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101 - Chapter 110

170 Chapters

제101화

전부 합치면 꼬박 오만 냥이었다. 후부 장부에도 분명 지출이 찍혀 있었지만 그 오만 냥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장로님들 앞에서 장부를 따졌사옵니다. 어르신께서는 그 일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지요. 그러니 뭐 어쩌겠사옵니까? 당연히 두말하지 않고 바로 서씨 부인을 때렸지요. 서씨 부인께서는 울고불고했지만 그래도 그 오만 냥이 어디로 갔는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사옵니다. 결국 참다못한 어르신께서는 장로님들 앞에서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하더니 바로 아내에게 수세를 써 주고 이혼을 하는 휴처를 쓰겠다 하셨사옵니다. 그러자 이번에 서씨 부인께서 대성통곡을 하시더군요.”신수빈은 물론이고 옆에서 듣던 청하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은보는 그녀를 흘끗 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신수빈이 제지하지 않았기에 그냥 두고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다음에는요?”청하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그 뒤에도 서씨 부인께서는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 말하지 않으셨고 오만 냥도 내놓지 못하셨사옵니다. 그러자 어르신께서 서 가 사람들을 불러 서씨 부인을 데려가라 명하시며, 자신은 휴처를 쓰겠다고 하셨지요. 한데 서 가 사람들이 오자 신씨 부인께서는 갑자기 기가 사셨는지 어르신과 말싸움을 벌였사옵니다. 입에 담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욕을 퍼부으며 장로님들까지 모두 욕하더군요. 하나 그분들도 이상하옵니다. 그렇게 욕을 먹고 체면이 구겨졌는데도 그저 소매만 털고 나가 버리시는 게 아니겠사옵니까. 그리고 더 이상 후부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사옵니다.”그 말에 신수빈의 흥미가 크게 일었다.“신씨 부인께서는 뭐라고 욕하시더냐?”“저도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어떤 사람을 계속 들먹였사옵니다. 이 씨였던가...? 윤 가의 사람들은 전부 겁쟁이에 쓸모없다면서 일가족까지 싸잡아 욕했사옵니다. 반군이 성을 포위했을 때, 윤 가는 아직 봉작도 받기 전이었는데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다나 뭐라나... 반군은 원래 떠돌이 도적 떼라 도리 같은 건 따지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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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화

이 일은 윤 가가 말하지 못하는 비밀에 속했다.만약 서 씨가 오늘처럼 마음껏 떠들고 다니기라도 한다면 당시 윤 가가 적군에 항복한 사건은 곧바로 온 집안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큰 죄가 될 것이었다.비록 이 씨가 반군 수장의 목을 베었다고 하더라도, 윤 가는 애초부터 이 씨를 희생해 살아남으려 한 것이므로, 마음은 이미 관산왕을 배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뒤에는 이 씨의 공을 가로채 관산왕을 속였으니 윤 가 사람들은 입이 열 개라고 할 말은 없을 터.“그 다음은?”“그 이후, 윤 어르신께서는 눈이 벌게져 서씨 부인을 죽일 듯 노려 보았지만 서씨 사람들이 모두 있는 탓에 실제로 죽일 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서씨 부인께서는 후부에 그대로 머물 수 있게 되었사옵니다. 다만 어르신께서 앞으로는 절대로 그녀가 자기 뜰 밖을 나서지 못하게 하라 명하셨사옵니다. 서 가 사람들도 서 씨 부인께서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르신의 뜻을 받아들였지요.”신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 그녀가 짐작한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다만 서 씨처럼 강하고 독한 사람이 그 좁디좁은 뜰에 갇혀 한 발짝도 나서지 못한다면 화병이 날 것이 분명했다.“이방 삼방에서는 뭐라 하더냐?”“그런 얘기는 처음 들었는지 둘째 마님과 셋째 마님께서는 무척 놀란 모습이셨사옵니다. 서씨 부인께서 모든 걸 터뜨려버리자 두 분께서 바로 겁먹은 표정을 짓더군요. 이 일로 어르신께서 몹시 노하여 둘째 공자와 셋째 공자에게도 좋은 말을 하지 않으셨사옵니다. 예전에 큰 어르신께서 계실 때 이미 분가를 했는데 그 뒤로 후부를 믿고 제멋대로 흥청망청 썼다는 것이 원인이겠지요. 서씨 부인께서 탐욕스러운 건 맞지만 이방과 삼방의 지출은 수입보다 훨씬 많았사옵니다. 제집 뒤뜰조차 다스리지 못하면서 매일같이 시끄럽게 굴고 은전 몇 닢 때문에 집안을 어지럽힌다면 차라리 짐을 싸서 모조리 나가버리라고까지 말씀하셨사옵니다.”신수빈은 여전히 아쉬웠다. 이번 일을 빌미로 이방과 삼방을 통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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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먼저 사과하고 그다음 참회하고 이어서 살갑게 굴며 정을 붙인 뒤 집안 살림을 틀어쥐려는 속셈일 터였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조카 며느리, 전에는 내가 네 뜰에 있는 그 귀첩의 모함을 듣고 오해해서 그런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것이니 부디 노여워하지 말거라.”