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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Kapitel

제1051화

무릎을 꿇고 있던 그는 이제 거의 버티지 못할 지경이었다. 서인경이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황후 마마,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황후 마마, 살려 주십시오! 제가 잠시 돈 욕심에 눈이 멀어 다른 이에게서 뇌물을 받고 태상황의 말을 몇 마디 전했을 뿐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이렇게 겁이 많은 자라면 오히려 입을 열게 하기는 쉬웠다.서인경은 일부러 목소리를 한결 부드럽게 낮췄다. 가능한 한 온화하게 들리도록 애쓰며 어린 내시의 긴장을 풀어 주려 했다.“겁내지 말거라. 네가 사정을 몰랐다면 본궁이 너를 탓할 일은 없다.”서인경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태상황이 어떤 말을 전하라 했는지만 얘기하거라. 누구에게 전한 것이냐?”그녀의 말투는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다른 후궁 주인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 덕분인지 어린 내시는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 기억을 더듬으며 서인경의 질문에 답했다.“태상황께서 제게 전하라 명하신 적은 단 두 번뿐입니다. 두 번 모두 같은 사람에게 전한 것입니다.”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한 번은 이렇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서두르지 말라고. 태상황께서는 아직 폐하와 황후 마마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으니 그 사람이 협력하기만 하면 일이 끝난 뒤 진국의 황위를 두 손으로 바쳐 주겠다고 말입니다.”황위를 바치겠다고? 서인경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도대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조건이기에 태상황이 스스로 황위를 넘겨주겠다고 했단 말인가?“그럼 두 번째는?”내시가 대답했다.“두 번째는 그 사람한테 폐하를 궁 밖으로 유인할 방법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황후 마마는 반드시 궁 안에 남겨 두라고 했습니다.”국경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이 결국 그 계획을 정확히 이루어 준 셈이었다.그 말을 들으며 육승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지금 그들의 상황은 상대가 예상했던 조건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상대가 무엇을 노리는지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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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2화

서인경은 자신을 대전 안에 가둔 채 하루 종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다시 문을 열고 나왔을 때는 이미 해 질 녘이었다. 저 멀리 하늘 끝에서 번진 노을은 궁궐 위로 길게 드리워지며 온 궁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내일도 틀림없이 맑은 날이 될 것이다. 모든 일이 순조로울 날이었다.봉한설과 평이는 문밖에서 하루 종일 지키고 서 있었다. 서인경이 모습을 드러내자 급히 다가왔다.“마마, 하루 종일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습니다. 어선방에 명해 식사를 올리게 할까요?”“준비하거라.”짐작대로라면 등 뒤에서 움직이는 자들의 세력도 곧 경성에서 행동을 시작할 것이다. 배를 채워 두어야 그들과 맞설 힘도 생긴다.저녁상이 차려졌을 때였다. 꼬막이는 옆에 앉아 있었지만 평소와 달리 밥을 먹는 모습은 축 늘어져 있었다. 예전처럼 음식에 눈을 반짝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서인경은 상 위를 한 번 살폈다. 모두 꼬막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라 더 의아해졌다.“무슨 일이냐?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냐?”꼬막이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는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고민이 드리워져 있었다.“모후 저는 왜 공부를 해야 합니까?”공부?서인경은 문득 떠올랐다. 연기준은 태자의 공부를 가르치면서 꼬막이도 늘 옆에 앉혀 두곤 했다는 것을.서인경은 아이가 아직 어리니 공부를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연기준은 반박했다. 어릴 때부터 귀에 익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그래서 결국 그냥 두었던 일이었다.사실 꼬막이는 이 문제로 여러 번 강하게 저항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놀고 싶은 나이라 공부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연기준을 이길 수는 없었다.연기준의 눈에는, 남자는 몇 살이든 집을 짊어질 준비를 해야 하는 존재였다. 배우지 않고 어찌 그 짐을 감당하겠는가.그런데 오늘은 하루 종일 연기준이 궁에 없었다.서인경의 의문을 알아챈 듯 꼬막이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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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3화

