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241 - Chapter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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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1화

청하는 신수빈이 화장대 앞에 앉아 윤수혁이 건네준 가면을 얼굴에 붙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얇은 막이 피부에 밀착되는 순간, 눈앞의 여인은 더 이상 신수빈이 아니었다. 낯설 만큼 평범한 얼굴에 청하는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네가 늘 입던 옷 한 벌 가져오거라.”신수빈이 옷을 갈아입고 나서자 그 모습은 더욱 눈에 띄지 않게 변해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용모라,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녀와 다를 바 없었다.신수빈은 잠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청하에게 망토 하나를 가져오게 했다. 어깨에 걸치자 배는 자연스럽게 가려져 회임한 흔적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너는 은보와 함께 갈 테니, 너는 여기 남아 있거라.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말아야 한다.”이도현이 그녀 곁에 심어 둔 눈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의 시선 아래에서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기록되고 있을 테니, 이 인피면구가 아니었다면 그를 속이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신수빈은 우산을 받쳐 들고 밖으로 나섰다. 은보는 마님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저 말없이 따라나섰다.마님이 굳이 변장까지 했다는 건 왕야의 심복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는 걸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더는 묻지 않고, 철저히 가려 주었다.후부를 나선 신수빈은 곧장 천일각으로 향했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 폭우 속에서 얼마나 많은 귀신과 요괴가 제 모습을 숨기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신병문은 신수빈이 한밤중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겉옷을 걸치고 나왔다.문 앞에서 낯선 얼굴을 마주하고 잠시 굳어 있었으나, 신수빈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그녀를 안으로 들이며 사람을 시켜 따뜻한 차를 내오게 했다.“무슨 일이 있기에 이런 시각에 찾아온 것이냐?”“전에 제가 오라버니께 말씀드렸던 양회 염세와 관련된 일 말입니다. 그때 부탁한 미끼 준비되었나요?”“이미 경성에 들어와 있다. 조부께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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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2화

“너는 아마 그에 대한 원망이 마음에 남아 있어 끝내 평정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구나. 한데 그가 권좌에 있던 자로서 내렸던 것은 당시로서는 틀리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후로는 안으로는 여러 친왕들을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남방의 병란을 평정했으니 그 능력만큼은 뛰어난 것이 분명하다.”“일 년 전만 하더라도 예왕이든 섭정왕이든, 혹은 병권을 쥔 다른 황자들 중 누가 즉위했더라도 지금처럼 천하가 하나로 정리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 가가 조정을 어지럽힌다면 그 역시 반드시 눈을 감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빈아, 당사자일수록 길을 잃는 법이다. 네가 그 곁에 오래 있었으면서도 어찌 그의 성정을 제대로 보지 못한단 말이냐?”신수빈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신병문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힌 것이었다.“오라버니께서는 왜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신병문은 고개를 저었다.“우리는 황권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집안이다. 그때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나 역시 모두 알지는 못한다. 그저 예왕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은 뒤에야 사정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지. 섭정왕은 선황의 여러 아들들보다 훨씬 큰 판을 보는 사람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선택이 태후 때문만은 아니었어.”신수빈은 고개를 숙였다. 눈동자에 스친 빛을 모두 거두어 들였다.그의 선택이 일 년 전 태후를 위한 것이었는지 아닌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그가 그녀를 곁에 붙들어 두고 장난감처럼 다룬 이유가 자신이 태후와 닮았기 때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이미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신수빈의 눈빛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설령 그가 눈을 감아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이 빠져나갈 구멍은 있습니다. 십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조정 곳곳에 세력을 심어 놓은 것을 보세요. 장 가는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닙니다. 정양왕과 태후라면 상황이 불리해질 경우 꼬리를 자르고 살아남는 방법을 선택하겠죠. 오기 전부터 생각해 봤습니다. 황성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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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3화

