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41 - Chapter 50

168 Chapters

제41화

윤수혁은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사람들 틈에 섞여 멀어져 가는 신수빈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어제 거리에서 본 그 장면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장강 같은 긴 거리 위에서 그녀는 흔들림 없는 자태로 서 있었다. 그리고 스쳐 지나던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어미이기에 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남들에게 손가락질당하며 살아가야 해요.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어디서든 위축된 채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그때 그는 그녀가 아마도 신씨. 집안의 어떤 여인일 거라는 짐작만 있었을 뿐 신씨. 집안의 적녀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저 여인이 자기 아우의 부인일 줄이야.남월정에서 수많은 오해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태도로 당당히 서 있던 모습은 어제 강가에서 본 그 단단한 뒷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 그림자는 차츰 그의 마음속에서 한 사람의 얼굴로 또렷하게 변해갔다.윤수혁은 문득 탁자 모서리에 놓여 있던 두 개의 금비녀를 발견했다.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 들고 장식 끝에 새겨진 두 글자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수빈...”신수빈이 하풍원에 가까워질 즈음 은보가 발걸음을 맞추어 다가왔다.“마님, 말씀하신 대로 모두 준비해 두었사옵니다.”신수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건 뒤에서 벌어질 연극을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금자는 지금 전원에 있었다. 아이 특유의 활발함으로 구경꾼 노릇을 제일 잘하니 돌아오면 틀림없이 보고 들은 것을 생생하게,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듯 흉내 내어 전할 것이다.은보는 잠시 머뭇거리다 주인을 흘깃 올려다보았다.“마님, 사실은… 외원에 온 귀한 손님이 이걸 제게 맡기며 꼭 마님께 전해 달라 하셨사옵니다.”신수빈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렸다. 무슨 물건인지 궁금해 펼쳐 보았다가 곧 빠르게 덮어 버렸다. 봄날 시냇물처럼 맑던 눈동자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단단히 다문 입술에는 한 줄기 냉기가 번졌다.“뭐라 하더냐?”은보는 숨을 고르며 조심스레 대답했다.“평양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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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왕야께서 무슨 분부가 있으시면 이 자리에서 곧장 말씀하시지요.”이도현은 차갑게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는 신수빈 뒤에 서 있던 청하를 스치듯 바라보고는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로 옮겼다. 그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더니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고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검은 눈동자에 날카로운 기세가 번득이며 그녀의 얼굴을 훑자 마치 온몸이 바늘방석 위에 앉은 듯 불편함이 엄습했다.“네 하인의 눈앞에서 나라는 간부의 시중을 드는 꼴을 보여줄 것이냐?”뒤에 있던 청하는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신수빈은 속으로 이를 갈며 차라리 이 자리에서 칼로 그를 두어 번 찌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이도현은 신수빈이 주저할 틈도 주지 않고 팔을 뻗어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휘어 감아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거센 기세로 기암괴석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청하는 뒤에서 애가 타 발만 동동 굴렀다. 따라가고 싶었으나 감히 나설 용기는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섭정왕이 강압적으로 아씨를 데려가는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신수빈은 평소 이쪽으로 온 적이 없었다. 그곳에는 바위들이 층층이 겹쳐 있었고 굴이 여러 갈래 나 있었으며 무성한 덩굴이 늘어져 천연의 장막처럼 동굴 어귀를 가리고 있었다.이도현은 손으로 덩굴을 젖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은 어둠이 짙어 눈이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신수빈이 발밑 자갈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자 그의 강한 팔이 허리를 감싸 그녀를 부축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의 시야가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졌다. 