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391 - Chapter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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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1화

신수빈은 그들이 어떤 수를 쓰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자신이 그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기에, 쉽게 갈 리가 없었다.그렇다고 내각 대신들이 이 일을 세세히 따질 리도 만무했다. 경성의 다른 귀부인들 역시 회임 중이면 형식적으로 한 번 들렀다가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흠천감은 신령한 체하며 온갖 수작을 부릴 것이고 그때가 되면 자신을 붙잡아 둘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설령 훗날 자신을 천 갈래로 찢는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반드시 윤연우를 무사히 세상에 내보내야 했다.순방영은 위험한 상대를 만났음을 알아차리자 곧바로 손을 휘저으며 명을 내렸다.순식간에 병사들이 모였다.본래 협조하면 공손히 모셔 가지만 거부하면 강제로 끌고 가라는 것이 원칙이었다.조정을 뒤흔드는 일인 만큼 대신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순방영이 데려온 인원은 스무 명 남짓 되었고, 겉보기에는 평범한 두 어린 시녀가 몇 수만에 상대를 모두 쓰러뜨렸다.순방영의 대장은 잠시 말을 잃었다. 오늘만 해도 친왕의 측비조차 순순히 흠천감으로 갔건만 이 윤씨 부인은 감히 거부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시켜 손까지 쓰게 했으니 말이다.“윤씨 부인, 지금 끝까지 명을 거역하시겠다는 것니까?”청하의 부축을 받으며 신수빈이 천천히 안에서 걸어 나왔다.그녀는 마당의 사내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말했다.“장춘도장에게 전하거라. 본부인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순방영의 병사들은 그녀의 빼어난 용모와 단정한 기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한참 만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윤씨 부인, 흠천감의 점괘에 협조만 하시면 됩니다. 별일 없으면 곧바로 모셔다 드릴 것입니다. 각로의 며느리도 다녀갔다가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어찌하여 이토록 일을 크게 만드시는 겁니까?”신수빈은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마당을 한 번 훑어보고는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순방영 대장도 이내 체면을 구긴 채, 사람들을 물리며 창란원에서 철수했다.*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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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2화

스무 명 남짓한 이들이 농담을 던지고 장난을 치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은 순방영 병사들과 얼굴을 아는 사이였지만, 신태안은 그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담을 넘어서 윤 가의 후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뒤뜰에 도착한 그는 사람들에게 물어 곧장 신수빈의 거처로 향했다.“나랑 가자. 내가 너를 성 밖으로 데려다주겠다.”신수빈은 그가 안으로 들어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 몹시 당황했다.“넷째 오라버니, 어떻게 들어오셨어요?”“그건 신경 쓰지 말거라. 밖에 어림군 형제들이 몇 있으니 후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만 빠져나간다면 신 씨 가문은 어찌한단 말인가?“넷째 오라버니, 지금 제가 성을 나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친 죄는 신 씨 가문 전체에 돌아갈 것입니다.”“그건 걱정하지 말거라. 나 혼자서도 널 데리고 나갈 수 있다.”신수빈은 신태안을 바라보다가 그저 조용히 웃었다. 그는 생각이 너무 단순했다. 지금 성을 나서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선택이었다.“넷째 오라버니,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출산이 임박해 몸도 움직일 수 없어요. 오라버니는 돌아가셔서 집안을 지켜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그 뒤로 신태안이 아무리 설득해도 신수빈은 연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바로 그때, 밖을 살피러 나갔던 금자가 급히 보고했다.“마님, 순방영이 전부 물러갔습니다.”신태안은 순간 멈칫했다.“설마 우리 쪽 형제들이 너무 세서 겁먹고 물러난 것이냐?”금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넷째 도련님 혹시 이런 가능성은요? 왕야 때문일지도 모르지요.”“왕야께서 돌아오셨다고?”신태안이 놀란 듯 되물었다.“아니요. 왕야 곁에 있던 좌시위 장풍이 직접 나서서 순방영을 물리쳤습니다.”“아, 아!”그제야 신태안이 상황을 이해한 듯 안도의 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왕야께서 떠나시기 전에 이미 대비를 해두셨다면야 내가 더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너는 안심하고 몸이나 잘 돌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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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3화

