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311 - Chapter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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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1화

윤수혁의 얼굴이 희미하게 굳어졌다. 천 번, 만 번은 들었던 말이었으나 지금, 신수빈 앞에서 그 말들이 피투성이로 도려내지 듯 까발려지자 그는 마치 자신이 한겨울 밤 한복판에서 옷이 모조리 벗겨진 채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손가락질과 욕을 고스란히 다 뒤집어쓴 셈이었다.“사생아.”“재앙 같은 자식.”그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신수빈은 그가 움켜쥔 두 주먹을 보았는데, 손등 위로 불거진 핏줄이 팽팽히 일어나 있었다. 그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전생의 윤연우 또한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윤수혁과 자신의 아이가 어떻게 그리도 닮아 있는 것일까?이때 신수빈이 낮고 단호하게 꾸짖었다.“대장부는 출신을 묻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나 떳떳하게 행하면 그것으로 군자입니다. 윗세대에 무슨 일이 있었든, 어린아이는 죄가 없습니다. 둘째 숙모께서도 자식이 있는 분이시면서 자식들을 위해 복을 쌓을 생각은 안 하시는 겁니까?”하지만 진 씨는 되레 크게 웃어 보였다.“군자? 저자가 무슨 군자란 말이냐? 세상에 제 아우의 부인을 넘보는 군자가 어디 있단 말이냐!”신수빈의 눈빛이 순간 굳었다. 그때 진 씨가 눈을 가늘게 뜨며 부어오른 얼굴 위로 기묘한 비웃음이 스쳤다.“아, 이제야 알겠구나. 윤서원이 침상에 드러누운 지 오래지. 저 사생아가 혼인도 하지 않는 걸 보니 두 사람이 벌써부터 붙어먹은 게 아니겠느냐? 큰 도련님과 동생 며느리라니, 이 후작부 안에서...”하지만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눈앞이 번쩍하더니 순간 그녀의 목이 단단히 조여왔다. 윤수혁이 손으로 그녀를 뒤로 밀친 것이었다. 곧이어 둘째 마님의 등은 뒤편의 나무에 세게 부딪혔고 가슴이 요동치며 피비린내가 입안으로 치밀었다.찰싹, 찰싹, 찰싹.연달아 맞은 몇 대의 뺨. 이미 부어 있던 얼굴은 더 참혹해져 있었다.진 씨는 피를 한 모금 토해냈는데, 그 속에는 부러진 이 두 개도 섞여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눈앞의 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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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2화

신수빈은 말을 마치자마자 가볍게 몸을 낮춰 예를 올린 뒤, 작별을 고했다.그녀의 발걸음이 멀어질 때까지 윤수혁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윽고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가 고개를 떨군 이유는, 자신의 출신이 비천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가 말한 군자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는 밝지도, 떳떳하지도 않았다.진 씨라는 여인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제수를 마음에 품고 있기에, 만약 그녀가 그의 속내를 알게 된다면 분명 치를 떨며 경멸할 것이었다.그래서 스스로를 극도로 억눌러 왔는데, 누군가가 이미 눈치를 챘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결국 그녀의 명예에 흠이 갈 것이다.이도현은 밤마다 거리낌 없이 그녀의 처소를 드나들 수 있었다. 당당하게 곁에 붙일 시녀와 암위를 배치하고 권세로 모든 길을 열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저 밤이면 지붕 위에 누워 그녀의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등불을 바라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도현은 권력을 사사로이 써서 신 가의 지위를 끌어올렸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분명했다.그 역시 남자였다. 그렇기에 남자의 속셈을 더 잘 알았다.만약 그저 한때의 연극이었다면 체면만 차리고 한 번쯤 정을 나누는 선에서 끝냈을 것이다. 이도현이 강권으로 밀어붙인다면 그녀 또한 가문과 아이를 위해 거부하지 못했을 터였다.하지만 그가 이토록 공을 들여 신 가의 격을 높인 이유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뜻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한때는 그녀가 평생 윤 가에 남아 있기만 한다면 그저 이렇게 곁에서 지켜보며 한 생을 보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그러나 그것조차 이제는 사치가 되어 버렸다.윤수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끝마다 납덩이처럼 무거웠다.권세가 이렇게나 좋은 것이구나.신수빈은 방으로 돌아와 가만히 앉아서 조금 전의 일을 곱씹으며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비록 자신과 윤수혁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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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3화

