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371 - Chapter 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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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1화

의원이 도착하자 신도연은 방으로 돌아갔고 신수빈도 어머니를 따라 함께 안으로 향했다.신 가의 집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신 가 형제들은 앞마당에서 손님들을 배웅하러 나갔고, 윤수혁은 연회청에서 하녀들에게 부축되어 밖으로 나가는 신수빈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조금 전, 모두가 신도연이 자신의 살을 베어 어머니께 돌려드리겠다고 한 그 충격적인 장면에 넋을 잃고 있을 때, 그는 거리낌 없이 신수빈의 눈을 가려 주었다.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끊어질 듯 이어지는 흐느낌이 윤수혁의 생각을 현실로 끌어냈다.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고 있는 진하빈이 보였다.하지만 이내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외면했다.같은 얼굴이라 해도 그녀에게서는 단 한 점의 빛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의원은 신도연의 상처를 꿰매고 있었다.신도연은 피비린내 나는 광경이 될 것을 염려해, 신수빈에게 병풍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안쪽에서는 의원의 한숨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다행히 신 대인께서 제때 기력을 붙잡는 단약을 복용하신 덕분에, 목숨을 건지신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과다 출혈로 몸이 크게 상하셨을 겁니다.”곧이어 신씨 부인의 흐느끼는 울음과 원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신도연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신수빈은 병풍 밖에 앉아 있다가, 문득 그때 윤수혁이 셋째 오라버니에게 먹여 주었던 약이 떠올랐다.의원이 말한, 기력을 붙잡는 단약은 아마 윤수혁이 준 단약일 터였다. 그리고 그 금창약은…이내 그녀의 머릿속에 한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밝고 생기 넘치는 얼굴, 반짝이는 눈동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아이...마침 그때 정 씨도 들어왔다.신수빈이 일어서려 하자 정 씨는 다가와 그녀를 말렸다.“일어나지 말거라.”신수빈이 말했다.“그때 저는 셋째 오라버니의 상처만 신경 쓰느라 연회청에 있던 아주버님을 깜빡했네요. 지금은 이미 가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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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2화

시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정 씨는 그것이 신수빈을 향한 오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신수빈의 뺨 위에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을 보는 순간, 정 씨는 잠시 멍해졌다.그녀는 신수빈이 눈짓으로 말리려고 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동안의 일을 하나도 숨김없이 모두 털어놓았다.신수빈이 어떻게 섭정왕에게 ‘선물’처럼 보내지게 되었는지, 윤 가 사람들이 어떻게 그녀를 붙잡고 피를 빨아먹듯 이용해 왔는지 까지 말이다.위로는 권세 있는 자들의 강압적인 강탈이 있었고, 아래로는 파렴치한 남편과 악독한 첩이 있었다. 신수빈이 그 남자의 권세를 빌리지 않았다면 이미 윤 가에게 산 채로 뜯어먹혀 뼈 한 조각 남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신씨 부인은 놀람과 함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녀는 신수빈을 끌어안은 채로, 한참 동안 울었다.신수빈은 오히려 어쩔 수 없다는 듯, 형수인 정 씨를 한 번 바라본 뒤, 조용히 어머니를 달랬다.“어머니, 다 지난 일이에요. 윤서원은 지금 반신불수가 되었고 그 첩은 이미 죽었습니다. 지금의 시어머니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늘 미친 사람처럼 굴어서 아예 별채에 가둬 두었어요. 늘 저를 괴롭히던 둘째 숙모도 이제는 친정으로 쫓겨났고요. 지금은 집 안팎의 일들을 모두 제가 맡고 있어요.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만 낳고 그 아이에게 세자 봉작만 받게 해 주면 앞으로의 삶은 더 자유로워질 거예요.”신수빈은 이내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그렇게 한참 뒤에야 신씨 부인의 울음이 잦아들었는데, 그녀는 갑자기 오늘 잠깐 스쳐 보았던 그 섭정왕의 얼굴이 떠올랐다.그 눈빛에는 분명한 불만이 서려 있었다.밖에서는 아무리 권세를 휘두르며 세상을 호령한다 해도 자기 딸을 그렇게 짓밟고 모욕한 남자가 어찌 좋은 남자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진 씨가 낳은 그 천한 계집이 이미 그의 후원에 들어가 있지 않은가.신씨 부인의 마음속에는 이도현을 향한 원망과 적개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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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3화

