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los capítulos de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apítulo 261 - Capítulo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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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화

신수빈은 먼저 행화루에 도착해 있었고, 아직 명양 장공주는 오지 않은 상태였다.은보는 부에 남겨 두고 금자와 청하가 그녀를 수행해 나왔다. 오는 길에 금자는 거리 가득 걸린 등불을 보며 눈을 반짝였고 신수빈은 그 모습만으로도 금자가 이런 번화한 풍경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행화루에 이르자 신수빈은 청하에게 일러 금자에게 잔돈을 조금 쥐여 주고 밖에 나가 구경하고 오라 했다.하지만 금자는 그녀의 걱정에 고개를 저었다.“밖에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무슨 일을 당하겠느냐?”신수빈의 말에 금자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왕야가 부인 곁에 배치한 암위들이 곳곳에 있고 모두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금자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금자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거리로 나가 등불을 구경하러 갔다.반 시진 남짓 지났을 무렵, 명양 장공주가 도착했다.“윤씨 부인을 오래 기다리게 했구나. 궁중 연회가 어찌나 시시하던지… 나도 빨리 나오고 싶었다.”“아닙니다. 제가 조금 일찍 왔을 뿐입니다.”신수빈은 몸을 낮춰 예를 올렸다.명양 장공주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자연스레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겼다.“이제 아이는 몇 달이 되었느냐?”“여섯 달 반쯤 되었습니다.”실은 이미 일곱 달을 훌쩍 넘겼지만 감추기로 한 이상,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다.명양 장공주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에 앉힌 뒤, 궁에서 겪은 일들을 깊은 한숨과 함께 늘어놓았다.“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잔머리가 아홉 개쯤 달린 인간들이라 상대하기가 정말 피곤하다. 강물 공사 자금이 결국 누구 손에 들어갔는지는 눈 밝은 사람은 다 알고 있지 않느냐? 끝내는 최 씨 가문과 그 친동생이 대신 뒤집어쓰고 희생양이 되었다. 태후가 무슨 약속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 씨 가문도 결국 받아들였더구나. 오늘에야 안 사실인데, 최 씨 쪽에서 적장녀를 내 황숙에게 시집보낼 생각이더군.”신수빈은 잠시 반응이 늦었다. 그녀가 말하는 황숙이 누구인지는 곧이어 이어지는 말에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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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2화

명양 장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 씨가 분명 더 할 말이 있으리라 짐작하고는, 말없이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오늘 장공주 마마를 모신 것은 염세 문제가 조정으로 번지게 된 배후가 바로 신 씨 가문임을 분명히 말씀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래의 계획은 예왕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었지요. 염세는 누구도 손대지 않으려 하는 사안이기도 하고, 예왕은 친왕이지만 조정 내 기반과 인맥도 미약해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렇게 하면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예왕에게 쏠릴 터였습니다만, 중간에 변수가 생겨 그 계획은 폐기되었습니다.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 이 시점에서 예왕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것은 오히려 그에게 해가 될 뿐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지금처럼 몸을 낮추고 잠행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지요. 그래서 오늘 장공주 마마를 뵙고자 한 것입니다. 돌아가셔서 부마께 이 염세 조사를 맡아달라고 전해주십시오. 제 판단이 틀리지 않다면 조정에는 이 일을 자청할 이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씨족 대가문들 역시 양회 염세가 다시 들춰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거예요. 부마께서 나서신다면, 감히 그 자리를 두고 다툴 자는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명양 장공주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크게 놀랐다.며칠 전, 부마 역시 같은 뜻을 내비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염세를 조사하고 싶다 했지만 그녀는 그곳이 얼마나 깊고 탁한 수렁인지 알기에 선뜻 허락하지 못했었다.신수빈은 장공주의 표정만 보아도 그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염세는 분명 위험한 일이다. 장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영화로운 삶을 누려 왔으니, 남편이 공을 세우겠다고 무리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 또한 당연했다.“장공주 마마께서 부마의 남하에 위험이 따를까 염려하신다면 그 점은 부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 씨 가문은 재물과 인력을 아끼지 않고 전력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더구나 이번 염세 문제를 뒤에서 밀어붙이기로 한 이상 충분한 준비 없이는 감히 나서지 않았을 터입니다. 만약 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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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3화

