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341 - Chapter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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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1화

신수빈은 입술을 살짝 다물고 웃다가 타박하듯 말했다.“왕야께서 그 일을 매번 마음에 담아 두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은 다 늙는 법이에요. 그리고 제가 언제 왕야를 흉본 적이 있나요?”이도현은 그녀가 예전에 자신을 놀리며 그가 전장에서 군사를 이끌고 싸울 때 그녀는 아직 유모에게 쫓기며 떡을 먹던 아이였다는 말을 했던 일을 늘 기억하고 있었다.그는 콧소리를 두어 번 흘리며 그녀를 따라 안실로 들어섰다.한편 신수빈은 손에 든 두 장의 가죽을 내려다보았는데, 상점에서 정갈하게 손질한 물건과는 달리 다소 거친 느낌이었다.“왕야께서 길거리 좌판에서 사 오신 겁니까?”“응. 이런 혹한에 그들도 빨리 팔아야 하지 않겠느냐?”신수빈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촛불이 아지랑이처럼 번지며 비추고 있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강인한 윤곽 위로 부드러운 빛이 얹혀 사람들 앞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권신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그녀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이도현은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느긋하게 말했다.“내가 한 일은 손을 조금 뻗은 것에 불과하다. 너처럼 세심하게 할 수는 없지. 성 밖에 죽을 베풀고 집안 하인들의 낡은 솜옷까지 나누어 주었다면서.”그의 눈빛은 촛불보다 더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신수빈은 조금 수줍은 듯 말했다.“그저 한가해서 한 일입니다. 제가 직접 하는 것도 아니고 말 한마디면 되는 일이니 어렵지도 않았고요. 전란이 막 그쳤으니 아직 떠돌이 신세인 이들이 많겠지요. 한 그릇 죽과 한 벌 옷이… 누군가에겐 겨울을 버틸 희망이 될지도 모르잖아요.”그녀는 고개를 숙여 불룩해진 배를 내려다보았다.“제 뱃속 아이를 위해 덕을 쌓는 셈이기도 하고요.”이도현의 시선이 그녀의 배를 스쳤다.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탁자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손안에 감싸고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문질렀다.“그렇다면 본왕이 선행을 하는 것은… 훗날 우리 아이를 위한 덕을 쌓는 것이나 다른 바 없겠군.”신수빈은 그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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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2화

이도현이 정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신수빈은 막 말린 머리로 침상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다.그는 자리에 누운 뒤 조정의 일들을 하나 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그쪽은 원래 다루기 까다롭다. 네 셋째 오라버니는 이제 막 관직에 발을 들였으니 재능을 펼치기도 전에 그 지역 사족들의 문생과 고구 인맥부터 상대해야 할 게다.”강회 일대의 사정을 들은 신수빈은 걱정이 앞섰다.“왕야께서는 셋째 오라버니가 일을 그르치거나 남의 계책에 빠질까 염려되지 않으십니까?”이도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린 매도 몇 번은 떨어져 봐야 날개를 펼친다. 본왕도 처음부터 승전만 거둔 것은 아니다. 부황께서 처음 나를 전장에 데려가셨을 때, 소규모 전투를 맡겨 연습하게 하셨는데, 그 당시엔 기세만 앞서 오만한 탓에 몇 차례 패하기도 했지.”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부황께서 내게 맡긴 병사들은 모두 생사를 함께하는 내 전우들이지. 그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알게 되었다. 한 장수가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뼈가 마르는지. 장수든, 관원이든 마찬가지다. 하나의 결심은 수많은 피와 눈물을 대가로 삼는다. 자리가 높아질수록, 잘못의 값은 더 커진다. 네 오라버니는 쓸 만한 인재다. 지금처럼 관직이 낮고 말의 무게가 가벼울 때 몇 번 부딪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편이 훗날에 도움이 될 테니까.”신수빈은 그를 바라보았다.이 사람이 군주가 된다면 분명 사람을 정확히 볼 줄 아는 밝은 임금이 되리라.그녀의 눈에 스친 찰나의 감탄을 이도현은 놓치지 않았다. 그 짧은 시선이 그를 은근히 기쁘게 했다.“부인 덕에 본왕이 쓸 만한 인재 하나를 얻었으니 고맙다고 해야겠군.”신수빈은 애교 섞인 콧소리로 말했다.“기억하셔야지요. 그때 제가 셋째 오라버니를 천거했을 때, 왕야께서는 그리 탐탁지 않아 하셨잖아요.”그러자 이도현이 그녀를 끌어안은 채 팔을 짚고 몸을 기울였다. “본왕이 네게 잘한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않고 서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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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3화