문 안으로 들어온 그 사람을 본 순간, 신수빈은 잠시 숨을 멈췄다.바로 이도현이었다.갑옷을 걸친 채 온몸에 찬 기운을 두르고 서 있었다. 그가 전투복 차림으로 그녀 앞에 선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고, 처음은 마부에서였다. 그때의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처럼 위엄이 넘치고 눈부셨다.하지만 지금은 마치 패전을 겪고 돌아온 장수처럼 초라해 보였다.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턱에는 푸르스름한 수염이 거칠게 올라와 있었고, 몸에 걸친 갑주는 성을 나서던 그날 그대로였다.그를 안 이후로, 이렇게까지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왕야, 어찌 이리 상하셨습니까?”놀란 목소리가 조심스레 흘러나왔다.그러나 이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한 번에 끌어안았다.갑옷은 차갑고 단단했다. 막 밖에서 들어온 탓에 한기가 그대로 스며 있었다. 신수빈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두툼한 갑옷을 입은 그는 그 차가움을 느끼지 못하는 듯,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숨결은 뜨겁게 흘러내렸다. 그의 몸에서는 먼지와 서리, 오래 씻지 못한 기운이 뒤섞여 났다.신수빈은 잠시 숨을 고르며 낮게 말했다.“방금 돌아오신 겁니까? 물을 데워 들이라 하겠습니다. 왕야, 먼저 몸을 씻으셔야지요.”그녀의 말에 이도현은 낮게 응답했다. 잠시 더 그녀를 안고 있은 후에야 손을 놓았다.두 사람은 마지막 만남에서의 불편한 기색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 청혼에 대한 일도 마치 없었던 일처럼 행동했다.예전과 다름없는 익숙한 호흡 속에서, 신수빈은 능숙하게 그의 갑옷을 풀고 옷을 벗겼다. 이도현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듯했다. 지난번보다 배가 더 불러 있어 허리를 숙일 때마다 여러모로 불편해 보였다.그는 그녀의 팔꿈치를 받쳐 들며 말했다.“그만 두고 쉬어라. 본왕이 하겠다.”신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정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다행이었다. 그가 들어오기 전, 그 편지는 이미 재가 되었고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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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4화

신수빈의 기억 속에서 이도현은 언제나 기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지쳐 보이는 모습은, 실로 처음이었다. 이번에 그가 서남으로 향한 것은 서남 지역의 군사 배치를 위해서였으니, 아마 마음과 몸을 다 쏟아부었을 터였다.어둠 속에서 신수빈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매섭게 울부짖으며, 마치 날 선 칼이 뼛속을 긁어내는 듯한 소리를 냈다.그녀는 손을 뻗어 비단 이불을 끌어올렸다. 밖으로 드러난 그의 팔을 덮어준 뒤, 조용히 그의 품에서 몸을 빼내 등을 돌리고 안쪽을 향해 누웠다.한밤중이 지나자 과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청하는 화로에 숯을 더하러 들어왔다가 마님이 겨울을 유난히 타는 걸 떠올렸다. 섭정왕이 곁에 있어도 세심히 챙기지 못할까 염려되었던 그녀는 살며시 장막 안을 들여다보며 혹여 이불을 걷어찬 것은 아닌지 확인했다.희미한 불빛 아래, 신수빈은 어느새 이도현의 품에 깊이 안겨 있었다. 등은 그의 가슴에 기댄 상태였는데 그 모습은 온몸이 그에게 꼭 맞물려 들어간 듯, 마치 그의 몸에 새겨 넣은 한 조각 같았다.청하는 그렇게 아무 말없이 물러났다.동이 틀 무렵, 창밖에서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마른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신수빈이 눈을 떴다.회임 말기에 접어든 뒤로는 밤잠이 편치 않았다. 한겨울의 차디찬 밤인데도 그녀는 온몸이 달아오른 듯 더웠다.이마와 등에 모두 땀이 맺혀 있었고, 속마저 불편해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이도현이 다시 그녀를 끌어안았다.“아직 이르다... 조금만 더 자거라.”그는 눈도 뜨지 않은 채, 깊은 피로가 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급해... 요.”그제야 이도현은 팔을 풀었고, 신수빈은 침상에서 내려왔다. 이불 밖으로 나오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그녀가 몸을 떨자, 그 기척에 이도현도 완전히 잠에서 깬 듯했다.“이리 추운데 어찌 시녀에게 요강을 장막 안으로 들이라 하지 않았느냐?”신수빈의 뺨이 붉어졌다. 그와 아무리 가까워졌다 해도 그의 앞에서 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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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5화