“괜찮습니다.”“요 며칠 동안 지난날 저질렀던 것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얼마나 아프던지... 스스로 두어 대 뺨을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단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이 집안에서 제일 분별 있는 사람이 너 같은 조카 며느리 아니겠느냐? 앞으로 나는 무엇이든 너만 믿을 생각이다.”“과찬이십니다.”“듣자 하니 네 친정 오라버니 중 미혼인 분이 몇 분 계시다지? 내 쪽에도 이름난 가문의 규수들이 몇 있단다. 조용하고 정숙한 아가씨들이라 네 오라버니와 잘 어울릴 것 같구나. 조만간 내가 데리고 와 보마. 분명 마음에 들 게다.”“수고해 주십시오.”“며칠 뒤 너랑 서원이는 피서 산장에 두 달이나 다녀온다 들었다. 그동안 이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은 어찌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너의 시어머니께서는 며칠 전 병을 얻어 뜰에서 요양 중이라 밖에 나오지도 못한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 대신 집안을 맡아보는 게 어떻겠느냐?”앞서 그리도 많이 아부했으니, 둘째 마님은 신수빈이 이번에도 싱긋 웃으며 허락해 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는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뒤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둘째 마님을 바라보며 말했다.“숙모께서 하루만 더 일찍 오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방금 제 큰 오라버니께 부탁해 천일각의 여 장객을 불러 저 대신 집안일을 맡아달라 했습니다.”둘째 마님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새까맣게 변했다.신수빈이 핏줄도 아닌 외인에게 집안 살림을 넘기다니!“장사치들은 모두 온몸에 돈 냄새가 배어 있다! 그런 자들이 무슨 대단한 체면으로 우리 후부의 살림을 맡는단 말이냐! 외인을 끌여들였다며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느냐!”신수빈은 조금도 봐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찻잔을 탁하고 책상 위에 내려놓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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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화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수치스러워서, 차라리 날마다 뜰에 틀어박혀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서씨 부인의 부름에 그녀의 방을 찾아간 윤서령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부터 흘렸다. 하지만 서씨 부인은 속으로 계책을 굴리느라 들떠 있었기에 딸의 손을 꽉 붙잡고 꾸짖었다.“방법을 찾아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울기만 하느냐! 울면 무엇이 해결된단 말이냐?”“밖에서 온갖 말이 떠돕니다. 저는 이제 그 무리에서 밀려났는데… 대체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그러자 서씨 부인의 눈에 이글거리는 빛이 번뜩였다. 그녀는 윤서령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예전에 너를 우러러보던 그 아가씨들에게 다시 높이 평가받고 싶지 않느냐? 너를 조롱하던 자들이 앞으로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예를 갖추게 하고 싶지 않느냐 말이다.”윤서령은 흐느낌을 멈췄다.“저도 당연히 그러고 싶지요. 한데 제가 어찌해야…”“네가 섭정왕과 인연을 맺기만 하면 된다. 그분과 엮이게 된다면 대주 왕조에서 태후를 제외한 가장 존귀한 여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우리 평양 후부의 적녀니 섭정왕비 자리도 충분히 어울리지!”윤서령은 서씨 부인의 말에 크게 놀랐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섭정왕이 못생겨서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경성의 어떤 귀족 자제보다도 수백 배는 더 준수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이유는 또 따로 있었다. 그는 감히 눈을 마주치기도 어려운, 압도적 기세를 지닌 남자였다. “섭… 섭정왕께서 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습니까?”“계책은 사람이 꾸미는 것이다. 그가 원치 않는다 해도 억지로라도 맞이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서씨 부인은 윤서령의 귓가에 속삭이며 자신의 계략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얼굴이 새빨개져 몸 둘 바를 몰라 했다.“어머니… 저는 감히 그런…”서씨 부인은 윤서령의 손을 놓지 않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섭정왕은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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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경중에서 피서산장까지 가려면 이 길을 무려 이틀이나 더 달려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달이나 머물러야 하니 챙겨야 할 것도 적지 않았다.