신수빈은 그의 웃음에 묻어있는 감정을 단번에 눈치챘다.심상치 않은 기색이라, 몸을 돌려 외면하려 했지만 이도현의 팔이 먼저 뻗어와 그녀를 다시 끌어왔다.“이 작은 여우 같으니라고. 진지한 이야기가 나오면 도망치기 바쁘구나. 본왕이 꼭 노골적으로 말해야 되겠느냐?”신수빈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이제는 왕야 말씀에 속지 않을 겁니다. 늘 금세 끝내겠다고 하시면서 항상 오래 괴롭히시잖아요. 약속을 지키신 적도 없으시잖아요.”가볍게 토라진 여인의 말투와, 눈살을 찌푸려도 사랑스러움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이도현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다정하게 정리하며 웃어 보였다. 군영에서 장정들이 모여 주고받던 거친 농담들이 문득 떠올랐다. 비록 귀족의 예법 속에서 자라났으나 그런 말들을 전혀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여인들은 원래 장부가 듬직하고 오래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느냐? 헌데 본왕 같은 사람은 싫단 말이냐?”그의 눈썹 사이에 자부심이 스치자, 신수빈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도대체 어느 여인의 말인지, 굳이 지금 꺼낼 필요는 없을 터였다.“지금은 제 몸이 불편해 왕야를 제대로 모실 수도 없는데 다른 방법으로라도 응하는 건 오히려 제가 더 마음이 불편합니다. 차라리 왕야께서….”그의 눈빛이 짙어지자 그녀는 말을 바꾸었다.“왕야께서 혼자 해결하시는 게 낫겠지요.”이도현이 그녀를 흘겨보며 손을 붙잡았다. 잠옷 자락을 걷어 올리고 한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며 일부러 사납게 말했다.“건방진 부인이로군. 오늘 밤 어떻게 혼을 내는지 잘 보거라.”신수빈은 이제 알았다. 이도현은 잠자리에 관해서는, 부드러움에 약하고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에 오히려 더 강해진다는 것을.그가 부군이라 불러 달라 할 때는, 차라리 처음부터 순순히 부르고 목소리를 한껏 낮추는 편이 낫다. 그래야 빨리 풀어주니까.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만족할 때까지 집요하게 어조를 요구했다.*이도현은 결국 자시가 되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만족한 얼굴로 침상가에 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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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4화

신수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국의 군주가 평범한 사내처럼 단 한 여인만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실이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어머님께서는 행복하셨겠어요.”“그래. 그래서 나 또한 행복하길 바라셨지.”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신수빈도 자연스레 자신의 기억을 꺼내 놓게 되었다.“저희 부모님께서도 대부분의 부부와 다를 바 없이 정이 깊으셨지요. 젊었을 적 한동안 크게 다투신 적은 있었던 듯해요. 제가 아주 어릴 때였는데, 어머니께서 크게 노하셔서 조부모님까지 오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몰라요. 유모가 묻지 못하게 했고 어머니께 여쭈어도 표정이 어두우셨거든요. 시간이 흐르면서 일은 지나간 듯했고, 두 분도 다시 평온해지셨어요. 아버지께서는 밖에서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옛집에서 저희 남매를 길러 주셨지요.”이도현은 조용히 말했다.“다투지 않는 부부는 없다. 지금은 부모님이 곁에 계시니 보고 싶을 때마다 찾아가면 되지 않겠느냐? 그리움이 쌓일 틈도 없을 것이다.”“네.”두 사람은 그렇게 누워 한참동안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수빈이 끝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들자, 이도현은 이불을 덮어 준 뒤 그녀를 안은 채 잠들었다.늦게 잠든 탓에 그가 일어날 때 신수빈은 아직도 꿈속이었다.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훤히 떠 있었다. 베개 곁과 목 아래에 놓인 그의 잠옷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왕야는 언제 나가셨느냐?”청하가 살며시 웃었다.“날이 밝기 전에요. 마님을 깨울까 봐 침상 위에서 먼저 잠옷을 벗고, 옷은 밖에 나가 입으셨다니까요.”신수빈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청하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아침상을 들려고 할 때, 바깥마당에서 급한 소식이 전해졌다. 신 가 쪽에서 사람이 왔는데, 급히 마님을 뵙고자 한다는 것이었다.말을 전해준 이는 다름아닌 오라버니의 심복 관리였다. 그는 예를 갖춘 뒤 급히 말했다.“마님, 대감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궁중에서 내관이 갑자기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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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5화