신수빈이 후부로 돌아왔을 때, 비는 이미 그쳐 있었고 하늘은 새벽빛을 띠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밖에 나갔던 사실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시녀의 옷을 벗어 두고 인피면구를 거두어 들이려는 순간, 문밖에서 은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왕야를 뵙습니다.”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안에 있는 신수빈이 듣기에는 충분했다.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번졌다. 만약 그가 자신이 그를 속이고 움직였다는 사실을 안다면…?지금 침상으로 돌아가 눕기에는 이미 늦었다. 신수빈은 숨을 고르고 차라리 정면으로 나서기로 했다.이도현이 들어왔을 때, 그녀가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이렇게 일찍 깨어 있었느냐?”“왕야.”신수빈은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한밤중에 천둥이 쳐서 잠깐 깼는데, 그 뒤로 도무지 잠이 오지 않더군요. 이 사건이 어찌 되었는지 걱정이 되어 마음이 줄곧 편치 않았습니다.”이도현의 안색은 어두웠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손에 닿은 감촉이 유난히 차가웠고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이도현이 고개를 숙였다.“손이 왜 이리도 찬 것이냐?”‘갑자기 돌아온 왕야 때문에 놀라서요.’그 말을 삼킨 채 신수빈은 고개를 숙이고 낮게 답했다.“걱정이 되어서요.”“무엇이 그리 걱정되느냐?”이도현은 그녀를 침상 가장자리에 앉혔다.신수빈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망설이는 기색을 충분히 보인 뒤 불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 셋째 오라버니를 해치려 한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갑니다.”이도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오늘 밤 황성시 안에는 단 한 명의 외부인도 없었고 심문에 관해 아는 자는 모두 그의 심복뿐이었다.“누구냐?”“제가 틀리게 짐작했다고 해도 왕야께서는 부디 노여워하시지 마세요.”신수빈은 먼저 한 발 물러났다.이도현이 그녀를 나무랄 리 없었다.“말해 보거라.”“강회 일대의 관원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제 오라버니는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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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4화

신수빈은 이내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거두었지만, 눈물은 차마 삼킬 수 없어서 그대로 떨어져 가슴을 적셨다.이도현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드러난 턱선과 굳게 다문 입가에서 불쾌감이 숨김없이 읽혔다.“네 마음속에서 본왕은 그렇게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사람이더냐?”신수빈은 강제로 그의 눈을 마주 보게 되었다. 아까부터 이어진 불안한 기색 그대로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이도현은 더는 태후와 얽힌 그 모든 일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남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거슬렸다. 본래라면 몇 마디 꾸짖었을 테지만 지금처럼 눈물에 젖은 그녀를 보니 어떤 말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그녀는 이미 이 일이 장 가의 소행임을 짐작했을 것이고 혹여 그가 장 가를 감싸지 않을까 밤새 불안에 떨었을 터였다. 자신이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억울함을 터뜨린 것도 그 때문임이 분명했다. 이토록 위태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찌 더 몰아붙일 수 있겠는가?이도현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쓸어 맺힌 눈물을 대강 닦아 주었다. 표정은 여전히 냉정했으나 말투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본왕이 언제 장 가를 봐주겠다고 했느냐? 회하 양안의 백성들이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목숨은 건졌으나 삶의 터를 잃었고 원망이 하늘에 닿았지. 이런 판국에 본왕이 화근을 눈감아 준다면 이 씨의 선조와 이 나라의 백성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체 무슨 수로 섭정의 자리에 서서 조정과 민심을 얻겠느냐?”말이 끝나자마자 신수빈의 눈빛이 환해졌다. 그녀는 그의 소매를 붙잡고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왕야의 말씀이 정말인가요? 저를 속이는 건 아니겠지요.”“본왕이 언제 너를 속였더냐?”그제야 신수빈의 미간에 남아 있던 근심이 말끔히 걷혀 있었다. 그녀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그럼, 왕야께서 이렇게 제 셋째 오라버니를 지켜 주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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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5화