덩굴 사이로 스며든 옅은 빛을 따라가자 의외로 안에는 제법 널찍한 동굴이 드러났다.“내 물건은 어디 있느냐?”술기운 섞인 목소리에 낮고 게으른 음색은 진지함보다는 노골적인 농락을 담고 있었다. 신수빈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어둑한 빛 속에서 보이는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번지는 듯했다. 그녀는 은보가 전해준 그 물건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다행히 어두웠기에 그녀의 붉은 기색을 충분히 가려 줄 수 있었다.“저에게는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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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신수빈은 그가 손에 쥔 배저고리를 수중에 넣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왕야께서는 무슨 용건으로 저를 부르신 겁니까? 오늘 저택에서 발생한 일이 번다하여 제가 오래 자리를 비우기 어렵습니다. 별다른 일이 없으시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술기운에 휩싸인 사내는 평소보다 훨씬 더 위험하기에 그녀는 그와 불필요한 얽힘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이도현의 시선은 품 안에 안긴 여인에게 떨어졌다. 소박하고 절제된 장신구, 분 한 점 없는 얼굴은 오히려 눈부시게 고왔다. 피부는 설산보다 더 하얬고 먼 산빛을 머금은 눈썹은 유려하게 이어져 강남 여인의 풍치와 매혹이 그녀 몸짓마다 배어 있었다. 맑고 고운 목소리로 별 의도 없이 내뱉는 한마디조차 은근히 사람을 휘감았다. 그야말로 타고난 요염한 자질이었다.그 순간, 그의 뇌리에는 어제 보석방에서 보았던 광경이 번뜩였다. 윤서원의 품에 안겨 있을 때도 이런 모습이었을까?원래라면 윤씨 집안 따위의 잔치에 그가 굳이 올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잊치지가 않아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었다.이도현은 그녀를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그는 신수빈의 허리를 거칠게 끌어안으며 몸을 가까이 밀착시켰다.“나는 네가 밖에 두고 기르는 간부이지 않느냐? 간부가 찾아왔는데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느냐?”그날 왕부에서 뱉은 말, 그는 똑똑히 들었고 지금껏 기억하고 있었다.신수빈은 그의 의중을 짐작했다. 술에 취한 지금 자제력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담담히 입술을 열었다.“왕야, 저는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러니 시중을 들기는 어렵지요. 오늘 잔치에 모인 부인들 중 자신의 딸을 왕부로 들여보내고 싶어 하는 이들은 널렸습니다. 원하신다면 그자들을 찾아가시지요.”이 관계에서는 도덕이나 체면은 사치일 뿐. 그는 부끄럼이 없고 그녀는 염치가 없었다. 이런 말들을 다른 사람이 듣게 된다면 비웃음을 사기 딱 좋을 것이다.이도현의 입매가 비틀리며 비웃음을 띠었다.“질투라도 난 것이냐?”신수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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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신수빈은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 버렸다. 이도현은 결코 말만 거창하게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가 정말로 사람을 불러들인다면 자신의 치욕은 지금보다 더 깊어질 터였다. 그녀는 억눌린 채 그의 거친 손길이 가녀린 목덜미를 짓누르는 대로 고개를 낮췄다. 마치 존엄이라 불리는 무언가가 한 겹 한 겹 흙 속으로 짓밟히는 듯했다.그가 그녀의 순종을 느낀 순간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허리가 점점 꺾이는 사이 신수빈의 존엄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풀어라.”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눈을 뜬 신수빈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청옥 띠, 그리고 곧 그녀를 짓밟으려는 위압감이었다. 그때, 전생의 기억이 파도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한 손으로 은근히 불러온 배를 쓸어내리며 또렷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저는 일품 부인의 봉호를 원하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조금 전까지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던 여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차분함 속에 맑은 기개가 번졌다.이도현은 아래로 시선을 떨구며 냉혹하게 물었다.“네 따위가 감히 조건을 내밀 자격이 있다고 보느냐?”신수빈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눈가에는 은근한 풍치가 서렸고 입술은 꽃잎처럼 붉게 휘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매혹적이었다.“왕야의 권세는 천하를 덮습니다. 억지로 저를 꺾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겠지요. 하나 제가 적극적이냐 아니냐로 분명히 달라질 겁니다. 그리고 그 맛은 직접 먹어보기 전까지 왕야께서도 알 수 없지요.”말끝에 섞인 풍류와 요염이 뒤섞인 기세에 이도현의 목구멍이 저절로 떨렸다. 불시에 침을 삼킨 그는 굵은 음성으로 물었다.