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61 - Chapter 70

168 Chapters

제61화

진씨 부인은 한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어찌 상인 집안의 딸 따위가 이토록 당당한 기세로 면전에서 후부의 웃어른을 꾸짖을 수 있단 말인가!그녀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고 그로 인해 진씨 부인의 얼굴은 수치심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곧바로 분노가 솟구쳤다.“이 못된 계집, 감히 이렇게 내게 대꾸하다니! 오늘 내가 반드시 혼쭐을 내주마!”진씨 부인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순간, 금자와 은보가 양옆에서 나서며 그녀를 가로막았다. 금자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기도 전에 진씨 부인은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옆에서 지켜보던 셋째 마님 유씨 부인은 충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둘째 마님이 대놓고 신수빈에게 손찌검하려 한 것도 뜻밖이었거니와 그 옆의 시녀가 이 집안의 주인을 가로막을 줄은 더더욱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셋째 마님은 둘째 마님처럼 무모하지 않았다. 그녀는 황급히 화기를 눌러 담으며 부드럽게 중재했다.“다 같은 집안사람 아니더냐? 어찌 되었든 네 둘째 숙모도 어른이자 이 후부의 주인이시다. 한데 어찌 하녀 따위가 주인의 손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냐? 이는 큰 금기를 어기는 일이다.”신수빈은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금자는 즉시 둘째 마님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진씨 부인을 흘긋 한 번 바라보더니 담담히 입을 열었다.“셋째 숙모도 보셨지요. 둘째 숙모께서 저에게 직접 손을 대려 했습니다. 제가 어디서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제 시녀는 몸으로 막아섰을 뿐, 손찌검을 한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충심으로 주인을 지키는 하녀라면 꾸짖을 것이 아니라 상을 주어 이 후부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줘야지요. 충성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입니다.”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녀는 몇 마디 더 보태었다.“아, 그리고 창란원에 딸린 제 곁의 하녀들의 월급은 제 지참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후부의 녹봉을 받은 적이 없으니 그들이 주인을 업신여겼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겠지요. 그들의 주인은 오직 저 하나뿐이니까요.”셋째 마님의 얼굴은 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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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마님께서 저희에게 일을 맡기지도 않고 이런 ‘충경전집(忠經全集:교양 도서)’과 ‘계연편(計然篇:교양 도서)’을 나눠주시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신수빈은 찻잔 위의 김을 살짝 불며 미소조차 띠지 않았다. 대신 곁에 서 있던 청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자연스레 읽으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통달하게 읽으라는 뜻입니다.”“우리는 후부의 관사들입니다. 이런 걸 읽어서 무엇 합니까? 맡은 일이나 성실히 하면 되는 법. 옛 평양후께서 살아 계실 때부터 우리는 늘 그렇게 해왔습니다. 마님, 집안 살림을 맡았다고 해서 지나치게 거드름 피우지 마십시오. 예전에는 이런 책 하나 없어도 우리 후부는 잘만 돌아갔습니다!”그중 한 관사는 서씨 부인 곁을 모시는 오 유모의 남편으로 후부에서 가장 총애 받던 자였다. 손에 쥔 권한도 많으니 자연스레 그의 기세는 거만했다.그는 두 권의 책을 툭 바닥에 내던졌다. 태도는 노골적인 멸시였고 그 눈빛은 신수빈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오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수빈은 바닥에 뒹구는 책을 흘깃 보더니 고개를 들어 서 관사를 똑바로 응시했다.신수빈은 “충경전집”의 첫 장을 읊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으나 단정하고 또렷하여 한 글자 한 글자 귀에 꽂혔다. 한 단락을 마치고 나서 그녀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다가 시선을 서 관사에게로 고정했다.“건국 이래, 선황께서 입관하시고부터 이 ‘충경’은 성전으로 받들어졌다. 조정의 문무백관은 날마다 향을 피우고 목욕을 재계한 뒤 이 책을 읽고 깨우치며 충군애국의 길을 걸었다. 서 관사, 그대에게 목숨이 몇 개나 된다고 선황께서도 성전으로 삼으신 책을 이렇게 짓밟을 수 있는 것이냐!”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청아했으나 그 속에 담긴 기세는 강물처럼 밀려와 억누르는 듯했다. 