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321 - Chapter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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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1화

신수빈의 표정은 이미 서릿발처럼 차가워져 있었다.주서화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한 점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네 입으로 들을 필요가 있어? 지금 그들은 모두 무사해. 그리고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고.”금자의 손에는 자루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안에서는 무언가가 뒤틀리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기척만으로도 주서화의 얼굴을 새하얗게 질리게 할 수 있었다.“신수빈, 안 돼…”그녀의 이가 딱딱 부딪혔다. 벽 모서리까지 밀려 더 물러설 곳도 없었다.금자가 자루를 풀어 그대로 그녀에게 던졌다. 안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꿈틀거리며 기어나왔다. 바로 뱀들이었다!수십 마리가 바닥을 타고 몸을 비틀며 주서화를 향해 달려들었다.주서화는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그러나 이 외진 뜰에 눈이 쌓인 날, 누가 그녀를 구하러 오겠는가?게다가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미친 여인으로 통했다. 이 뜰에서 어떤 소리가 나든, 하녀와 유모들은 눈보라를 헤치고 달려올 생각조차 하지 않을 터였다.주서화의 발이 한 마리의 몸을 밟는 순간, 뱀이 번개처럼 달려들었다.그녀가 마구 발버둥을 치자 다른 뱀들까지 미친 듯 달려들어 온몸을 휘감았다.“이 계절에 이렇게 많은 뱀을 구하기 쉽지 않았어. 천천히 즐겨.”주서화는 악귀처럼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차라리 죽여! 이렇게 잔인하게 괴롭히다니... 보복이 두렵지도 않아?”그 순간, 신수빈이 웃었다.웃음 속에 눈물이 고였다.“너와 윤서원은 이 말을 할 자격이 없어. 그리고 난 벌을 받는다 해도 상관하지 않아. 원한다면 염라에게 가서 고해. 내가 벌을 두려워했다면 다시 태어날 자격도 없었을 거니까.”본래 겨울잠에 들어야 할 뱀들이 억지로 깨워져 사납게 주서화의 몸을 조였다.“살려줘... 이거 치워! 신수빈, 제발... 난 이제 아무것도 없어. 아이도 잃었고 가진 것도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살려줘...”한 마리가 그녀의 목을 휘감고, 또 다른 뱀이 눈을 향해 달려들었다.주서화는 필사적으로 잡아떼려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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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2화

“마님, 서 씨가 기절했습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니, 혹시 무언가 적어 마님께 해가 될까 염려되어 양손도 못 쓰게 해 두었습니다.”은보의 말이 끝났을 때 신수빈은 이미 표정을 가다듬은 뒤였다. 그녀는 눈을 한 번 내리깔았다가 조용히 말했다.“돌아가자.”서 씨는 마당 한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눈은 여전히 흩날리고 공기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움이었다. 이대로 방치된다면 얼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신수빈은 한 번 흘끗 바라보았을 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전생의 신수빈은 이미 죽었다. 지금 살아 있는 이는 악귀라 해도, 나찰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다시는 짓밟히는 여인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이도현은 눈을 맞으며 왔다.창란원의 본채에 불빛이 없는 것을 보고 혹 이미 잠든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담을 넘으며 무심코 마당 밖 감나무를 밟았다. 새들이 쪼아 먹다 남긴 감 하나가 푹 익어 떨어지며 그의 어깨를 때렸다. 주황빛의 끈적한 과즙이 어깨를 타고 흘러 가슴팍까지 번졌다.이도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창란원으로 들어섰다.본채에 이르자 바깥에서 청하가 작은 등잔불 아래 무언가를 꿰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청하는 그를 보자 급히 일어나 예를 올렸다.“섭정왕께 인사드립니다.”“부인은 자고 있느냐?”“마님께서는 은보와 금자를 데리고 후작 부인 뜰에 가셨습니다. 아마 곧 돌아오실 듯합니다.”“일어나거라.”이도현은 안으로 들어갔다. 청하는 얼른 불을 더 밝히고 화로에 숯을 보탰다.그러다 그의 옷에 묻은 감 자국을 보고는 조심스레 말했다.“왕야, 감나무에 맞으셨습니까?”“응.”“벗어 주십시오. 씻어서 드리겠습니다.”이도현은 겉옷을 벗어 건네며 한마디 덧붙였다.“조심해라. 망치지 말고.”“예.”청하는 옷을 받들며 덧붙였다.“다음부터는 반대편으로 들어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쪽 감나무에는 아직 감이 많이 달려 있습니다. 마님께서 일부러 남겨 두신 것인데 또 맞으시면 어쩌십니까?”이도현은 의아해했다.“왜 남겨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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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3화

