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81 - Chapter 90

170 Chapters

제81화

두 미친 것들이 한 쌍을 이루니 제법 어울렸다. 제발 서로 방생하지 말고 서로 꼭 끌어안고 있길.섭정왕부는 궁궐에서 멀지 않았기에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왕부 앞에 도착했다. 마차는 왕부로 들어와 외서재 앞에 멈춰 섰다.“왕야, 도착했습니다.”마차 밖에서 전해지는 목소리에 이도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신수빈 또한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어둡고 음울한 기운이 맴돌았다. 모친께서 돌아가시기 전 가장 원하셨던 것은 자신이 장은지를 왕비로 맞이하는 일이었다. 그때 그는 다른 뜻이 없었다. 오직 어미의 소망을 이루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러나 장은지는 저만의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녀를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는 풍문이 어디서 흘러나온 것인지 그는 뻔히 알고 있었다. 황권이란 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 걸고 달려드는 것인가!신수빈은 그가 무슨 생각에 잠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찌푸린 미간과 온몸에서 풍기는 분노의 기운을 보자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한참이 흐른 뒤 이도현은 눈을 떴다. 그 눈빛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처럼 어두웠다. 그는 곧 몸을 일으켜 발을 젖히고 마차에서 내렸다.신수빈은 그제야 길게 숨을 고르며 그가 자신을 왕부까지 데려왔으니 더는 마차에 묶어두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내릴 채비를 했다. 고개를 아래로 떨구자 마차의 높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녀는 얼굴에 난처한 웃음을 띠었다. 스스로 내릴 수야 있겠지만 지금은 몸에 아이를 품은 지 넉 달이 넘었고 또 고명복 차림까지 하고 있으니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이도현은 그녀의 곤란한 처지를 눈치챘는지 몸을 돌려 단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올렸다. 신수빈은 그의 팔에 조여진 허리에 놀라 중얼거렸다.“아기, 배가…!”아이를 지키려는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왜소한 그녀의 몸은 그의 거대한 체구 앞에서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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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이도현은 몸을 돌려 침상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신수빈을 바라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빛이 그녀를 내리깔았다. 말 한마디 내뱉지 않았으나 순간 공기마저 얼어붙듯 기압이 낮아졌다. 신수빈은 끝까지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의 눈길에는 단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만약 이 순간 그를 피한다면 정말로 자신은 그가 새장에 가둬 기르는 금사조의 처지가 될 것이다.이도현은 그런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유연히 물처럼 흐를 수도 있고 또 천산만산처럼 굳세게 버틸 수도 있는 여인. 조정의 권신이라도 쉽사리 이런 시선을 맞받아 들이치진 못할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집착하는 윤 가, 그녀 마음속에서 윤서원이 정말로 그만큼 중요하단 말인가? 이도현 가슴속에 알 수 없는 기운이 치밀었다. 그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자세히 살폈다.분명, 태후와 몹시도 닮은 얼굴이었다. 이것은 신혼 첫날밤, 이미 깨달았던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세밀히 들여다보니 그 사이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었다. 이도현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번졌다. 그의 눈가에는 장난기 어린 흥미가 스쳤다.“언젠가, 반드시 네가 스스로 원하여 이곳에 남게 만들 것이다.”신수빈은 눈빛을 반짝이며 밝은 웃음을 터뜨렸다.“왕야, 부디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보시지요.”이도현의 미간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이 작은 여인이 감히 자신을 도발하다니.그는 이내 침상의 바깥쪽에 몸을 던져 눕더니 신수빈을 팔로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눈을 감으며 낮게 명했다.“늦게 돌아가거라. 우선 본왕과 함께 쉬자꾸나.”신수빈은 거스르지 않고 그의 품에 몸을 기대었다. 억지로 반항했다간 정말로 그녀를 이 왕부에 가두어버릴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녀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다. 