신수빈 또한 태후의 뜻을 짐작할 수 없었으나 낮은 목소리로 어머니를 달랬다.“어머니, 제가 곁에 있을 테니 두려워하지 마세요.”다른 일이라면 신씨 부인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겠지만 궁에서 생긴 일만큼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상가 출신으로 오래동안 살아왔기에,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선 이들을 직접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 두려운 것도 사실이었다.궁중 명부들이 입궁할 때는 이미 연교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들은 내궁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옮길 수 있었고, 영수항을 지나니 태후의 궁과 가까워졌다.오늘은 모녀만 부름을 받은 줄 알았으나 도착하고 보니 달라져 있었다. 마침 태후가 대신들과 부인들도 초청한 것이었다. 이 연회는 큰 의미가 있었다. 해마다 추수 후 가장 먼저 바쳐진 벼로 술을 빚어 그 첫 술을 신료들과 함께 나누었기 때문이다. 풍요와 태평을 기리는 대연이라고도 불린다.행사는 태후의 궁이 아니라, 궁성 안 가장 큰 전각에서 열렸다. 평소 백관들이 조회를 올리던 바로 그곳.내관이 길을 인도하며, 지나치는 전각들의 주인마저 일일이 설명해주었다.“이곳은 근정전입니다. 조회가 열리는 전각과도 바로 이어져 있지요. 섭정왕께서 평소 휴식하시고 정무를 보시는 곳이기도 합니다. 일이 늦어지면 이곳에서 쉬시기도 합니다.”신수빈은 근정전을 올려다보았는데, 엄숙하며 위엄이 있었다. 역시나 역대 천자가 정사를 돌보던 자리 같았다. 지금 이도현이 하는 일은 사실상 천자의 역할과 다를 바 없으니, 사실상 그의 거처와 일상이 황제와 다를 바 없었다. 곧이어 그들은 연회장으로 안내되었는데, 이도현 또한 대전에 자리하고 있었다.그는 신수빈이 신씨 부인과 함께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잔을 든 손이 아주 미세하게 멈춰지며, 눈썹 또한 거의 보이지 않게 좁혀졌다.신수빈은 단번에 그의 놀람을 읽었다. 그에게 전한 소식이 아직 닿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수많은 시선이 모인 자리에서 서로 말을 섞을 수는 없었기에, 이도현이 먼저 내시를 불러 낮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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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6화

태후의 말은 분명했다. 신 가를 달가워하지는 않지만 그가 아끼는 이이기에 체면을 세워주겠다는 뜻이었다. 다만 섭정왕이 제 아들을 잘 보필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라는 경고이기도 했다.술잔이 오가는 소란 속에 대신들은 그들 사이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이도현은 그저 연회장 한가운데서 펼쳐지는 오곡풍등무를 바라보며, 태후가 신수빈에 대한 노골적인 견제를 거두겠다는 타협의 신호를 알아차렸다.그가 태후의 말에 담담히 응한 것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의미와도 같았다.이런 대연은 본디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신수빈처럼 상가 출신에 세가의 배경이 없는 여인에게는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것 외엔 할 일이 없었다. 늘 그렇듯 그리 지나가리라 여겼다.그런데 뜻밖에도 몇몇 부인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이전에 윤 가 연회에서 놀란 규수들의 가족들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신수빈이 즉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달래 준 데다 이후 상처 약까지 보내 주었으니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신수빈이 몸을 추스르며 집에 머무는 탓에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인사를 전하게 되었다고 했다.이도현은 그녀가 외로이 앉아 있을 거라 여겼지만, 그녀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이웃 자리의 부인들과 부드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말은 원만하며 태도는 유연했다.이도현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그녀의 영민함이라면 누구와 마주해도 봄바람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 터였으니 말이다.그녀의 마음이 아직 자신에게 오지 않았을 때도 그랬다. 달갑지 않아 하면서도 말솜씨로 그를 기분 좋게 만들어 놓곤 했다.참으로 교묘한 입을 가진 여인이었다.연회가 절반쯤 무르익자 이 자리의 전통이 이어졌다. 황제가 새로 빚은 술 항아리를 봉인하고 이듬해 풍년이 들면 다시 열어 함께 나누는 의식이었다.어린 황제는 서 있어도 술독보다 키가 작았다. 이도현이 손을 잡아 함께 봉인하러 나섰고 백관이 뒤따랐다.여인들만 남은 자리에서 신씨 부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눈부신 화려함이 신 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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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7화

