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휘는 당대 최고의 권신으로 모두가 그를 두려워했다. 권모술수와 권세를 쥐고 흔드는 데만 흥미가 있었고 여색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그에게 느닷없이 한 아가씨가 찾아왔다. 그녀는 자칭 그의 약혼녀라며 자신을 소개하는데... “나랑 연애해 보지 않겠느냐?” “어떤 종류의 연애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한 것 말이다.” 그날 이후 여수아는 늘 깊이 후회했다. 왜 그때 충동적으로 그의 약혼녀라고 자청했을까? 긴 고민 끝에 그녀는 결국 파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주위 사람들에게 털어놓았지만 모두 그녀를 뜯어말리기 바빴다. “그래, 그 사람이 간사하고 잔인하긴 하지만, 뭐 그 외에도... 마음씨가 고약하고 인품이 글렀다고는 하지만 말이지. 그거 빼고는 흠잡을 데 없지 않나...” 여수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좋은 점이 없다는 뜻 아닙니까?” 그 질문에 모두 머리를 짜내어 생각하더니 그녀에게 겨우 위로의 한마디를 건넸다. “잘생기긴 했잖소?” “그럼 당신들 중 그 자를 갖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십시오. 그 대가로 저택 한 채는 그냥 드릴 터이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진저리 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급히 입을 열었다. “아, 아니지! 이건 저택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저택을 무료로 준다고 해도 그를 데려가겠다는 자가 없으니 웬. 여수아는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날 팔아먹는데 실패했느냐?” 늘 우수에 차 있는 눈빛으로 말하던 소휘에게 신경 쓰이는 일이 하나 생겼다. 바로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 나타나 그에게서 여수아를 가로채려 한다는 것이다. 그 후로부터 소휘의 낯빛이 바뀌기 시작하더니 그의 속에서는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된다.
View More여수아는 아직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제와 어제, 이틀 밤이나 아무 일 없었고 금군들이 근처를 순찰하더라도 전망대까지 들어오는 일은 없었는데… 오늘 밤은 도대체 왜 이 난리인 것일까?그런데 이내 대문 안으로 발을 들이는 소휘의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모든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여수아는 속으로 씩씩거렸다.‘이 인간이랑은 정말 궁합이 사나운 게 틀림없군!’흔들리는 횃불이 안으로 밀려들며 텅 빈 전망대의 전각을 일순간 흐릿한 그림자와 잔상으로 가득 채웠다. 소휘는 불빛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이상하리만큼 부드러웠고 마치 누굴 잡으러 온 게 아니라 오랜만에 옛 지인을 만나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그는 유리기와 지붕을 올려다보더니 주위를 찬찬히 훑었다. 나선형으로 감겨 있는 계단들을 쭉 훑어보다가 마침내. 아니, 어쩌면 아주 정확하게 여수아가 몸을 숨기고 있던 어두운 음영의 구석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여수아는 그 순간 그가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리고 단박에 숨을 죽였다. 몸을 벽에 바짝 붙이고 자신을 어둠 속에 녹여냈다. 그가 정말로 알아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그 전각 안은 한동안 정적에 휩싸였다. 금군 대장이 조심스레 물었다.“나리, 자물쇠는 이상이 없사옵니다. 저희가 직접 올라갈까요?”솔직히 아무도 그 고된 계단을 오르고 싶지 않았다. 이곳은 그저 풍경이나 구경하는 누각일 뿐, 궁인들이 청소를 위해 오르내리는 걸 제외하고는 훔칠 만한 보물 하나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문은 분명 바깥에서 제대로 잠겨 있었는데 사람이 안에 들어왔다면 어떻게 그 자물쇠가 멀쩡히 닫혀 있을 수 있겠는가?여수아는 마음을 졸이며 귀를 곤두세웠다. 그러자 소휘가 조용히 말했다.“살펴보거라 이상이 없으면 다시 돌아오도록.”“네!”금군들이 계단을 따라 조금 올라가더니 횃불을 들고 위층을 비추며 주변을 탐색했다.불빛은 한두 층 더 위까지 닿았지만 별다른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그들이 조금만 더 올라갔더라면 여
황제와 상 귀비가 자리를 떠난 후에야 아여는 긴 숨을 내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이번 고비는 잘 넘겼사옵니다.”여수아는 담담히 말했다.“잠시뿐이지요.”아여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상 귀비는 결코 아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한고비 넘기면 또 한고비가 기다릴 뿐이었다.그날 밤, 여수아는 조용히 온화전을 빠져나왔다. 궁 안에는 전망대라 불리는 누각이 있었는데 황궁 내에서 손꼽힐 만큼 높은 건물이었다. 그곳에 오르면 궁궐 전체는 물론 장안의 등불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유진원에 드나드는 것에 비하면 전망대에 드는 것은 훨씬 수월했다. 그곳은 금지구역도 아니고 수위 또한 느슨했으니까. 여수아는 순찰 도는 금군들과 등불을 드는 환관들을 피하며 재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안은 탑처럼 나선형 계단이 천천히 이어지고 있었다. 황제를 위한 정경이라 했지만 일 년 내내 그가 이곳에 오르는 일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건물 전체 높이를 어림잡아도 수천 계단은 족히 되어 보였고 그 하나하나를 오르려면 평범한 사람이라면 숨이 넘어갈 판이었다.