마지막 어귀가 약간 높아지자 뜰 안에 모인 이들은 한순간 숨조차 막히는 압박을 느꼈다. 아까 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자들은 허둥지둥 책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고 얼굴에는 당혹과 두려움이 서렸다.책을 던졌던 서 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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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신수빈은 그 말을 또렷하게 들었으나 조금도 노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그저 오늘 날씨를 말하듯 평온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신가야말로 후부와 견줄 수는 없지. 한데 우리 신가는 근검절약을 가훈으로 삼고 청백과 청풍을 가문에 새겨 벌어들이는 돈 한 푼 한 푼이 거짓 없이 깨끗하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고리대금을 일삼는 일이 없고 허세와 사치를 부려 가면만 번지르르하게 치장하는 일도 없지. 신가는 겉만 번듯하고 속은 썩은 비단 베개 따위로 지어진 허수아비 같은 집안과는 차원이 다르단 말이다.”그 말이 끝나자 관사들은 얼굴에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으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신수빈이 가리킨 것은 바로 어제 벌어진 일, 분명 후부에서 실제로 저지른 행태였기에 변명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한편, 한쪽에서는 윤서령이 조용히 숨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오늘 아침 서씨 부인이 일러둔 바 있었으니. 신수빈이 살림을 맡게 되면 관사들이 얼마든지 트집을 잡아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고. 그래서 새벽부터 몰래 숨어들어와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짧은 몇 마디에 신수빈은 관사들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윤서령은 더는 참을 수 없어 마침내 앞으로 나와 비꼬는 듯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형수님, 잊지 마세요. 형수님은 이제는 후부의 사람이시라 후부가 영광을 얻으면 함께 영광을 누리고, 후부가 손실을 입으면 함께 손실을 입는 몸입니다. 한데 후부를 이렇게 깎아내려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신수빈은 이미 나무 뒤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았고 화려한 옷차림 덕에 누군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십중팔구 자신의 실수를 보고 비웃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윤서령일 것이다.“이게 어디 깎아내리는 겁니까? 사실을 말한 것뿐이지요. 대장부가 천지 사이를 살아가려면 마땅히 광명정대하고 부끄럼 없이 살아야 합니다. 사람 됨됨이는 물론 일도 그런 식으로 처리해야 하지요. 잘못한 것은 잘못이라 인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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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신수빈은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윤서령의 체면을 송두리째 걷어내듯 시작부터 매섭게 몰아세웠다. 그녀가 입을 떼 다시 말하려는 찰나, 신수빈은 담담하고 또렷한 어조로 계속 이어갔다.“계연... 춘추 시기 송나라 사람입니다. 그는 제자백가 가운데 ‘계연학파’를 열었지요. 작은아씨께서 책을 적게 읽으니 당연히 그의 이름이 낯설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리고 춘추시대 월나라 재상인 범여(范蠡)가 바로 계연의 제자입니다. 범여는 계책을 바쳐 월나라 왕 구천(勾践)을 도와 마침내 부국을 이뤘고 공을 이루자마자 미련 없이 물러나 장사에 뛰어들어 천하를 제패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사 상성(商圣:상업의 최고 성현)이라 부르며 칭송했지요.”신수빈은 천천히 윤서령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말투는 온화했으나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파고드는 조리였다.“계연의 일곱개 계책 중 범여는 다섯개만 이용하여 오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나라를 살리는데 그만한 효험이 있다면 집안 살림을 돌보는데는 두말할 것도 없지요.”그녀의 눈길은 다시 뜰에 모인 자들을 훑었다. 그 가볍게 깔아내리는 듯한 표정에는 분명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나는 알 수 없구나. 이 평양 후부는 대체 어떻게 굴러온 것이더냐? 윗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적녀건 노비건, 눈뜬 장님뿐이니. 충군애국의 도리를 알지도 못하고, 옛 성현의 말씀도 모른 채, 계연의 계책을 두고 구린 돈 냄새라 부르다니. 