궁중.태후는 순방영 병력이 모두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정양왕 세자는 태후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부친께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경성의 금군과 순방영 통령은 모두 섭정왕 사람입니다. 아래 지휘사 몇 명은 겨우 움직일 수 있었지만 순방영 통령이 직접 나서자 그들 역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태후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이도현이 떠난 뒤에 반드시 신 씨 곁에 사람을 붙여둘 것이라 짐작은 했으나 이 정도까지 신경 쓸 줄은 꿈에도 몰랐다.태후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장춘도장에게 전해라. 회임한 여인들은 모두 문제가 없는 듯하나 그 ‘화근’을 찾지 못했으니 누구의 뱃속에 있는지 아직 확정할 수 없다고. 당분간은 돌려보내지 말고 붙들고 있거라 전하거라. 그리고 내일 아침, 소문을 퍼뜨리면 된다. 평양후부의 세자 부인이 협조하지 않아 경성의 모든 회임한 여인들이 발이 묶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고.”정양왕 세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엄지를 치켜세우며 감탄했다.“과연 뛰어나십니다!”순방영과 금군을 움직일 수 없다면 이제는 ‘하늘의 뜻’과 민심으로 밀어붙이면 된다.단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여인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 압박을 신 씨가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태후는 이어서 담담히 말을 이었다.“그리고 오늘 밤, 곧 해산할 여인 몇명을 골라 난산으로 죽게 하거라. 죽은 시신은 모두 흠천감 문 앞에 둬서 가족들이 찾아가게 하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명을 따르지 않은 벌이라 전하거라. 신 씨가 과연 이것마저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정양왕 세자는 연신 태후의 계책을 칭찬하며 힐끔힐끔 그녀 곁을 곁눈질했다.최근 들어 자주 궁에 드나드는 그의 속내를 태후 역시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다만 친조카라고 해서 굳이 회유할 필요는 없었다.진하빈은 고운 용모를 지녔고 이도현에게 버려진 지금, 차라리 자신의 손에 쥐고 쓰는 것이 더 나았다.이 패를 조카에게 넘기기에는 아까웠다.정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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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4화

하지만 이미 늦었다.정양왕이 급히 말을 타고 도착했을 때, 흠천감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들것에 실려 나온 세 명의 산모의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부푼 배를 안은 채, 하반신은 피로 물들어 있었는데, 아기들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뱃속에서 숨을 거둔 듯 했다. 붙잡혀 온 여인들의 가족들은 불안에 떨며 있다가 자신들의 식구임을 알아보는 순간, 일제히 통곡했다. “하늘도 무심하다! 우리 며느리는 다음 달이 출산이었단 말이다! 어제 끌려갈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오늘은 이렇게 죽어 돌아왔으니 이를 어쩐단 말이냐!”“제 부인은 원래 몸이 튼튼해서 조산할 일이 없습니다! 다 당신들이 죽인 겁니다!”세 집안이 격렬하게 따져 들었고 주변 사람들 역시 가족이 아직 안에 갇혀 있는 탓에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바로 그때, 흠천감 사정이 나서며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제, 어떤 여인이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흠천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본래 이 세 산모는 아직 해산할 때가 아니었으나 누군가 하늘의 뜻을 거스른 탓에 하늘이 그 화를 이들에게 내린 것입니다. 오늘 회임한 여인을 흠천감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오늘 밤, 그 화가 누구에게 닥칠지는 본관 또한 알 수 없습니다.”백성들은 본디 천명을 깊이 믿었다. 하늘의 뜻이라는 말만 나오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곤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났을 때, 사정이 기대했던 ‘두려움’ 대신 더 거세진 분노만이 번져갈 뿐이었다.사람들은 어젯밤 퍼진 전서를 손에 들고 소리 높여 외쳤다.“속일 생각 마십시오! 이건 전부 당신 흠천감이랑 장 씨 가문이 꾸민 짓입니다!”썩은 채소와 잔해들이 흠천감 쪽으로 날아들었다.문을 지키던 관리들이 아니었다면 사정 역시 분노한 군중에게 맞아 쓰러졌을 것이다.혼란 속에서 사정은 한 장의 전서를 주워 들었고, 이내 그 안의 글자를 확인하는 순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이건… 이건…산모 셋을 죽인 것이 오히려 스스로의 발등을 찍은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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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5화

