금자는 다급하게 외치며 물었다.“마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저희 마님께선 대체 어디에 계신 것입니까!”그 말에 주서화의 마음속에 기쁨이 번지기 시작했다. “너희 마님은 팔자가 참 사납지. 자객이 사람을 잘못 알아봤다나? 호수에 떨어졌다.”금자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는 곧장 사람들을 헤집고 앞으로 나아가 주저 없이 호수로 뛰어들었다.은보는 활을 겨눈 금위군의 모습을 보자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단숨에 깨달았다. 누군가 물에 빠졌는데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구조가 아니라 금위군이 활을 당겨 물에서 나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라니...!이게 음모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은보는 사람들 틈으로 조용히 숨어들어 슬금슬금 뒤로 빠지더니 순식간에 군중 속에서 사라졌다.한편, 신수빈은 물에 빠지는 순간, 조금 전까지 배를 젓던 그 환관이 손에 단검을 들고 자신을 향해 헤엄쳐 오는 모습을 보았다.연못에서 연꽃을 따라며 억지로 내몰더니, 알고보니 돌아오는 길에 복병을 심어 둔 것이었다.태후는 오늘 어떻게든 그녀의 목숨을 끊어 내야만 했다.아무리 태후가 그녀를 미워한다 한들 백관과 귀부인들이 지켜보는 눈앞에서 직접 손을 쓰지는 않을 터. 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 여자의 질투와 원한에서 비롯된 살의.그녀와 이도현 사이의 일을 태후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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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그들이 호수에서 마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이쪽으로 수색해 올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먼저 마님을 데리고 빠져나가겠습니다.”윤수혁은 옷을 비틀어 물을 짜고는 고개를 돌려 신수빈에게 말했다. 그녀는 얇디얇은 여름 옷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물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원래부터 자태가 요염하고 굴곡이 뚜렷한지라 그 눈길을 끄는 가슴은 도무지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도드라져 보였다. 윤수혁은 급히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신수빈은 지금 쉬어야 할 때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윤수혁의 말에 짧게 응하고는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그의 뒤를 따라갔다.그들이 밀림 속으로 들어서자, 신수빈은 뒤에 바짝 따라붙으며 물었다.“큰 도련님께서는 제가 위험하다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윤수혁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간결하게 말했다.“이곳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우연히 태후 곁의 관사가 금위군과 환관을 시켜 매복 살해를 꾸민다는 걸 들었습니다. 그때 마님의 이름을 언급하는 걸 듣고 미리 연꽃 숲에 숨어 있었지요.”신수빈의 얼굴은 그 순간 새하얗게 질렸다.윤수혁의 짧은 몇 마디 속에서 그녀는 이미 한 번 황천길을 다녀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오싹한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훗날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제가 반드시 온 힘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저한테까지 굳이 예를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윤수혁은 원래의 보폭으로 앞서 나가다가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뒤처지는 것을 듣고는, 자신도 함께 속도를 늦추었다.“이 밀림을 지나고 앞에서 서원 쪽으로 돌아가면 곧 춘진각에 도착합니다.”신수빈은 그가 자신이 머무는 곳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도련님께서는 이 행궁에 대해 아주 잘 아시나 봅니다?”윤수혁은 잠시 침묵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두 번 정도 온 적 있지요.”윤수혁은 백신, 즉 지체는 높으나 벼슬을 얻지 못한 자일 뿐, 관직도 없기에 설령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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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저는 젊었을 적 세상과 운명을 원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 훗날 한 사람을 만났고, 그는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지요. 마음속의 악마를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준 덕분에 다른 시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이제는 그 소년 시절의 일들을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게 되었지요.”신수빈은 그의 눈썹과 눈매 사이에서 번지는 그 온화하고 여유로운 기운을 바라보았다. 여러 강이 모이는 곳인 만천을 품고도 바다처럼 넉넉한 포용이 있는 듯한 모습은 윤서원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만약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도련님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요?”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윤수혁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며 어른거리는 사이, 그는 마치 그녀에게 한 겹 부드럽고 온화한 빛이 씌워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한마디 속에 담긴 인정과 칭찬이 말라 있던 그의 마음에 서서히 따스한 물길을 뿌려주는 것만 같았다.누구나 평양 후부에 쓸모없는 대공자가 하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문무도 제대로 못 하고 출신마저 좋지 않다는 말은 그가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것이었다.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이런 칭찬을 듣게 될 줄이야.