청하는 장공주가 떠난 뒤 마님이 잠시 더 머무를 것임을 알고는 계단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여인이 그녀에게 다가와 길을 물었다.“아가씨, 목단청은 어떻게 가야 하나요?”아까 마님을 모시고 올 때 마침 목단청 앞을 지나쳤던 터라 청하는 일어나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설명했다.“저쪽이에요. 이 길로 곧장 가서 왼쪽으로 꺾으면 나옵니다.”“저쪽이 맞나요?”청하는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방향을 분명히 짚어 주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청하의 손을 붙잡고 연신 감사 인사를 건넸다.청하가 다시 몸을 돌려 객실로 돌아가려던 순간, 회랑 한쪽에서 휘장을 쓴 채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마님의 모습이 보였다. 망토로 불룩한 배를 가린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아가씨가 돌아갈 채비를 했음을 알아차린 청하는 급히 달려가 팔꿈치를 받쳐 들었다.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니 마님에게서 풍기는 향이 어딘가 다른 것 같았다. 평소 쓰던 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청하는 장공주와 함께 있다가 향이 옮았겠다고 생각하고는, 깊이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녀를 따라 행화루를 나섰다.밖으로 나온 뒤에도 마님은 마차에 오르지 않고 거리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청하는 혹시 화등을 구경하려는 줄 알고 좌우에서 함께 걸었다.한참을 걸어가자 뒤쪽에서 웅성거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불이 났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청하가 뒤를 돌아보자 소란이 난 곳은 행화루 쪽이었다.이미 밖으로 나온 마님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시 고개를 돌린 순간, 청하는 깜짝 놀랐다.마님의 걸음이 지나치게 빨랐던 것이다. 그 보폭과 속도는 회임한 몸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민첩했다.이상함을 느낀 청하가 급히 손을 뻗어서 붙잡는 순간, 망토가 단번에 젖혀졌다.하지만, 마님이 아니었다.그 여인은 반사적으로 손바닥으로 청하의 어깨를 내리쳐 단숨에 몸을 뺐다.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선 청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잡아라!”소리치고 나서야 금자가 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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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4화

“제가 데리고 나가겠습니다.”윤수혁은 망토로 그녀의 머리와 몸을 단단히 감싸 품에 안은 채 인파를 피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사이를 비집고 나아가던 중, 그는 검은 색 밀착복을 입은 몇 명의 무인들이 곧장 신수빈이 있던 객실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윤수혁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이도현이 그녀의 곁에 붙여 둔 사람들이었다.윤수혁은 잠시 시선을 멈췄으나 일부러 그들을 부르거나 흔들지 않았다. 그저 아무 말없이 신수빈을 안은 채 더 빠르게 행화루에서 빠져나왔다.이때 거리 역시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평양 후부의 마차가 어디에 세워져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윤수혁은 우선 이곳을 벗어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한편, 청하가 행화루로 되돌아왔을 때, 안에서 사람들이 미친 듯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밀치고, 넘어지고, 밟히는 소리가 뒤섞이며 들렸다.청하는 마님이 있던 건물이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고 사람들의 흐름을 거슬러 안으로 파고들었다. 목이 터져라 울부짖으며 달려갔다.거의 다다랐을 때, 누군가가 절규하듯 외쳤다.“도망쳐요! 건물이 무너집니다!”곧 붕괴될 듯한 건물을 바라보며 청하의 마음은 텅 비어 버렸다.마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자신 역시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서 마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가만히 다가오는 불길과 붕괴를 기다렸다.그 순간, 허리에 강한 힘이 감겼다.튼튼한 팔이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고는 위험한 자리에서 단숨에 구해준 것이었다!청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불빛 속에서 옥처럼 단정하고 귀한 기운을 지닌 젊은 공자가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는 몇 차례 몸을 날려 위에서 떨어지는 목재를 피해냈다.청하는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 그가 마지막 구명줄처럼 느껴졌다.“제발… 제발 저희 마님을 구해주세요. 아직 그 건물 안에 계십니다.”소년 공자는 고개를 돌려 불길에 휩싸인 고층 건물을 바라보았는데,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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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5화