장안성 안은 이미 혼란에 빠졌다.두 장의 격문, 두 개의 예언.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백성들로서는 도무지 가려낼 수 없었다.하지만 그 중, 가족이 끌려간 이들은 자연스레 먼저 퍼진 쪽의 말을 더 믿는 것 같았다.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하나가 어찌 하늘의 별을 뒤흔든단 말인가!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혼란은 분명히 흠천감이 만들어낸 일인데도 말이다.이런 종류의 예언이라면 조정이 크게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이번 일은 황위와 직결된 문제였다. 예언이 실제로 맞아떨어진 사례는 역사 속에 수도 없이 많았으니, 대신들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진나라 때 ‘녹도서’에는 ‘진을 멸망시킬 자는 호다’라 적혀 있었고 진시황은 이를 북방 이민족이라 여겨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결국 나라를 망친 것은 그의 아들 호해였다.또한 현종 때, 이순풍이 국운을 점치며 ‘여인이 흥한다’고 말했는데 훗날 그 말 또한 현실이 되었다.지금 떠도는 두 예언은 모두 나라의 존망을 건드리고 있어, 장안의 거리에서는 사람들끼리 만나기만 하면 이 이야기가 오갔고 군사들조차 틈만 나면 몇 마디씩 보탰다.비록 내각에서는 이미 사적인 언급을 금지했지만 흐르는 말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청하는 큰 도련님에게 전할 소식을 들고 천일각으로 향하던 길이었다.마차 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길가의 한 주루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소경과 몹시 닮아 있었다.며칠 전 그가 부탁했던 향낭도 마침 완성했기에 청하는 마부에게 잠시 멈추라 했다.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그는 내려오지 않아, 결국 청하는 직접 주루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문을 들어서던 순간, 건장한 사내 하나와 부딪히고 말았고, 이내 그 사내의 모자가 떨어지려고 했다. 그 순간 드러난 머리 모양은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사내는 모자를 다시 눌러쓰며, 청하를 사납게 노려보고는 그대로 지나갔다.청하는 이내 점소이에게 그의 생김새를 설명하며 물었지만, 본 적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한참 더 기다렸지만 끝내 사람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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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6화

청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 사람은 혼자였습니다. 곁에 다른 이도 없었고, 누구를 만났는지도 알지 못합니다.”장안에 선항족이 나타났다니…!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가슴 깊이 스며드는 듯했다.오늘은 초팔, 이도현이 떠난 지 이미 열엿새가 지난 날이었다.신수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은보, 장풍과 장녕에게 전갈을 보내라. 오늘 성 안에 선항족이 나타났다고. 반드시 왕야께도 전해지도록 해야 한다.”“예, 마님.”만일 이 사태가 조정과 얽혀 있다면, 이번 출정은 아마 이도현조차 예측하지 못한 위험 속으로 들어간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그에게 알려야 했다.*은보가 나간 지 반 시진쯤 되었을까.다시 돌아온 그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빛은 분명하게 흔들리고 있었다.신수빈의 심장이 순간 내려앉았다.은보는 금자와 달리 언제나 침착한 아이였다. 그런 그녀가 이토록 흔들린다는 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무슨 일이냐?”은보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좌위장 장풍이 전해 왔습니다. 선항족이 왔다고 합니다.”신수빈의 눈썹이 서서히 좁혀졌다.“그게… 무슨 뜻이냐?”“선항군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지금 장안에서 불과 십 리 거리입니다. 정찰병이 피투성이로 돌아와 전했는데... 적어도 십오만 대군이라 합니다.”“뭐라고…?!”신수빈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럼 왕야께서는 서사주 쪽으로 향하시던 길에 적을 만나지 못하셨단 말이냐?”은보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 역시 이미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지금은 서사주 쪽 소식이 완전히 끊겼습니다.”*신수빈은 천천히 의자에 주저앉았다.이도현이 떠난 지 보름이 넘었다.그 사이, 선항군은 곧장 장안 앞까지 들이닥쳤다.서사주는 천 리 밖에 있었다. 군량과 병력이 이동하는 동안, 어느 성 하나 장안으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는 건, 처음부터 계획된 움직임이라는 뜻이었다.이도현의 군과 성들을 피해 의도적으로 우회한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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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7화