“적극적으로 따르면 어떻고 따르지 않으면 또 어떠냐?”신수빈은 대답 대신 미소만을 지었다. 눈빛을 스치며 흘러간 빛은 찬란했다.이도현의 복부가 저릿하게 당겨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좋다. 본왕이 허락하마.”그녀의 움직임은 서툴렀으나 약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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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신수빈과 이도현은 한 사람은 앞서고 한 사람은 뒤따르며 동굴을 빠져나왔다.앞서 걷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에서 너무 오래 지체했으니 바깥 상황이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뒤따르던 이도현은 그녀의 불안한 걸음과 마치 들킬까 두려워 몸을 잔뜩 움츠린 표정을 보고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 모습은 꼭 금단의 정을 나눈 사내와 여인 같아 그에게는 더욱 짐짓 우스운 풍경이었다.기암괴석 어귀에 이르자 이도현이 불쑥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왕야, 무슨 일이십니까?”갑작스러운 손길에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는 차갑게 되물었다.그녀가 옷깃을 여미듯 몸을 똑바로 세우며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기색에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는 동굴의 잔향을 타고 울려 퍼졌다.“이미 본왕을 따른 이상, 본왕에게 충성해야 할 것이다. 그 폐물과는 멀리하거라. 다시는 네 몸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말이다.”그 위협적인 음성 속에는 사냥감을 노리는 수컷의 서릿발 같은 기운이 스며 있었다. 그 말을 들은 그녀의 가슴은 크게 출렁였다. 하지만 겉으로는 체념 섞인 무력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왕야께서는 무리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분은 제 남편입니다. 이 후원은 머지않아 그의 것이 될 텐데 그가 제 뜰에 머물고자 한다면 이는 합당한 일이지요. 한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그녀의 말에 이도현의 눈빛이 칼날처럼 매서워지며 둘 사이의 공기가 싸늘해졌다.“내 앞에서 꾀부리지 말거라. 그가 다시 네게 손을 댄다면...”그의 시선이 서서히 그녀의 아랫배로 흘러내리더니 이를 악문 듯 낮게 뱉어냈다.“그 배 속의 얼충은 본왕이 직접 없애 버리겠다.”“당신…!”그날 선 협박에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들었느냐?”다시금 강하게 다그쳐 오는 목소리에 결국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그는 그녀의 팔을 놓아주며 마치 상을 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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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신수빈은 허겁지겁 옷자락을 움켜쥐며 형식뿐인 인사를 올린 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뒤돌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도현의 눈빛은 점점 서늘해졌다. 허리를 감싸며 아랫배를 보호하듯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그 모습이 그의 눈에는 칼날처럼 거슬렸다.그 무렵, 청하는 아씨가 이미 한 시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가슴이 조마조마 해졌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마침내 신수빈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쁨에 찬 열굴로 급히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섭정왕께서는...?”청하가 뒤편을 흘깃 바라보자 그녀는 냉랭하게 잘라 말했다.“신경 쓰지 말거라.”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앞선 일에 붙들려 있었기에 뒤에 서 있는 이도현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청하를 데리고 곧장 그 자리를 벗어났다.신수빈은 청하를 창란원으로 돌려보내고 오직 은보만을 거느리고 하풍원으로 향했다.연회장은 여전히 구경꾼들로 떠들썩했기에 그녀가 이미 한참 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눈치챈 이는 드물었다.다만 주서화만은 그녀 곁에 낯선 시녀가 따르는 것을 발견했다. 평소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청하가 보이지 않자 속으로 은근히 쾌재를 불렀다.오늘 그녀는 일부러 연이를 시켜 청하를 연회 옆 뜰로 꾀어내게 했다. 한 번 그곳에 들어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수가 제 자리를 잡았다.신수빈이 연못가 정자에 앉아 부채를 가볍게 흔들며 태연한 척하는 모습을 보자 주서화의 입가에는 더욱 오만한 미소가 번졌다.바로 그때, 어린 시녀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와 서씨 부인 귀에 속삭였다.곧 그녀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주서화가 가로막고 나섰다.이렇게 공들여 꾸민 대연극을 어찌 어둠 속에 묻히게 하겠는가?서씨 부인이 진상을 가리려 한다면 그 모든 노고가 물거품이 될 것이다.“어머님, 무슨 일이십니까? 