오전 내내 뜨거운 햇볕에 시달리며 탈진했으니 눈을 감자마자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도현은 여전히 수많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귓가에 고른 숨결이 들려오자 그는 조용히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그의 품에 안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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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한참을 귀 기울이고 나서야 신수빈은 이들이 논하는 바가 하도치수를 맡을 관리를 고르는 일임을 알아차렸다. 순간 그녀는 셋째 오라버니 신도연을 떠올렸다.그는 장사를 탐탁지 않아 했고 어려서부터 산천강천을 유난히도 좋아했다. 심지어 한 번은 세 해 동안 집을 떠나 황하의 근원을 찾아 헤매었고 돌아올 때는 황하가 지나치는 곳마다 물길이 어떻게 흐르는지 그림으로 그려왔다.다만 전생의 그는 끝내 재능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에게 천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비록 산천 지리에 관심과 소양이 남달랐으나 글재주는 평범했으므로 과거 시험으로 벼슬길에 오르기는 매우 힘겨운 일이었다.하지만 만약 그에게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신수빈은 굳게 믿었다. 셋째 오라버니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에서 반드시 크게 뜻을 펼칠 수 있으리라는 것을.그녀가 잠시 넋을 놓은 사이 바깥에서는 이미 논의가 일단락된 듯했다. 곧이어 들려온 것은 이도현의 익숙하고도 차가운 목소리였다.“본왕의 기억에, 이 최문화는 금과 진사였지?”“왕야의 기억이 맞습니다. 일갑 십삼명으로 급제한 젊은 인재입니다. 이 최문화는 하도치수에 대해 나름의 식견이 있사오니 그를 기용한다면 강회 유역을 능히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이도현은 그의 수고와 도면을 펼쳐 보았다. 자신은 하도치수에 문외한이었으나 전쟁에 있어 강과 지세가 미치는 영향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최문화의 수고는 그리 놀라울 만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치수와 전쟁은 본디 다른 이치일지도 모른다. 이도현은 곧 도면을 내려놓았다. 어쨌든 최문화는 적어도 이 분야에서 연구와 고민을 해왔다는 점만은 분명했다.“내일 조정에서 다시 논하도록 하겠다.”그러다 이도현은 최문화가 지금 한림원에 있고 공부에 속하지 않는다 것을 보고는 의아해 물었다.“그런데 그대는 어찌 한림원에 이런 인물이 있었는지 알았는가?”공부 상서는 숨김없이 대답했다.“신도 처음에는 최문화의 장점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오늘 태후께서 불러 말씀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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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이도현은 그녀의 눈가와 미간에 배어드는 풍정을 바라보았다. 그 유연하고도 매혹적인 자태가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억누르던 욕망을 격렬히 일으켜 세웠다. 그는 그녀의 장난스러운 손을 붙잡아 제압하듯 눌렀다. 그의 깊고 짙은 빛으로 일렁이는 눈동자가 그녀를 완전히 뒤덮었다.“‘좌전·소공편’에 이르기를, 무릇 이 세상에 절색이 있으면 충분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 하였지. 네가 지금 이토록 유혹하는 것은 본왕의 심지를 흔들려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는 쉰 듯 낮게 갈라져 있었다.신수빈은 대답하지 않고 두 팔을 들어 그의 어깨 위에 걸쳤다. 그녀는 아름다운 눈매를 부드럽게 치켜 올렸다. 투명한 물빛을 머금은 그 눈동자는 은연중에 뼛속까지 스며드는 요염함을 내뿜고 있었다.“그렇다면, 저는 절색입니까?”이도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옷깃을 휙 젖혀내렸다. 이 순간, 그의 목소리는 낮고 탁했다.“설령 네가 어떤 절색일지라도 본왕에게 무슨 대수겠느냐!”한참 후, 신수빈은 그를 밀쳐내며 은근히 나무라듯이 말했다.“왕야는 제 혼자 즐겁기만 하고 남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으시는군요. 저는 배가 고픕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서 지금까지 물 한 모금 못 삼켰단 말입니다.”마침 그때,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도현은 잠시 흥이 깨졌다. 그 역시 아직 점심을 들지 않았기에 방금 전 이미 부엌에 식사를 준비하라 명해둔 터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단정히 여미고는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배고프면 일어나거라. 부엌에서 다 차려놨다.”“왕야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먹을 것이 있다는 말에 그녀의 얼굴에는 금세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이도현은 그녀가 가슴 끈을 여미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자신은 등을 돌려 뒤편 정실로 들어갔다.신수빈은 그가 다시 나왔을 때, 목덜미에 물기가 어리고 이미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것을 보았다. 아마도 찬물로 얼굴을 식힌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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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신수빈은 손을 들어 그 지도 위를 쓰다듬었다. 