근정전 앞쪽은 그가 내각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는 곳이었고 뒤쪽은 그가 잠시 몸을 눕히는 침거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내시가 신수빈을 침실 안으로 들인 뒤 물러나자 은보 역시 눈치껏 문밖에 있기로 했다.신수빈은 침상 위에 비스듬히 누운 그를 바라보았다. 긴 다리는 반쯤 침상 밖으로 늘어뜨려져 있었고 옷자락은 침상을 제 것처럼 차지한 채 흩어져 있었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삼키며 다가갔다.그는 팔을 베고 기대어 있었다. 술기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웃는데 문득 윤 가 연회 때 가산동굴에서 보였던 그 장난스러운 시선이 겹쳐 떠올랐다.“왕야.”“신씨 부인은 돌아가셨느냐?”“네.”이도현은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반쯤 품에 가두듯 안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 부드럽고 달콤한 체온은 늘 그를 붙잡았다.“본왕이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거라. 그 누구도 너를 곤란하게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신수빈은 궁에 들어선 순간부터 한 가닥 긴장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태후가 어떤 일을 벌일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품 안에 안기니 자연스레 마음이 느슨해졌다.“태후께서 갑자기 어머니께 고명을 내리셔서 급히 따라 들어왔습니다.”“알고 있다. 네 어머니께 준 품계가 조금 낮았다. 내년엔 본왕이 일품으로 가봉하겠다.”신수빈은 웃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 고명도 본디 억지로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데요. 신 가에 뚜렷한 공도 없는 상황에서 계속 은총을 더하면 괜한 시선만 사게 될 겁니다.”“무슨 소리냐?”그는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낮게 말했다.“너를 낳고, 이렇게 잘 길러 낸 것이 내 가장 큰 공이다.”그의 말은 터무니없었지만 목덜미가 은근히 간지러웠다.신수빈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를 밀어냈다.“빈아, 본왕은 너를 원한다.”장난과 억눌리지 않는 욕망이 섞인 음성이었다.신수빈은 목에 자국이라도 남을까 조심스러웠다.“왕야, 앞 연회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그는 아이처럼 코웃음을 쳤다.“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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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8화

“그야 당연하지.”이도현의 얼굴 위로 자연스레 오만한 기색이 번졌다. 이 말은 그의 모비가 수도 없이 해 주던 말이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었지만 신수빈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묘하게도 마음 깊은 곳의 자부심을 다시 건드렸다.잠시 뒤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린 듯 그녀를 흘겨보았다.“본왕이 지금도 늙은 건 아니다.”신수빈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입술을 눌러 웃었다.“여인은 세월을 걱정하며 아쉬워한다 하지요. 헌데 왕야 같은 사내가 어찌 그리 예민하십니까?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괜히 왕야께서 깊이 생각하셨네요.”“감히 본왕을 놀려?”이도현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간질이려는 듯 손을 움직였다. 일부러 노한 체하는 얼굴이었다.신수빈은 웃으며 손을 잡고 애원했다.“제가 어찌 감히 왕야를 놀리겠습니까? 전부 진심입니다. 젊은 날의 왕야가 찬란한 명주처럼 빛났다면 지금은 한창 장년이시니 위엄은 더욱 깊어지며 기품이 더해졌습니다. 소년 시절엔 없던 침착함까지 갖추셨으니, 지금이야말로 가장 매혹적이실 때지요.”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진심이냐?”“예, 진금보다 더 진심입니다.”신수빈은 거의 맹세라도 할 기세였다.사실 과장이 아니었다. 이도현과 같은 기세와 용모는 실로 드물었다.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술기운이 도는 탓인지 가슴이 묘하게 들떴다.그는 문득 미래를 상상했다. 훗날 아이가 태어난다면, 누구를 닮든 못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의 장점만 닮는다면 얼마나 빛날까.“왕야, 언제 연회로 돌아가실 겁니까?”“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본왕과 조금 더 쉬자. 며칠 뒤 신 가에서 연회가 있다지? 이틀 안에 정무를 마무리해 두겠다. 그날은 본왕이 직접 체면을 세워 주마.”그리고 고개를 숙여 덧붙였다.“다만 이틀 동안은 내가 올 수 없으니 네가 홀로 방을 지켜야겠구나.”신수빈은 속으로 혀를 찼다. 무슨 말을 하든 꼭 저 방향으로 흘러가니 말이다.어젯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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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9화