옛사람들의 말이 틀린 적이 없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정말로 자애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망친다는 말이 딱 맞는 순간이었다.조금 전 어화원에서 보았던 사람을 떠올린 평이가 급히 입을 열었다.“아, 황후 마마. 조금 전에 어화원에서 신태비를 뵈었습니다. 신태비께서 내일 궁을 떠나신다고 합니다. 오늘 마마를 한 번 뵙고 인사를 올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내일?”서인경이 물었다.“다른 태비들도 모두 내일 궁을 떠나는 것이냐?”평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예, 그렇습니다. 사실 오늘도 이미 궁 밖에 가족이 있는 태비들은 가족들이 와서 데리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태비들도 모두 내일 궁을 떠날 예정입니다. 내일 밤이 되면 후궁의 궁전 절반은 비게 될 겁니다.”평생을 후궁에 갇혀 살아온 태비들. 자식이 없는 이들은 혹시라도 태상황이 붕어하면 자신들이 순장될까 두려워했다. 자식이 있는 이들 또한 이 감옥 같은 궁을 벗어나 바깥 세상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 했다.어차피 태상황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이제는 총애를 다툴 이유도 없었다. 궁을 떠날 기회가 생긴다면 누구라도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어 했다.이 궁은 하나의 성과 같았다. 성 밖 사람들은 들어오기를 꿈꾸지만 막상 들어온 사람들은 하루하루 성벽의 벽돌을 세며 살아간다. 그러니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저녁 식사가 끝나면 신태비를 한 번 들게 하거라.”“예, 마마.”평이가 대답했다.그때, 서인경의 동작이 잠시 멈췄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무부에 전하거라. 모레 정오에 삼품 이상의 모든 관원과 그 가족들을 궁으로 초청해 연회를 열겠다고. 태상황께서 두 공주를 얻으셨으니 함께 축하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내무부에는 이번 연회를 반드시 성대하고 빈틈없이 준비하라고 말하거라.”평이가 잠시 멈칫했다. 황제가 궁에 없는데 연회를 연다고?“마마, 그때 폐하께서 나타나지 않으시면 들통나지 않겠습니까?”서인경이 담담하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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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4화

두 사람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바깥에 어둠이 내려앉을 즈음, 신태비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궁을 떠났다.서인경은 그녀의 뒷모습이 밤빛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다음에 다시 만날 날이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었다. 내일이 지나면 이 후궁에 남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상대해야 할 자들뿐이었다.가라. 모두 떠나거라. 언젠가는 여자에게도 여자의 세상이 오기를.전장에 가고 싶은 여자는 전장으로 갈 수 있고, 평생 혼인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여자는 세상의 시선을 무시하고 마음껏 살아갈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초원을 달리고 싶은 여자는 초원의 여왕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다시는 어떤 여자도 이 자금성 같은 궁 안에 원치 않게 갇혀 남자들의 이해관계를 위한 교환물로 또는 권력의 희생양으로 살아가지 않기를.신태비가 떠난 뒤에도 서인경은 계속 곤녕궁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누군가 알현을 청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한 가지뿐이었다.“폐하께서 몸이 편찮으십니다. 황후 마마께서 친히 곁에서 용체를 돌보고 계시니 국사는 당분간 태자께서 대신 처리하실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그 소식이 태상황에게 전해졌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역시 연기준은 경성에 없군. 어디 한 번 보자. 서인경이 혼자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어떻게 감당하는지.”태상황이 손짓하자 곧 한 내시가 다가왔다.“태상황, 무엇을 명하시겠습니까?”태상황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올라갔다.“내일만 지나면 짐은 여전히 진국의 황제다. 감히 말을 잘못하는 놈이 있다면 짐이 그 아홉 족을 모조리 멸하겠다!”내시는 겁에 질려 곧장 무릎을 꿇었다.“폐하, 용서하옵소서! 제가 잠시 말을 잘못했습니다!”그 아첨을 듣자 태상황은 만족한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그 풍덕이라는 놈은 잡아두었느냐?”내시가 대답했다.“이미 사람을 붙여 감시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명만 내리시면 곧바로 잡아오겠습니다.”풍덕. 예전에는 그의 곁을 지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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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5화