정교하게 그려진 모양은 산세의 굴곡까지 붉은 흙으로 입체적으로 빚어 올려져 있었다. 관문과 관문이 서로 호응하며 이어지고 또 적을 깊숙이 유인하는 형세였다. 신수빈은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왕야께서 전장에 나섰을 때, 틀림없이 정확한 전략으로 천리 밖에서도 적들을 제압하셨을 것입니다.”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 이도현은 분별할 줄 알았다. 분명했다. 이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녀가 앞서 수없이 늘어놓던 아부의 말들과는 달리 이 한마디가 그의 가슴을 훨씬 더 시원히 적셔 주었다.“당연하지.”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지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빛을 반짝이는 것을 보자 순간 그의 가슴속에서 만장을 헤아릴 듯한 호기가 치밀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전조보다 훨씬 광활하게 뻗은 국경선을 그려나가며 남성 특유의 장대한 기개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 만리강산을 거머쥘 수 있었겠느냐?”그제야 신수빈은 깨달았다. 왜 황권의 길은 언제나 천만의 백골 위에 세워지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수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몸을 던지는지.이 강역, 바로 그것이 곧 지고한 권세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신수빈은 눈 속 깊은 야심을 거두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투명히 빛나는 눈동자가 그를 우러르며 물었다.“왕야, 제 고향은 어디입니까?”그런 눈길에 이도현은 흡족해하며 한없이 인내하는 듯 그녀를 데리고 다른 지도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손끝으로 한곳을 짚으며 말했다.“여기가 바로 그곳이다.”신수빈은 그 지점을 바라보았다. 비록 이 생애에는 시집온 지 넉 달 남짓 되었을 뿐이지만 그곳은 이미 오래도록 돌아가지 못한 그녀의 고향이었다.그녀는 손가락으로 그곳을 한 치씩 어루만졌다. 부모님께서는 지금 안녕하실까? 지난번 큰 오라비를 뵈었을 때는 시간이 너무 짧아 집안의 소식을 미처 묻지 못했는데 지금은 모두 평안하실까? 출가할 때, 큰 형수는 이미 회임한지 넉 달이 넘은 몸이었다. 이제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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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신수빈은 눈물에 젖은 눈으로 이도현을 올려다보았다.“저는 왕야의 장난감이 아니란 말입니까?”이도현의 얼굴에 금세 노기가 스쳤다.“본왕은 분명 네게 남으라 했다. 그럼에도 네가 굳이 윤 가로 돌아가겠다 한 것 아니더냐!”신수빈은 오히려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물은 그렁그렁 매달려 속눈썹 끝에서 매혹적이게 흔들렸다."잠깐 동안의 장난감이든 아니면 영연한 장난감이든 결국은 같은 것이지요.”이도현의 입술이 단단히 다물어졌다. 그의 각진 턱선에 힘줄이 도드라지며 노기가 점차 뚜렷해졌다. 그가 진노하기 전에, 신수빈은 두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쌌다.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묻으며 흐느낀 듯 나직하게, 그러나 힘겹게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왕야께서 저를 조금은 아껴주시니 곁에 두려 하시는 거겠지요. 하지만 저는 부모와 오라비, 형수를 두고 차마 떠날 수 없습니다. 그분들이 훗날 저를 떠올릴 때, 마음 깊이 자랑스레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다른 이의 입에 오르내리는 첩실이나 침상을 덥히는 노비가 아니라, 당당히 머리 들고 설 수 있는 윤 가의 부인으로요. 왕야께서는 아까 제게 이유를 묻고 제가 말하지 않으면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한데 제가 진실을 고해도 노여워하시니… 참으로 저로서는 난처할 따름입니다.”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서글픈 감정이 그대로 실려있었고 그 곡진한 속삭임에 이도현의 가슴속 분노는 이미 자취도 없이 흩어졌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흐느낌에 떨려오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품에 가두었다.“본왕이 언제 네게 잘못을 물었더냐? 도리어 말로만 본왕을 가로막는구나.”그의 목소리는 이미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품 안에 여전히 고개를 묻은 채 훌쩍이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귀에 낮게 속삭였다.“그만 울어라. 더 울면… 본왕의 방식으로 네 입을 막아버리겠다.”신수빈은 작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툭 쳤으나 이도현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심술 어린 투정이라 여겨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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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신수빈은 그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치자 책상 위의 앵두 한 알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앵두를 입술 사이에 살며시 머금은 채 그의 어깨에 손을 거치고는 반쯤 몸을 기대며 스스로를 내맡겼다. 