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los capítulos de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apítulo 271 - Capítulo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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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1화

신수빈은 온 몸에 쌓인 피로를 씻어 내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저택의 일들은 유능한 관사 어멈들이 알아서 처리하고 있었기에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중요한 결단이 요구되는 일뿐이었고 그 외에는 잠시 한가함 속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막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앞마당 쪽에서 시녀가 전갈을 들고 왔다.“마님, 귀한 손님이 와 계시니 어르신께서 마님을 전각으로 모시라 하십니다.”신수빈은 잠시 멈칫했다.이른 아침에 누구란 말인가?그러자 곁에서 수발 들던 어린 시녀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실례지만 어떤 분이신가요?”“섭정왕이십니다. 어제 밤 행화루 화재에 관한 일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그의 이름이 나오자 신수빈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아침이라 뜰에 사람이 많았고 오늘은 늘 가까이 두는 시녀가 아닌 낯선 아이들이 곁에 붙어 있었다.이도현은 자신이 직접 들이닥칠 틈이 없으니 이런 명분을 만들어 찾아온 것이었다.잠시 침묵한 끝에 그녀는 그의 성정을 떠올렸다. 이미 평양후까지 그를 맞이하러 나갔는데 그녀가 나오지 않는다면 무리하게 안으로 들이닥칠 수도 있었다.“옷을 갈아입겠다.”외원에 도착하자 신수빈은 시녀들을 밖에 남겨 두고 혼자 들어갔다.이도현은 전각에 앉아 계속 문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때로는 일어나 서성거리기도 했다. 그 모습에 평양후조차 그의 초조함을 눈치챌 정도였다.문간에 그녀의 모습이 비치는 순간, 이도현은 벌떡 일어나 두세 걸음 만에 문 앞까지 갔다가 뒤에 있는 평양후를 떠올리고는 억지로 걸음을 멈췄다.평양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젯밤 행화루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이 사나운 인물이 이토록 조급해진 것인가.신수빈이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장대한 뒷모습이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왕야를 뵙습니다. 어르신께도 문안 올립니다.”“어젯밤, 행화루에 있었느냐?”“예.”“섭정왕께서 말씀하시길, 어젯밤의 화재가 매우 중대한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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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화

“어젯밤, 어디에 있었느냐?”이도현은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 손을 놓지 않았다. 위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신수빈의 머릿속에는 이미 준비해 둔 대답이 떠올랐다.“왕야께 아룁니다. 불이 났을 때 장공주께서 돌아오셨는데 신첩은 시녀를 찾지 못해 장공주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날이 밝고 나서야 장공주께서 신첩을 다시 데려다주신 것이지요.”그녀가 다시금 스스로를 ‘신첩’이라 부르며 거리를 두는 듯한 말투를 쓰는 것을 보고 이도현은 그녀의 서운함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조금 힘을 풀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나를 원망하고 있느냐?”신수빈은 그의 눈에 비칠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시선을 피하고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답했다.“감히 그런 마음을 품지 못합니다.”이도현은 본래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얼마 전 조정 일에 손을 댄 것을 이제는 문제 삼지 않겠다고, 설령 무슨 일을 벌였든 그 뒤는 자신이 감당하겠다고.그러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의 마음과 달리 미묘하게 책망 섞인 어조였다.“감히 못 할 일이 있긴 하느냐? 양회의 염세에도 손을 댔으면서 네가 감히 못 할 일이 또 뭐가 있지?”그 말을 듣는 순간, 신수빈은 알았다. 그가 최근 자신을 멀리한 이유는 단지 그날 밤 외출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이도현이 마음먹고 조사한다면 숨길 수 있는 일이란 없었다. 그는 분명 염세 사건의 상인과 신 가의 관계까지 모두 알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비 오는 밤 그녀가 밖으로 나간 일까지 자연스럽게 연결지었을 터였다.신수빈 역시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며칠간 자신을 찾지 않은 데에는 분명 질투와 그녀가 그의 정무에 손댄 것에 대한 불쾌감이 섞여 있다는 것을.그는 본래 정치에 관여하는 여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침상에만 머무는 여인이 아니라는 점이 오히려 그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다만 아직 그녀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었기에 처벌하지 않았을 뿐.지금 그의 목소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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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3화