신수빈은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릴 뿐이었다. 그에게 얼굴을 보이고 싶지도 않은 듯했다. 이도현은 그녀의 쓸쓸한 표정을 보고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곧이어 몸을 조금 가까이 옮겨 앉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맞은편에서 그녀의 얼굴은 다정하게 바라보았다.그녀의 피부는 응고된 기름처럼 희고 고와, 빛 아래에서는 거의 투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마치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 같은 연약함. 그런 뺨 위에 남은 붉은 손자국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선명했다.“…누가 그런 것이냐?”이도현이 다시 물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하게 조여 들어오며 억눌린 분노가 스쳤다. 신수빈은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맑은 눈동자에는 이미 얇은 물안개가 서려 있었다.“어머니예요.”이도현은 순간 말을 잃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떤 방법이든지 그녀의 억울함을 풀어 주거나, 대신 갚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그녀의 가족이라면… 말은 달랐다. “왜 너를 때리신 것이냐?”신수빈은 여전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는데, 그 시선 속에는 어느새 원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왜겠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어머니께서는 늘 자식 교육에 엄격한 분이시니까요. 딸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길 바라셨겠죠. 남과 몰래 정을 통하고 염치도 모르는 여자가 되는 걸 원치 않으셨을 겁니다.”말을 이어가던 그녀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쌓여 있던 억울함이 눈물과 함께 흘러내렸다.가느다란 눈물이 뺨을 따라 흘러 이도현의 손등 위로 떨어지자 그는 마치 뜨거운 것에 데인 사람처럼 움찔했다.그리고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품고 있는 억울함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크다는 것을.이도현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닫으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듯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어떻게 달래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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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4화

신수빈은 한참동안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은 이 일에서 이도현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세상에는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일도, 통제할 수 없는 일도 너무 많았다. 다시 태어난 자신도 오늘 같은 일까지 미리 내다볼 수는 없었으니까.마차에 오르던 순간 느꼈던 억울함이 이 순간부터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그녀는 차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오늘 일은 왕야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 잘 알아요. 사람의 마음이란 채워지지 않으니까요. 아버지가 아직 상인이셨을 때 진 씨에게는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을 테니, 굳이 신 가를 건드릴 이유가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높은 지위가 생기니 마음이 흔들린 거겠죠. 왕야께서는 모르고 그런 것이니 탓할 일도 아니고요. 왕야의 호의 또한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녀의 표정이 담담해진 것을 보고, 이도현의 눈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역시 빈이는 가장 이치에 밝은 사람이구나. 내 마음이 참으로 놓인다, 참으로 놓여!”신수빈은 그가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진 것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왕야, 저는 이제 들어가 보겠습니다.”“그래.”그는 그녀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해 여전히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빈아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너를 맞아들이는 일로 결코 사람들에게 험담을 듣게 하지는 않겠다. 장풍이 이미 경기대영에 가서 군의를 모셔 오고 있다. 그는 외상 치료에 가장 뛰어난 의원이니, 네 셋째 오라버니는 괜찮아질 것이다.”“네.”곧이어 이도현의 마차가 떠났다.신수빈은 한동안 뒷문 앞에 서 있다가 청하와 은보가 다른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집 안으로 들어갔다.신 가에서 벌어진 일은 며칠 동안 경성에 떠돌았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사건이 그 화제를 덮어 버렸다.얼마 전부터 경성 전체를 술렁이게 했던 병부 도난 사건에 새로운 단서가 나온 것이다.강양 대도가 서 가를 털면서 남조와 내통했다는 서신이 발견되었고 그 일로 사건이 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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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5화