이도현의 처음으로 보인 반응은 단 하나였다. 신수빈의 편에 서는 것.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눈물을 보이다니.이도현의 가슴이 조여 들었다.목소리에는 이미 불쾌함이 스며들었고 권위자의 기세가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서 씨냐? 아니면 다른 누구냐?”신수빈은 다시 고개를 젓고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한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은 채 흐느꼈다.“아무도 아니에요… 왕야, 묻지 마세요.”그녀의 울먹임에 이도현의 입술이 굳게 닫히며 단단하 턱선이 드러났으나 끝내 분노를 삼켰다.그는 이내 그녀를 안은 채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녀들은 눈치 빠르게 물러나며 문을 닫아 주었다.이도현은 그녀의 망토를 풀어 한쪽에 던지고 침상 바깥쪽에 누워 몸을 기울여 그녀를 바라보았다.“말하고 싶지 않다면 본왕은 묻지 않겠다. 헌데 본왕이 어떤 일이든 네 뒤에 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네가 괴롭힘을 당하고도 말하지 않으면 내가 어찌 너를 지켜줄 수 있겠느냐?”신수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오는 길에 이미 생각을 정리해 두었다. 이 일은 숨길 수 없었고 태후 쪽에서도 곧 움직일 터였다.“왕야… 제가 화를 저질렀습니다.”눈물 맺힌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를 지키겠다고 매달렸던 때를 제외하면 그 앞에서 이렇게 무너진 적은 없었다.그 눈빛은 무력하고 애처로웠다.이도현의 심장이 갑자기 움켜쥔 듯 아려왔다. 그는 처음으로 가슴이 내려앉는다는 감각을 뚜렷이 느꼈다.강인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워졌다. 마치 그녀를 놀라게 할까 조심하는 듯했다.“두려워 말거라. 내가 누구인지 잊었느냐? 이 세상에 본왕이 감당 못 할 일은 없다. 네가 하늘에 구멍을 뚫어 여와가 다시 꿰매야 할 정도가 아니라면 나머지는 본왕이 다 막아 줄 수 있다.”그의 말은 가볍고 다정했다.신수빈은 잠시 웃을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곧 표정이 다시 가라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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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4화

“빈아, 왜 본왕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내가 너를 어떻게 대했는지 정말 모른단 말이냐?”신수빈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반짝였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이 달싹였으나 끝내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타오르던 불길의 통증은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했다. 쇄혼루에서의 칠 년동안 밤낮없이 이어지던 고통.그 화마는 몸만 태운 것이 아니었다. 사랑도 정도, 남자를 향한 신뢰마저 모조리 태워 버렸다. 이도현은 훌륭한 권력자였다. 자신이 아끼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그녀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그녀의 마지막 목표가 태후라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그 순간, 그녀는 기댈 곳 하나 없는, 벌거벗은 존재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가 베푸는 다정함은 태후를 향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은 의지할 수 있는 뿌리가 아니었다.신수빈은 몸을 일으켜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왕야… 제게 시간을 주세요. 다시 사내를 믿는 법을 배우게요.”그 말은 이도현의 가슴을 조용히 건드렸다. 그제야 그녀의 불안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열일곱의 소녀는 혼인한 후 한평생 사랑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약에 취해 다른 사내의 침상으로 내던져졌다. 그 뒤로도 다시 마씨 집안으로 보내졌다그 모든 일은, 어린 여인에게는 파괴와도 같았다. 남자를 믿지 못하게 되며, 믿을 용기도 잃은 채 살아왔을 터였다.이도현은 문득 이해가 되었다. 궁문 밖에 홀로 서 있던 그 소년의 마음을. 가장 믿었던 이들이 하나 둘 등을 돌리던 날, 닫혀 버린 궁문과 함께 무너져 내렸던 자신의 신념을...비록 벌써 십이 년 전의 일이긴 했지만, 수많은 풍파를 겪은 자신조차 아직 잊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녀는 오죽할까?이도현은 더이상 묻지 않고 팔을 뻗어 그녀를 안아 주었다.그녀를 안는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그때의 소년을 안아 주는 것이기도 했다.“묻지 않고 기다리겠다. 네가 본왕을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 여기게 될 때까지. 네가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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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5화

