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51 - Chapter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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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신수빈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일일이 알지 못했으나 창란원에 홀로 앉아 더위를 식혀주는 매실차를 천천히 마시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그러나 굳이 나가지 않아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하루로 평양 후부의 체면과 자존심은 모조리 땅에 떨어졌고 이후에는 반드시 경성 사대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밖은 이미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었으나 창란원만은 고요해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 미시가 되었을 즈음 금자가 폴짝폴짝 뛰며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에 가득 번지는 흡족한 기운을 보니 분명 바깥의 소동을 몰래 구경하다 돌아온 것일 터.신수빈은 손짓으로 그녀를 불러들였고 금자는 뛰어와 그녀 앞에 서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조잘조잘 구경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마님, 오늘 그 장사치들이 들이댄 외상 빚을 모두 합치면 팔천 냥이나 된다지 뭐예요! 게다가 비단이랑 금은 아예 후부 내에서의 지출이 아니고 주씨 부인이 제멋대로 자기 치장에 쓴 거래요. 그동안 후부의 살림살이는 모조리 줄이면서도 정작 자기 치장은 사치스럽게 굴었던 거죠. 대감마님께서 장부를 보시는 순간 얼굴이 새까맣게 굳었답니다. 후부 장부에는 돈이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아 팔천 냥조차 마련하지 못한대요. 그제야 후부의 이방과 삼방이 들고일어나 장부를 뒤지자고 소리쳤고 급기야 장방 선생을 불러 이 몇 년 치 장부를 모조리 들춰 보겠다며 나섰다지 뭡니까.”“서씨 부인께서는 기가 막혀 두통이 재발하셨는데 이방과 삼방이 장부를 캐묻겠다고 나서자 차마 눌러 앉아 계시지 못하고 직접 나와 주씨 부인을 쥐어뜯으며 집안을 망치는 잡귀 같은 년이라 욕했습니다. 그리고 평양 후부를 욕되게 만들었다며 호통을 치셨어요. 지금 안채는 온통 아수라장이고 큰 마님께서는 이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기절해버리셔서 태의까지 불려왔답니다.”신수빈은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가슴이 시원히 뚫리는 것만 같았다. 마치 푹푹 찌는 더위마저 가시는 듯했다.전생의 그날 큰 마님의 회갑연에서 청하가 억울하게 모함을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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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이방이 한바탕 쏟아낸 뒤에는 삼방이 나섰다.“오늘은 어머님의 회갑연 자리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입니까? 그전에도 윤서원이 군주를 첩으로 들이겠다고 했을 때 저는 단호히 안 된다고 했습니다. 황실 여인을 첩으로 맞는 건 본디 집안을 어지럽히는 흉조이니까요. 제가 서화 군주를 무시해서 그런 말 하는 게 아닙니다. 한데 그 행실과 인품이 도저히 사람답지 못하다는 것, 변방에서 자라 규율도 모른 다는 것, 그리고 혼인 전에 사사로이 간통하여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린 것은 모두 사실이지요. 그런데도 거리낌 없이 남들 앞에서 위세를 부리고 사치스레 낭비하며 체통을 잃었으니 이 어찌 집안의 수치가 아니란 말입니까!”윤씨 셋째 도련님의 격앙된 얼굴빛과 직언에 윤서원의 안색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신수빈은 그 장면을 보며 속으로 차갑게 비웃었다.전생에는 감히 누구 하나 나서서 주서화의 체통을 문제 삼는 이가 없었다. 그녀가 태후 앞에서 교묘히 환심을 사 윤 가에 적잖은 이익을 안겨다 줄 때 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원배인 자신을 눈엣가시로만 여겼었다. 인간이란 것은 결국 자기 이익만 챙기는 이기적인 동물이었던 것이다.이때 평양후는 두 아우의 원망과 제수들의 비웃음을 한 몸에 들으며 오늘 하루의 치욕까지 더해지자 가슴속의 화기가 극에 달했다. 그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세차게 내리치며 서씨 부인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어리석은 년! 네가 우리 윤 가를 그르쳤구나! 내 당당한 일품 후작부가 네 손에서 이리 망가져 버렸으니! 집안의 재산은 어디로 간 것이냐? 네가 다 어디다 쓴 것이냐!”서씨 부인 또한 사태가 이리 번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이 와중에 주서화가 염치없이 외상을 내며 온갖 사치를 부렸을 줄이야.결국 자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덤터기를 뒤집어쓰게 되자 할 말이 없어진 그녀는 그저 더듬거리며 중얼거릴 뿐이었다.