이도현이 말을 마쳤는데도, 신수빈은 한동안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긴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의 연분홍빛 입술은 삼월의 꽃처럼 곱고 눈동자는 봄 샘물처럼 맑았다. 평소의 영민하고 요염한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그녀는 어딘가 풋풋했다. 마치 규중의 소녀로 돌아간 듯, 순한 얼굴이었다.이도현은 목 안이 서서히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마른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숨결도 점점 가빠졌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그녀를 붙들었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입가를 스칠 듯 말 듯 맴돌았다.“빈아... 본왕은 너를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했다.”그날, 억지로 아이를 지우게 한 이후로 그는 다시는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정무에 쫓겼고 시간을 내어 찾아와도 그녀는 좀처럼 응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그는 그녀의 고집을 받아주었다.그러다 보니 벌써 석 달째가 되었고, 그 뼛속까지 녹아내리는 듯한 감각을 잊은 지 오래였다.신수빈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복잡하게 얽힌 생각을 억눌렀다. 눈앞에 있는 그의 눈동자는 깊고 짙었다. 노골적인 욕망이 숨김없이 번져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굽혀진 무릎 가까이 뜨겁고 단단한 기척이 전해졌다.“왕야, 곧 날이 밝아요...”“금방... 끝내겠다.”달래듯 속삭이는 음성이 낮게 흘리며, 그녀의 말은 곧 그의 입술에 삼켜졌다.며칠 동안 바람과 비를 맞고 달려온 탓인지 그의 입술은 예전보다 거칠었다.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평소처럼 거칠게 몰아붙이지 않았다. 긴 여운과 온기가 더해져 있었다.천하의 형세를 손에 쥔 사람. 전란을 막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온 사람. 황제가 되든 장수가 되든, 그는 분명 뛰어난 인물이었다.신수빈은 두 팔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밖에서는 이미 시녀들이 일어나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당의 눈을 치우라며 유모가 거칠게 하녀들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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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6화

“마님, 밖에 유모들이 대패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네가 먼저 나가서 배치하거라. 늘 하던 대로 처리하고, 은보를 들여보내거라.”“예.”이도현은 금세 씻고 나왔다. 신수빈이 아직도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 있는 걸 보고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겨우 손을 좀 썼을 뿐인데 이리 힘들어하다니. 훗날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마치면 그 체력으로 어찌하려는 것이냐?”그의 눈빛에 놀림이 담겨 있었다. 신수빈은 방금 전 장막 안에서의 억지스러운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괘씸한 마음에 곁에 있던 방석을 집어 던졌다.이도현은 웃으며 방석을 받아 한쪽에 던져 두고 옷자락을 정리하며 그녀 곁에 앉았다.“일어나서 뭐 좀 먹거라. 본왕은 이제 가봐야 한다. 며칠 전 황성시에서 편지가 왔는데, 경성에서 부방도를 훔친 자를 잡았다고 하니 가서 직접 가야 한다. 시간 나면 다시 들르마.”그의 말에 신수빈의 심장이 순간 내려앉았다.속내를 감추려 일부러 눈을 흘기며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시간이 나면이에요. 왕야께서는 그 생각이 나야 저를 찾으시는 거잖아요.”그녀의 눈동자가 요염하게 흔들렸다. 새침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매혹적인 얼굴이었다.이도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못된 것. 갈수록 응석만 늘어나는구나. 본왕이 그 일만 원했다면 불러들일 여인이 많을 텐데, 굳이 네게 오겠느냐?”신수빈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기댔다. 겉으로는 한없이 다정한 모습이었으나 마음속은 차분했다.보나마나 태후 때문이겠지.그 누구보다 자신이 태후와 닮았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예전 장원 부인이 태후를 닮았다 하나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이도현은 그녀를 바라보며 한동안 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비운 며칠 사이 조정의 일이 산처럼 쌓였을 터였다.“본왕은 이만 가보마. 아침만 먹고 조금 더 쉬어라. 집안일은 하인들에게 맡기고. 이제 일곱 달이나 되었으니 무리해서는 안 된다. 몸을 잘 보호해서 무사히 아이를 낳는 것이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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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7화