모든 것이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조금만 마음을 쓰면 그는 기꺼이 그녀의 손 안에서 움직였다. 하지만 이도현의 눈 깊은 곳에 서린 짙은 정을 마주할 때마다 신수빈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그는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눈을 지닌 사람이었기에, 그 시선을 오래 견딜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여 그의 가슴에 기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혹여라도 자신의 가장 차갑고 냉혹한 속내를 들켜 버리는 것은 아닐까?하지만 이도현은 그녀가 피곤한 줄로만 알았다.“쉬어라. 사람을 불러 씻고 정리하게 하겠다.”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신수빈은 그의 턱 아래 푸르게 올라온 수염을 보고 문득 정신을 다잡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아침에 나가시며 오늘 밤에 면도를 하신다 하셨지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괜찮다. 내일 아침에 본왕이 직접 하겠다.”“안 됩니다. 이미 약속하셨는데 어찌 그만두십니까?”그녀는 끝내 그를 붙잡고 밖에 대기하던 시녀를 불렀다.이도현은 그녀의 고집을 보고는 더 말리지 않았다.집 안에 면도 도구는 있었으나 신수빈이 직접 써 본 적은 없었다. 전생에 윤서원과는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고 그는 그녀의 뜰에 거의 오지도 않았다. 따지고 보면 남자의 수염을 깎아 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이도현은 그녀가 칼을 쥔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마치 신병이 자수바늘을 든 것처럼 어색했다.“괜한 고집을 부리더니.”해 본 적도 없으면서 굳이 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이 귀여웠다.신수빈은 괜히 웃음거리가 된 듯해 억울해하며 말했다.“누구나 처음은 있지요. 배워 두어야 다음번엔 능숙하게 모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그 말이 이도현의 귀에는 봄바람처럼 들렸다. 마치 오래된 부부가 자연스럽게 나누는 대화 같이 느껴졌다.신수빈은 조심스레 그의 턱으로 다가갔다. 손끝으로 까슬한 수염을 만지며 살짝 고개를 들어서 그를 바라보았다.“왕야, 무섭지 않으십니까?”“무서울 게 뭐가 있느냐? 베인다 한들 또 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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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6화

이도현의 가슴속의 연민이 더욱 짙어졌다. 그날 밤의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태후에게 약을 받아 정신을 잃은 채, 약기운을 풀겠다고 일부러 다른 여인을 찾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처음이라 분별을 몰랐다고 해야 할까?어느 쪽이든 그는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것이다.”신수빈은 그 말을 조용히 들으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지만 눈빛은 한없이 잔잔했다.“뽕잎 아직 시들지 않아 푸른 기운 짙게 드리웠네.아, 비둘기여, 그 붉은 열매는 탐하지 말라. 사내가 사랑에 빠지면 스스로 헤어날 수 있으되, 여인은 한 번 정에 젖으면 벗어나기 어렵도다.”신수빈은 마침내 그의 턱을 붙들어 수염을 말끔히 밀어냈다. 두어 군데 피부가 긁혀 살이 벌어졌고 한 곳에서는 핏방울이 맺혔지만 이도현은 아픔조차 느끼지 못한 듯 가만히 그저 그녀의 손길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신수빈은 수건으로 조심스레 피를 닦아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다음부터는 하인들에게 맡기세요.”이도현은 거울을 이리저리 비춰 보며 흡족한 듯 웃었다.“익숙해지면 솜씨도 늘지. 게다가 부인의 손은 다른 데에 더 요긴하니.”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꼬리를 살짝 치켜 올린 채 은근히 놀리듯 바라보자 곧바로 뜻을 깨닫게 되었다.그녀는 이도현을 흘겨보며 수건을 그의 턱에 툭 던졌다.“참, 저속하시군요.”신수빈은 말을 마치고 돌아서 침상으로 가버렸다. 이도현은 따라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침상 안의 일을 어찌 저속하다 하겠느냐? 남녀의 정은 물고기와 물 같아 서로 어우러져야 자연스러운 법이지. 네가 지금 아이를 품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 나와 함께 그 기쁨을 다 맛보았을 터인데.”신수빈은 그 화제를 더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등 뒤에서 다시금 뜨거워지는 그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그녀가 그를 쉬게 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 문밖에서 시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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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7화