곧 태후 궁에서 나온 내시가 앞으로 다가와, 공손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세자비 마마, 태후 마마께서는 억울하게 옥에 갇히셨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걱정하셨습니다. 이제 진상이 밝혀져 석방되셨으니, 마마께서는 특별히 세자비를 궁으로 모셔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십니다.”그러나 서 씨는 그 내시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황성시가 언제부터 태후 마마의 명을 받들어 움직이게 했느냐?”그 말에 내시는 순간 멍해졌다.“황성시는 지금 왕야께서 관할하고 계십니다. 비록 태후 마마의 관할이 아니긴 하나 세자비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서 씨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렇군. 방금 네 말을 듣고, 나는 태후 마마께서 내 억울함을 밝혀 주시고 직접 석방해 주신 줄 알았다.”내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때 정양왕 세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은근한 비위를 맞추려 하는 기색이 떠 있었다.“낭화, 고모도 좋은 뜻에서 내관을 보내셨을 거야. 너를 궁으로 모셔가라고 말이야. 네가 옥에 있는 동안 고모께서도 많이 걱정하셨다. 오늘은 궁에 들어가 인사라도 드려야지.”서 씨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그와 혼인한 지 삼 년. 그에게 아이 하나도 낳아 주었고 장 가 어른들을 성심껏 모셨다. 그녀는 장 가가 앞으로 자신이 평생을 의지할 집안이라고 믿었다.그런데 한 번의 재난이 닥치자 비로소 침상 곁의 남자와 시가의 진짜 얼굴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서 씨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는, 한때 가장 익숙했던 그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장 세자, 말 조심하십시오. 지금 저희 두 집안의 인연은 이미 끊겼습니다. 세자께서 모시는 고모는 태후로서 존귀한 분이지만 더 이상 제 가족은 아닙니다. 게다가 저는 이미 내쫓긴 몸이니, 태후 마마를 뵐 면목도 없습니다.”정양왕 세자는 잠시 얼어붙었다. 마치 눈앞의 여자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낭화,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그건 그저 임시방편이었을 뿐이며, 종친 어른들의 결정이었지. 나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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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6화

“그런 말을 왜 여기서 하는 것이냐? 집에 돌아가서 이야기하면 될 일 아니더냐.”하지만 서 씨는 이미 입을 연 이상 이 일을 끝까지 밝히고 싶었다. “원래는 저도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헌데 세자께서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게 더러운 누명을 씌우려 하시지 않았습니까. 내실에서는 부군의 말을 따랐습니다. 헌데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 부덕과 부도덕을 운운하셨습니다. 이건 제 명예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서 가의 체면이 걸린 일입니다. 오늘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면 저는 서 가의 딸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주변에서 구경하던 백성들은 이 상황이 더 커질수록 재미있다는 듯, 서 씨의 말에 박수를 보내며 환호하기 시작했다.정양왕 세자는 체면이 바닥에 떨어진 느낌에 얼굴이 붉어졌다.그는 주변의 구경꾼들을 노려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이렇게 길거리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앞으로 사람들이 우리 딸을 어떻게 보겠느냐? 나와 함께 장 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건, 설마 딸까지 버리겠다는 뜻이냐?”서 씨의 눈썹 사이에는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딸이 아직 어립니다. 헌데 언젠가 자라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게 되면 분명 알게 될 것입니다. 어미인 제가 피와 눈물로 겪은 이 일을 통해 아이는 인생에서 가장 먼저 무엇을 배워야 할지 말입니다. 저의 딸아이는 나중에 혼인은 반드시 인품이 바른 사람과 해야 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과 해야 한다는 도리를 깨닫게 되겠지요. 그리고 여자는 때가 되면 돌아설 줄 알아야지, 부군에게 버림받고도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는 뼈대 없는 나약한 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함께 말입니다.”서 씨의 말에 또 한 번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정양왕 세자는 자신의 체면도 명예도 모두 무너지는 상황에 속이 뒤집혀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서 씨가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모든 것을 말해 버리면 그 소문이 퍼져 나갔을 때 장 가가 어떤 평판을 얻게 될지는 뻔했다.장 가는 여 귀비를 배출한 이후에 태후까지 나오면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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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7화