가볍게 다그칠 수도, 그렇다고 강하게 몰아붙일 수도 없으니 차라리 혼자 두고 스스로 돌아보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참고 받아 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는지 그녀 스스로 깨닫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이도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녀가 이토록 끝까지 버티며 단 한 번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암위의 보고에 따르면 그녀는 매일 한가롭고 태연한 나날을 보내며, 여유롭고 평온하게, 불편함이라곤 전혀 없어 보였다고 했다.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도현은 이를 악물었지만, 애써 참으며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녀가 도대체 무슨 힘을 가졌기에 이렇게나 자신을 흔들어 놓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하지만 오늘 밤, 술기운이 오르자 그의 고집스러운 마음도 어느새 한결 느슨해져 있었다. 밝은 달을 올려다보니 문득 그녀가 너무도 보고 싶어진 그였다.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그녀가 몇 마디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이 차갑고 위선적인 얼굴들로 가득한 황성에서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터였다.그가 그녀의 아버지를 후작으로 봉했음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기뻐할까? 그리고 이 지난 시간 동안의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게 될까?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가슴속 충동은 더는 억누르기 어려워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보고 싶었다.이때, 장풍이 급히 달려와 얼굴을 굳힌 채로 보고를 올렸다.“왕야, 큰일이 났습니다. 마님께서 오늘 밤 장공주 마마와 함께 행화루에 나가셨습니다. 장공주 마마께서 돌아가신 뒤, 어떤 자가 마님으로 가장해 그녀의 시녀와 암위들을 모두 따돌렸고, 그 사이 행화루에 큰불이 났다고 합니다. 마님께서 계시던 그 건물이 가장 심하게 불탔고 안으로 뛰어든 호위들 중 살아나온 이는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건물은 이미 붕괴되었습니다.”이도현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한순간에 술기운까지 다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곧장 달려나갔고, 장풍이 그를 뒤따랐다.그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서 태후는 그가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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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6화

지난달 보름날, 그는 그녀에게 이 패를 쥐여 주며 어디에 있든 이 패가 있는 한, 자신이 곁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했었다. 반드시 그녀를 지켜 주겠다고.이도현은 감히 타버린 시신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보지 않으면 스스로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신수빈이 아닐 수도 있다고, 그녀는 아직도 평양 후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그가 떠나던 날,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그를 기다리겠다는 말 한마디였다. 그런데도 그는 한 달 내내 그녀를 공허한 기다림 속에 방치했고, 심지어는 그녀가 보낸 향낭마저 돌려보내며 삼가라고 일러주었다.이도현은 그것을 떠올릴수록 가슴 속에 검은 구멍이 하나씩 더 파이는 것만 같았다. 그 공허가 점점 커져 결국 자신을 삼켜 버릴 것 같았다.돌이킬 수 없는 후회란 언제나 이렇게 찾아오는 법이다. 부황도 그러했고 모후도 그러했다.그리고 이제는 그녀마저 또 하나의 영원한 후회가 되어 버리는 것일까?그때, 통곡하던 금자가 갑자기 울음을 멈췄다.“이상해요.”그녀는 소매로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더니 눈물이 뒤섞인 채로 그을린 시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마님께선 아이를 가진 몸이었잖아요. 배가 이렇게 납작할 리 없습니다. 이 사람은 마님이 아닙니다.”장녕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거의 울 뻔했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감정선이 다 엉망이 되잖아.’하지만 이도현은 그 말에 오히려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시신을 직접 보지 않는 한, 그는 결코 그녀의 죽음을 믿지 않을 생각이었다.금자가 다시 파내려 하려는 순간, 순방영의 병사들이 들이닥쳐 그녀를 막아섰다.불을 끄는 이들,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이들, 그리고 잔해 속에서 생존자를 찾는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장풍, 금군을 불러라. 순방영과 함께 경성을 봉쇄할 것이다. 야간 통행을 금하고 집집마다 의심스러운 자가 없는지 모조리 조사하거라.”이건 분명 그녀를 노린 움직임이었다.그 시각, 신수빈은 대주 왕조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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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7화