신수빈은 이도현을 배웅한 뒤,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그녀가 등을 보이며 멀어질 때, 이도현은 무심한 듯 다시 한 번 그녀를 돌아보았다.그 순간, 발끝 아래에 묻은 진흙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아주 잠깐 멈칫했다.“빈아.”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신수빈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왕야, 무슨 일이신가요?”이도현은 그녀와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잠시 바라보다가 물었다.“오늘 밤, 밖에 나간 적 있느냐?”“없습니다.”신수빈은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이도현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낮게 말했다.“들어가 쉬거라.”그 말을 남기고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여명이 막 트기 시작한 시각, 이도현이 창란원을 벗어나자마자 암위를 불러 세웠다.“부인이 오늘 밤 밖으로 나간 적이 있느냐?”“없습니다.”“방 밖으로도 나오지 않았느냐?”“예. 방을 벗어난 적도 없습니다.”이도현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다시 물었다.“오늘 밤, 창란원에서 누군가 밖으로 나간 적은 없느냐?”암위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비가 올 무렵, 마님 처소에서 시녀 한 명이 나왔고, 은보가 그 시녀를 따라 함께 창란원을 나갔습니다.”“그 시녀의 생김새는?”“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밤이 깊은 데다가 우산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시녀의 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따라가 보았느냐?”“아니요. 좌시위께서 마님의 안전만 지키고 그 외에는 관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그 시녀와 은보는 언제 돌아왔느냐?”이도현의 목소리에는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우울함이 배어 있었다.“왕야께서 오시기 전에 이미 돌아왔습니다.”암위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 덧붙였다.“은보를 불러 확인해 볼까요?”이도현의 표정이 서서히 식어 갔다.“그럴 필요 없다.”그는 그렇게 말하고 곧장 윤부를 떠났다.그래서였군. 그가 돌아왔을 때, 신수빈의 손이 그토록 차가웠던 이유가!그녀는 방금 밖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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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6화

요 며칠, 조정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살이 거세게 뒤틀리고 있었다. 그 기류는 관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장터의 백성들조차도 조정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낄 정도였다.먼저 공부 시랑이 가택 수색을 당해 죄를 물었고 뒤이어 하도 총독이 압송되어 경성으로 올라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관원 수십 명이 연이어 구금되었다. 사정을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단번에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회하 하천 공사 은전 횡령 사건과 얽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처음에는 신 가의 셋째만 연루된 줄 알았으나 이제는 물에 젖은 그물처럼 걸려드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신수빈 또한 그 소문을 전해 들었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 신병문에게 물었고, 답장은 오래되지 않아 도착했다.편지를 다 읽은 뒤 신수빈은 촛불에 불을 붙였다. 종이는 이내 타들어 가며 재로 변했다.과연, 그녀의 짐작이 맞았다.장 가는 결국 최 가 남매를 내세웠다. 다만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잔혹한 방식으로 말이다. 정양왕비 최 씨는 자택에서 스스로 목을 맸는데, 그 거처에서 최문화와 주고받은 서신이 다수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회하 공사 은전 삼십만 냥의 행방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황성시는 서신에 적힌 주소를 따라가 수색을 벌였고 그곳에서 과연 은전 삼십만 냥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곳은 다름 아닌 최문화 명의의 저택이었다.사건이 드러나자 최 가의 가주는 즉각 결단을 내렸다. 최문화를 족보에서 삭제했고 이미 출가한 최 씨 또한 가문에서 완전히 배척했다.신수빈은 창가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바람에 떨어진 몇 잎의 낙엽이 뜰 안에서 빙글빙글 맴돌다가 내려앉았다.장 가와 태후가 최 가에 내민 대가는 분명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씨족의 으뜸이라 불리는 최 가가 이토록 순순히 수사에 협조할 리가 없었다.사람들이 목숨처럼 쫓는 것은 결국 네 가지뿐이다.재물, 권세, 명예, 그리고 가문의 영광.명예와 재물은 최 가에 이미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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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7화