예전에는 벼슬아치들만 산장으로 따라갈 수 있게 허락되었다. 아무래도 피서 중에도 조정에 나가 일을 봐야 하니 집안 식구는 데려가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올해는 어찌 된 일인지, 집안사람을 데려가도 된다는 명이 내려온 것이었다.피서 산장으로 출발 하는 날, 신수빈이 막 마차에 오르려던 찰나, 마차의 덮개가 홱 들리더니 시종이 윤서원을 부축하며 마차에 태웠다. 다행히 마차가 넓고, 이불까지 잘 갖춰져 있었기에 길에서 하룻밤을 묵어도 문제없었다. 윤서원은 맞은 곤장 자국이 아직 다 낫지 않아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었기에 가는 길 내내 마차 안에 기대어 누워 있어야 했다.그는 이내 신수빈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곧이어 주서화도 마차에 올랐는데, 그녀는 신수빈을 못 본 체하며 윤서원에게만 극진히 마음을 쏟았다.“오라버니, 상처는 좀 어떠십니까?”주서화는 말을 막 꺼내자마자 서러움이 치밀어 올랐다.“요 며칠 늘 유 아가씨 댁에만 계셔서 상처를 보러 가고 싶어도 괜한 것을 보게 될까 두려워 마음이 너무 힘들었습니다.”윤서원도 그녀를 못 본 지 꽤 오래되었다. 비록 지난번 일은 그녀가 잘못하긴 했으나 지금처럼 애잔하고 그윽한 모습은 누구라도 동정이 갈만했다.“됐다. 그만 울 거라. 내 상처는 이젠 별일 아니다. 그냥 좀 다친 것뿐이지. 부윤 나리께서 정말로 날 부러뜨리기야 하겠느냐? 오래 앉아 있지만 않으면 된다.”주서화는 그가 부드럽게 말해주는 것을 보고서야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녀는 윤서원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리움을 담아 조곤조곤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서원 오라버니, 지난날 제가 잘못한 건 앞으로 꼭 고치겠습니다.”윤서원도 주서화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다정한 순종을 마음껏 즐겼다.그녀와 유이연은 달랐다. 유이연은 신분이 미천하기에 그를 우러러보는 것이 당연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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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마차에서 자야 했다.아침의 긴긴 행차보다 더 견디기 힘든 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신수빈은 마차 안의 좁은 공간을 바라보았다. 윤서원과 주서화와 함께 잘 생각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저녁식사를 한 뒤, 신수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마차가 비좁습니다. 헌데 서방님께서는 몸에 상처가 있고 서화 아가씨께서는 아이를 품고 있으니 저는 오늘 밤 뒤쪽 마차에서 하인들과 함께 자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이곳에서 편히 쉬십시오.”말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뒤쪽으로 걸어갔다. 이번에 그녀가 데려온 것은 금자와 은보 둘뿐이었고, 주서화 쪽에서도 똑같이 두 명을 데려왔다. 그녀까지 합치면 인원은 총 다섯 명. 비좁기는 해도 그 둘과 한 마차에 눕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신수빈이 마차의 장막을 들고 올라타려는 순간, 마차 안에 앉아 있는 윤서령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크게 놀라며 물었다.“아가씨께서는 어찌하여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윤서령의 표정은 오만함으로 가득했고 눈썹 끝에는 분명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서화 형수님께서 저도 함께 데려가신다 하셨습니다.”신수빈은 미미하게 눈썹을 올렸다. 지금 윤서령의 표정은 너무나도 당당했다. 얼마 전 연달아 충격을 받아 풀이 죽어 있던 모습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혹시 그녀와 주서화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이로써 신수빈이 머물 곳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해는 이미 져서 사방은 어두워졌고, 시위와 병사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하루 종일 마차를 타고 와 힘든듯 모두 쉬고 있었다.그녀는 목적 없이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고, 은보와 금자가 신수빈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며 그녀를 보호했다. 마침 그 둘도 마차 안이 비좁다는 이유로 윤서령에게 쫓겨났던 참이었다.앞쪽 먼 곳에는 작은 시냇물이 하나 있었다. 신수빈은 그 시냇물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평평하고 거대한 바위 하나가 보이자 걸음을 멈추었다.“오늘 밤은 여기서 쉬도록 하자.”다행히 그녀는 모기와 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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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이도현의 시력은 매우 뛰어나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물며 오늘 밤은 달빛이 유난히 밝았기에, 그녀의 뺨을 비추는 홍조까지 또렷이 드러나 보였다. “좋으냐?”