눈 내리는 밤에 뒤를 따르는 자들마저 모두 금위군이라니.마님이 이 밤중에 입궁한다면 어찌 무사할 수 있겠는가?사람들은 주씨 부인이 죽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기세등등하게 들이닥친 금위군을 보며 태후가 이 일을 가볍게 넘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은보와 금자는 왕야가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두렵지는 않았다.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많은 금위군이 들이닥쳤고 심지어 다른 뜰의 시녀와 유모들까지 문밖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야가 마님의 방에서 걸어나오는 모습이 보인다면 그녀의 명성은 한순간에 무너질 터였다.두 사람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 채, 어떻게든 날이 밝기 전까지 시간을 끌 생각뿐이었다.“명확한 교지는 있으십니까?”황 상궁은 잠시 말을 잃었다.“구두 전교다.”그러자 은보는 더욱 조심스레 나섰다.“마님께서 태후의 뜻을 거스르려는 것이 아닙니다. 허나 분명한 교지 없이, 말 몇 마디로 육삭을 넘긴 일품 고명 부인을 이 눈 오는 밤에 데려가시겠다니, 혹여 누군가 태후의 이름을 빌려 마님을 해하려 든다면 이는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일 아니겠습니까?”황 상궁은 신 씨 곁에 이토록 담대한 시녀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녀는 즉시 노기를 띠며 소리쳤다.“저 둘을 붙들어라!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신 씨를 데려오너라!”금위군은 훈련된 자들이었다. 막 움직이려는 순간, 갑자기 방 안에서 신수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보, 들어오너라.”사람들이 일제히 멈칫했다. 은보는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 다시 밖으로나와 황 상궁 앞에 섰다. 그러고는 손에 든 물건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황 상궁, 안으로 드시지요.”황 상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름아닌 섭정왕의 현철령이었기 때문이다.그는 섭정왕과 윤씨 마님의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몰래 정을 통한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그저 섭정왕이 잠시 흥미를 느껴 남의 아내를 탐하는 것쯤으로 여겼다. 뜰 안에도 총애하는 첩이 있으니 굳이 남의 집에 묵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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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8화

왕야가 나설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단호하게 신수빈을 감싸며 그녀가 입궁하지 못하도록 막아섰다.“본왕의 말이 이해되지 않느냐.”위압적인 기세에 눌린 황 상궁은 식은땀을 흘리며 곧장 머리를 조아렸다.“소인이 곧 돌아가 태후께 아뢰겠사옵니다.”그녀는 허리까지 깊게 숙인 채 천천히 물러났다.조금 전까지 거만하던 황 상궁이 이토록 공손한 모습으로 마님의 방에서 물러나오는 것을 보고 뜰 안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그녀가 금위군을 이끌고 떠나자 뜰에 모였던 이들도 하나둘 흩어졌다.은보와 금자는 그제야 숨을 돌렸다. 오늘 밤 왕야가 계시지 않았다면 태후는 억지로 사람을 끌고 갔을 것이기에, 무슨 수를 써도 막기 어려웠을 것이다.만약 그들이 금위군과 몸싸움이라도 벌였다면 오히려 태후에게 신수빈을 곤란하게 만들 구실만 안겨주었을 터였다.방 안.이도현은 다시 침상에 몸을 눕혔다. 신수빈이 생각에 잠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몸을 돌려 팔꿈치로 상체를 받치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죄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무엇이 죄스럽다는 것이지?”그러자 신수빈은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가 그의 품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왕야께서 오늘 밤 오실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그래서?”“그래서… 감히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말을 마친 뒤,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신수빈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차분한 눈빛 속에 불안이 스며 있었다.“왕야께서 저를 지켜주실 거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마음 놓고 일을 벌일 수 있으니까요.”이도현은 그녀의 두려운 눈빛을 바라보았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굳이 캐묻지 않은 것은 그녀가 스스로 털어놓기를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쩌면 신수빈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고 스스로 한 걸음 다가오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신수빈은 그의 깊어진 눈빛 속에서 희미하게 번지는 감정을 읽어냈다.사람의 심리와 본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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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9화