행궁에서 돌아온 뒤, 조정의 신료들은 곧바로 변화를 알아차렸다.태후가 발을 드리우고 정사를 듣던 그 자리가 사라진 것이다.장 씨 가문이 잠시 반발하려 했지만 강회 수로 문제에 정양왕비가 연루되며 형세가 기울었다. 정양왕은 겉으로 책임을 벗었으나 결국은 힘이 부족했고 이도현이 한번 손을 쓰자 태후의 자리는 그렇게 허망하게 걷혀 버렸다.젊은 황제는 본래 이도현을 두려워했는데 이제 모후마저 물러나자 매사에 그를 의식하게 되었고 신료들 또한 새 황제가 지나치게 나약하다고 여겼기에 중대한 결단이 필요한 일은 곧바로 섭정왕에게 상주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그러나 오늘 신료들조차도 섭정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어딘가 훨씬 누그러져 있었고 심지어 멍하니 생각에 잠기기까지 했다. 이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섭정왕은 개국 조상인 관산왕과 닮아 전장에서도, 조정에서도 늘 강경하고 단호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조회에서 정신을 놓다니.“섭정왕?”여러 차례 불러서야 이도현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마치 깊이 생각하고 있던 사람처럼 태연히 말했다.“계속하거라.”신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다가 아무 말 없이 방금 논하던 내용을 다시 반복했다.주제는 또다시 양회 염세에 관한 문제였다. 반달 넘게 논의했으나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은 사안이었다. 비록 조사를 맡길 인물들이 몇 명 추천되었지만 이도현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이미 문제를 알아차렸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두 세가 깊이 얽힌 가문 출신들이었기에, 결국 그들이 가서 하는 일이라곤 그저 겉치레에 불과했다.양회의 관리들은 그것을 알기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상처 입을 일은 없다는 자신감이었다. 누가 감히 햇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구석을 들추겠는가?조사를 하지 않을 거면 하지 말고 할 거라면 끝을 봐야 한다. 그래서 이도현은 그 누구도 쉽게 허락하지 않은 채 이 일을 계속 미뤄 두고 있었다.이때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상주했다.“신 또한 청하옵니다. 양회로 가 염세를 조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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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4화

측근 내시는 명을 받고 물러났지만, 아직 마음속에서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왕야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평소 옷차림에 아무 관심도 없고, 조복 아니면 늘 단정한 평상복이나 갑옷뿐이던 사람이 언제부터 이런 걸 따지게 된 걸까 싶었다. 잠시 후, 여러 벌의 옷이 안으로 들여보내졌다.검은빛, 감청, 자줏빛 같은, 대개가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색이었다. 평상복이라고 해도 눈에 띄는 색은 거의 없었다.이도현은 문득 모후가 살아있을 때 맞춰 준 한 벌의 비단 옷을 떠올렸다. 그때 그가 그 옷을 입은 모습을 본 모후는 장안에서 가장 빛나는 아들이라며 칭찬해주었다. 그래서 모후가 세상을 떠난 뒤로 이도현은 그 옷을 입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밤 신 씨에게 할 말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그 옷이 생각났다. 모후가 살아 있었다면 신 씨 같은 여인을 좋아했을까?“본왕이 따로 보관하라 했던 그 옛 옷을 가져오거라.”내시뿐 아니라 문 밖에 서 있던 장풍까지 의아해했다.‘왕야는 대체 무슨 바람이 든 걸까? 공작이 꼬리를 펼쳐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잠시 후 옷이 들여보내졌고 이도현은 얼른 그것을 입어보았다. 그와 동시에 장풍은 그의 눈가에서 열두 해 만에 되살아난 소년의 기운을 볼 수 있었다.그러나 그가 거울 앞에 서자 모두가 말문을 잃었다. 열다섯 살의 소년과 지금 한창인 사내가 어찌 같을 리 있겠는가? 그는 이미 체구가 단단해지고 어깨도 넓어졌으며 비단 옷의 단추조차 잠기지 않았다.소년의 밝은 색은 이제 그의 위압적인 체격과 기세에는 어울리지 않았다.이도현은 한동안 거울 속을 바라보다가 결국 옷을 벗어 내시에게 건넸다.“다시 보관하거라. 대신, 본왕이 전에 치워 두라 했던 그 담백한 옷을 가져오거라.”그것은 한 달 전, 신 씨와 함께 그녀의 지참 가게에서 고른 옷이었다. 그는 그 옷을 단 이틀만 입었고 두 사람이 다툰 뒤에는 벗어 두었다. 재질도, 재단도 황실의 옷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이 옷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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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화