신수빈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은보를 바라보았다.“뭐라고 했느냐? 방금 한 말… 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은보는 이를 악물고 마음을 다잡은 뒤, 그대로 다시 말했다.“왕야께서… 앞으로는 마님께서 주시는 어떤 사사로운 물건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님께서도 스스로 몸가짐을 잘 삼가시라고 하셨습니다.”“하… 하하… 하하하.”신수빈은 그대로 웃음을 터뜨렸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끝내 웃음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자중하라니. 그 말을 그 개 같은 인간이 어떻게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한바탕 웃고 나자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도현이 왜 이런 태도를 취했는지, 왜 굳이 사람을 통해 이렇게 모욕적인 말을 전하게 했는지 하나씩 짚기 시작했다.그와 지낸 세월이 짧지는 않았다. 열을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어도 일곱 여덟은 읽어낼 수 있었다.이런 식의 대응은 이성적인 단절이 아니라 분노가 치밀어 오른 순간에 내뱉는 독한 말에 가까웠다.곰곰이 떠올려 보아도 그를 노골적으로 자극한 일은 없었다.정말로 있었다면 그날 밤이었다. 신발 밑에 묻은 진흙이 그녀가 밖에 나갔다는 사실을 들춰낸 바로 그 순간.그녀는 그 일이 드러났을 때의 후폭풍을 수없이 상상해 왔다. 조정 일에 끼어든 것을 꾸짖어서 신 가에까지 불똥을 튈지, 그동안 공들여 쌓아 온 판이 한순간에 무너질지.그런데 지금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인가? 향낭을 돌려보내고 사람을 시켜 차갑게 선을 긋는 말 한마디 뿐이지 않은가?만약 그가 진심으로 추궁할 생각이었다면 이전처럼 직접 나서서 냉혹하게 몰아붙였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애정의 흔적이나 돌려보내며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을 터.신수빈은 그제야 완전히 안심했다.그녀는 자리에 앉아 태연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자중하라 이거지? 좋아. 누가 먼저 자중하지 못 하는지 어디 한 번 보자고.”은보는 단번에 두 사람이 단단히 어그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왕야는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마님을 찾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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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8화

신수빈은 금자의 달콤한 말에 웃으며 접시 위에 놓인 작은 숟가락으로 석류 알을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응, 정말 달구나.”금자의 얼굴이 단번에 환해졌다. 그녀는 눈웃음까지 번지며 해맑게 말했다.“그럼 마님, 저를 쫓아내거나 태워 버리지는 않으실 거죠? 제가 앞으로 매일매일 마님께 석류를 까 드릴게요.”신수빈은 의아한 표정으로 금자를 바라보았다.“왜 내가 너희를 쫓아내거나 태운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냐?”금자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저랑 언니는 왕야께서 마님 곁에 두라고 보내신 사람들이잖아요. 한데 마님께서 지금 왕야께 화가 나셔서 향낭이랑 허리띠도 다 태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혹시 저희 둘을 보면 마음이 더 상하실까 봐서요.”신수빈은 미처 삼키지 못한 석류 알을 뿜어낼 뻔했다. 급히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기침을 억눌렀다. 예법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 이렇게까지 체면을 잃은 적이 없었다.석류 알을 겨우 뱉어낸 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금자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너 말이야, 정말 사람을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그럼 마님, 저희를 계속 곁에 두실 거죠?”“그럼 어쩌니? 너희까지 같이 태워 버릴까?”금자는 가볍게 웃으며 얼른 예를 갖춰 인사한 후 방 밖으로 뛰어나갔는데, 얼굴엔 걱정이 말끔히 사라진 뒤였다.신수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입가에 걸린 웃음을 거둘 수가 없었다.조정의 흐름 때문에 가슴에 드리웠던 먹먹함도 그 순간만큼은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회하 은전 횡령 사건은 중추절을 앞두고 마침내 결론이 났다.주범은 최문화였다. 그가 중심이 되어 삼십만 냥을 빼돌렸고 그 외 지방 관리들과 공부 시랑 역시 저마다 액수는 달랐으나 모두 횡령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났다.양회 일대의 백성들은 큰 피해를 입었고 섭정왕 이도현은 이 일에 극도로 분노했다.조정 회의에서 그는 분명히 말했다.“중형과 중전이 아니고서는 결코 민심을 다잡을 수 없다.”결국 주동자들은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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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9화