신혼, 출산, 참혹한 살해, 그리고 불길에 휩싸인 밤…꿈속에서 그녀는 그 모든 일을 다시 겪고 있었다. 벗어나려 애써 몸부림치고 필사적으로 달려 보았지만 사방에서 번지는 화염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이도현은 신수빈의 뒤척임에 잠에서 깼지만, 잠결에도 절망에 찬 울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품에 이불을 꼭 끌어안은 채 마치 새끼를 지키는 어미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려는 듯 입술이 떨렸으나 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이도현은 크게 놀랐다. 순간 행궁으로 가던 길에서도 그녀가 이런 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빈아… 빈아… 눈을 뜨거라!”그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일으켰다. 품에 안은 이불을 떼어내려 손을 뻗는 순간, 그녀가 갑자기 이를 드러내며 물어뜯었다. 예상치 못한 일에 그는 팔을 빼지 못했고 그녀의 이가 그의 팔뚝을 깊이 파고들었다. 마치 살점을 뜯어내려는 듯 사납고도 처절했다.이도현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그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광기 어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처음 보았다. 힘을 주어 밀어내면 그녀의 치아가 망가질 터.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팔에서 피가 흐르도록 그대로 두고 목이 터져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빈아! 깨어나거라!”마침내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이도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평소 봄샘과 가을물처럼 맑던 눈이 지금은 날카로운 증오로 불타고 있었다. 짙은 흑색의 동공 속에는 모두를 끌어안고 함께 파멸하겠다는 듯한 절망과 원한이 들끓고 있었다.마씨 저택 마용을 죽이던 그날보다도 더 깊고 사나운 눈빛이었다.이도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에겐 엄청난 비밀이 있을 것이다. 열일곱 살 여인이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이토록 성정이 뒤틀릴 리는 없었다.그는 다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낮게 달래듯 속삭였다.“빈아, 두려워 말거라. 내가 있다.”가슴이 조여오는 느낌에 무심코 쓰던 호칭조차 잊은 채였다. 도대체 무엇을 겪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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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0화

그의 수단은 매서웠으며, 성격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신수빈이 어찌 그런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이도현의 마음에는 깊은 실망과 무력감이 함께 번졌다. 그녀 같은 여인을 억지로 몰아붙인다면 더 멀어질 뿐이다.그렇다고 부드럽게 기다린다고 해도 그녀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혼자 끌어안고 그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이도현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만두자.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 일 없다면 됐으니, 누워 있어라. 본왕이 처리하고 오겠다.”신수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등불을 밝히고 장막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던 그녀의 정신은 어딘가 떠 있는 듯했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그의 팔에 감긴 간단한 붕대를 바라보았다.“제가 요즘 생각이 많아 밤에 잠을 잘 못 자요. 이렇게 왕야의 휴식까지 방해할 정도라면… 당분간은 밤에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이도현이 이불을 들추려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누워 비단 이불 아래의 그녀를 끌어안았다.“몇 번이나 말했느냐? 이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본왕이 있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그리 걱정하는 것이냐.”신수빈은 그저 그가 밤에 오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잠결에 무슨 말을 내뱉어 그의 의심을 살까 두려웠던 것이다.“모르겠습니다… 아마 출산을 앞둔 불안 때문일 겁니다.”“의원은 언제쯤이라 하더냐?”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말했다.“섣달쯤일 겁니다. 회임 중 겪은 일이 많아 태기가 좋지 않다 하니, 조산할 수도 있다 합니다.”아이의 달수는 더 늦추려 해도 오래 미룰 수가 없었다. 십일월 중순이면 이미 세상에 나와야 할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도현은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괜찮다. 본왕은 시간이 나는 대로 오겠다. 몸이 무거운 지금, 밤에 누군가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오늘처럼 악몽을 꾸면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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