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71 - Chapter 80

168 Chapters

제71화

둘째 마님은 분노로 온몸이 들끓어 마치 일곱 구멍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고 눈은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듯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어 치아 틈으로 말을 짜냈다.“천한 것!”그러나 청하는 태연했다. 이제 그녀가 의지할 언덕은 오직 소저뿐. 소저가 이 집안사람들에게 억울한 수모를 당한다면 자신 또한 살아남을 길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둘째 마님께서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노비는 스스로의 신분이 미천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감히 둘째 마님과 견줄 수는 없지요. 마님께서는 명문가의 출신이시고 진가 대인께서는 이품 대원, 진씨 마님께서는 이품의 고명을 받으셨으니 말입니다.”청하가 ‘이품’ 두 글자를 또렷하게 똑 부러지게 발음하는 순간 둘째 마님의 얼굴은 마치 기름불을 뒤집어쓴 듯 화끈 달아올랐다. 그때, 신수빈이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고 청하는 곧장 뒤로 물러서며 고명복을 안쪽으로 감췄다.“방금 숙모님께서 장부에 대해 이의가 있으시다고 하셨지요?”신수빈의 음성은 여전히 물결처럼 부드러웠으나 그 미소는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했다.둘째 마님은 속으로 신수빈을 산 채로 씹어 삼키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제 더는 아까처럼 노골적으로 고함을 지를 수 없었다. 그녀는 목구멍에 걸린 듯 답답했지만 억지로 그 말을 삼켜야 했다.“다 옛 장부들이니 누가 알겠느냐? 네 시어머니가 관리할 적에 손을 썼을 수도 있지.”결국 화살은 서씨 부인을 향했다. 그러나 신수빈은 태연히 웃을 뿐이었다.“숙모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 장부들이 저의 시어머니께서 잘못 챙기신 것인지 아니면 숙모님께서 인정치 않는 것인지는 결국 저의 시어머니와 숙모님만 알겠지요. 저는 이제 막 집안의 살림을 맡았을 뿐이라 이방과 삼방, 그리고 후부 사이의 장부는 장부책을 펼쳐보아야 겨우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전의 일은 저로서는 알 수 없고 두 분께서 직접 저의 시어머니께 여쭈셔야 마땅하겠지요.”셋째 마님은 시세를 꿰뚫어 보는 이었다. 집안에서의 신수빈의 지위가 이미 예전과는 달라졌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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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말을 돌려 하자면 사실상 이미 분가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방과 삼방은 더 이상 후부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셋째 마님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만약 후부를 떠난다면 앞으로 이 경성에서의 그들의 지위는 단숨에 곤두박질치고 말 터였다.“어머님께서 아직 살아계시는데 분가라니... 그런 말은 너 같은 아랫것이 입에 담을 바가 아니다!”둘째 마님은 이를 갈며 독하게 내뱉었다.“저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닙니다. 다만 집안의 살림이 한정되어 있으니 이후 이방과 삼방의 경비는 숙모님들께서 스스로 감당해 주셔야겠지요.”말을 마친 신수빈은 얼굴에 담담한 온화함을 띠면서도 그 속에 냉랭한 거리감을 섞어 다시 말을 이었다.“금자야, 두 숙모님을 바래드려라. 나는 기력이 달려 피곤하구나. 청하야 나를 방으로 부축해 다오.”“예, 마님.”신수빈은 두 숙모가 떠나기도 전에 먼저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남겨진 둘째 마님과 셋째 마님은 입술조차 떼지 못할 만큼 분통이 터졌으나 장부 문제를 생각하니 울분을 삼킬 길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다 마침내 서씨 부인의 처소로 곧장 몰려가 따지려 했다.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둘째 마님은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더니 곧장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셋째 마님은 바로 뒤를 따르다 같이 발이 걸려 그만 중심을 잃고 두 사람은 서로 얽혀 한데 뒹굴며 동시에 나자빠졌다.그 광경을 본 뜰 안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벙벙해 있던 윤서령이 정신을 차리고 급히 외쳤다.“뭘 그렇게 가만히 서 있느냐! 어서 마님들을 부축해 드리지 않고!”하녀와 유모들은 서로 곁눈질하며 눈치만 살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저마다 의문이 피어올랐다.‘방금까지만 해도 둘째 마님과 셋째 마님은 신수빈을 곤경에 몰아넣으려 갖은 수를 다 쓰지 않았던가?’‘이제 와서 그들을 부축한다면 작은 마님께 불충으로 여겨지진 않을까?’‘도와준다면 작은 마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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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지난번 책봉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궁에 들어가 감사의 예를 올려야 했다.