이도현은 서란소축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금계화 위로 달빛이 걸릴 때까지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이때 사람을 데리러 간 장풍이 한참 만에 돌아와 머뭇거리며 보고했다.“왕야, 마님께서는 사정이 생겨 오지 못하셨습니다.”“무슨 일이지?”“윤 가의 큰 마님께서 위독하다고 합니다. 마님께서는 정오부터 큰 마님의 곁을 지키고 계셨고 이 일도 저는 금자와 은보에게서 들었습니다.”이도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가 곧 불쾌함으로 굳었다. 그는 이미 신수빈을 자신의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윤 가의 웃어른 앞에서 효도를 하고 있다니... 그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이도현은 냉소를 흘리며 소매를 털었다.“본왕이 직접 가 보겠다.”윤 가에서는 모두의 얼굴이 마치 시든 잎처럼 창백했다. 효심이 어떠한지는 몰라도 큰 마님이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는 공포만큼은 모두가 진심이었다.윤 가의 삼방 남정들은 모두 조정에 이름을 올린 몸이었다. 큰 마님이 돌아가시면 그들은 상복을 입고 벼슬을 내려놓아야 했다. 원래도 높지 않은 관직이었는데 이마저 잃게 되면 다시 벼슬길에 오르기는 더욱 어려워질 터였다.태의가 반나절 내내 침을 놓았으나 호전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윤수혁은 해질 무렵 자리를 떴다가 어둠이 내려앉을 즈음 다시 돌아왔다.태의가 고개를 저으며 침을 거두는 모습은 이미 뒷일을 준비하라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윤수혁은 따뜻한 물 한 그릇을 가져오게 하고는 약환 하나를 풀어 큰 마님께 천천히 먹였다.그 모습을 보고 있는 둘째 마님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큰 마님이 세상을 떠나면 이 집안은 반드시 갈라질 터였다. 지금은 신 씨가 살림을 맡아 이곳저곳을 알뜰히 계산하긴 해도 어쨌든 후작부의 그늘 아래에 있으니 조금이나마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분가한다면? 남편과 아들들 모두 조정에서 존재감이 없게 될 테니 이 가지는 금세 몰락할 게 뻔했다.윤수혁의 손에 들린 검고 알 수 없는 약을 본 순간,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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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6화

그가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자 둘째 마님은 흠칫 놀라 욕설을 뱉으려 했다.그러나 그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차갑고 날카롭게 빛나는 그 눈빛은, 이 집에서 가장 천대받던 서자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그녀를 공포에 빠뜨렸다. 그녀는 한동안 말도 잇지 못했다.윤수혁은 무심한 듯 그녀의 뒤편을 한번 훑어보고는 다시 둘째 마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분노가 없고 텅 빈 듯한 냉기만이 남아 있었다.“둘째 숙모도 아시겠지요. 제 목숨이 얼마나 하찮은 지. 헌데 만약 그 하찮은 목숨 하나 때문에 사촌 동생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때도 지금 한 말을 후회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그 공허한 시선만으로도 둘째 마님은 온몸이 다 서늘해졌다.그렇게 잠시 후, 윤수혁의 눈에서는 이미 그 섬뜩한 기운이 사라져 있었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큰 마님 곁으로 돌아가 약을 먹였다.그제야 둘째 마님은 기세를 되찾은 듯 소리쳤다.“감히! 제가 도련님을 무서워할 줄 압니까? 당신이 대체 뭔데 저를 협박합니까! 당신은 윤 가의 족보에도 이름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 있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어디서 어른 앞에 대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겁니까!”그녀가 아무리 퍼부어도 윤수혁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차분히 큰 마님께 약을 먹이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주었다.둘째 마님은 아까 느낀 공포를 지워 버리려는 듯 더욱 거칠게 욕을 쏟아 냈다. 그러나 단 한 마디도 신수빈을 향해 뱉지는 못했다. 심지어 돌려 말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셋째 마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 없이 큰 마님 곁에 있는 윤수혁을 지켜보고 있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사정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이 집에서 큰방의 서자 장남은 늘 애매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셋째 방의 며느리인 그녀로서는 관여할 이유도, 의욕도 없었다. 학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돌봐 준 것도 아니었다.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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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7화