그런 무지몽매로 어디 밖에 나가 후부의 체면이라 내세울 자격이 있더냐? 내가 만약 다른 이라면 제 배를 잡고 비웃었을 것이다.”그 말에 윤서령의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자신을 하인과 똑같이 낮춰 꾸짖는 듯한 모욕에 가슴속 분노가 폭발하려는 찰나, 신수빈의 목소리가 다시 가볍게 흘러나왔다.“또 하나 묻자꾸나. 대체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와 장사꾼 집안을 천박하다 함부로 비웃는 것이냐? 관중(管仲: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은 상업을 발전시켜 제후국을 강성케 한 후 제나라를 춘추의 패왕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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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신수빈은 무릎 꿇은 윤서령을 힐끔 바라보았으나 단 한마디의 자비조차 베풀지 않았다.이도현. 그 개 같은 사내. 밉살스럽고 불쾌한 존재이긴 하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참으로 쓸모 있는 깃발이었다. 살아있는 염라대왕의 이름이니 누구든 그 이름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세 번쯤은 움찔할 수밖에.뜰에 가득 모인 관사와 유모, 하녀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한결같이 바랐다. 후부의 큰 아가씨인 윤서령이 나서서 새로 들어온 마님의 기세를 꺾어버렸으면 좋겠다고.하나 뜻밖에도, 결과는 완전히 거꾸로였다.마님의 말 몇 마디에 윤서령은 모욕을 당하고 무릎까지 꿇었으며 관사와 하녀들조차 무능한 허수아비라 매도당했다.평소라면 후부 같은 고문벌은 신가 같은 상인 집안이 감히 고개도 들 수 없는 높은 나무였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마님의 입을 통해 후부가 오히려 신씨 집안보다 못하다는 말이 공공연히 흘러나왔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본래도 자기보다 못한 윤씨 집안에 들어온 몸 아닌가. 잠시 후, 신수빈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이 두 권의 책, 먼저 읽거라. 깨달음을 얻고 마음으로 체득하면 그때 다시 내게 와서 맡을 일을 고르도록 하거라. 서 관사, 그대는 읽을 필요도 없다. 그토록 무지몽매하고 감히 선황께서 성전으로 삼으신 경서를 모독하니... 그러니 후부에 두는 것은 오히려 화근일 뿐이지. 어느 날 누군가 그 잘못을 빌미로 잡는다면 후부 전체가 덩달아 화를 입을 것이다. 오늘부로 내가 주인으로서 되었으니 그대와 그대 집안의 계약서를 풀어주겠다. 그러니 후부를 떠나 스스로 살 길을 찾아가거라.”뜰 안은 다시금 정적이 흘렀다.서 관사. 후부의 첫째 가는 실세이자 후부 외의 전답과 점포의 절반을 거느리며 어디를 가나 떠받들리던 자였다. 후부의 나무를 등에 업고 수년간 재산을 불리며 작은 군수조차 그의 앞에서는 몸을 낮춰야 했는데 한순간에 후부에서 잘려 나간다면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동안 뻣뻣이 목을 치켜들던 탓에 이미 원한을 산 자가 부지기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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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관사들은 더 이상 말 한마디조차 보태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순순히 그녀를 따랐다. 신수빈의 시선이 다시 내원에 모여 있던 하녀들과 유모들에게로 옮겨갔다.“그리고 너희들. 너희는 안채 곳곳을 맡아 지내는데 안채는 외택과는 달리 더욱 많은 금기와 규율이 따르는 곳이다. 세가 귀족의 집안에서 좋지 못한 말이 바깥으로 한 올 새어나가기만 해도 누군가는 그 조각을 붙잡아 풍문을 만들고 이내 사람들의 술자리에 오르내리며 웃음거리가 된다. 그러니 너희는 더욱 잘 알아야 한다. 어떻게 주인을 모셔야 하는지, 어떤 말은 해야 하고 어떤 말은 해서는 안 되는지, 언제 말을 해야 하고 누구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지 말이다. 모든 것에는 분명한 법도가 있다. 이런 도리를 모르는 자라면 나는 그 자를 사용인으로 두지 않겠다.”하녀와 유모들은 공포에 휩싸인 채 엎드려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로 충성을 맹세했다. 뜰 안에는 삽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은 모습만 남아 있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둘째 마님과 셋째 마님은 눈이 휘둥그레져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본디 그들은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상인 집안 출신의 작은 며느리를 길들이려는 심산이었다. 서씨 부인이 남겨둔 이 관사과 유모들이 나서서 어떻게 신씨 부인을 곤란하게 만들지 지켜보려 했던 것이다.하지만, 고작 향불 한 자루가 탈 시간 동안 신수빈은 연이어 치고 들어가며 반격을 쏟아냈다. 먼저는 후부의 체면을 짓밟듯 내리누르고 이어 늘 제멋대로 구는 윤서령까지 짓밟아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한 뜰 가득한 하인들조차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복종하게 만들었다.