“저… 저는 그저, 저택의 장전과 전장의 수익이 턱없이 부족하다 생각해… 조금이라도 이익을 늘려 보려… 그래서… 그래서 인자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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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윤서원은 몸과 마음이 후회로 가득 찼다.처음에는 주서화가 황실의 군주 신분이기도 하고 태후의 총애도 받고 있으니 그녀를 곁에 두면 태후에게 자신에 대한 좋은 말 한마디쯤은 보탤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그러나 몇 번이고 그녀를 떠본 후 알게 된 사실은 비록 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다 해도 조정의 대사를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실권은 전부 이도현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설령 그가 벼슬을 탐해 주서화를 통해 은근히 부탁해도 손쓸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윤서원은 감히 아버지께 대꾸하지 못하고 곧장 무릎을 꿇어 꼿꼿이 앉아 꾸지람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게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신수빈은 혼인 전 그렇게까지 자신을 흠모하고 온 마음을 바쳤는데 어째서 이토록 차갑게 식어버린 것일까? 왜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것일까?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그물이 촘촘히 자신을 덮어 단 한 치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것 같았다.“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후에는 반드시 반성하여 신수빈과 마음을 합쳐 성심껏 살림을 꾸리며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습니다.”신수빈은 고개를 숙여 눈동자에 이는 증오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애써 가렸다.그가 잘 살고 싶다 마음먹으면 과연 잘 살 수 있는 것일까?아니, 그녀는 그를 반드시 한 걸음 한 걸음 벼랑 끝으로 몰아세워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고통과 절망을 뼈저리게 맛보게 하리라! 그가 살고자 해도 살 수 없고 죽고자 해도 죽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리라!그녀의 눈앞에는 연우가 뱀구덩이에 던져졌던 장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차오르는 분노를 삭히기 위해 애썼으나 눈가에 차오르는 눈물만은 어쩌지 못하였다.그때, 시야에 뚜렷한 골격을 가진 한 남자의 손이 나타났다. 그 손에는 수건이 들려 있었고 그녀 앞으로 내밀어졌다.사내의 손이었다.신수빈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았다. 뜻밖에도 그것은 윤수혁이었다.그의 맑고 단정한 눈썹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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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그리고 후부의 가면이라는 것은 또 무엇일까? 혹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일까?신수빈은 윤수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곧게 뻗은 등은 굳어 있었고 옆얼굴의 턱선은 단단히 죄어 있었으며 관자놀이에는 미세하게 핏줄이 솟아 있었다.신수빈은 흠칫 놀랐다.설마… 신씨 부인의 입에 올랐던 이씨라는 사람이 윤수혁와 연관이 있는 것일까?윤승복은 서씨 부인의 횡설수설을 듣고 또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윤서원이 급히 나서서 막아서며 간청하듯 목소리를 낮췄다.“아버지, 부디 진정하소서. 지금은 할머니께서 깨어나셨으니 어서 가 보셔야 합니다. 게다가 부윤 대인께서도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이미 모친께서 불러온 화근이니 제가 자식 된 도리로 책임을 짊어지겠습니다. 겨우 몇몇 평민들이 소란을 부린 것일 뿐이니 머지않아 잠재울 수 있을 겁니다. 이후로는 어머니를 더욱 엄하게 단속하면 그만입니다.”윤승복은 큰 마님의 안위를 걱정하며 아내와 아들을 어두운 낯빛으로 바라본 후 소매를 휘날리며 나가 버렸다.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평양후를 따라 큰 마님의 안채로 향했고 그제야 윤서원은 문가에 서 있던 신수빈을 발견했다.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차갑고 담담하여 마치 구경꾼인 신분으로 윤 가의 어지러운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윤서원은 조금 전 자신의 처참한 꼴이 그녀 눈에 고스란히 비쳤음을 깨닫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 그동안 자신이 보였던 온갖 비위를 까맣게 잊고 이제는 그녀가 부부의 정분도, 후부의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치가 떨렸다. 그는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며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네가 감히 섭정왕에게 기대어 단숨에 하늘로 오를 수 있다 착각하지 말거라. 나는 결코 너와 화이하지 않을 것이다! 