다음 날 이른 새벽, 궁중에서 이미 전갈이 내려왔다. 신수빈은 서둘러 일어나 청하의 시중을 받아 고명복을 단정히 입고 마차에 올라 궁궐로 향했다. 이번에는 청하를 데리고 가지 않고 은보만 동행시켰다. 궁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은보의 침착한 얼굴빛과 신중한 거동을 살펴보던 신수빈은 자신의 추측이 점점 더 확신으로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궁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가마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녀는 그 위에 앉아 느릿느릿 영수궁을 향해 나아갔다.그 시각 바깥의 하늘은 막 밝아오기 시작했는데 층층의 관문을 지나고 나니 벌써 천지가 훤히 밝아 있었다. 유월의 날씨란 아침부터 이토록 찌는 듯이 더운 법.신수빈은 아이를 가진 뒤로 더욱더 더위를 견디지 못했다. 지금처럼 가마에 앉아 있어도 가슴속까지 눅눅하고 답답하였다. 마침내 영수궁에 가까워지자 신수빈은 가마에서 내려 직접 걸어 들어가야 했다.고명복은 단정하고 화려하여 그 발관 또한 영화롭고 존귀했다. 그러나 이런 혹독한 여름날 그 복식을 오래도록 입는다는 것은 실로 형벌 같은 일이었다.그러나 여기는 황궁, 황권이 지존하는 곳. 그녀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어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내관을 따라 묵묵히 영수궁을 향해 걸어갔다.“태후 마마께서 아직 조정을 보고 계시니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소서.”신수빈은 영수궁 대전 앞에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다. 이곳에는 그늘이 비치는 처마 하나 없었다. 잠시라면 견딜 수 있으련만 오래 서있는다면 어찌 그 뜨거운 볕을 이겨내겠는가?“내관, 감히 여쭙습니다만, 태후 마마께서는 보통 언제쯤 조정을 파하십니까?”신수빈은 슬쩍 소매 속에서 비단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내관은 그것을 받아 쥐고는 손가락으로 눌러보았다. 그의 눈빛에 곧 만족스러운 기색이 번졌다.“그건 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조정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사시가 끝날 무렵에 파하시지만 혹 일이 있으면 오시를 넘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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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그 시각 조정에서는 강회 유역의 치리를 두고 논의가 한창이었다.이 일로 인해 이부에서 몇몇 인물을 천거했으나 조정은 이 문제를 두고 연일 언성이 높아졌다.강회 유역은 본래 전조의 수중에 있었는데 후일 강을 건너 전조를 쓸어내고 전쟁이 평정되며 백성들이 귀순하자 그제야 강회의 홍수와 범람을 다스릴 문제가 조정의 안건으로 떠오른 것이다.문제는 이 일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어제부터 시작된 논쟁이 오늘까지 이어졌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결론은 없었다.이때, 늘 곁에서 시립하던 내관이 허리를 굽히고 섭정왕 앞으로 다가와 귀에 대고 한 마디를 속삭였다. 잠시 후 이도현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곧 내관이 물러났다.태후는 이도현의 일거일동을 주의 깊게 살폈다. 이윽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순간 차갑고 준엄한 위세가 소리도 없이 번져갔다.“그저 치리를 맡을 한 사람을 정하는 일일뿐인데 어찌 이리도 떠들썩하단 말이냐! 본왕이 모른다 생각지 말거라. 너희들이 속으로 무엇을 도모하는지 본왕이 모를 줄 아느냐! 지금의 일은 백성과 사직이 걸린 대사이다. 결코 너희가 사사로운 정에 끌려 붕당을 짓고 사심을 펼칠 때가 아니란 말이다. 이 수많은 사람 가운데 본왕은 기어코 치리를 다스릴 만한 인물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산조하거라! 내일도 뚜렷한 방도가 나오지 못한다면 공부 상서와 이부 상서는 다시는 조정에 나오지 말거라!”말을 마친 이도현은 곧장 태화전을 나섰다. 남겨진 조정 신하들은 서로 얼굴만 마주 본 채 입을 다물었다.이제 겨우 사시가 되었는데? 평소라면 가장 이르게 파한다 해도 사시 말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 이리도 일찍 산조가 된단 말인가? 그러나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혹여 이도현의 눈밖에 날까 두려워서였다. 태후 또한 이렇게 일찍 산조가 되리라 예상치 못했다. 이도현이 태화전을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곁의 여관에게 눈짓을 보냈다. 여관은 곧 뜻을 알아차리고 그를 뒤따라갔다.“왕야, 잠시 멈추소서.”여관은 이도현을 따라잡아 가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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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이도현은 곁눈질조차 하지 않고 태후와 어린 황제 쪽으로 곧장 걸어갔다. 마치 영수궁 뜰 안에 서 있는 누군가의 존재 따위는 전혀 보지 못했다는 듯이. 그는 신수빈의 곁을 스쳐 지나면서도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곧장 태후와 황제의 앞에 다가섰다.