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간신은 오늘도 나를 죽이려 한다: Chapter 11 - Chapter 20

100 Chapters

제11화

소휘의 마차가 제왕부의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그 앞마당은 이미 난장판이었다.수십 명의 금위군이 들이닥쳐 왕부를 송두리째 뒤엎는 중이었다. 기왓장 틈까지 파헤치는 듯한 그 기세는 숨길 것 하나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 같았다.제왕은 멀리서 그 마차를 보는 순간 얼굴이 뒤틀렸다.이 일은 분명 사사로운 감정을 핑계로 왕부를 불바다로 만든 소휘의 짓임이 틀림없었다. 그 덕분에 대리시의 철저한 수사를 받아야 할 지경에 놓였으니 제왕은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제왕은 흐트러진 복장을 제대로 추스를 겨를도 없었다. 그의 몸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었고 눈빛에는 분노가 맹렬히 치솟고 있었다. 금위군이 앞을 가로막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마차에 달려들었을 것이다.“역신! 간신! 사사로운 앙심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 같으니라고! 너 같은 놈은 머지않아 몰락할 것이다!”마차 안, 소휘는 의연히 앉아 있었다. 가볍게 옷자락을 매만지던 그는 여유롭게 금위군에게 명했다.“막지 말거라.”금위군이 길을 열자 제왕은 잠시 주춤했다. 이제 와서 달려드는 건 스스로 품위를 내던지는 일이었기에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가까이 와서 욕하셔도 됩니다.”그 말에 제왕은 몸을 떨었다. 체면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분노를 선택할 것이냐? 그는 체면을 구기기 싫어 주춤하는가 싶더니 다시 성을 냈다.“본왕이 너를 두려워할 줄 아느냐? 조정의 백관이 상소를 올려 군주의 측근을 모조리 갈아 엎어치우는 날, 가장 먼저 처형당할 자가 바로 너일 것이다.”소휘는 옅게 웃으며 곁에 선 곤이에게 명했다.“좀 더 가까이 가거라. 소리가 잘 안 들리는구나.”곤이는 즉시 고삐를 당겨 마차를 조금 더 앞으로 몰았다. 그러자 제왕은 흠칫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차가 멈춰 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제왕은 또다시 뒤로 물러났다.결국 마차는 왕부의 석계단 바로 앞까지 다가왔고 제왕은 문안으로 한껏 물러선 채 마지막 힘을 짜내듯 외쳤다.“너… 너는… 반드시 비참한 결말을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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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 시각, 여수아는 시방 안 구석 어딘가에 앉아 있었다.문이 ‘덜컥’ 닫히는 소리가 울릴 때까지, 그녀도 소년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소년은 문이 닫히는 걸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뛰어들 듯 달려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두 손에 힘을 꽉 쥐고 당기고 또 당겼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소년은 안간힘을 다해 두드리며 외쳤다.“문 열어 주십시오!”허공 속에 맴도는 그의 목소리는 끝내 벽 너머를 넘지 못했다. 그 소년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축하한다. 이제 너도 나랑 같이 갇혔구나.”소년은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작은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겁먹은 눈동자는 쉴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문을 잡아당기는 그의 숨결은 거칠어지는가 싶더니 금세 옅어졌다.손끝에서 기운이 빠져나가자 그는 천천히 무너지듯 바닥에 웅크렸다. 작은 몸이 서서히 땅에 내려앉을 때 여수아는 직감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아이 곁으로 다가갔다.땅에 쓰러진 소년은 가느다란 두 손으로 목깃을 움켜쥐고 사력을 다해 호흡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작은 짐승 같은 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절박하면서도 처절한 숨소리에 여수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점점 얕아지는 숨결과 목을 죄어오는 발작적인 증상으로 보면 이 아이는 천식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아이에게서 사향 냄새가 나는 거지?그녀는 이내 무릎을 꿇고 아이의 몸을 돌려눕혔다. 옷깃을 풀고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어 숨통을 틔워주었다. 그 순간, 소년의 옷 속에서 무언가 ‘딸각’하고 떨어졌다.바닥에 굴러떨어진 건 작은 향 주머니. 그리고 그 속에서 스며나오는 짙은 사향 냄새.그녀의 눈매가 차게 굳어졌다. 여수아는 조용히 자신의 주머니에서 약환을 꺼내 소년의 입에 넣었다. 입을 벌리고 혀를 누르면서 조심스럽게 삼키게 했다.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천식을 앓는 아이가 사향을 달고 다닌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그리고 하필 이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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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그 시각, 밤이 완연히 내려앉은 뒤에야 소휘가 재상부로 돌아왔다. 