섭정왕이 천하의 여론을 무릅쓰고 남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을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설령 화이한다 해도 고작 상인 집안의 딸이니 두 번 시집간 몸으로 섭정왕부에 들어설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첩이 될 자격도 없을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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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신수빈은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그저 낮게 말했다.“조모께서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손부의 무능이 문제이옵니다. 남편의 마음을 붙잡아 두지 못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윤씨 큰 마님이 어찌 신수빈의 위축과 윤서원의 권태를 알아차리지 못하랴.그러나 지금 후부의 형세는 반드시 누군가가 전면에 나서서 전권을 쥐여 주어야 했다.남월정에서 이미 보아온 바였다. 신수빈은 비록 겉으로는 연약해 보였으나 실상은 큰 뜻을 품은 여인이었다. 서씨 모녀와 주서화조차 그녀의 손에서 이득을 본 적이 없고 후부의 체면과 평판을 모두 잃은 판에도 그녀는 서두르지도 조급해하지도 않고 고요히 절제하며 태연히 자리를 지켰다. 이런 여인이야말로 집안을 거느릴 자격이 있는 진정한 안주인이었다. 서씨 부인 같은 단견의 여인은 눈앞의 사소한 이익만 좇아 일을 그르치니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나는 네 억울함을 안다. 우리 여인네가 시집와서 사는 삶에 억울하지 않은 자가 몇이나 되더냐? 서원, 그 어리석은 아이가 네 가치를 몰라본 것이지. 하나 나중에는 서서히 깨닫게 될 것이다. 손부야, 너는 총명한 아이이니 여인의 일생은 멀리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남편의 총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지위다. 내가 너에게 속 깊은 말을 하나 하마. 너는 서원의 정실 부인이다. 누구도 너를 넘을 수 없지. 함께 고생한 아내는 쫓겨나지 않는 법. 아무리 군주가 곱고 화려하다 한들 첩은 첩일뿐이다. 네가 있는 한, 너는 곧 우리 후부의 체면이자 주인이다.”큰 마님은 이쯤에서 의미심장하게 신수빈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마찬가지다. 네게 영예와 치욕을 안기는 것도 결국 이 후부이지. 여인이라면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늙어서는 아들을 따른다. 네가 지금 서원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또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겠느냐? 설령 네가 그와 함께하기 싫어 화이하여 친정으로 돌아간다 한들 그 뒤의 삶이 정말 편안하겠느냐? 나도 안다. 네가 지금 그에게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걸. 하나 부부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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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신수빈은 끝까지 말없이 고요히 앉아 있었다.이방과 삼방의 사람들은 윤씨 큰 마님께서 이 집안의 권리를 상인 집안 출신인 신수빈에게만 주고 자신들에게는 일절 주지 않자 즉각 불만을 터뜨리려 했다. 그러나 입을 떼기도 전에 큰 마님이 눈빛으로 한번 쏘아보자 감히 누구도 찍소리 내지 못했다.“손부야 네가 말이 없으니 나는 네가 응한 것으로 알겠다. 내일 아침 곧바로 사람을 시켜 저택의 전장과 점포의 토지문서, 그리고 각처의 대패를 전부 창란원으로 보내게 하마. 네 시모는 기력이 좋지 않으니 이후로는 내 곁에서 경을 외고 불공을 들이며 편히 지내도록 할 것이다. 앞으로 저택의 모든 사무는 곧장 네 창란원에 보고하도록 하거라.”큰 마님의 이 한마디는 사실상 후부의 모든 권력을 신수빈의 손에 쥐여주며 그녀를 정실 안주인의 자리에 올려놓겠다는 선포였다. 심지어 서씨 부인조차 이제부터는 그녀 손에 묶여야 했다. 이방과 삼방은 마치 매실을 두 근쯤 씹은 듯 얼굴이 시큰해졌으나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조모의 은혜, 감사히 받겠습니다. 손부가 감히 조모를 대신해 집안을 맡아 보겠습니다. 만약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조모께서 꾸짖으셔도 달게 받겠습니다.”큰 마님은 그녀가 응답하는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가 결국은 승낙할 것이라는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 길이야말로 가장 총명한 여인의 선택이었으므로.“마음 놓고 과감히 하거라. 모든 일에는 내가 있으니.”“예.”큰 마님은 신수빈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기력을 다한 듯 눈을 감으며 사람들을 내보냈다.“수혁이는 남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물러가거라.”모두들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나 큰 마님의 찡그린 얼굴과 더는 상대할 뜻이 없다는 태도에 감히 더 붙들지 못하고 흩어졌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간 뒤, 윤수혁은 큰 마님 앞에 약을 공손히 올려 드렸다. 