“신, 태후 마마와 전하께 문안드립니다.”그의 자태는 준수하고 곧았다. 분명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는 자세였으나 그 속에는 비굴함도 오만함도 없는 기개가 배어 있었다. 태후는 어린 황제의 손을 잡고 눈앞의 이도현을 바라보며 옛 시절처럼 환하고 친밀하게 미소 지었다.“이미 몇 번이나 말했듯이 우리 사이에 무슨 예가 필요하단 말이냐?”그녀는 그리 말하며 황제를 이끌고 내전으로 향하려 했다. 그 순간, 이도현이 측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금빛 곤복에 화관을 쓴 채 뜰에 서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태후 마마께서 다른 일이 있으시다면 신은 다음번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그제야 태후는 뜰에 서 있던 이를 떠올린 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이고, 내 기억이 어찌 이리 흐린 것인지. 어제 평양후 세자 부인에게 고명을 내린 것을 잊었구나. 오늘이 바로 그녀가 입궁하여 사은을 올리는 날이었지. 한데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다니.”태후는 몸을 돌려 여전히 온화하고 따스한 얼굴빛으로 말을 이었다.“신씨 부인, 오늘은 그만 물러가거라. 앞으로 조정의 은혜를 잊지 말고 부디 부군을 도우며 자식을 잘 가르치고 또 신가가 나라를 위해 힘쓸 수 있도록 독려하거라.”신수빈은 저릿하게 굳은 다리를 버티며 무릎을 꿇었다.“태후 마마의 가르침을 삼가 명심하겠습니다.”“일어나거라.”신수빈은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뜨거운 기운이 이미 몸 깊숙이 스며들어 어지럽고 아찔했다. 미리 약을 복용했음에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결국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곁에 있던 은보의 팔을 붙잡아 간신히 몸을 가눌 수 있었다.태후는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신수빈의 이런 연약하고 꾸며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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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누가 어진 인재인지를 밝게 가려낼 능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합당한 군주가 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이도현은 열 살 남짓한 어린 황제를 바라보며 말할 때 자연스레 몸에 두른 차가운 기운을 거두어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스했다.황제는 알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차가운 얼굴의 이 숙부와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으나 어미가 굳이 묻도록 강권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나선 일이었다. 물음이 끝나자마자 대답도 막혀 그만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태후는 이를 보자 황제 곁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어린 황제와 이도현 사이에 바짝 다가앉아 목소리를 한층 더 유순하게 낮추며 유도하듯 말했다.“어제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무왕이 주왕을 토벌한 고사를 숙부에게 묻고 싶다고. 네 어미와 태부가 들려주는 것은 재미가 없다 하였지 않았느냐? 전쟁터를 직접 겪은 너의 숙부의 이야기가 더 생생하다 했었지.”황제는 마지못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짐은, 무왕이 주왕을 토벌한 이야기와 또 은나라가 참으로 달기 때문에 나라가 기울었는지 그것을 정녕 묻고 싶습니다.”그 무렵, 신수빈은 차가운 매실차를 한 그릇 들이켜고 나서야 기운을 되찾아 고개를 들어 상석을 바라보았다. 태후는 황제를 옆에 두고 앉아 있었고 황제의 다른 쪽 곁에는 이도현이 앉아 있었다. 그는 얼굴빛을 온화히 풀고 있었으며 태후의 눈매에는 은근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도현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마치 사랑이 흘러넘쳐 방울져 떨어질 듯 부드러웠다.모르는 이가 본다면 분명 화목한 한 집안의 세 식구라 여길 법한 장면이었다.잠시 뜸을 들인 이도현은 입을 열었다.“경전에 기록된 말을 온전히 믿기만 한다면 차라리 읽지 않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스스로의 분별력을 가지셔야 합니다. 은나라가 멸망한 것은 천명이 다했기 때문이지 한 사람의 군주 때문도 아니고 더구나 한 후궁의 여인 때문도 아닙니다. 주왕은 마지막까지 녹대에서 끝내 항복을 거부하고 목숨을 던진 인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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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곧 태후도 정신을 차렸다. 대전 안에는 아직도 다른 이들이 남아 있었고 신수빈의 기색도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다. 태후의 자리에서는 그저 신수빈이 공손히 고개를 숙인 모습만 보였으므로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그 비웃음을 알아채지 못했다.