대청에 들어선 그는 손을 씻으러 향하던 중 때마침 의원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하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손을 물에 담근 채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누가 의원을 불렀느냐?”하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가준이 때문이옵니다. 시방에서 사고가 났사옵니다. 마 씨가 찾았을 때는 이미... 듣자 하니, 여 아가씨께서 아이의 목을 졸랐다고 하옵니다. 가준이는 온몸이 멍들어 있었고 정신을 잃은 상태였으며 조금만 늦었어도… 아마 살릴 수 없었을 거라고…”소휘는 천천히 손을 닦아내며 감흥 없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의원에게 전하거라. 있는 힘껏 가준이를 살리도록 하거라”하인은 고개를 숙이며 의원을 데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대청에는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곤이는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여 아가씨께서는 이곳에 막 들어온 몸이라 가준이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을 텐데 설마 그런 일을…”말이 끝나기도 전, 소휘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분노도 냉소도 없었지만 공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그녀를 두둔하겠다는 뜻이냐?”곤이는 즉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그럴 리 없사옵니다. 어찌 감히…”한편, 의원은 마 씨의 처소로 도착한 후 급히 가준을 진찰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열은 계속 내려가지 않았다.여수아는 어둠 가득한 시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초저녁에는 몇몇 하인들이 찾아와 입에 담기 힘든 조롱을 퍼부었고 그녀를 향해 침을 뱉으며 비아냥거렸다. 물론 지금은 문을 잠그고 뿔뿔이 사라졌지만 말이다.곧이어 누군가 나무 창살 너머로 시커먼 무언가를 던져 넣었다.‘찍찍’그 소리는 낮고 끈질기게 바닥을 기어다녔다. 쥐 떼였다. 한 무더기의 생쥐들이 시방의 바닥을 휘젓고 다녔다. 밖에서 누군가가 키득거리며 말했다.“악독한 년, 너는 이놈들과 같이 지내는 게 딱이다.”여인이니 쥐를 무서워할 거라 여겼던 모양이었다. 쥐 떼 속에서 비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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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다음 날 아침, 가준은 마침내 희미하게 의식을 되찾았다. 마 씨는 곧장 그를 부축하며 대청으로 달려갔다. 소휘가 앉아 있는 태사 의자 앞에 꿇어앉자마자 그녀는 억장이 무너진 듯 울음을 터뜨렸다.“재상 나리! 가준이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핏줄이옵니다. 그런데 어젯밤, 그 아이가 거의 죽을 뻔했사옵니다. 이렇게 어린 아이까지 해칠 필요는 없지 않사옵니까? 제발 저희 모자를 위해 억울함을 풀어주옵소서!”소휘는 감정 하나 담지 않은 음성으로 곁에 서 있던 곤이에게 명했다.“그녀를 데려오거라.”곤이는 곧장 시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안쪽 어둠 속 구석에 앉아 있던 여수아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주인 어르신께서 부르시옵니다.”여수아는 눈썹을 약간 치켜올리며 그를 보았다.“이제야 죄를 따지려나 보군.”곤이는 그 말에 눈썹을 한번 꿈틀거렸다.“왜 그리 행동하셨사옵니까?”여수아는 말없이 일어섰고 스스로 대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곤이는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도 다시 한 번 낮게 중얼거렸다.“가준의 아버지는 생전에 재상 나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고 그 은혜로 나리께서 그 모자를 누구보다 아껴왔사옵니다. 그 아이를 정말 해쳤다면… 나리께서 아가씨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옵니다.”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대청에 이르자 여수아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안을 살폈다. 오늘 소휘는 연한 호색 도포를 걸쳤고 검은 머리는 가지런히 올려 묶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찻잔을 손에 들고 있었고 뚜껑 아래로 피어오르는 김이 그의 속눈썹에 아른아른 내려앉았다.그리고 그 곁에는 마 씨와 가준이 나란히 서 있었다. 아이는 아직도 안색이 창백했으나 정신은 제법 말짱해 보였다.그녀가 대청 안으로 걸음을 들이자 가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더니 마 씨의 뒤로 몸을 숨겼다. 마 씨는 아이를 다독이며 여수아를 노려보았다.“걱정 말거라, 가준아. 오늘은 반드시 나리께서 너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다.”소휘는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여수아를 바라보았다.