마차의 문이 열리자 이도현이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그의 모습은 위엄이 넘쳤다. 깊은 못처럼 고요하고 산처럼 우뚝 선 기세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했다.마차 안에는 아직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했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보기도 전에 문은 다시 닫혔다. 이도현의 등장에, 사람들은 서둘러 땅에 엎드렸다.이도현은 노골적인 비웃음을 띤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정양왕 세자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곧 서 씨에게 다가가, 밝은 황색의 두루마리 하나를 건넸다.“폐하의 뜻이 담긴 교지다. 서 씨 낭화는 억울한 죄로 옥에 갇혔고 부군의 집에서까지 버림을 받았으니 이는 조정의 책임이기도 하다. 이에 특별히 교지를 내려 서 씨가 부군의 집과 화이하도록 한다. 서로 갈라져 각자 다시 혼인할 수 있도록 허한다. 서 씨는 온화하고 덕이 깊으니 특별히 숙혜부인의 작위를 내리고 기존의 고명 또한 그대로 유지한다.”이도현의 말이 끝나자, 주변 사람들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서 씨는 원래 부군에게 쫓겨난 몸이었는데 황제의 명으로 지금의 화이가 된 것이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화이한 뒤에도 예전과 같은 고명을 그대로 유지했고, 심지어는 숙혜부인이라는 작위까지 받았다.이제 그녀의 존귀함은 장 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되었다. 한편 서 씨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이 고명이 어디서 갑자기 떨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장 가는 태후의 친정이기에, 장 가가 체면을 잃으면 곧 태후가 체면을 잃는 것과도 같았다. 그런데 태후가 어찌 황제로 하여금 이런 교지를 내리게 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태후가 아니라면 눈앞의 이 섭정왕은, 이도현일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서 가와 이도현에게는 그동안 아무런 왕래도 없었고 서 씨 역시 그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단순히 교지를 전하는 일이라면 굳이 왕야가 직접 올 이유도 없지 않은가. 왜 그가 이렇게까지 서 가의 체면을 세워 주는 것일까?“서 씨, 교지를 받들라.”서 씨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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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8화

서 씨가 더는 이 괴로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이도현의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왜 그러느냐. 그대는 원하지 않는 것이냐?”그 말에 송치연이 고개를 들었는데, 너무 격해진 감정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눈이 이미 젖어 있었다. 믿기지 않는 듯한 기대가 가득 담겨져 있기도 했다. “제가… 가능하겠습니까?”그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멍해졌다.가능하겠냐니? 이건 원한다는 뜻인가, 원치 않는다는 뜻인가.잠시 뒤 송치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신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선비입니다. 어릴 적부터 태원 서가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며 자랐고 그 집안의 적녀인 낭화 아가씨를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어 왔습니다. 젊은 시절 소망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과거에 급제하게 되면, 반드시 혼인을 청하리라. 헌데 급제한 뒤에도 저는 벼슬도, 작위도 없는, 그저 한림원에서 책을 편찬하는 하급 관리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어찌 서 가의 적녀와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이후 그녀가 부모의 뜻에 따라 천자의 하사혼으로 장 가에 시집갔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저 평생 평안하게 바랬습니다. 제 마음속 바람은… 그저 제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었을 뿐, 감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을 듣고 이도현은 잠시 놀란 듯 송치연을 바라보았다.송치연의 눈은 지금 온전히 서 씨에게 향해 있었다.서 씨는 그 자리에서 넋을 잃은 듯 서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듯했다.송치연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오늘 왕야께서 물으셨으니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습니다. 저 송치연은 평생 서 씨 낭화 외에는 다른 여인을 부인으로 맞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저에게 시집와 준다면 그것은 제 삼생의 복일 것입니다. 헌데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저는 평생 혼인하지 않겠습니다.”이도현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갔다.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 서 씨를 바라보았다.“서 씨, 들었느냐?”서 씨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송치연을 바라보았다.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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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9화