“선항군이 어째서 장안에 나타난 것이냐? 서사주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태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내각 대신들을 향한 물음에는 이미 감추지 못할 공포가 스며 있었다.분명 들은 바에 따르면 선항족은 서사주에서 소란을 일으켜 이도현을 전선으로 끌어낼 뿐이라 했다.그런데 어째서 이 군세가 장안까지 들이닥쳤단 말인가!도대체, 어디서부터 틀어진 것인가.병부상서는 더는 상황을 따질 겨를도 없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태후 마마, 지금은 그 연유를 따질 때가 아니옵니다. 장안의 병력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선항군이 강공에 나선다면 지금 남아 있는 군세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그의 목소리는 점점 다급해졌다.“성은 결국 함락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서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하지만 태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쟁을 겪어본 적도,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 놓여본 적도 없는 그녀가 대체 여기서 무슨 결정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정양왕은? 정양왕은 어디에 있느냐?”“외성에서 선항군과 교섭 중이옵니다.”정양왕은 선황과 태조를 따라 전장을 누볐던 인물이라, 이 상황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태후는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 성 안의 병력은 얼마나 되느냐?”병부상서는 급히 정리한 장부를 올렸다.“경기 대영에 남은 병력은 만 명 남짓, 금군 오천, 순방영 삼천, 각 관아의 하급 병력까지 합쳐도 모두 이만 명에 불과합니다.”이만 대 십오만.그 숫자만으로도 결과는 이미 정해진 싸움이나 다름없었다.태후의 얼굴이 다시금 창백해졌다. 그녀는 장부를 들 힘조차 사라진 듯, 눈앞이 캄캄했다.바로 그때, 정양왕이 급히 들어왔는데, 그의 관모는 삐뚤어지고 머리칼은 흐트러져 있었으며 볼에는 선명한 혈흔까지 남아 있었다.“정양왕께서 어찌 이리…!”그의 모습에 곧이어 주위에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정양왕은 눈빛에 살기까지 띠고 있었다.선항족 놈들…!십수 년 전, 자신이 그들을 받아들여 살 길을 열어주고 숨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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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화

성을 지키고, 그 여인을 제거해야 한다.이전에는 손을 쓸 수 없었지만 지금은 선항군이 성을 포위한 이 틈을 빌릴 수 있어, 그녀를 없애기에 더없이 알맞은 때였다.장안을 지키지 못하면 모두가 함께 죽겠지만, 설령 지켜낸다 해도 모든 책임은 흠천감의 진 사정에게 돌리면 그만이었다.“대신들의 생각은 어떠합니까?”정양왕은 결정을 내리지 않은 채 조용히 모두의 의견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예언에 관한 일이니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그 침묵을 진사정은 ‘동의’로 받아들였다.그의 눈빛이 더욱 굳어졌다.“하늘이 경고를 내렸다면 마땅히 그 뜻에 따라야 합니다.”그는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신의 생각으로는 그 화근을 품은 여인을 선항군 진영으로 던져야 합니다.”그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리하면 이 재앙이 끊어지며 적군 또한 물러날 것입니다.”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성벽 아래에는 맹수와 같은 적군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회임한 여인을 그곳으로 내던진다면 살아남을 리 없었다.설령 예언이라 해도 이는 명백히 인륜을 거스르는 일이었다.하지만 누가 감히 반대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뜻을 거스른다는 말을 누가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지금 이 상황에서 장안이 무너진다면 반대한 자가 곧 죄인이 된다.하지만 바로 그때, 한 사람이 침묵을 깨고 일어섰다.“헛소리!”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두 군이 맞붙은 마당에 적을 물리칠 방책은 생각하지도 않고, 이런 요괴 같은 술법으로 회임한 여인들을 희생시키겠다고?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로다!”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일어난 이는, 다름아닌 늘 조용히 뒤에 서 있었던 예왕이었다.그가 이토록 강경하게 나설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예왕은 진 사정을 노려보며 말했다.“선항족은 간교하기 그지없다. 섭정왕 숙부께서 친히 출정하실 것을 예상하고 그 군을 피해 장안을 기습했을 가능성이 크다.”그의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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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9화