셋째 마님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며느리는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감히 더 나설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뒤쪽에서 나직이 한숨을 흘리며 중얼거렸다.“서원의 며느리가 저리도 강경하니 장부를 들여다보는 것도 이제는 불가능겠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큰 마님의 명을 받아 이제는 둘째 마님마저 눈에 두지 않으니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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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후부 내의 장부들은 모두 창란원에 모여 있었으나 신수빈은 책을 뒤적이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저쪽이 바로 분가 이후, 이십 해 가까이 이방과 삼방의 점포와 전답에서 들어온 수지 기장입니다. 옛 평양후께서 세상을 떠난 지도 십 해가 되어가죠. 그 십 해 동안은 조모님 곁을 지키던 배필 관사들이 매달, 매해의 출납을 빠짐없이 적어 두었습니다. 그중 몇몇 의복 가게들은 천하가 평정되면서 남쪽에서 진상된 촉비단과 소주 자수가 경중을 휩쓸자 진부한 양식만 내놓던 가게들은 매해 적자를 면치 못했습니다. 거기에 세 해 전 대흉년이 들어 전답에서 조세를 거두어들이지도 못했으니 올해가 되어서야 그나마 좀 회복된 수준이지요. 평균을 따져보면 해마다 겨우 팔천 냥 남짓 들어왔을 뿐입니다. 삼방 역시도 비슷하고요.”셋째 마님과 둘째 마님은 살림을 실제로 맡아본 적이 없으니 이 수익이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셋째 마님은 팔천 냥이라는 숫자가 입에 오르자 순간 눈빛이 흔들렸다. 어제 후부에 빚을 받으러 온 상인들이 떠들던 액수가 바로 팔천 냥이 아니었던가? 결국 그녀들과 이방의 일 년 총수입이란 게 고작 후부의 한 달치 지출과 큰 마님의 회갑연 비용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는 걸 실감한 것이다.비록 모두가 적자로 힘들다 했어도 결국은 후부라는 큰 나무를 등에 업고 있었으니 그 기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분가가 끝났을 때 셋째 마님이 굳이 둘째 마님에게 부를 나누지 말자고 부추긴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후부라는 기둥이 있어야만 그들 또한 이전처럼 체면을 세울 수 있었으니까.그런데 지금, 신수빈은 장부를 한 장도 들추지 않고 곧장 정확한 장부 내역을 입에 올렸다. 셋째 마님은 그녀의 비범함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재물이란 본디 몸 밖의 물건일 뿐. 예로부터 이 모든 건 장모님과 큰 형수께서 맡아왔으니 우리는 믿고 안심했다. 이제는 조카며느리 네가 맡아보거라. 네가 신가 사람이라는 걸 누가 모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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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신수빈은 윤 가의 두 숙모 속내 따위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하나는 탐욕에 눈먼 채 우직함을 가장한 무모한 자였고 또 하나는 겉으론 불심을 가장하며 속에 독을 감춘 호랑이였으니.“두 숙모께서 직접 말씀을 꺼내셨으니 오늘은 기필코 장부를 낱낱이 따져야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큰 적자를 안고 있는 후부의 살림을 제가 어찌 감히 맡을 수 있겠습니까?”그녀가 고개를 들어 청하를 바라보자 그녀는 곧장 일부분의 후부 일상 지출 장부를 둘째 마님 앞에 내려놓고 주판 또한 신수빈의 앞으로 들여왔다.“우선 둘째 마님의 안채부터 계산해 보지요. 둘째 숙모의 유모와 하녀들은 모두 숙모께서 시집올 때 데려온 지참 노비들이지요. 일등 하녀가 네 명, 이등 하녀가 여덟, 삼등 하녀가 여섯, 잡일 하녀 다섯. 여기에 집안일을 총괄하는 유모가 세 명 있지요. 이들의 월급은 모두 후부의 장부에서 지출되었습니다. 일등 하녀는 한 달에 은자 두 냥, 이등 하녀는 한 냥, 삼등 하녀는 팔백 문, 잡일 하녀는 오백 문, 유모들은 석 냥씩.이것을 모두 합치면 하녀들의 월급만으로도 1년에 삼백팔십칠 냥 육백 문이 들지요. 여기에 둘째 마님께서 매 계절마다 안채의 하녀들에게 비단과 무명으로 지은 옷과 장신구 두 벌씩을 지급하도록 요구하셨으니 이는 오백구십오 냥 육백 문이 더해집니다. 이 항목은 다른 안채들에 비해 둘째 숙모의 지출이 훨씬 높은 편이지요. 제 말이 틀리지 않았지요?”신수빈의 고운 옥 같은 손가락이 주판 위에서 경쾌하게 튕겨지고 계산이 끝난 뒤에도 그녀의 얼굴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저 고요하고 날카롭게 둘째 숙모를 바라볼 뿐이었다.둘째 마님은 오히려 우쭐해져 전혀 그녀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 채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그야 물론이지. 나는 어려서부터 내 곁에는 늘 시중드는 인원이 많았다. 게다가 그들의 월급은 시집올 때부터 지금껏 단 한 번도 올려주지 않았으니 차라리 내가 미안할 지경이지.”