신수빈도 그와 함께한 시간이 길었으니 그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지금은 어쨌든 가장 손에 잘 맞는 도구였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 덕분에 그에게 작은 보상도 아끼지 않았다.몸을 살짝 기울여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숨결. 닿는 순간 마치 구름 위에 서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그녀가 먼저 입을 맞추는 일은 드물었다. 대개는 그에게 이끌려 마지못해 응할 뿐이었다. 정말 기쁠 때가 아니라면 말이다.신수빈은 그가 순간 몸을 굳히는 것을 보고 입술을 눌러 미소 지었다.“보상이에요.”그녀는 마치 잠자리 한 마리가 물을 스치듯 가볍게 입맞춤만 남겼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갈증을 단숨에 끌어올렸다.하지만 다시 단정히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에 이도현의 마음에 못마땅함이 스며들었다.“인색하군.”그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큰 손으로 그녀의 뒷목을 잡아 피할 틈도 주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입맞춤 같은 일은 언제나 자신이 주도하는 편이 더 좋았다.그녀의 눈빛이 놀람에서 부끄러움으로, 그리고 마침내 애처로운 간청으로 변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이상할 만큼 즐거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끝없는 다정함이 흘러나왔다. 그의 움직임도 점점 더 부드러워졌다.한참이 지나 더 큰 불길이 번지기 전에 그는 천천히 물러났다. 손을 들어 그녀의 붉은 입술과 짙은 눈썹을 천천히 더듬었다. 그 어느 것 하나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그녀는 마치 봄의 샘물에 가을 물빛이 비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성이 난 듯, 그런데 또 어딘가는 다정한, 마치 마음대로 취해도 좋다는 듯한 모습이었다.이도현은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이게 진짜 보상이지.”신수빈은 이제야 깨달았다. 남녀 사이의 일에 있어서 그는 늘 이렇게 강하게 밀어붙였다.“너는 그 송치연과 꽤 친한 모양이구나.”이도현은 그제야 며칠 전 그녀가 자신을 찾아와 서 씨에게 고명을 내려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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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0화

이도현은 어제 조정이 끝난 뒤 일부러 신 가에 들러 신도연을 문병했던 일을 떠올렸다. 겸사겸사 신수빈에게도 좋은 인상을 남겨 보려는 생각이었지만 신씨 부인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은 결코 곱지 않았다. 신분과 지위가 아니었다면 아마 말 한마디 없이 그를 문밖으로 쫓아냈을지도 모른다.“나는 반드시 너를 부인으로 맞이할 것이다.”이도현의 말에는 여전히 굽히지 않는 고집이 묻어 있었지만, 신수빈은 여전히 담담했다. “왕야께서 권세로 억지로 밀어붙이신다면, 어머니도 막지는 못하시겠지요. 윤 가 집안 사람들 성정을 보건대 당장이라도 화이를 서두를 겁니다. 제가 가마에 오르지 않겠다고 해도, 제 아버지는 저를 왕부로 보내실 거예요.”“빈아, 알지 않느냐. 나는 너를 억지로 데려가고 싶지 않다.”신수빈은 그의 말을 듣고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억지로 하지 않겠다는 것과 억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이 남자는 정말로 원하는 것이 생기면 세상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을 사람이었다.*신수빈 쪽에서는 마음에 두었던 일이 이루어졌지만 궁 안의 태후는 달랐다.분이 풀리지 않아 찻잔 한 벌을 통째로 바닥에 내던졌지만 그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어째서 그자는 사사건건 나와 맞서려는 것이냐! 어째서 늘 나를 거스른다는 말이냐!”“태후 마마, 노여움을 거두소서…”내관들과 궁녀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린 채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황제가 망풍루에서 떨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이도현 곁에 있던 좌시위가 황제에게 바깥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는지에 대해서 귀띔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궁 안에서 제멋대로 자라온 아이였으니 내관과 호위들이 막을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결국 몰래 궁을 빠져나간 덕분에, 그 뒤의 일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하지만 망풍루처럼 높은 난간에서 떨어지려면 누군가 손을 쓰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태후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증거가 딱히 없었다. 그리고 설령 증거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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