신수빈은 그의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띠었다. 윤수혁은 어린 시절부터 돌봐주는 이 하나 없는 환경에서 자라 아주 작은 호의 하나도 오래도록 마음에 새기는 사람이었다.그는 이미 그녀의 목숨을 구한 적도, 수차례 그녀를 도운적도 있었다. 정말 빚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신수빈 쪽일 것이다.“아주버님께서는 이미 저를 몇 번이나 구해 주셨습니다. 은혜를 따지자면 제가 아주버님께 진 빚이 더 크지요.”윤수혁은 부드럽고 차분했다. 그의 눈빛은 따뜻한 햇살 같아 달빛의 쓸쓸한 냉기를 가볍게 덮어주는 듯했다.“제수씨와 저 사이에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신수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 집은 크지 않았다. 앞뒤로 세 채가 이어진 삼진 저택이었는데 경성 한복판에서 이만한 규모라면 이미 부유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폐허가 된걸까?“밤공기가 차니 안으로 들어갑시다.”윤수혁이 뒤쪽의 방채를 가리키자 신수빈은 그를 따라갔다. 문을 여니 오래 비어 있던 집 특유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밤의 정적 속에 기묘하게 퍼졌다. 달빛이 스며든 방 안에는 거미줄로 가득차서 마치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듯 보였다.“겁내지 마세요.”윤수혁이 앞장서며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 불을 밝혔다. 사실 신수빈은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지옥에서 돌아온 몸이었으니.세상에서 가장 큰 악을 본 그녀가 사람보다 귀신을 더 무서워할 리 있겠는가?방 안에는 아직 다 타지 않은 붉은 촛불이 남아 있었고 윤수혁은 그것에 불을 붙였다. 불빛이 살아나자 방 안의 풍경이 또렷해졌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신방이었다.창에는 아직도 희자가 붙어 있었고 가구들 역시 모두 혼례에 맞춰 들인 것들이었다. 특히 붉은 비단 장막과 은근히 비치는 백자천손 무늬의 비단 이불이 눈에 띄었다. 이런 완벽하게 보이는 신방이 어찌 이토록 방치되었던 것일까? 집안이 통째로 떠났다고 해도 이불과 살림살이만큼은 가져갔을 법한데 말이다.“아주버님께서는 어쩌다 이 폐가를 알게 되신 겁니까?”“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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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8화

신수빈은 다시 그 초상화를 바라보았다.어딘가 어색해 보였지만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말로 짚어낼 수가 없었다. 아마도 붓을 잡은 이의 솜씨가 충분하지 않아 인물이 미묘하게 어그러져 보이는 것일 터.그렇게 한참을 보다가 그녀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방 안의 살림들은 모두 새것처럼 보였지만 거미줄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고 탁자 앞에는 책들이 여기저기 놓아져 있었다.신수빈은 다시 탁자 앞에 앉으며 자기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흘렸다.“세상에는 닮은 얼굴이 참 많네요. 저 그림도 아마 그 신과 장원이 자신의 부인을 그린 거겠지요.”지금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만 해도 세명이었다. 태후, 진 씨, 그리고 이 장원 부인까지. 이렇게 따지고 보면 닮은 얼굴의 여인들이 유난히도 많은 것 같았다.“천지에는 세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고 합니다. 형상의 아름다움, 도의 아름다움, 덕의 아름다움. 형상의 아름다움은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이지만 도의 아름다움과 덕의 아름다움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요. 사람을 오래 보아도 싫증 나지 않게 하는 것은 결국 얼굴이 아니라 품성과 도덕입니다.”신수빈은 촛불 너머의 윤수혁을 바라보았는데, 불빛이 흔들리며 그의 눈매를 더욱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아주버님 말씀이 옳아요.”그녀는 문득 하늘이 결국 윤수혁에게는 공평했음을 느꼈다. 어린 시절 그렇게 가혹한 삶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반듯하고 온화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오늘은 중추절이라 본래라면 달을 보고 차를 마셔야 할 밤이죠. 헌데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이런 황폐한 집에서 제수씨를 붙잡아 두고 있으니…”“오늘 행화루에 불이 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다음엔 반드시 길일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외출해야겠어요. 아주버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불길 속에서 죽었을 겁니다. 그러니 폐를 끼친 건 오히려 저지요.”“폐라 할 것도 없습니다. 원래 저는 중추절을 거의 보내지 않으니까요.”신수빈은 그의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늘 밖을 떠돌며 명절에도 돌아올 곳이 없었던 사람.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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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9화