여수아는 주저하지 않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은 빠르고 가벼웠으며 중반에 이르러서는 내친김에 기운을 끌어올려 달리기 시작했다. 치맛자락을 휘몰아치며 뛰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밤하늘을 가르는 경홍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여전히 제약을 안고 있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가빠지며 걸음을 멈춰야 했다.계단 위로 고개를 들어보니 옥상은 유리기와로 덮여 있었고 달빛이 물처럼 고요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 뒤로 남은 계단은 숨을 고른 뒤 한 번에 올라 드디어 옥상에 도달했다. 그곳에서는 바람이 일렁였고 성루에 홀로 기대선 그녀는 하늘의 별도 닿을 듯한 높은 자리에 올라서 있었다. 도성 전체의 불빛은 찬란했고 골목길은 흐릿하게 반짝였다.잠시 도성을 내려다본 그녀는 허리춤의 향낭에서 작은 옥소를 꺼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크기는 작았지만
여수아는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불편함은 참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문제는 그 원인이 바로 소휘라는 사실이었다. 그 손으로 건드렸던 곳은 지난번보다도 훨씬 더 깊고 확실했다.아여가 조심스레 물었다.“아가씨, 생선은… 드실 것이옵니까?”그 질문에 여수아는 단호하게 말했다.“당연히 먹어야지요. 그런 천한 인간 때문에 굶기나 하고 있으면 저만 손해이옵니다.”그녀는 저녁도 거른 채, 반나절을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러고 나서 방 안에서도 한바탕 소란을 치렀으니 배가 고픈 게 당연했다. 밖에서 그 말을 들은 악동이는 큰 소리로 외쳤다.“두 분 어서 나오십시오! 방금 생선을 다시 구웠사옵니다!”그러나 여수아와 아여가 문을 나서자 뜻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개 같은 남자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선을 앞에 두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때 여수아가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하자 아여가 조용히 물었다.“어딜 가시려는 것이옵니까?”여수아는 냉랭하게 대답했다.“칼 가지러.”아여는 당황한 듯 따라붙으며 속삭였다.“그만두십시오, 아가씨. 들은 바로는 궁 안에서 제멋대로 불을 피우는 건 중죄라 하옵니다. 괜히 서로 물고 늘어지다간 나리께서도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옵니다.”그러자 악동이도 어리둥절해졌다.‘방금 전까지 그렇게 불꽃이 튀더니 왜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것이지?’그는 웃으며 분위기를 무마하려 했다.“두 분 이쪽으로 앉으시지요.”결국 여수아는 아여의 만류를 받아들였다. 우선은 대의와 형세를 생각해야 했다. 이런 앙금은 언젠가 반드시 갚을 수 있으니 잠시 눈감아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가자 악동이는 얼른 아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앉혔다. 그리하여 여수아는 울며 겨자 먹기로 소휘 옆에 앉게 되었다.그는 마치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단정히 단추까지 여민 모습이었다.“제가 잡은 생선인데 왜 나
그때 소휘가 여수아를 바라보는 눈빛이 갑자기 바뀌었다. 마치 지금 당장 그녀를 집어삼키든지 아니면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였다. 그는 낮게 물었다.“그래서 대체 어쩌겠다는 것이냐?”여수아는 자신이 그를 붙잡고 있다는 상황에 은근한 쾌감을 느끼며 말했다.“어디 함부로 행동해 보십시오. 제가 나리를 고자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사옵니다.”“고자?”소휘는 그 말을 되뇌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는 이지러진 달빛 같은 음울한 매력과 술기운이 배인 듯한 유혹의 기운이 뒤섞여 있었다.그 눈빛에 여수아는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잠시 후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존재가 두어 번 꿈틀였다.‘잡혀 있으면서도 뻔뻔하긴.’여수아는 속으로 중얼이며 손에 더 힘을 주었다.‘차라리 뿌리째 뽑아버릴까.’실제로 손에 힘을 주며 단호히 눌러봤지만 도리어 그의 반응은 거세졌고 상황은 더욱 아슬아슬해졌다. 결심을 굳힌 여수아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려던 순간, 그녀의 치맛자락이 뜯기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다리를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깜짝 놀란 여수아는 즉시 손발을 놀려 그를 저지했다. 그러나 방 안은 이미 밀도 높은 공기로 가득 찼다. 이전 두 번의 경험에 의해 여수아는 그의 손길을 막는 데 온 신경을 쏟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결국 그의 품 안에 눌린 채 침상에 반쯤 올라가 있었다.여수아는 당황한 기색으로 숨을 고르며 한껏 힘을 주어 저항했다.“제가 언제 유혹했다고 그러시는 것이옵니까?”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답했다.“옷은 흐트러지고 말은 거칠어지고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들었지. 이게 유혹이 아니면 무어란 말이냐?”그녀의 마지막 옷고름이 그의 손에 의해 풀려 버렸고 천이 흐트러지며 그녀의 살결이 드러났다. 흰빛이 은은하게 번지는 그 모습은 차마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위태로운 기운을 풍겼다. 그는 시선을 떨구고는 다시 말했다.“정말 유혹하고 싶었다면 좀 더 노골적이어야 했을 텐데.”