“신씨 부인, 이제 괜찮아졌느냐?”“이미 회복되었습니다. 태후 마마의 은혜로운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어좌 앞에서 실례를 범한 죄만이 남아 송구할 따름입니다.”태후는 여전히 땅에 꿇어앉아 머리를 숙이고 있는 신씨 부인을 보았다. 끝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그녀는 잠시 안도했다.“이제 물러가거라. 조금 뒤에 윤가로 보약을 보내주도록 하마.”태후의 넓은 아량과 은혜로운 태도를 담은 말은 외려 신수빈의 마음을 차갑게 만들었다. 만일 정말로 그를 걱정했다면 새벽도 밝기 전에 사람을 윤가로 보내 데려오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뜨거운 볕 아래 두 시진이나 세워두지도 않았을 것이다.“태후 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그리 말한 뒤 신수빈은 곧 자리에서 물러났다. 태후는 그녀 곁에 서 있던 어린 시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어딘가 낯이 익은 듯했으나 언제 어디서 본 것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이때 어린 황제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어미와 섭정왕이 모두 출입문 쪽을 주시하는 모습을 보고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는 몸을 꼼지락이며 안절부절못했다.이도현은 눈길을 거두고 어린 황제를 향해 물었다.“전하께서는 혹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어린 황제는 그만 입이 먼저 열리고 말았다.“짐은 이제 묻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그렇다면 전하께서 더는 할 말씀이 없으시니 신은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이도현이 몸을 일으키자 어린 황제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태후의 눈빛이 날카롭게 쏘아 붙자 그는 목을 움츠리며 자신이 어디서 잘못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섭정왕, 잠시 머무르거라. 아직 상의할 일이 있다.”이도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태후는 황제의 손을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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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태후의 얼굴빛은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그녀의 두 입술은 미세하게 떨렸고 목소리는 끝내 울먹이며 터져 나왔다.“너는 여전히 나를 원망하는구나. 원망하는 것이지? 선황께서 붕어하시던 그날, 내가 너와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을. 한데 나는 단지 한 명의 여인이 아니지 않으냐? 나는 한 아이의 어미이기도 했으니…”이도현은 냉혹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입가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비웃음의 자취가 남아 있었고 그 눈빛은 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있는 듯했다.“태후께서는 천자의 모후시니 일거수일투족이 천하 여인의 본보기가 됩니다. 그 지존의 권세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법. 이미 권력의 정점에 선 태후라면 마땅히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만약 마음이 허전하다면 차라리 전조의 태후들처럼 총애할 첩이나 기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은 조정의 일로 분망하니 태후의 정을 누릴 복은 없습니다.”그 적나라한 모욕에 태후의 얼굴은 홍조로 물들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어 삼키듯 분노와 수치가 뒤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너…! 네가 이제 와서 감히 나를 이렇게 욕보이다니!”이도현은 입매를 한껏 비틀어 올렸다. 그의 눈가와 미간에 조롱의 빛이 번져가며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순간 그 몸에서 쏟아져 나온 살벌한 냉기가 마치 칼날처럼 대전을 압박했다.“실은 태후께서야말로 신을 붙잡고 늘어진 것이 아닙니까? 산조 후마다 신을 불러들이고 다시금 궁인을 내보내며 저 혼자만 남겨둔 뜻이 무엇인지 태후 본인께서 모르신단 말입니까? 남녀 사이의 그 얕은 속내는 태후께서도 알고 본왕 또한 알고 있습니다!”태후는 그의 기세에 눌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심장이 덜컥하고 조여들며 속내를 들킨 듯 눈빛에는 당혹감이 스쳤다.“태후께서는 감히 신에게 단지 옛정을 나누고 싶었을 뿐이라 둘러대지 마세요. 옛일을 들춰 무엇을 얻고자 하셨습니까? 신을 태후의 침실로 끌어들여 아예 정부로 삼고 싶으셨습니까? 본왕이 젊은 날 바쳤던 일편의 진심과, 모비 여 귀비께 드린 그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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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태후의 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믿지 않았다. 