방금 저 아이가 간통이니, 몰래 정을 통했다느니 그런 말들을 속삭이던데... 제가 중궁살림을 맡고 있는데 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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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여인들이 잇달아 취죽원으로 몰려들 즈음 남정네들 또한 이곳으로 옮겨 와 있었다.그 순간, 이도현은 한눈에 여인들 무리 뒤에 앉아 있는 신수빈을 포착했다.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나비처럼 가볍게 부채를 흔들며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바람결에 옷자락이 은빛 물결처럼 흩날리고 그 자태는 느슨하면서도 아련한 향기까지 풍기는 듯했다. 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에 보는 이라면 누구든 눈길을 뗄 수 없었다.‘신수빈이 아니구나.’이도현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곧 옆에 선 남정네들의 눈길이 모조리 그녀에게 꽂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저 여인은 어찌 저토록 태평하고 또 어찌 저리 무심한 풍정을 흘려 다른 사내들의 눈길을 끄는 것인가? 서수빈 또한 곁눈질로 그를 보았으나 뜨겁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정사에 분주해야 할 섭정왕이 남의 집 흉흉한 험담에 이리도 신경을 쓰다니… 그녀는 속으로 비웃으며, 부채만 고요히 흔들었다.취죽원은 본래 외원과 내당을 가르는 경계이기에 남정네들이 이곳에 발걸음을 한다는 것부터 이미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나 주서화는 그런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이야말로 정실 부인의 체면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릴 기회라 여겼다.시녀가 문을 밀어 열려는 찰나 서씨 부인이 다급히 달려와 주서화의 팔을 끌어당겼다.“이만하면 됐다. 더는 소란 피우지 말거라!”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다독이는 듯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어머님, 걱정 마십시오. 모든 것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그녀는 곧바로 하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작은 사내종들이 안으로 들이닥쳤으나 이내 하나같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우물쭈물 밖으로 끌려 나왔다. 감히 평양후의 이름을 입에 담지 못하고 땅바닥만 보며 얼버무릴 뿐이었다.바로 그때, 소란을 들은 윤서원이 허겁지겁 달려왔다.“이게 무슨 짓거리냐! 이토록 큰 소동을 벌여 무엇을 얻겠다는 것이냐!”주서화는 어려서부터 정원왕을 따라 변방에서 자랐다. 정원왕비는 일찍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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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평양후가 그토록 장소도 가리지 않고 은밀히 만난 여인이 연이일 줄이야.주서화는 혼인을 거치지 않고 사사로이 사통하여 윤서원의 첩이 되더니 그녀의 몸종 또한 주서화을 본받아 평영후와 얽히고 말았다. 게다가 주서화는 처음부터 청하를 탓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었다.남자들은 후부의 사정을 알 리 없으니 그저 평양후의 이런 추태가 집안의 가풍을 더럽혔다며 혀를 찼고 여인들은 본디 이런 시시한 소동을 곱씹기 좋아하니 이 광경을 보고는 수군대기 시작했다.“과연 주인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종도 그 꼴을 닮는다더니. 다른 건 못 배워도 이런 천박한 수법은 남보다 먼저 익혔구나.”“예전에는 평양 후부도 이리 문란하지는 않았는데... 삼품 고명의 귀첩을 끌어들여 아내를 제치고 살림권을 잡게 하더니 이런 어지러운 일들이 줄줄이 터지는군.”“역시 재앙은 집 안에서부터 일어난다더니 평양 후부의 좋은 날도 머지않은 것 같소.”“쉿, 그만하시오. 태후께서도 그 여인을 총애한다 하지 않았소?”비록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지만 주서화의 귀에는 한 마디도 빠짐없이 모두 꽂혔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가슴속은 터져 나오려는 한 줄기 탁한 기운이 꽉 막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했다.그때 연이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무릎으로 기어와 주서화 곁에 붙었다. 그녀는 한없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군주, 이건… 노비가 군주의 계책을 망친 게 아닙니다. 누군가 노비를 기절시켜…”찰싹!주서화는 그 말을 끊어내듯 손을 높이 들어 뺨을 내리쳤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여봐라, 이 년의 입을 막아 묶어 두거라.”연이는 입이 틀어막힌 채 끌려 나갔으나 그녀가 토해낸 말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들었다. 특히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윤서원의 귀에는 더욱 또렷하게 박혔다.