윤수혁은 그렇게 멍하니 신수빈을 바라보다가,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자 즉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계를 세워 신수빈을 보호했다. 다가오는 이는 매우 조심스러워 보였다. 금자가 이쪽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따라온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를 본 금자가 조심스럽게 불렀다.“마님이시옵니까?”신수빈은 금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기쁨에 벅차 경계하는 윤수혁을 급히 끌어당겨 물러서게 했다.“제 시녀입니다.”금자는 눈앞의 사람이 정말 신수빈인 것을 확인하자 곧장 달려와 그녀의 다리에 매달리며 엉엉 울었다.“마님, 저는 정말 죽은 줄 알았사옵니다. 호수 바닥에서 한참을 찾아도 마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더군요. 한데 연꽃 숲 쪽에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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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서원은 유난히 넓었기에 끝내 금자가 신수빈을 업고 돌아왔다.그들이 춘진각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해시 말이 되어 있었다. 신수빈은 조용히 동쪽 행랑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금자에게 당부했다.“도련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외간 남자이시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그가 물속에서 나를 구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온갖 험담을 해댈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지금부터 누가 묻는다면 네가 나를 물에서 구했고 밀림에서 길을 잃어 지금에서야 돌아왔다고 말하거라.”금자는 고개를 끄덕였다.“은보는?”신수빈이 묻자 금자는 그제야 동행랑에 그녀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지금쯤 그 아이는 틀림없이 왕야에게 알리러 간 것일 터.“아마 왕야께 알리러 갔을 것이옵니다. 지금쯤이면 호숫가에 있겠지요.”“호숫가에 가서 한마디만 전하거라. 나는 무사하다고. 그리고 태의원으로 가 심신을 안정시키고 원기를 보하는 약 두 첩만 받아오거라.”금자는 신수빈이 혼자 동행랑에 남는 것을 걱정했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금자를 달랬다.“괜찮다. 주서화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가보거라.”금자는 그제야 안심하고 호숫가로 향했다.한편 그 시각, 호숫가에는 수영에 능한 모든 금군이 거의 다 불려 와 있었다. 이도현은 검은 안색으로 호수 한가운데 배 위에 서서 불을 들고 계속 건져 올리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태후는 이미 궁으로 돌아갔고 관원들의 가족들도 모두 흩어졌다.잠시 후, 누군가 와서 아뢰었다.“왕야, 호수에서는 금비녀 한 가닥만 건져 올렸사옵니다. 죽은 환관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사옵니다. 당연히 윤씨 부인께서도 보이지 않았고요.”이도현은 그들이 바친 금비녀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날 밤, 시냇가에서 자신이 뽑아준 바로 그 비녀였다. 이렇게 큰 호수에서 누군가가 한마음으로 그녀의 목숨을 노렸는데 지금 그녀가 있을 곳은 어디란 말인가?“찾거라. 계속 찾아! 본왕은 시신이라도 봐야겠다!”지금의 이도현의 눈빛은 한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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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관사 환관은 머리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윤씨 부인은 죽지 않았사옵니다. 물에 들어간 그 시녀가 구해서 지금 춘진각에 있사옵니다.”태후의 손에 들린 옥빗이 무심결에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며 두 동강이 났다.“그 시녀가 물에 들어갔을 때, 호수 바닥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한데 어째서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냐?”“죽은 것은 자객 환관이랍니다. 이미 섭정왕께서 건져 올려 뼛가루까지 흩뿌리셨사옵니다.”태후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녀는 호수 바닥에 사람을 더 배치해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신수빈 같은 연약한 여자가 물속에서 반항할 힘이 어디 있다고!“그는?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관사 환관은 태후가 묻는 대상이 섭정왕이라는 것을 알고 그대로 아뢰었다.“섭정왕께서는 지금 춘진각에 계시옵니다.”태후는 이 말을 듣자 분노가 극에 달했다. 거울 속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보고는 소매를 휘둘러 화장대 위의 것들을 모조리 쓸어 떨어뜨렸다.그 시각, 이도현이 급히 걸음을 옮겨 춘진각에 도착했을 때, 신수빈은 침상에 기대어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촛불 아래 그녀의 피부는 거의 투명할 만큼 하얬고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과 매끄럽게 이어지는 눈선이 부서질 듯한 비감함을 더욱 더해주고 있었다.이도현은 그녀를 놀라게 할까 두려워 발걸음을 조심스레 낮추었다.신수빈은 들려오는 발소리에 속눈썹을 미세하게 떨며 그대로 눈을 떴다. 이도현을 보자 평소에 봄샘 같은 그 두 눈에 물빛이 일더니 은은한 눈물기가 맺혔다.그의 마음은 그 순간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기쁨인지, 두려움이 가신 후의 허탈인지, 혹은 마음 저미는 아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침상 앞으로 성큼 다가가 위아래로 그녀를 살폈다. 그의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은 단 한 문장으로만 흘러나왔다.“다친 곳은 없느냐?”신수빈은 수영을 잘해 다친 곳은 없고 단지 놀랐을 뿐이라고 금자가 이미 알려줬지만 그는 꼭 그녀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다.신수빈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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