이도현은 다시 한번 물었다.신수빈은 오늘따라 그의 시선이 유난히 강렬하다고 느껴져 고개를 돌려버렸다.“왕야께서는 어찌하여 이곳에 온 것입니까?”그녀의 목소리에는 당황함을 감추려는 기색이 엿보였다.이도현은 지금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괜히 장난을 걸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반딧불이 본왕을 이끌어 이곳에 왔지.”신수빈은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듯했다. 그에 대한 기억은 아직 지난번의 불쾌했던 이별에서 멈춰 있는데 지금 또 이렇게 가벼운 장난까지 칠 줄은 몰랐다.그녀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아 입술을 살짝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도현은 낮게 웃고는 곧장 옷자락을 정리하고 그녀의 곁에 앉았다.“번식과 사랑의 즐거움은 모든 짐승과 인간의 본능이다. 침상 위에서는 대담하고 풍치도 있던 네가 두 마리 반딧불 때문에 이처럼 수줍어하는 걸 보니 본왕은 더 궁금해지는구나.”하지만 신수빈은 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듯, 얼른 화제를 돌렸다.“왕야께서는 이 늦은 밤에 잠도 안 주무시고 시냇가에는 어인 일로 나오신 겁니까?”“널 찾으러 왔지.”“왕야께서 제가 이곳에 있는 걸… 대체 어찌 아시고...?”“본왕이 알고자 하면 자연히 알게 된다.”신수빈은 이도현의 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금자와 은보는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금자와 은보는 왕야의 사람이겠지요?”그 말에 이도현은 뜻밖이라는 듯 놀란 눈길을 보냈다.“… 어찌 알았느냐?”그의 대답은 곧 인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가 인정하지 않았더라도 신수빈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처음부터 은보가 예를 올리는 모습이 이상했습니다. 그녀가 무행 출신이 맞다면 강호의 예를 올려야지 군중의 예를 행할 턱이 없지요. 그때부터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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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본왕이 원한다면?”신수빈은 그가 연약한 여인을 아끼는 사람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농락을 주고받으며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자 신수빈은 손을 뻗어 그를 밀어냈다. 그와 이렇게까지 가까워지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혹시 역관에는 미인이 다 떨어졌습니까? 왕야께서 아직도 저를 생각하실 줄은 몰랐습니다.”“지금 본왕은 오직 너 같은 맛만 좋아해서 말이지.”신수빈은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자신처럼 태후를 닮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는 심지어 그녀를 마음대로 능욕할 수도 있지 않은가?“왕야의 취향은 참으로 단조롭군요.”신수빈은 조소 섞인 말투로 말했으나 이도현은 그 비아냥을 못 들은 듯했다. 대신 바위 옆의 풀을 가리키며 말했다.“이 풀은 보검초 라 부른다. 뱀독을 풀 수 있기에, 이런 풀이 나는 곳에는 반드시 뱀굴이 있다. 한데 이런 벌판에서 잠을 자겠다니... 네 배짱도 참 놀랍구나.”뱀굴이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신수빈은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연우가 관 속에 던져졌을 때 뱀에게 휘감겼던 그 장면이 지금까지도 그녀를 짓누르는 악몽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흠칫 놀라며 몸을 일으켰고 얼굴에는 순식간에 피기가 사라졌다. 반짝이던 눈동자는 홀연히 생기를 잃었고 대신 텅 빈 공포만 가득했다.신수빈의 반응에 놀란 것은 오히려 이도현이었다. 그녀가 뱀을 무서워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토록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공포를 보일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이도현은 그녀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듯 본능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러자 신수빈이 몸을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멈출 수 없는 떨림이었다. 더 나아가 그 떨림은 턱까지 번져 이가 부딪히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본왕이 있다. 두려워하지 말거라.”이도현이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신수빈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기억에서 짜낸 악몽에 빠져 도무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도현은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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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화