그 소리가 책상 쪽에서 난다는 것을 깨달은 윤수혁이 가까이 다가가자, 쥐 두 마리가 휙 하고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그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담담히 말했다.“쥐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신수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윤수혁이 허리를 굽혀 책들 아래 눌려 있던 선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곧이어 그의 이마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여기에 혈서가 있군요.”윤수혁은 그것을 들고 탁자로 돌아왔다. 읽어 내려갈수록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갔다.신수빈 역시 그 내용이 궁금해졌다.“아주버님, 뭐가 적혀 있습니까?”윤수혁은 잠시 침묵했다. 망설이던 끝에 결국 그 종이를 그녀에게 건넸다.신수빈은 그것을 받아 들고 눈길을 내렸다. 핏빛은 이미 바래 있었지만 글자는 여전히 또렷했다. 한 줄, 또 한 줄 읽어 내려갈수록 그녀의 가슴은 깊고 무겁게 가라앉았다.마지막까지 다 읽었을 때 신수빈의 왼손은 자신도 모르게 꽉 쥐어져 있었고 손톱은 어느새 살을 파고들어 찢고 있었다.윤수혁은 그녀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저는 절대 제수씨를 저런 꼴로 만들지 않을 겁니다.”그러나 신수빈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방금 읽은, 피로 쓴 글귀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그 신과 장원의 아내 역시 이도현에게 짓밟힌 여인이었다. 정식으로 아내로 들일 수는 없으면서 규수의 순결만은 무참히 뺏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유는 단 하나, 그저 태후를 닮았기에...그녀는 이후 자신의 과거를 묻지 않는 한 사내를 만나 진정한 혼인을 얻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도현의 심기를 거슬렸다. 통적과 반역의 죄를 씌워, 출정에 앞서 그 신과를 말 앞에서 참수하며 그의 부인을 억지로 끌어들여 첩으로 삼기까지 했다. 그 여인은 이미 아이를 품고 있었는데 강제로 낙태약을 먹였고, 그 한 그릇의 약은 태아와 함께 여인의 목숨마저 끊어 놓았다.그녀는 자신의 피로 이도현의 죄를 하나하나 적어 내려갔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뒤에 이도현은 한 번도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고 오직 혈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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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0화

이도현은 마지막으로 시신 하나가 들것에 실려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가슴에 매달려 있던 불안이 비로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그러나 곧 또 다른 생각이 스쳤다. 누군가 일부러 그녀의 시녀와 암위들을 유인해 떼어냈다면 그 뒤에 또 다른 수가 숨어 있지 않을까?그는 행화루의 잔해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찾거라. 끝까지 찾아야 한다. 살아있다면 사람을, 죽었다면 시신을 내 앞에 데려오너라. 오늘 밤 이곳을 드나든 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조사하도록!”“명 받들겠습니다.”장녕은 대답하면서도 미간에 근심이 어렸다. 행화루는 보통 주점의 몇 배나 되는 규모였기에 드나드는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데 어떻게 전부 가려낼 수 있단 말인가?그러나 왕야는 지금 분노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장녕은 그저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왕야께서는 우선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끝까지 추적해 보겠습니다.”이도현은 밤새 술을 마셨고 이제 곧 조회도 있었기에, 장녕이 조심스럽게 권했음에도 그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손에 쥔 검은 철패만 응시했다. 결국 장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일일이 수색을 명할 뿐이었다.…윤수혁은 탁자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는 신수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낮에 집안의 중추절 연회를 준비하느라 분주했고 밤에는 행화루의 화재로 놀란 데다 온종일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와 이제 더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촛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창밖에서 스며드는 희미한 달빛 아래 그녀의 피부는 백옥처럼 희고 고왔다. 작은 얼굴에는 피로의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고 관자에 풀린 머리카락이 뺨을 타고 입가로 내려와 그녀의 가느다란 숨결에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윤수혁은 손을 들어 그 머리칼을 정리해 주려 했다. 그러나 손끝이 그녀의 뺨 가까이에 닿았을 때 그는 문득 손을 멈췄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손을 거두고는 창가에 기댔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동이 틀 무렵, 거리의 병사들이 물러났다. 윤수혁은 즉시 신수빈을 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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