이도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건 이미 한참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는 거의 잊고 있었건만 신수빈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정말... 본왕이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로 되받아치는구나. 몇백 년도 더 된 일을 아직도 품고 있다니. 그렇게 옛일을 잘 들춰내니, 차라리 호부 통계사에 보내 직을 맡기지 그러느냐?”신수빈은 그의 손을 툭 쳐내고는, 외포를 걸쳐 주며 옷깃을 정리했다.“감히 왕야의 조정 일에 끼어들 생각은 없습니다. 지난번에 하신 훈계, 아직도 잊지 않았거든요.”이도현은 그녀의 그 새침하고도 앙증맞은 모습이 몹시 사랑스러웠다. 허리를 굽혀 입을 맞추려 하자 신수빈이 질색하며 밀어냈다.“따가워요.”그제야 그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몇 번 입을 맞추자 그녀가 금세 고개를 돌리고 말도 하지 않다가 나중에는 더는 협조하지 않던 모습이 생각났다. 이유를 묻자 막 자라난 수염이 따갑다고 했었다.그녀의 피부는 본디 비단결처럼 고왔던 터라 조금만 스쳐도 금세 붉은 자국이 남았다. 하물며 지금처럼 거칠어진 상태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이도현은 낮게 웃으며 그녀의 손끝을 붙잡아 제 입가로 가져갔다.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스치며 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눈빛에는 노골적인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이따가 다시 오겠다. 그땐 부인이 직접 본왕의 수염을 깎아 주거라.”그가 ‘부인’이라 부른 음성은 유난히 길고도 끈적해 신수빈의 귀에는 거의 유혹처럼 들렸다.이 사람은 정말이지 뻔뻔하기 그지없다. 조금 전에는 기어이 서방님이라 부르라며 몰아붙이더니 이제 와서는 또 부인이라니. 누가 그의 부인이란 말인가?그녀는 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손을 빼내어 옷깃을 매만지며 말했다.“밤에 눈이 많이 오면 길이 미끄러울 테니 저를 찾으로 오지 마세요. 이렇게 오래 바깥에 있었으니 며칠은 푹 쉬셔야죠.”“본왕이 알아서 하겠다. 신 가에서 언제 개부 연회를 여는지 미리 알려주거라. 그날 일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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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8화

어째서 서 씨는 그런 눈으로 자신의 배를 바라본 것일까?신수빈은 마음 한구석에 의문을 남겨 두었다.곧이어 윤서원의 방에서 시녀가 나오자 그녀는 서 씨를 데리고 동쪽 사랑채로 향했다. 두 걸음쯤 뒤에서 걷다가 낮은 목소리로 은보에게 일렀다.“금자에게 가서 물어보게 하거라. 최근에 서 씨가 누구를 만났는지.”“예.”지시를 마친 뒤 동쪽 사랑채로 들어섰다. 방금 화로를 들여놓은 탓에 방 안은 아직 냉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서 씨는 곧장 윤서원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마자 시큼하게 썩은 듯한 냄새가 훅 다가왔다. 오래 누워 꼼짝 못 하는 노인의 침상에서 날 법한 역한 느낌이었다.그러자 서 씨의 눈이 즉시 붉어졌다.“신 씨, 네가 내 아들을 어떻게 돌보았기에 이리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이냐?”신수빈은 담담히 답했다.“어머님, 아시다시피 서방님께서는 지금 거동이 불편합니다. 아침 약을 드신 뒤 실금하셨고 방금 막 갈아 드린 참이라 냄새가 좀 심합니다.”“그렇다면 씻겨 주면 될 것 아니냐!”“전에는 자주 씻겨 드렸습니다만, 지금은 몸이 너무 약해지셨습니다. 이 추위에 혹시 감기라도 들면 어떡할까 염려됩니다. 조금 더럽더라도 병을 얻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서 씨는 이를 악물었지만, 신수빈의 말에는 흠을 잡을 것이 없었다.서 씨는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윤서원의 몸을 만져 보았다. 싸늘했다. 그 순간, 신수빈이 정성껏 보살피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방 안에서 그의 아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그런데도 평양후는 저 며느리를 맹신하고 자신의 말은 믿지 않는다니.서 씨는 이불을 들추었다가 윤서원의 검게 그을린 팔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신 씨! 어찌 아직도 이리 낫지 않았단 말이냐?”화상을 입은 지 오래되었건만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신수빈은 그 팔을 힐끗 보았다. 이틀 전, 다시 불을 댄 자리였으니 당연히 나을 리가 없었다.그리고 그녀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화상 약을 써 주었다. 거의 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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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9화