“또 일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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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온종일 시끄럽게 몰아붙였던 끝에 결국 은인을 원수로 착각한 꼴이 되자 마 씨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제가 섣불리 판단하고 빚어낸 과오이옵니다. 나리 앞에서, 그리고 여 아가씨 앞에서 사죄드리옵니다. 아이를 구해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사옵니다. 염치없지만 용서해 주시옵소서.”여수아는 그녀의 달라진 태도를 보며 굳이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손해 본 것도 없고 뼈가 부러진 건 자기 팔도 아니니 말이다.소휘는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잠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손을 들자 그의 수하인 곤이가 다시 여수아를 끌고 나갔다.“잠깐의 억울함을 면했다 해도 허 유모의 죽음은 아직 미궁이니 그 몸은 잠시 더 가둬두도록 하거라.”여수아는 끌려나가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그대 주인께선 이 결과에 꽤나 실망한 듯하군.”곤이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꾸했다.“실망이야… 안 했다고 하면 거짓이겠지요.”그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이어 말했다.“여 아가씨, 운은 참 좋은 편이신 것 같사옵니다.”그러고는 끝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끌고 갔다.그러나 그날 오후, 뜻밖에도 여수아는 순순히 풀려났다.“허 유모를 죽인 자가 잡혔느냐?”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는 하인의 목소리는 예전과 다르게 부드러웠다.“잡히진 않았사옵니다. 허나 마 씨 아주머님께서 아가씨를 위해 변호해 주셨사옵니다. 그 날밤 허 유모를 후원에서 보았다고요.”이제 누가 허 유모를 죽였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누군가 여수아를 위해 입을 열어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의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그 하나면 족했으니.돌아온 그녀는 다시 예전의 조용한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 문을 밀고 들어선 그녀는 방 안을 스윽 둘러보고는 몇 군데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때마침 마 씨가 다가오자 그녀가 물었다.“제 짐은요?”마씨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그건 저도 모르겠사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드리지요.”수소문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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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그 보따리 속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여수아의 낡고 해진 옷가지 몇 벌이었다. 소휘는 무심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더니 문진 위에 얹혀 있던 붓대를 뽑아 들었다. 마치 잡초라도 헤집듯 그녀의 옷가지를 하나하나 툭툭 건드려가며 무언가 더 흥미로운 물건이 나올까 싶어 뒤적였다. 하지만, 결국 나온 것이라곤 옷뿐이었다.그러다 그는 붓 끝으로 그녀의 속옷 하나를 건드렸다. 소휘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고 여수아는 지쳐버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더러운 인간들.그때, 소휘가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지금… 속으로 나를 욕하는 중인가?”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되물었다.“욕하는 것 같사옵니까? 만약 욕했다면 그 이유가 짐작 가긴 하시옵니까?”그는 그녀의 속옷을 손끝에서 내려놓으며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렸다.“치우거라.”검은 그림자처럼 서 있던 곤이는 고개를 숙이고 다가왔다. 그는 난생처음 여인의 옷을 손에 들게 되자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설프게 보따리를 매만지던 그는 끈을 단단히 잡지 못해 밑동이 풀려버렸다.바스락.옷가지들이 쏟아지며 소휘의 책상 위를 뒤덮었다. 그의 정갈하던 문서와 상소문들은 한순간에 천 조각들에 파묻혀 버렸다. 그중, 아까 붓대로 툭 건드렸던 속옷이 마치 이 모든 장면의 절정을 찍듯 그의 눈앞에 고스란히 펼쳐졌다. 여수아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이 주군과 부하란 작자들은 짐승인 것일까?곤이는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부주의했사옵니다. 죄를 받들겠나이다.”그녀는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제 보따리와 무슨 원한이라도 있사옵니까?”소휘는 산산이 흩어진 책상 위를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나는 불만이 없는데 그대는 아주 불쾌한가 보군.”“제 사생활을 침범했는데 불만이 없으면 이상한 게 아니겠사옵니까?”그러자 소휘는 태연히 말했다.