“말을 삼가세요!”그의 음성에는 분명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이어 더욱 낮게 가라앉은 말이 뒤따랐다.“미쳤습니까? 이 일이 세상에 드러나면 얼마나 큰 파문이 일어날지 아십니까?”“나는… 그저 순간 마음이 급해져서 그런 것뿐이다. 너가 우리 모자를 버릴까 봐…”태후의 목소리는 비통하게 젖어 있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남자의 긴 한숨소리가 들려왔다.“저는 결국 혼인을 해야 합니다. 설령 제 마음속에서 당신을 부인으로 여기더라도,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왕비를 들여야 하지요. 그 여인은 당신을 삼 분쯤 닮았고 당신처럼 총명합니다. 그걸로 충분해요.”이도현의 음색은 몹시 특별했다.분노할 때는 천둥처럼 울렸고 기쁠 때는 맑고 부드러웠으며 정이 깊어질 때는 낮고 눌린 음색이 되었다. 마음에 두었든 아니든, 오래 곁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 숨결 하나까지 잊을 수 없다.지금 그의 목소리는 짙고도 아픈 애착이 서린 음색이었다.신수빈은 눈을 크게 뜬 채, 침상 위에 옆으로 누운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황실의 비밀. 누가 알게 되든, 오래 살지 못할 이야기였다.그녀는 은보에게 눈짓했다. 한 마디 소리도 내지 말라는 신호였다.은보의 얼굴은 이미 창백해져 있었다.“지난번 강회 일로 괜히 너와 다툰 것 같다. 네가 최 가 남매를 대신 죄인으로 세우겠다고 했을 때, 깨달았다. 아직 나를 생각하며, 장 가를 배려하고 있다는 걸. 이제 오라버니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제발 더는 그를 탓하지 말거라.”이도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직 화가 가시지 않은 듯했다.잠시 후, 태후의 음성은 한층 부드러워졌다.여인의 특유한 유혹이 스며 있었다.“현아, 지난번 다툰 뒤로 지금까지 나와 함께 묵지 않았다. 이 깊은 궁은 너무 적막해. 오늘은… 나와 함께 있어 줄 수 없겠느냐?”남자의 숨결이 흐트러졌다.“여긴 안 됩니다. 신 씨가 안쪽에서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그럼… 내 궁은 어떠한가?”“알겠습니다.”앞쪽 의사청이 조용해졌다.신수빈은 길게 숨을 내쉬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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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0화

어린 황제가 그와 그가 사랑한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신수빈의 마음에는 이제 서러움도, 상실감도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대체품임을 알고 있었기에 하루 더 대신하든, 하루 덜 대신하든 마찬가지였다. 이도현이 그녀를 총애해 주는 한, 그것으로 그녀는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황제가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알아차렸다는 걸 눈치채게 된다면...?문득, 회귀 후 처음 궁의 편전에서 그를 마주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가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을 때, 그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서 번뜩이던 살기…신수빈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한편, 태후는 환관 복장을 한 사내를 뒤에 두고 근정전을 나섰다.그리고 이내 마당에서 대기 중이던 내시를 향해 말했다.“기다리지 않겠다. 섭정왕이 돌아오면, 내 궁으로 오라 전하거라.”“예.”태후가 근정전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이도현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는 태후가 근정전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신, 태후를 뵙습니다.”“예는 생략하거라.”“태후께서 근정전에 오신 까닭이 무엇입니까?”“어제 옛 물건을 정리하다가 창고에서 옛날 여 귀비께서 내게 하사하신 것들이 여러 점 나왔다. 그래서 그걸 네게 알리러 온 것이다. 그래도 남긴 물건이니… 사람을 보내 가져가도록 하거라.”여 귀비의 유품은 당시 모두 불태워 황릉에 함께 묻혔다. 넓은 궁전 속에서 이도현은 모비의 마지막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그녀의 유품이 남아 있다는 말에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근정전 정전을 한 번 바라본 뒤, 공손히 말했다.“태후께서 먼저 가십시오. 신이 곧 사람을 보내겠습니다.”“그래도 좋다. 다만 여 귀비께서 친히 그리신 ‘복호도’가 하나 있는데… 지난번 눈이 올 때 창고 창문이 닫히지 않아 습기가 찬 것 같다. 오래 두기 어려울 듯하니 직접 와서 보거라.”그는 그 그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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