신수빈은 단 한순간도 깊이 잠들지 못했다. 그녀가 놀라서 깨어날 때마다 이도현은 그녀를 끌어안고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위로를 해주었다.“두려워하지 말거라.”그는 사람을 잘 달래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이렇게 한마디를 내뱉는 것조차도 약간은 차갑고 무뚝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어설픈 다독임 속에서도 신수빈은 서서히 진정되며 다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은 이도현 역시 편히 잠들지 못했다.날이 조금씩 밝아올 무렵, 그는 신수빈을 깨웠다.“일어나거라.”그녀는 졸린 상태로 겨우 눈을 뜨더니 곧이어 또렷이 정신을 차렸다.“곧 날이 밝을 것이다.”“그렇군요.”신수빈은 눈을 내리깔고 대답한 뒤 그의 뒤쪽으로 돌아 내려가려 했다. 그 모습에 이도현은 신속히 몸을 일으켜 자리를 비켜주었다.그의 방에는 시종도 없이, 오로지 둘만 있었다. 신수빈은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어 올린 후에야 비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 이도현이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어젯밤에 신수빈에게서 가져간 비녀를 다시 머리 사이에 꽂아주었다.이때, 두 사람의 시선이 동경 속에서 맞닿았다.“좀 나아졌느냐?”신수빈은 흘러내린 잔머리를 정돈하며 평소처럼 부드럽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어제는 고마웠습니다, 왕야. 제가 어릴 적부터 뱀을 무서워해 심리적 공포가 생긴 것뿐입니다. 한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바깥에 사람이 있는지 좀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왕야 방에서 나오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니까요.”하지만 이도현은 그녀가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것을 보며 스스로도 이유 모를 허전함을 느꼈다. 어젯밤, 자신 앞에서 연약해 보였던 그녀가 전부 허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서인경을 슬쩍 곁눈질하고는 다시 침상으로 돌아갔다.“그게 본왕과 무슨 상관이냐? 언제부터 네가 본왕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단 말이냐?”그녀도 사람들 눈을 피하고 싶을 테니 한마디의 청이라도 건네겠지.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신수빈은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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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기다림은 언제나 고된 법이었다.밤이 밀려나고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들의 비참한 결말이 다가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처럼… 이도현이 돌아왔을 때, 궁녀 차림의 여관 하나가 호위에게 캐묻고 있었다.“왕야께서 역관으로 데려온 이는 대체 누구인 것이냐?”이도현의 살짝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서늘한 눈빛을 내뿜는 그의 몸에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기 어린 기운이 번졌다.그 여관이 바로 태후 곁에 있던 소영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의 목소리는 더욱 싸늘해졌다.“본왕이 누구를 거느렸는지 왜 알고 싶은 것이냐? 언제부터 소상궁이 이런 일에 관여하게 된 것이지?”소영은 등골이 오싹해져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곧장 무릎을 꿇었다.“제가 죄를 지었사옵니다. 저는 누군가가 왕야께 해를 끼칠까 염려되어….”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서릿발 같은 준엄함이 깃들어 있었다.“태후와 함께 자란 정을 봐서 이번에는 눈감아 줄 것이다. 한데 기억하거라. 본왕이 분수를 모르는 자를 어떻게 다뤄왔는지를 말이다.”소영은 온몸이 굳은 채 바닥에 엎드려 사죄하며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이도현이 방으로 돌아간 뒤에야 소영은 자신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간신히 걸음을 옮기며 방금 그 섭정왕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여인의 모습을 억지로 머릿속에서 지워내기 위해 노력했다. 날이 밝아 태후와 황제가 깨어나면 또다시 길을 이어가야 했으니까.윤서원과 주서화가 깨어났을 때, 마차 벽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신수빈의 모습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지자 신수빈은 곧바로 눈을 떴다.“언니,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어젯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었는데 말이지.“어젯밤에.”신수빈은 더 이상 말할 생각도 없다는 듯 그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태후와 황제가 역관에서 나오자 모두가 마차에서 내려 정식적으로 예를 올렸다.신수빈은 주서화가 윤서원을 조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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