“나는 그냥 봤을 뿐이지, 훔쳐본 것이 아니오.”당당했다. 마치 너무나 자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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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여수아는 조심스럽게 보따리를 안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 안에 담긴 자신의 옷가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갈아입을 옷은 두 벌의 속옷과 겉옷뿐이었지만 방금 전까지 모두 소휘의 손을 거쳐갔다. 그중에서도 손바닥만한 크기로 정갈하게 접혀 있던 속옷은 마치 자신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신경을 긁어댔다. 그러나 당장 입을 옷이 그것뿐이었으므로 혀를 끌끌 차며 물속에 처넣었다.“정말이지, 인간이 아니라 짐승들이구나.”마 씨가 옆에서 바라보다 한 발 나서며 말했다.“이런 일은 아가씨께서 손수 하실 일이 아니 옵니다. 제가 하인을 시켜 드리지요.”그로부터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재상부는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소휘가 직접 여수아와의 혼례를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날짜까지 못 박아버렸기 때문이다. 열흘 후 그는 여수아와 혼례를 올릴 생각이었다.애초에 아무도 소휘가 그녀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시골에서 떠밀려 올라온 여자일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그 여자가 이 넓은 저택의 안주인이 된다는 말에 하인들은 태도를 바꾸며 그녀의 처소에 들락날락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차가운 시선을 주던 자들이 이제는 앞다퉈 고개를 조아리며 다정한 말투로 그녀에게 아부했다.그녀는 후회했다. 이렇게 구역질 나는 곳일 줄 알았더라면 봉황옥패 따위는 들고 올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러나 이곳의 질서는 의외로 간단했다. 모든 것은 소휘의 기분에 따라 움직여졌다. 그의 기분이 좋으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것이고 기분이 나쁘다면 후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마 씨가 필요한 것이 없냐는 질문에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속옷부터 다시 맞춰 주거라. 전에 입던 건 입고 싶지 않구나.”혼례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의 결단은 벼락처럼 빠르고 명확했다.그 모습에 여수아는 기가 찼다. 이 남자는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한 것일까? 무슨 애틋한 연정을 품은 신랑이라도 되는 양 온 도성에 ‘정혼 발표’까지 해대다니.그렇다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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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며칠간 말똥을 뒤지다시피 하며 벌을 받은 곤이가 다시 돌아왔다. 땀 냄새와 말똥 냄새가 엉겨 붙은 몸을 질질 끌며 돌아오던 길에 나뭇가지 아래 그늘에 기대선 한 여인이 휘파람을 불며 그를 불러 세웠다.여수아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서있었다.“열 길 스무 길 밖에 있어도 네 몸에서 풍기는 말똥 냄새는 못 숨기는구나.”그러자 곤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했다. 누가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혀부터 나불대는 여인을 향해 그는 이를 악물며 걸음을 재촉했다.“다른 사람 걱정할 시간에 아가씨나 잘 챙기시옵소서.”여수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네 주인, 진심으로 혼례 할 생각은 없어 보이던데?”곤이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하지만 여수아는 그 말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가 진심으로 혼인을 원했다면 진작 바로 혼례를 밀어붙였겠지. 굳이 정혼 따위 절차를 밟을 이유가 있을까?눈 깜짝할 사이에 열흘이 흘러갔다. 초대장이 조정 곳곳에 뿌려지고 온 도성은 한바탕 소란에 빠졌다.“뭐? 재상이… 정혼을 한다고?”모두가 충격에 휩싸였다. 도대체 누구와? 어느 집안의 규수길래 저 칼처럼 날 서 있는 자를 붙잡을 수 있었단 말이지?그런데 정작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그 상대는 한적한 시골 출신의 여인이라고 했다. 기대에 가득 찼던 수군거림은 곧 비웃음으로 번졌다. 조정의 대신들 또한 겉으론 축하를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분통을 삼켰다.‘그놈이 결혼이 웬 말이더냐? 평생 혼자 늙어죽는 운명일 줄 알았건만…’‘자식? 웃기지 말거라. 하늘이 그런 자에게 자식을 선물로 주겠느냐?’그러면서도 다들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축하드리옵니다, 나리.”청악군주는 초대장을 받자마자 눈앞이 새파래졌다. 그녀는 그 곱고 단정한 종이를 손에 쥐고는 마치 독극물이라도 만진 듯 구겨 던졌다.“그 여자가 대체 뭐라고… 오라버니께서는 정말 그 여인과 정혼한단 말이냐?”분노는 곧 시퍼런 질투로 번졌다.