단 한 글자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마음 깊숙이 숨어 있던 한 목소리가 은밀히 속삭이고 있었다. 이도현이 말한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그렇다면 내가 입궁하던 그날, 네가 빗속에 무릎 꿇고 궁문에 서 있던 것은 어찌하여 그런 것이냐? 그것이 나를 차마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단 말이냐?”이도현은 코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 속에는 노골적인 경멸이 서려 있었다.“그날은 본왕의 모비 기일이었습니다. 태후께서는 황권의 영광을 탐닉하느라 벌써 잊으신 듯하네요. 태후께서 입궁하여 책봉을 받으신 그날, 사실은 본왕의 모비께서 부황을 따라 순장당하신 바로 그날로부터 꼭 두 해 뒤였습니다. 생전 가장 총애하시던 여 귀비의 기일마저도 태후께서는 권세와 영화를 좇느라 잊으신 것이지요.”태후의 얼굴빛은 단번에 어두워졌다. 그녀가 애틋한 정으로 착각했던 그 장면이 알고 보니 단지 그녀와 무관한 일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이도현의 눈가에는 비웃음이 가득 차올랐다.“모비께서는 태후를 아끼시며 늘 본왕의 왕비로 삼으라 하셨지요. 본왕은 그저 모비께서 즐거우시다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본왕이 궁문 앞에 꿇었던 것은 모비께서 생전에 원하시던 바마저도 황권에 빼앗긴 이유 때문이지 태후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그는 더는 뒤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은 단호하고 뒷모습은 냉철하며 이별을 고하는 듯 결연했다. 문턱에 다다랐을 때, 그는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이후 태후께서 신과 의논할 일이 있거든 조정에서 하시옵소서. 사사로이 신을 불러들이지 마시고.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면 태후는 체면을 잃을 뿐이지만 신은 황실의 존엄까지 짊어져야 하니까요.”그 말과 함께 그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소상궁이 안으로 들어와 멍하니 앉아 있는 태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삼키며 태후를 부축하려 다가갔다. 그녀는 절박하게 소상궁의 손을 움켜쥐며 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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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마차 안에는 이도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바퀴도 움직이지 않은 채 마차는 궁문 앞에 그대로 멈추어 서 있었다.신수빈은 냉소를 흘렸다. 분명 태후의 전각에서 나온 이도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이 마차가 어떻게 지어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안에 들어서면 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은은한 바람이 불어들어 답답하기는커녕 오히려 쾌적했다.그녀는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반나절 동안 체력을 소모한 탓에 이미 지쳐 있었다. 다행히 마차는 넉넉히 넓었으므로 그녀는 화관을 벗어내고 부드러운 침상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다 눈꺼풀이 금세 무거워져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꿈결 속 몸이 후끈거려졌다. 무의식중에 그녀는 옷깃을 잡아당겨 고명복의 매듭 두 줄을 풀어헤쳤다. 드러난 목덜미와 어깨로 바람이 스며들자 그제야 한결 시원해진 듯 안온히 잠들었다.잠시 뒤, 이도현은 궁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은보가 깜짝 놀라 신수빈을 깨우려 했으나 이도현이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 손짓에 은보는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물러났다.이도현은 온몸에 살기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가슴속 깊이 쌓인 분노는 막 폭발을 앞둔 화산 같았다. 사지의 혈맥마다 뜨거운 불길이 치밀어올라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찢어발겨야만 풀릴 듯했다.그때, 그의 시선에 신수빈의 모습이 들어왔다. 구름처럼 풀린 머리칼이 어깨 위에 흘러내렸고 그녀는 마치 해당화가 봄날에 곤히 잠든 듯 부드러운 베개에 몸을 기댄 채 곤히 자고 있었다. 옷깃은 풀려 두 줄의 매듭이 느슨히 열려 있었고 백옥 같은 피부가 은은히 드러났다. 흘러내린 가느다란 머리카락 한 올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옷깃 안으로 사라져 저도 모르게 눈길을 가두었다.이도현은 손끝으로 옷자락을 젖히고 몸을 숙이며 그대로 덮쳐들었다.신수빈은 순간 눈을 반짝 떴다. 몸에 스며든 아픔에 신음을 흘리며 눈앞의 사내를 밀쳐내려 했다. 이곳은 이도현의 마차, 감히 그녀를 범할 자는 없을 것이다. 이 광견 같은 자를 빼면 말이다. 그는 개처럼 달려들어 마치 그녀를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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