큰 마님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으나 윤수혁이 몸을 낮춰 그녀에게 귀를 가까이 대자, 그녀는 거의 들리지 않는 숨결로 중얼거렸다.“안 돼... 안 돼...”하지만 기운이 없는 탓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윤수혁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다가 담담하게 말했다.“할머니, 염려 마십시오. 할머니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부디 기운을 차리세요. 제가 반드시 명의를 모셔와 할머니의 병을 낫게 하겠습니다.”큰 마님의 눈동자는 탁하게 흐려 있었고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보였지만 입술만 떨릴 뿐이었다.사람들은 하나 둘 흩어졌다. 이번에도 큰 마님은 가까스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돌아오는 길, 신수빈은 앞서 걷는 윤수혁의 등을 바라보았는데, 어둠 속에 서 있는 그 모습이 유난히도 고독해 보였다.어린 시절, 큰 마님은 아마도 그에게 남은 유일한 따뜻함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마저 잃게 된다면 윤수혁과 이 후부를 잇는 마지막 인연도 끊어지고 말겠지.신수빈은 그동안 그에게 받은 보살핌이 떠올라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이 깊은 내원에서 괜한 말이 오르내리는 것이 두려워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그렇게 마음속으로만 한숨을 쉬며 창란원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뒤에서 윤수혁의 목소리가 들렸다.“잠시만요.”신수빈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달빛 아래, 윤수혁이 그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예를 갖추어 인사하자, 윤수혁이 작은 병 하나를 내밀었다.“아침에 무혁이 제수씨의 시녀가 화상약을 찾는 것을 봤다고 하더군요. 어젯밤 다치셨습니까? 할머니의 약을 구하러 가며 함께 챙긴 것이니 받아 두세요.”신수빈의 시선이 그의 손에 들린 작은 백옥 병에 머물렀다. 그는 이 집에서도 늘 버거운 처지였기에 더는 그에게 짐을 얹고 싶지 않았다.“아주버님께서 마음 써 주신 건 고맙습니다만 저는 다치지 않았어요. 어젯밤 금자가 잔해 속에서 저를 찾다가 손을 덴 것뿐입니다. 이미 의원을 불러 약도 받아 두었어요.”윤수혁은 그녀의 공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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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8화

이도현이 불쾌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에 이도현은 순간 속이 다 뒤집힐 뻔했다. 그는 책상 앞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가 병풍 앞에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본왕이 멈추라 하지 않았느냐?”신수빈은 끌려 돌아서며 이마를 그의 단단한 가슴에 부딪쳤다. 그녀는 이마를 쓸어내리며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왕야, 자중하세요.”그 말에 이도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뜻인가?아침에도 이 말로 그를 막아 세웠으면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이도현은 몸을 숙여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가 내린 눈길을 들여다보았다.“아직 화가 난 것이냐?”“신첩은 감히 그럴 리 없습니다.”또 그 딱딱한 말투였다. 이도현은 답답한 숨을 내뱉었다.“그래서 오늘 본왕의 약속도 거절한 것이냐?”“집안의 조모께서 위독하셨습니다. 손부로서 그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불효지요.”그녀의 목소리는 끝까지 차분하고 어디까지나 격을 지키는 듯했다.이도현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적당히 토라지고 풀면 될 일이다. 본왕은 너를 하루 종일 기다렸다. 지금 화가 많이 쌓인 상태다.”그가 병풍을 지나 안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뒤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신수빈의 목소리가 들렸다.“기다리라고 한 것도 아닌데...”이도현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그는 어쩔 수 없이 입술을 눌러 웃었다. 역시나 성현의 말이 맞았다.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려운 존재였다.그녀가 먼저 그를 속이고 조정의 일에 손을 댔으면서 이제 와서는 모든 것이 그의 탓이 되어 있었다.신수빈이 세정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도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뒤따라 들어갔다. 그녀가 손을 씻고 돌아서자 그는 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로 마지못해 그것을 받아 들었다.“어째서 시녀를 부르지 않는 것이냐?”신수빈은 얼굴을 닦고 아무렇지 않게 수건을 다시 그에게 내밀었다. 마치 하인에게 건네듯.“시녀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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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화