그 순간, 그는 몸을 돌려 주서화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스친 한 줄기 음울한 빛에 주서화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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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신수빈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는 곧장 한발 물러섰다. 반면, 윤서원은 두 눈썹을 바짝 찌푸린 채 크게 소리쳤다.“감히! 여기는 평양 후부다. 어찌 감히 이곳에서 함부로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그러나 상인들은 윤서원의 준엄한 꾸짖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우리가 찾는 곳이 바로 평양 후부입니다. 우리들은 성서에서 원림 장사를 하는 자들인데, 반 달 전 귀부 측에서 명귀한 나무와 꽃을 다수 주문해 가 놓고 며칠 뒤에 값을 치르겠다고 하더니 이제 보름이 지나도록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우리 하인들이 여러 차례 재촉했건만 귀부의 관사가 일절 상대해 주지 않아 하는 수없이 오늘 이 자리에 찾아온 것입니다.”그 말이 끝나자, 다른 상인들도 잇따라 나섰다.“저희도 그렇습니다. 저희는 남쪽에서 갓 올라온 신선한 과일을 전속으로 대는 역참 상인인데, 귀부에서 영남의 여지와 강절의 양매를 주문하여 신선한 채로 보내오면 그 자리에서 계산해 주겠다 하였으나 끝내 귀부의 관사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다시 남쪽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저희도요. 저희는 과자점인데 귀부에서 보름이 지나도록 값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교외의 채농입니다. 매일같이 채소를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하는데 당초에는 사흘마다 결산한다 약조하였건만 이제 보름이 넘도록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저희 집안은 이제 쌀이 다 떨어져 끼니조차 이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순식간에 모든 사람의 눈길이 윤서원에게 쏠렸다. 저마다 후부가 갚지 않은 은전에 대해 입을 모아 불만을 토해냈다.그 자리에 남아 있던 세가의 귀부인들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충격에 젖었다.세가 귀족이란 본디 남에게 빚 독촉을 당하는 법이 없는데 그것도 하필이면 후부에서 회갑연을 벌이는 날에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그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알고 보니 후부의 기화이석과 시절의 과실이 모두 외상으로 사 온 것이란 말이오?”“그럴 재력이 없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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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주서화는 곧장 화살을 신수빈 쪽으로 돌렸다. 이때 신수빈은 윤서원의 뒤편,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서서 한 손에 부채를 가만히 흔들며 주서화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나는 줄곧 후부의 장부에 은전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만 후부의 수입이 누구 손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 내가 살림을 맡았을 때는 모두 내가 지참한 혼수로 메꿔야 했거든. 게다가, 후부의 살림을 맡겠다고 한 것도 네가 아니었느냐? 당시 어머님께 문안을 드릴 때, 태후 마마 곁에서 사무를 익혔다 했고 그분께서도 너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했지. 그래서 나는 태후 마마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니 틀림없이 잘할 거라 여겨 살림권을 내준 것이다. 만약 네가 태후 마마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살림권을 너에게 넘기겠느냐? 한 번 둘러보거라. 경성은 물론 천하를 통틀어도 어느 집안에서 첩실이 살림을 맡는 법이 있더냐? 심지어 우리 신씨 집안처럼 상가 집안조차도 첩에게 살림을 맡기는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신수빈의 이 말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귀에 너무도 명확한 뜻으로 새겨졌다.윤 가는 신씨 집안의 혼수를 탐하여 텅 빈 껍데기 후부를 며느리 손에 맡겨 혼수로 버티게 했다는 것, 주서화는 태후의 권세를 빌려 윤 가에서 횡행하며 첩의 신분으로 정실을 모욕했다는 것, 그리고 윤 가는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주서화의 횡포를 방임한 가풍도 규범도 없는 집안이라는 것.세가 대족들 사이에도 크고 작은 갈등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은폐하는 법. 평양 후부처럼 대놓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집안 망신을 폭로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다.서씨 부인은 탐욕스럽고 신씨 부인은 세력이 약해 혼수마저 빼앗겼으며 주서화는 태후 마마만 믿고 교만하게 행동했다. 이런 꼴로 나아간다면 평양 후부가 무너지는 것도 멀지 않으리라.이제 이런 집안에 딸을 시집보내려 할 세가 대족은 없을 것이고 심지어 청백한 선비 집안이라 해도 윤 가는 꺼리게 될 터. 윤서원은 주서화가 집안을 엉망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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