서 씨가 돌아간 뒤, 은보가 다가가 아뢰었다.“가까이 붙어 있을 수가 없어 동쪽 사랑채 발 뒤에 숨어 들었습니다. 후작 부인께서 세자께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더군요. ‘내 말이 맞다면 눈을 깜빡여 보거라’ 하시고는 그 뒤로 귀에 대고 속삭이셔서 저는 듣지 못했습니다. 다 묻고 나서는 한참 우시다가, ‘아들아, 조금만 더 참거라. 어미가 절대 그 천한 것 뜻대로 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고는 떠나셨습니다.”신수빈의 눈썹이 미묘하게 올라갔다. 그녀의 눈빛은 한층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처지인데도 아직도 꾀를 부릴 힘이 남아 있다니.“금자가 돌아오면 다시 이야기하자.”금자는 예전 군중에 있을 때 정탐을 맡았던 아이였다. 나이는 어렸으나 몸놀림이 재빠르고 무엇보다 천진한 얼굴이 상대의 경계를 무너뜨렸다.이 작은 내택에서 무언가를 캐내는 일쯤은 그녀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서 씨 곁을 드나드는 시녀와 유모들의 입을 모조리 털어낼 수 있었다. 서 씨는 한동안 미쳐 날뛰다 약을 먹고는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 며칠 전, 주서화의 뜰에서 온 시녀가 부엌에서 음식을 받다 서 씨 쪽 유모와 말을 섞었으며, 이틀 전에는 서 씨가 몸이 나아지자마자 갑자기 주서화의 거처를 찾았다고도 했다.그녀는 행궁에서 돌아온 뒤로 줄곧 제정신의 상태가 아니었고, 뱀이 있다며 마구 소리를 질러댔었다.더군다나 윤서원이 지금처럼 누워 지내게 된 일에 그녀도 얽혀 있었기에 저택 안 사람들은 거의 손을 놓다시피 했다. 겉으로는 주모 신수빈이 돌본다 했지만 사실상 방치에 가까웠던 것이다. 신수빈은 그녀를 죽게 두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살려 두지도 않았다.그녀의 뜰에는 날마다 뱀이 나타났고 평범한 하녀들은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주종 둘만이 외진 곳에서 ‘요양’이라는 이름 아래 고립되어 있었다.서 씨가 그곳에서 무엇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돌아온 뒤로 다시 광증을 부린 듯 헛소리를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정신이 또렷해지자마자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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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0화

서 씨는 주서화가 떠나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너는 내 아들의 첩이다. 대체 어딜 가겠다는 것이냐?”“지금 서원 오라버니는 마비되어, 이미 신 씨 손에서 떨어졌습니다. 신 씨가 그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어머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미 몸은 망가졌을 겁니다. 제가 이곳에 남아 있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여기 남는다면 그 천한 것에게 짓밟히기만 할 뿐입니다. 떠나야만 저와 서원 오라버니의 원수를 갚을 수 있습니다.”“네가 가 버리면 내 아들은 어찌하느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지금 그녀 뒤에는 섭정왕이 있습니다. 누가 감히 건드리겠습니까? 제가 태후 곁으로 돌아가야 기회가 생깁니다. 섭정왕께서 태후께 품은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와 태후를 비교한다면… 고작 반딧불이 하나가 해와 겨루는 격입니다.”문 밖에서 이를 듣던 신수빈은 이미 짐작은 하고 왔으나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주서화가 말한 편지란 것은 분명 자신에게 불리한 것이었다.최근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주서화를 소홀히 감시한 것이 실수였다. 방금까지도 미쳐 날뛰던 여자가 지금은 또렷한 정신으로 말을 내뱉고 있다니.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세간에 미쳤다는 평판이 자자했기에, 무슨 말을 퍼뜨린다 한들 두려울 것은 없었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미친 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을 테니. 신수빈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의 두 여인은 그녀를 보는 순간 얼어붙었다. 주서화는 온몸을 떨며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신수빈!”그 외침에는 증오와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주서화는 뼈만 남은 모습이었다. 같은 또래였지만, 이미 늙은 노파처럼 초췌해 보였다. 눈은 푹 꺼지고 얼굴은 바짝 말라 있었다.서 씨 또한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신수빈을 보자마자 눈빛에 증오가 불타올랐다.“이 천한 년, 너와 끝을 보겠다!”은보가 재빨리 서 씨를 붙들었다. 신수빈은 무심히 한 번 흘겨보고 담담히 말했다.“어머님께서는 병이 도져 주씨 부인을 찾아와 소란을 피우며 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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