그녀가 약을 다 삼키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할머니께서는 그토록 신씨 부인을 좋아하시는 겁니까?”큰 마님은 태연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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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할머니께서는 요양하는 것에만 전념하세요. 제가 마음에 둔 여인이 있다면 그때 반드시 할머니께 먼저 말씀드릴 것입니다.”윤씨 큰 마님은 이 손자가 어려서부터 스스로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마음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재능으로 치자면 윤수혁은 윤서원보다 훨씬 뛰어났다. 진정으로 윤 가를 짊어질 사람은 바로 그였다. 하나 오래된 그 과거의 일들이 결국 그를 붙들어 매고 말았다.윤수혁은 큰 마님이 잠든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창밖에는 장미 덩굴이 담장을 가득 뒤덮고 있었고 그의 시선은 점점 어두워졌다.어린 시절의 일들이었다. 분명 오래전 지나간 일이건만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그는 족학에서 윤 가의 아이들에게 떠밀려 덤불 속으로 내던져졌고 장미 가시에 피부가 찔려 피가 스며 나왔다.“명덕, 우리가 이렇게 저 아이를 괴롭히면 후부에서 문제 삼지 않을까?”“네가 저 아이를 과대평가하는구나. 저 아이는 후부의 수치일 뿐이야. 그의 어미는 그를 버리고 다른 사내와 도망쳤지. 한데 후부에서 그를 거들떠나 보겠어? 세자의 자리는 그의 차지가 아니야. 너도 보았지? 세자는 전문적으로 교육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 있어. 그런데 저 아이는 혼자 족학으로 내던져졌잖아.”“이러면 야생아와 다를 바 없지 않아?”“본디부터 야생아지. 그의 어머니도 원래는 명매정취로 들어온 정실이었어. 그러다 스스로 정분이 나 다른 사내와 도망쳤지. 지금 후부에서 누가 그를 대공자라 부르겠어. 모두 세자만 인정해 줄 뿐이지.”어린아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미숙한 말들이었으나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조롱이었다. 그 일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고 그는 이제 덤불 속에 떠밀리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장미꽃은 여전히 그에게 두려운 존재였다.“네가 저들의 조롱을 방관한다면 네 아이는 훗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어디서도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비굴하고 나약하게 살게 될 것이다. 여인은 본디 나약하나 어머니가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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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그것은 분명 기뻐하고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그녀가 애써 공들여 짜낸 계책이 헛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바로 이날을 기회 삼아 타오르고 있는 윤 가의 불길 위에 장작을 한 짐 더 얹어줄 수 있었으니.금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들려왔다. 신수빈은 청하를 시켜 확인하게 했다. 잠시 후 돌아온 청하의 얼굴빛은 어둑했다.“집사께서 사람을 시켜 세자를 우리 창란원으로 모셔다 놓았습니다.”신수빈은 미묘하게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겉옷을 걸치고 나왔다. 피투성이로 들려온 윤서원은 이미 방 안에 엎어져 있었다. 그녀는 시치미를 떼며 그에게 물었다.“서방님께서 여긴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어쩌다 이토록 피투성이가 된 겁니까?”윤서원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눈으로만 봐도 곤장을 심하게 맞은 것이 분명했다. 신수빈은 즉시 집사에게 명했다.“집사, 어서 후부 내의 명첩을 지니고 태의를 청해 오너라.”집사가 명을 받고 물러가자 신수빈은 세자를 부축하고 있던 하인들에게 차분히 지시했다.“주서화야말로 가장 다정하고 세심하게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이다. 서방님께서 평소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할 때마다 늘 그 아이가 직접 돌보지 않았느냐? 나는 서툴고 어설퍼서 혹여 제대로 간호하지 못할까 두렵구나. 서방님을 주화에게 맡기는 편이 훨씬 낫겠다. 어서, 서방님을 주서화에게 모셔가 잘 보살피도록 하거라.”하인들은 모두 얼이 빠졌다. 어디서 정실 부인이 남편을 첩에게 밀어 넣는 경우가 있던가? 그러나 함부로 토를 달 수 없으니 결국 명대로 세자를 들어 주씨 부인의 처소로 향했다.윤서원은 신수빈의 말을 들으며 얼굴빛이 더욱 검게 질렸다. 이제 그녀는 자기 앞에서 가식조차 벗어던진 것이다. 방금 전 그녀의 얼굴 위에는 싫다는 두 글자가 낱낱이 쓰여 있었다.하지만 그는 고통에 짓눌려 지금은 따질 겨를조차 없었다. 주서화의 뜰로 향하는 길목에서 그는 곧 다가올 울음 섞인 투정과 호소를 미리 떠올렸다. 그러자 지긋지긋해지며 머리가 찌끈 거리기까지 했다. 