소휘는 점점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수아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숨을 죽였다. 이대로는 오래 함께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리, 구운 생선 드시겠사옵니까? 밖에서 함께 먹는 게 어떠하옵니까?”말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그의 옆 공간을 틈타 빠져나가려 했으나 소휘는 그 짧은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다시 붙잡힌 여수아는 뒷걸음치다 작은 탁자에 부딪혔다. 나무가 넘어진 소리에 바깥에서 듣고 있던 아여와 악동이가 깜짝 놀라며 몸을 움찔거렸다.“세긴 하군요...”악동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작은 탁자에서 무언가가 굴러떨어졌다. 손에 쥐어든 그것을 소휘가 눈앞에 가져가 확인해 보니 여수아의 붉은 속옷이었다.여수아도 그걸 확인하고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까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던 그것이 왜 하필 여기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소휘의 시선이 그녀의 앞섶에 고정됐다.“안 입었군.”하지만 말보다 그의 손이 훨씬 빨랐다. 그의 손길이 옷깃을 지나 살짝 그녀의 살결을 눌러왔다. 얇은 천한 겹 너머로 확인하듯 천천히 손을 굴려보았다.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자 여수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저항하기 위해 몸을 비틀다 자그마한 의자 위로 밀려 올라갔다.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지자 그녀는 그의 아랫배를 무릎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곧 무릎은 그의 손에 붙들렸고 이내 그의 허리에 감겨졌다.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수치도 모르시옵니까?”소휘는 태연하게 말했다.“옷을 거꾸로 입었군.”여수아는 멈칫했다. 어쩐지 옷고름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 했더니...“일부러 유혹하려는 건가?”그녀는 어처구니없어 쏘아붙였다.“누가 누굴 유혹했다고 그러시옵니까?”“그럼 이 꼴은 무엇이냐?”“분명히 말했사옵니다. 옷 갈아입고 있는 중이었다고 말이옵니다. 한데 나리께서 먼저 들이닥쳤잖습니까?”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옷고름이 사정없이 풀려버렸다. 이미 단정치 못했던 옷은 더 흐트러졌고 희고 가녀린 피부가
악동이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돌아왔사옵니다! 여수아 아가씨께서 스스로 돌아왔지요. 이 물고기도 그분이 호숫가에서 직접 잡아오신 것이옵니다.”소휘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조용히 방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악동이는 얼른 앞질러 말하며 아첨스럽게 덧붙였다.“지금은 방 안에서 푹 쉬고 계시옵니다. 막 잠드셨지요.”소휘는 말없이 걸음을 옮겨 방으로 향했다. 아여는 그를 제지하기 위해 용기를 짜내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휘의 부드러운 눈길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마음속에 밀려들었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나리, 여수아 아가씨는 오늘 하루 너무 지쳤사옵니다. 잠시만이라도 쉬게 해주시는 것이…”소휘는 단호하게 말했다.“오늘 지친 건 나도 마찬가지다.”아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자 악동이 재빨리 뛰어와 아여를 잡아끌며 중얼거렸다.“어서 비키십시오. 죽고 싶사옵니까? 상감께서 여기까지 왔는데 더 막으면 우린 생선을 먹기도 전에 잡혀가옵니다!”아여는 분하고 초조한 마음에 악동이의 발을 짓밟았다. 그는 입술까지 퍼렇게 질리면서도 아여의 팔을 놓지 않았다. 보기에는 허약해 보였지만 저 발길질은 뼈에 사무칠 정도로 아팠다. 그래도 꾹 참아야 했다.그 시각, 여수아는 그야말로 천운처럼 막 방 안으로 몸을 들여놓은 참이었다. 창문을 넘어 들어와 막 옷을 벗고 갈아입으려던 참에,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수아는 온몸이 굳어졌다.‘이런 귀신같은 인간, 때를 참 잘도 골라서 오는구먼.’옷을 반쯤 벗은 채 갈아입을까 말까 망설이며 더러운 옷과 방금 꺼낸 깨끗한 옷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차피 갈아입는 건 똑같으니 깨끗한 옷을 입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아여와 악동이에게 옷을 갈아입겠다고 말한 상태였고 그대로라면 오히려 수상해 보일 수도 있었다.여수아는 밖에서 들려오는 악동이의 아부 섞인 목소리에 혀를 차며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었다. 방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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