그 붉디붉은 앵두는 그녀의 치아와 입술 사이에서 희미하게 드러나며 마치 그녀의 홍채 같은 입술빛과 누가 더 곱고 눈부신지 겨루는 듯하였다.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지척. 이도현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더니 그 속에서 위험하고도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몇 번의 호흡이 흐르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뒤로 손을 뻗어 머리채를 단단히 틀어쥐며 입안에 있던 앵두를 앗아 물었다.신수빈은 그를 달래는 방식이 통했음을 알아채자 곧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뒷머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어 도무지 벗어날 수 없었다. 숨이 막히는 찰나, 그의 치아에 으깨진 앵두가 도리어 그녀의 입속으로 밀려왔다.신수빈은 반사적으로 거부했지만 그녀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앵두는 두 사람의 입술과 혀 사이에서 밀고 당겨지는 사이, 즙이 터져 나와 그녀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결국 그녀가 흐느끼듯 항의하자 그제야 이도현은 입술을 거두었다.그녀의 입술은 앵두빛 즙으로 인해 더욱 짙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흡족해하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고 입술 가장자리에 맺힌 즙을 훑어내렸다.“탐욕스러운 계집…”그가 가리키는 탐욕이란, 왕부의 정실 자리를 넘본 그녀의 욕망을 뜻했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이 틈을 파고들었다.“저는 압니다. 왕야께서 저를 아껴주시니 그 은혜를 제 집안에도 나누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딸 된 몸, 곁에서 효를 다하지 못하는 보상이라 여겨주십시오.”이도현은 눈썹을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가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흥, 어떻게 해 주면 좋겠느냐?”신수빈은 곧바로 대답했다.“제가 윤 가에 시집온 후로 늘 웃어른들의 꾸짖음을 들었습니다. 제가 상가 출신이라 하여 집안의 노복들조차 저를 업신여겼지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만약 신 가가 관가의 집안이라면 감히 그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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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신수빈의 말은 이도현의 흥미를 끌었다.그의 마음을 흔든 것은 그녀의 미색이 아니었다. 여인 하나 때문에 조정의 중대사를 좌우할 만큼 그는 가벼운 인물이 아니었다. 그를 멈춰 세운 것은, 바로 그녀가 입에 올린 신씨 셋째 도련님의 필첩과 도면이었다.그는 다시 신수빈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여 눈빛을 거둔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정중했다. 이도현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지켜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대체 어느 모습이 진짜 그녀인가? 침상 위에서 풍정을 흩날리던 모습이? 아니면 기암괴석에서 모욕을 피할 수 없음에도 끝내 흥정을 멈추지 않던 모습이?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처럼 이성적이고 냉철한 모습이?이도현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규칙적이고 느릿한 리듬이 흐른 뒤에야 그는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만약 본왕이 네 청을 들어 준다면 넌 무엇으로 본왕에게 보답하겠느냐?”신수빈은 곧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가 이 일을 허락할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도현은 지금 그녀에게서 무언가 더 취하려는 핑계를 찾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이토록 수치를 무릅썼는데 이제 와 무엇을 더 아낄 수 있단 말인가?신수빈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웃음 속에는 은근한 풍월이 감돌았다.“왕야께서는 조정을 흔드는 권세를 손에 쥐고 계십니다. 왕야께서 원하신다면 얻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에게 남은 것이라곤 이 몸 하나뿐이지요. 왕야께서 원하신다면 언제까지든 다 왕야의 것입니다.”이도현은 잠시 멈칫했다. 그는 세상의 여인들이라면 으레 청순하고 단아함을 앞세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신수빈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단정한 기품을 보이면서도 은밀한 자리에서는 전혀 달랐다.그는 설명할 수 없었다.한편으로는 그녀가 명문 귀녀처럼 절제된 기품을 지니기를 바랐고 또 한편으로는 지금처럼 풍정에 젖은 모습을 끊임없이 탐닉했다. 