결국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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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어제 윤 가에서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그녀가 사람을 시켜 중상을 입은 윤서원을 곧장 주서화의 처소로 옮기게 하여 그가 자신의 뜰로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이도현은 그녀가 그나마 눈치가 있어 자신의 말을 제대로 새겨들었구나 싶었다. 그러니 오늘은 그 보답으로 그녀에게 일품 고명을 내려 그녀의 기분을 달래주는 것도 괜찮으리라.예부 시랑의 보고를 들은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신씨 가문의 의로운 행보를 높이 칭송했다. 이때 이부의 한 관리가 시의적절하게 말을 받았다.“신씨 집안이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조정과 백성을 위하였으니 차라리 벼슬을 내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들의 대의에 대한 답례이기도 할 터입니다.”이부 관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정의 신료들이 앞다투어 호응하였다. 그러나 휘장 뒤의 태후는 고개를 숙이며 미간을 바짝 좁혔다. 신씨 집안은 본래 상인 집안이라 이미 나라와 맞먹을 만큼의 부를 쌓아둔 집안이었다. 필요하다면 도살하여 기름을 짜내듯 그 재물을 빼앗아 조정을 부양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런데 신씨 집안이 조정에 세력에 뿌리내리게 된다면 훗날 나라의 기틀을 흔들 위험한 족쇄가 될지도 모른다. 태후가 근심 어린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왕좌 위의 사내가 차갑고도 아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저 상가의 집안일뿐이다. 어찌 관직에 나서 백성을 다스릴 도를 알겠느냐? 신씨 집안에서 은전을 내었다 하여 벼슬을 주어야 한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조정이 관직을 사고파는 곳이라 여길 것이다. 진실한 학문과 본분은 어디에 있겠느냐? 벼슬에 앉아 백성을 위하고 싶다면 반드시 참된 재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신씨 집안은 그저 장사를 잘하면 그만이지.”태후는 휘장 뒤에서 그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본디 이도현은 전조의 잔당을 평정할 때 신씨 집안과 일시적 교분이 있었다 하여 그 세력을 끌어올릴까 염려했는데 지금 보니 그의 생각은 자신과 다르지 않았다.태후는 살며시 휘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의 곧고 굳건한 자태는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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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온 후부 사람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근근이 지내고 있다는데 정작 신씨 부인의 상에는 제비집에 이어 북방 변경에서 들여온 포도까지 올려져 있었다.신수빈은 둘째 마님 진씨 부인과 셋째 마님 유씨 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으나 일어나 맞이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들어 담담히 인사만 건넸다.“둘째 숙모와 셋째 숙모께서 오셨군요. 청하야, 숙모님들을 전정으로 모셔 가거라. 난 식사를 마치고 바로 가마.”그 말이 끝나자 진씨 부인은 당장 폭발하듯 냉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신수빈의 식탁 위를 훑었다.“그러면 그렇지! 온 집안의 아침상이 볼품없는데 알고 보니 절약한 것들이 다 여기로 흘러왔구나! 날마다 제비집이라니! 어른들께는 대체 뭘 드린 것이냐? 살림을 맡겼더니 결국은 이런 식으로 사사로이 이익을 챙기는구나! 과연 상인 집안의 딸이라 체면도 신경 쓰지 않고 대놓고 못난 짓을 하는군. 이제 막 대패를 손에 쥐니 그동안 숨겨두었던 본색이 드러나나 보지?”유씨 부인은 둘째 올케의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으나 차마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 신수빈을 누를 수만 있다면 삼방도 덩달아 이익을 얻을 수 있기에 굳이 끼어들 필요는 없었다.신수빈은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제비집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진씨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분노라고는 전혀 없었고 오직 담담한 고요 속에 희미한 조롱만이 비쳤다.“아마 숙모님께서 오해하신 듯합니다. 창란원의 일용품이며 제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들의 의식은 모두 제 혼수에서 지출한 것이지 후부의 경비가 아닙니다. 또 창란원의 삼시 세끼 역시 제가 제 돈을 들여 작은 주방에서 따로 마련하는 것이니 후부의 살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진씨 부인은 잠시 멍해졌다가 얼굴빛이 확 굳어졌다.“무슨 혼수 타령을 하느냐? 네가 윤 가에 시집온 이상, 이미 한 집안 아니더냐? 온 집안이 함께 사는데 감히 혼자만 잘 먹고 잘 지내는 것이 옳으냐? 위로 어른들이 계신데 어찌 효성을 모른 체할 수 있단 말이냐! 너희 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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