신수빈은 그저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둘째 숙모께서는 참으로 어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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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윤수혁은 안마당 밖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그는 뒤채 안에서 한 여인이 준엄하게 꾸짖다가 냉담하게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생동감 넘치는 행동은 고요하면서도 우아했다.세상에 절세미인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유독 그녀만은 한 번 본 이후 잊혀지지 않았다. 그녀가 강인하다 여겼을 때 또다시 지혜롭고 영민한 모습이 드러났다. 하지만 때로는 후부의 계략에 온몸으로 맞서며 무력하고 연약한 눈빛을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 순간, 그녀는 또다시 예리하고 세상사에 능숙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윤수혁은 믿을 수 없었다. 세상에 어찌 그녀와 같은 여인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도무지 꿰뚫어 볼 수 없으면서도 신묘하게 마음을 끌어당기는 존재라니.원래는 조모께서 둘째 숙모와 셋째 숙모가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까 염려되어 사람을 시켜 옛날 분가할 때 조부가 친히 써 내려간 가훈을 전하게 했다. 그리고 이 일을 윤수혁이 맡았기에 그가 직접 신수빈의 안채로 가져온 것이었다.하나 뜻밖에도, 그녀는 둘째 숙모와 셋째 숙모를 대하며 화를 내지도, 그들과 억지를 부리며 다투지도 않았다. 그저 열 손가락이 주판 위를 날개처럼 오가며 태연하게 장부를 펼쳐 그들 앞에 숫자를 쌓아 보일 뿐이었다.윤수혁은 손에 쥔 조부의 가훈을 내려다보다가 끝내 전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조용히 돌아섰다.그 시각, 둘째 마님은 마치 목이 죄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오리처럼 입술만 몇 차례 열었다 닫았다. 그러나 끝내 한 마디도 뱉어내지 못했다.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옆에 있던 장부를 거칠게 낚아채더니 찢어버리려 들며 분노에 차서 고래고래 소리쳤다.“이게 다 무슨 개소리야! 전부 헛소리일 뿐! 우리 은전을 가로채려는 수작이지! 절대로 안 된다!”신수빈은 고요히 그녀의 발악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둘째 숙모, 원하시면 찢으셔도 됩니다. 미처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저는 어려서부터 별다른 재주는 없었으나 오직 기억력 하나만은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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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마침 그때, 전원에서 평양후의 친위 관사가 궁중 내관을 공손히 모시고 들어왔다.“신병호의 딸, 신가 수빈, 성지를 받으시오.”내관의 간사한 목소리가 울리자 마당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순간 얼어붙었다.여기는 윤가이다. 설령 황명의 성지라 한들 마땅히 윤가의 여인에게 내리는 것이지 어찌 신가의 딸에게 내려지겠는가?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신수빈을 향했다. 그녀가 앞으로 나서서 무릎을 꿇고 성지를 받자 다른 이들도 황급히 따라 무릎을 꿇었다.“신가 수빈은 성품이 순숙하고 근면하며, 행실이 바르고 내칙을 잘 다스리며, 숙덕까지 품고 있다. 집안 전체가 청백으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검소함을 지켰고 사직에 도움을 주어 백성에게 복을 도모하였으니 곧바로 신가 수빈을 일품 고명 부인으로 책봉한다.”내관의 성지 낭독이 끝나자 뜰 안은 단숨에 숨죽인 정적에 잠겼다.마님께서 일품 고명 부인으로 봉해진다고? 게다가 윤가의 공훈이 아닌 신가의 위세로?보통 후궁 혹은 후당 여인의 고명은 남편이 조정에서 누리는 관직과 품계에 따라 정해진다. 이른바 남편이 조정에서 귀하면 아내는 집안에서 영예롭다는 도리였다. 평양후 세자는 조정에서 특별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기에 그의 부인 역시 일품 고명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심지어 지금의 평양후 아내인 서씨 부인조차도 일품 고명을 받지 못한 처지였다.그런데 작은 마님은 단숨에 일품 고명을 받았다. 이로써 신가가 얼마나 체면이 서는 집안인지, 그리고 조정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가 뚜렷이 드러났다. 그러니 아까 작은 마님이 윤가 따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그 순간, 땅에 무릎을 꿇고 있던 둘째 마님은 정신이 아득해졌다.잠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상인의 딸에게 일품 고명을 내렸다? 이건 성지를 잘못 내린 것이 아닐까?그러나 바로 그때, 신수빈은 성지를 받들고 고개를 들어 내관에게 물었다.“감히 여쭙습니다 내관. 저는 일품 고명이 어느 품계에 속하는지 알지 못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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