신수빈의 분노와는 달리 성 아래의 백성들은 군사들이 울부짖으며 애원하는, 회임한 여인들을 억지로 성벽 위로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며 그저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하늘에서 떨어진 돌에 새겨진 예언에서 ‘피가 깃발을 물들이며 왕성을 무너뜨린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선항군이 성을 함락시키는 순간, 이곳의 모든 사람은 죽게 될 것이다.호부상서 정문선도 예왕을 붙잡으려 했지만, 끝내 막지 못했다.예왕은 여전히 앞으로 나서서 군사들을 향해 호통칠 뿐이었다.“성 밖에는 강적이 둘러싸고 있는데 너희는 이 자리에서 여인과 아이를 해치는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냐!”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다.“섭정왕 숙부께서 돌아오시면 이 모든 죄를 묻지 않을 것 같으냐!”군사들의 얼굴에 잠시 두려움이 스쳤다.그들에게 있어 이도현은 패한 적 없는 존재이자 신과도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그때, 정양왕이 갑옷을 입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뒤에는 병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위압감은 순식간에 분위기를 눌렀다.“흠천감에서 이미 점을 쳤다. 섭정왕께서는 패하여 죽었다고 말이다.”정양왕의 목소리는 차가웠다.“헌데 예왕은 진 사정이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막고 있구나.”그의 시선이 이내 예왕을 향했다.“그 의도가 대체 무엇이냐?”예왕은 이를 악물며 답했다.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방사들의 말은 온전히 믿을 수 없습니다.”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지금 장안을 맡은 자라면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그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역사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랑캐가 도성을 포위했을 때 칠만의 병력과 백성들이 싸울 뜻을 굳혔음에도 황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요. 그저 ‘곽경’이라는 도사의 허황된 말만 믿을 뿐이었습니다.”“문을 열고 도술을 펼치면 콩을 뿌려 병사를 만들고 하늘의 군대가 도와줄 것이라 했지요.”그는 낮게 비웃었다.“헌데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적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도성 안으로 밀고 들어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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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0화

선항왕은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며 성 위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경성 사람들은 이런 짓을 참 좋아해. 이미 죽을 지경이면서, 여전히 여인들만 내세우는군.”그러고는 가볍게 턱을 들며 말했다.“마침 우리도 진형을 정비해야 하니, 밤에 공성을 시작하지. 어디 한번, 저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보자고.”그리고 곧이어 벌어진 광경은 선항군마저도 놀라게 했다.그들은 회임한 여인들을 억지로 묶은 뒤, 성벽에서 밧줄로 매달아 그대로 성문 아래로 내려보낸 것이었다. 선항왕이 손을 들어 명했다.“가서 확인해라. 대체 무슨 속셈인지!”잠시 후, 내려보낸 두 여인이 끌려왔는데, 그들은 그저 겁에 질린 채 온몸을 떨고 있을 뿐, 특별한 점이라곤 없었다.그제야 선항왕은 확신했다. 정말로 저들이 이 어리석은 짓을 믿고 있다는 것을. 회임한 여인을 보내면 하늘의 뜻이 바뀌어 군이 물러갈 것이라 생각하다니.그는 하늘마저 자신을 돕는 듯한 이 상황에 크게 웃었다.그리고 그 웃음 뒤에는 차가운 살기가 서려 있었다.그의 명령은 간결했다.“앞으로 끌어내린 후, 옷을 벗기고 능욕하거라.”“예!”처절한 울부짖음 속에서 여인들은 성 앞에 끌려 나왔고,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짐승처럼 무참히 짓밟혔다.성벽 위의 병사들은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그저 이를 악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한 번, 두 번. 그 광경은 계속해서 반복되었고, 결국 여인들의 숨이 모두 끊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뱃속의 아이와 함께…적군은 칼을 꺼내 그들의 배를 가르고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를 꺼내 옆에 걸어둔 솥에 던져 넣었다.성 위에서 이 장면을 본 여인들 중 여럿이 그 자리에서 기절했지만,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새로운 여인들이 아래로 내려 보내지고 있었다.게다가 그 광경을 차마 보지 못하겠는 듯, 한 병사가 움직임을 멈추자 뒤에서 칼이 번쩍이며, 바로 베어졌다.“화근을 없애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거역하는 자는 이 꼴이 날 것이다!”*성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선항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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