신수빈은 이도현의 입에서 후작으로 봉했다는 말을 듣자 번개처럼 고개를 들었다.“왕야께서 방금 후작으로 봉했다고 하셨나요?”그녀의 눈가에는 아직 눈물이 맺혀 있었고, 크게 뜬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이도현은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을 닦아주었다.“네 둘째 오라버니가 올린 산호가 길조로 해석되었다. 어젯밤 조정의 대신들 앞에서 본왕이 그를 위해후로 봉했지. 오늘 조서가 항주로 내려갔고 작위와 함께 저택도 하사될 것이다. 그러니 곧 네 부모도 상경할 수 있게 되겠지.”신수빈의 가슴이 조용히 흔들렸다. 상인 가문이 벼슬길에 오르는 것조차 어려운데 후작이라니. 대주 왕조의 후작들은 개국 공신이거나 국가에 탁월한 공을 세운 이들만이 받는 자리였다. 그런 작위를 단지 ‘길조’ 하나로 내렸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놀라게 했다.신수빈은 이도현을 바라보며 서서히 깨달았다. 그는 자신에게 깊이 빠져 있었고 이 모든 것은 그녀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의 연장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 애정의 뿌리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과거 그가 그 장원 부인을 탐하던 방식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이도현은 그녀가 깜짝 놀라 고맙다고 말하려는 것도 잊은 줄로만 알고 그녀를 끌어안으며 가볍게 웃었다.“아직도 본왕에게 투정 부릴 생각이냐?”신수빈은 정신을 가다듬고 그의 익숙한 체취 속에서 몸을 부드럽게 풀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이도현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네 부모가 상경하면 본왕이 직접 맞이하러 가겠다. 그럼, 이제 그 누구도 네 출신을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네.”“그때 네가 왕부로 들어와도 상관없다. 황실 종친들이라 해도 아무 말 하지 못할 것이니.”그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자 신수빈은 더는 이어가고 싶지 않아 고개를 들어 물었다.“오늘 밤 왕야께서 이곳에 머무르시나요?”“오늘 온 이유가 바로 이 일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너는 먼저 누워라. 본왕이 씻고 와서 다시 이야기하겠다.”그의 말은 부드러웠으나 신수빈의 가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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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0화

신수빈은 작게 대답하고는, 자연스레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이도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오늘 조정에서 부마가 스스로 나서 양회로 가겠다고 했다. 재능은 있으나 염세라는 것이 그 한 사람 힘으로 파헤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얽힌 세력이 너무 깊고 그 길은 필시 위험하다. 어젯밤, 네가 있던 누각 말고도 옆 동이 하나 더 불타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가운데 실려 나온 시신 하나가 양회 상회 회장이었어. 이렇게 많은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고 하지. 황도 아래에서도 살인과 방화가 일어나는데 하물며 황제의 손이 닿지 않는 양회라면 어떻겠느냐? 부마 혼자서는 부족한 것 같으니 본왕이 다른 사람을 암중에서 붙여 지켜주겠다.”“왕야께서 보내실 사람은 누구입니까?”이도현은 잠시 말이 없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예왕.”신수빈의 심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자기 속셈을 들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왜 하필 예왕인가요? 그분은 세상일에 뜻이 없고 권한도 크지 않은, 그저 한가로운 왕야로만 알고 있는데요.”“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평판이 있으니 강회에 가도 아무도 염세와 연결 짓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놀러 간 줄로 알겠지. 그리고 사족들이 서로 얽혀 움직이는 판에 그들을 눌러 둘 왕족 하나 없으면 부마 같은 신분으로는 경계를 끌어내기 어렵다.”신수빈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조정 깊숙한 곳의 음습한 기류까지 이 남자는 이미 모두 꿰뚫고 있었다.그녀의 맑은 눈빛이 샘물처럼 반짝이자 이도현은 다시 말을 이었다.“본왕이 양회 염세를 그대로 두려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난 몇 해는 전쟁 중이었고 군량이 모자랐지. 상인들은 이익을 쫓아 곡식을 쌓아 두고 내놓지 않았기에 본왕은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은 것이다. 그렇게 작년이 되어서야 국정이 안정되었지만 조정 안에서는 구신과 신진의 다툼, 중원 사족과 관중 귀족의 대립이 여전히 들끓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염세를 파헤치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내후년쯤 본왕이 새 정법을 펼칠 때, 염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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