그리고 마음 깊숙이 깨닫고 있었다. 그는 이 모습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누구도, 어쩌면 그녀의 남편조차도 그녀의 이런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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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그녀가 끝내 자신의 첩이 되길 거부하고 윤서원과의 화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기어이 뱃속의 잡종을 지켜내려고 고집을 부릴 때마다 이도현의 심기는 어김없이 불편해졌다. 그의 말이 칼날처럼 박힌 순간, 신수빈의 심장 속에는 오직 싸늘한 빙설과 꺼져가는 희망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몇 차례 머뭇거린 것을 눈치챘으나 끝내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담담히 읊조렸다.“그만두세요.”그러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만약 본왕이 반드시 이 아이를 없애라 한다면 너는 어찌할 셈이냐?”차마 목구멍을 넘지 못한 이 한 마디는 번번이 이도현에 의해 삼켜지고 있었다는 것을.그때, 바깥에서 집사가 조용히 알현을 청했다. 신수빈은 곧장 몸을 바로 세우며 그의 곁에서 물러섰다. 이도현은 곁눈질로 그녀를 한차례 흘겨본 뒤 집사를 들이라 명했다. 집사는 정성스레 상자를 두 손에 받쳐 들고 와 올렸다.“왕야, 이것이 오늘 찾으라 하신 옥지고입니다. 전조의 궁중 비방으로 그 가운데 두 가지 약재는 이제 거의 사라져 구하기 어렵습니다. 이 약을 조제하는 것 또한 대단히 힘든 일이라 노신이 반나절을 뒤져 겨우 두 상자를 구해 온 것입니다. 마님께서 마음에 드신다면 다시 수소문하여 더 구해 오겠습니다.”“쓸데없는 말이 많구나. 어서 물러가거라.”이도현은 담담히 내뱉었다.집사는 본래 신수빈 앞에서 비위를 맞춰주어 그녀의 환심을 사려 했다. 어차피 왕야의 내실과 서재를 드나드는 여인은 이제껏 윤씨 마님 한명 뿐이었으니.혹여 그녀의 수완이 뛰어나 훗날 왕부에 자리를 잡는다면 그 곁을 미리 공고히 다져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주군의 냉랭한 말에 그는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이도현은 상자를 열어 보았다. 작은 상자 두 개가 나란히 들어 있었고 뚜껑을 열자 안에는 수정처럼 투명한 유백빛 고약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고약에서는 은은한 향이 번졌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고약을 살짝 떠 올리며 그녀가 햇볕에 그을린 자리를 가리켰다.“옷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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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이도현은 소매를 휘둘러 나가려 하다 문턱까지 간 후에야 이곳이 자신의 서재임을 떠올렸다. 그대로 내보내는 건 체면이 서지 않는 듯싶어 문가에 서서 불쾌하게 목소리를 높였다.“평양 후부에서 끌고 온 그 낡은 수레는 어딨느냐? 당장 준비하거라.”집사는 영문을 몰라 멍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눈빛을 주고받던 두 사람의 관계가 어찌 이토록 순식간에 뒤집힐 수 있단 말인가?“왕야, 이미 뒷문에 대기 중입니다.”“데리고 가거라!”이도현은 이 말만 던지고 다시 서재 뒤편의 휴식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넓은 소매 끝이 병풍 모서리에 박힌 보석 장식을 스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병풍이 바닥으로 무너졌다.신수빈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치 성이 나서 털을 곤두세운 강아지 같아 보이는 그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만 지었다. 그녀는 그저 옥지고에 사향이 섞여 있다고 말했을 뿐인데 어찌 이리도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인가?문 앞에서 기다리던 집사는 신수빈이 병풍 앞을 지나며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안으로 사라진 이도현의 뒷모습을 향해 가볍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왕야, 부디 몸조심하십시오.”그러고는 몸을 돌려 집사를 따라가려 했다. 그러나 막 문가에 이르렀을 때 뒤편에서 묵직하면서도 급한 발걸음이 다가왔다. 신수빈이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 허리를 거칠게 휘감은 강철 같은 팔이 그녀를 낚아챘다.힘이 실린 순간, 두 발이 땅을 떠나 그녀는 그대로 그의 품에 휘말려 후실로 끌려 들어갔다. 집사는 비록 오랜 세월 그를 모셨지만 그가 남녀 사이의 일을 이처럼 거칠고 본능적으로 대하는 성정이라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안에서는 옷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신수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이건 고명복이옵니다!”그러나 방 안의 광란은 멈추지 않았다. 집사는 얼굴에 붉은 기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슬그머니 서재 문을 닫아버렸다.이도현은 사실 오늘 그녀가 궁에서 고생한 것을 알았기에 원래는 건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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