후원에서 여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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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여수아가 문을 나서자 마당 한복판에 서 있는 소휘가 눈에 들어왔다.오늘 그는 자줏빛 당색의 곤룡포를 입고 있었고 옷깃 하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여며 있었다. 곧고 반듯한 모습은 고요했지만 그가 풍기는 기운은 한마디로 범접할 수 없는 냉정함이 서려있었다. 겉으로는 친절해 보이지만 아무나 손댔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따스한 눈길로 여수아를 바라보았다. 저 표정은 그가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걸작이겠지.소휘는 눈빛에 잔결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만 살짝 올리곤 조용히 말했다.“이리 오거라.”늘 그를 피하기만 했던 여수아였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오늘은 둘 사이가 너무 멀어 보이면 구설수에 오르기 딱 좋은 날이었기에 형식적으로라도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어차피 서로 마음도 없는데 겉모습이라도 맞춰야지.’그리하여 여수아는 말없이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녀가 그의 곁에 다가서기도 전, 소휘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짜릿한 만족감을 느꼈다.그 기분도 잠시, 소휘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여수아는 은근히 힘을 주어 손을 빼려 했으나 소휘는 더욱 다정한 척하며 손을 꼭 쥐었다. 멀리서 본다면 참으로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을 것이다.“굳이 이렇게 진하게 향수를 뿌려야 했나?”소휘가 물자 여수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불편하시옵니까? 저는 좋은데.”사실 그녀는 일부러 향을 진하게 뿌렸다. 코를 찌를 정도의 향기였지만 소휘에게서 풍기는 그 야릇한 냄새를 덮는 데는 충분했다. 적어도 그 향에 현혹되는 일은 없으리라.“나는 불편하다.”소휘가 단호하게 말했다.“어쩔 수 없사옵니다. 나리와 저는 향에서도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데 이 혼인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떻사옵니까?”소휘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나랑 혼인하기 싫은 것이냐? 약혼하고 보니 실망스러워?”“설마요. 감히, 재상 나리께 실망이라니...”여수아는 비꼬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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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정혼식 연회가 막 시작될 무렵, 재상부 뜰 안은 이내 북적이는 인파들로 가득 찼다. 내정의 하인들뿐 아니라 각 가문의 하객들이 데려온 시종들까지 더해져 대청 앞마당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그간 재상부에서는 큰 잔치를 연 적이 없었기에 이번만큼은 체면을 세우려는 듯 유난히 성대히 꾸며졌다. 정원 한편에는 가설무대가 세워졌고 초청된 희단이 무대 위에서 곡을 뽑아내고 있었다. 손님들은 잔을 들고 음식을 즐기며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흥이 오를 즈음, 무대 위 장수 역의 배우가 창을 높이 치켜들고 극의 절정을 노래하던 찰나 그의 칼끝이 방향을 틀었다. 날 선 칼끝은 곧장 상좌에 앉은 소휘를 향해 날아들었다. 좌중은 그제야 경악했다. 숨이 턱 막히려던 순간, 소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손을 들었다. 여수아와 잡고 있던 손을 말이다. 그는 그녀의 손을 틀어쥐며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여수아는 그 짧은 찰나에 소휘의 뜻을 알아차렸다. 이 남자, 진심으로 그녀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녀를 방패로 쓸 생각이었다.‘이 개자식.’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녀는 기만하게 움직였다.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오히려 더 깊이 파고들어 그의 다리 아래로 몸을 숨겼다.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무력하고도 순진한 여인의 모습을 연기하며 그 칼이 그를 꿰뚫기만을 내심 바랐다.칼끝은 순식간에 코앞까지 닿았고 소휘는 마침내 손으로 상 위를 힘껏 들어 올렸다.잔이 깨지고 그릇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날은 상판에 쾅 하고 꽂혔다. 철성은 여운처럼 퍼졌고, 긴장감은 절정에 다다랐다.하객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여수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평온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 어둡고 깊은 눈동자에는 미세한 경계의 떨림만 남아있었다.“재상 나리, 괜찮사옵니까?”그녀는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고는 그의 반응을 기다릴 틈도 없이 곧바로 그의 품에서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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