신수빈은 이틀 전에 이미 큰 오라버니에게서 편지를 받았었다. 오늘 셋째 오라버니가 옥에서 풀려난다는 소식이었다.그녀는 새벽부터 몸단장을 마치고 마차에 올라 황성시 감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문득 얼마 전 이도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셋째 오라버니가 풀려나는 날, 자신이 직접 데리고 나오겠다고 했던 말.그런데 결과는 어땠는가?그는 결국 자중하라느니 어쩌느니하면서 말만 번지르르한 약속 하나 지키지 못하는 인간일 뿐이었다.역시 남자는 믿을 게 못 된다.황성시 감옥 앞에는 신병문과 신수빈이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아직 당번 시간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바깥에서 기다렸다. 신병문은 누이의 배가 한층 더 불러온 것을 보고 혹여 무리가 갈까 염려되어 마차에서 쉬라고 권했다.“괜찮아요.”신병문은 곧 다가올 중추절을 떠올리며 물었다.“궁에서 중추 연회가 열린다더구나. 대신들과 명부들이 모두 입궐해 황제와 함께하는 자리라던데 너도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아직 모르겠어요. 예법대로라면 가야 맞지만 지금 상황이 그렇잖아요. 셋째 오라버니는 무죄로 풀려났고 장 가는 삼십만 냥을 토해내며 최 씨 남매까지 잘라냈어요. 태후께서 저를 그냥 두실 리가 없죠. 곤란하게 굴게 뻔합니다.”신수빈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담담히 말을 이었다.“마침 내일쯤 태동이 불안해 조산 기미가 있다는 진단을 핑계로 침상 안정이 필요하다는 사유서를 올릴 생각이에요. 입궐을 피하기 위해서요.”신병문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피해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다. 차라리 섭정왕께 말씀드려 보호를 구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그래야 덜 고생할 텐데 말이야.”신수빈은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 대한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잠시 후, 황성시 감옥의 대문이 열렸다. 관리들이 극히 공손한 태도로 신도연을 밖으로 모셔 나왔다.살은 좀 빠졌지만 눈빛은 여전히 맑았다.신병문은 화로를 준비하게 했고 신수빈은 청하가 건네준 버드나무 가지를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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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0화

좌시위 장풍은 왕야를 힐끗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직접 맞이하러 온다더니 왜 이런 구석에 숨어 몰래 보고 있는 거지? 이건 좀 자중이 없는 거 아닌가?물론 그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 웃지 않는 법쯤은 몸에 밴 지 오래였다.이도현은 그들의 마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잠시 후, 차 안에서 둔중한 소리와 함께 명령이 떨어졌다.“돌아가거라.”좌시위는 왕야의 속내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직접 맞이하겠다고 나선 것도 이도현이었고 보고 나서 혼자 속을 끓이는 것도 그였으니까.설마 반 달 넘게 자신을 찾지 않은 신수빈이 자기가 없어 풀이 죽어 있지는 않을지 확인하러 온 건가?하지만 방금 본 신수빈의 얼굴은 밝아져 있었고 여전히 눈부시게 단정해 보였다. 그것 때문에 왕야의 마음이 괜히 불편해진 것일까 싶었다. 장풍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마부에게 돌아가라 손짓했다.천일각 뒤뜰에서는 신병문이 이른 아침부터 연회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막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하인이 급히 달려와 아뢰었다.“평양 후부에서 명첩과 축하 예물을 보내왔습니다. 셋째 도련님의 누명을 벗고 관직이 오른 것을 축하한다 하며 지금 문밖에 와 있습니다.”신수빈과 신병문은 동시에 눈썹을 치켜올렸다.평양 후부에 이렇게 눈치 빠른 사람이 있었던가?“네가 준비한 것이냐?”“아니에요.”신병문도 누가 보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 사람을 들이게 했다.문을 넘어 들어온 이는 윤수혁이었다. 뜻밖이면서도 어쩐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인물이었다. 아마도 평양 후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사리를 잘 아는 사람이 그였을 것이다.“윤 공자께서 찾아오셨는데 맞이하지 못해 송구합니다.”신병문이 먼저 나서 인사를 건넸다.윤수혁의 시선은 자연스레 막 자리에서 일어선 신수빈에게로 향했다. 같은 윤부에 있었지만 내외원이 갈려 있던 탓에 지난번 이후로는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그날, 미묘한 기척이 드러났던 일을 떠올린 그는 더는 시선을 두지 않고 다시 신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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