“폐하, 변통을 나르는 내시 소양자가 돌아와 전했습니다. 그 큰 인물께서 몇 번이나 당부했다고 합니다. 연기준과 서인경은 계략이 많은 사람들인데 그녀가 감히 궁연을 연다는 것은 어쩌면 연기준이 아예 궁을 떠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의 계획도 바뀌어야 한답니다. 모든 일은 모레 정오 궁연이 끝난 뒤 상황을 보고 다시 정하겠다고 했습니다.”태상황의 얼굴이 어둡게 굳었다. 또 기다려야 한다니. 그는 이미 충분히 오래 기다려 왔다.서인경이 자신의 침상 곁에 있던 여인까지 서슴없이 죽이는 모습을 본 뒤로 그는 하루라도 더 기다리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태상황 혼자서는 서인경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분노를 억누른 채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좋다. 하루 더 기다리겠다. 그자가 짐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다.*다음 날.늘 고요하던 후궁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수레바퀴 소리, 이별의 인사, 짐을 옮기는 소리들이 후궁 곳곳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태황태후는 불당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이 서인경이라는 계집이 끝내 우리 진국 황실 자손들을 경성 밖으로 내쫓아 황실의 복을 흩어 놓으려 하는구나! 대체 무슨 속셈이냐!”옆에 있던 유모가 슬그머니 말을 보탰다.“태황태후 마마, 우리 진국 황실은 원래 자손이 번성하고 복이 이어지던 집안이었습니다. 헌데 그녀가 이렇게 뒤흔들어 놓으니 폐하께서는 이제 비빈은커녕 통방 시녀 하나도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진국의 강산을 이을 사람이 결국 그녀의 아들 하나뿐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태상황의 열다섯 째 황자를 태자로 세우도록 밀어 준 것이겠지요. 겉으로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 하지만 실은 앞으로 자기 아들과 경쟁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열다섯 째 황자는 지금 의지할 세력도 없으니 훗날 태자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도 결국 그녀 손에 달린 셈이지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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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6화

안포의 빈정거림은 꽤 정확한 지적이었다.한때 후궁 궁투의 승자였던 그 태황태후는 아마 아직도 과거의 승리에 취해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금 이미 천하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서인경은 알고 있었다. 내일 열릴 궁연에서 상대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것을.하지만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누군가가 먼저 연기준이 후궁에 없다는 사실을 터뜨리면 상대가 다음에 어떤 수를 쓸지 알 수 없었으니까.사람들을 궁 안으로 끌어들여 먼저 움직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밤이 되었을 때, 육승이 궁 밖에서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위영의 가족들이 결국 입을 열었던 것이다.위영은 지난 몇 년 동안 한 사람에게서 계속 돈을 받아 왔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 사람을 위해 일을 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형부에서는 그 증거들을 모아 맹국공부 문 앞에 공개했다. 그제야 몰려와 공격하던 군중들이 겨우 흩어졌다.한편 서왕부는 여전히 조용했다.서인경은 짐작했다. 아마 상대는 아직 서왕부를 공격할 명분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궁연을 당당히 열겠다고 하니 상대는 연기준이 정말로 궁을 떠났는지 의심이 생겼을 터. 그래서 일단 움직임을 멈춘 듯했다.맹국공부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자 서인경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그 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육승이 또 하나의 폭탄 같은 말을 꺼냈다.“맹국공부 사람들은 모두 무사합니다. 다만 맹 아가씨께서 사라졌습니다.”서인경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사라졌다고? 그게 무슨 말이냐?”육승이 편지 한 통을 내밀자 서인경은 곧바로 받아 펼쳤다.편지에는 맹은영이 서인경의 말투를 흉내 내며 이렇게 적어 놓았다.“세상이 이렇게 넓으니 저는 한 번쯤 돌아다녀 보고 싶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길에서는 반드시 진방옥을 붙잡고 다닐 겁니다. 절대 저를 잃어버리게 하지 않을 거예요.”진방옥과 함께 떠났다고?서인경은 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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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7화

“황후 마마, 저도 함께 가게 해 주세요. 혹시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제가 곁에서 도울 수 있습니다.”서인경은 고개를 저었다.“너희는 꼬막이만 잘 지켜라. 꼬막이만 안전하다면 나는 반드시 안전할 수 있다. 헌데 꼬막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어떤 패를 쥐고 있어도 결국은 꼼짝없이 잡히게 될 거다.”꼬막이는 그녀의 유일한 약점이었다.봉한설은 그 말을 듣고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꼬막이는 제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걱정하지 않게 하겠습니다.”그날 밤, 서인경은 침상에 누워 꼬막이를 품에 안았다. 눈을 감아도 머릿속에는 온통 연기준의 모습뿐이었다.연기준 당신은 지금 무사한가요?*한편, 황량한 산야 어딘가.연기준은 이틀 밤낮을 쉬지 않고 말을 달린 끝에 지금은 한적한 산속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그는 손에 마른 식량을 쥐고 천천히 씹어 먹었다. 그의 시선이 밝게 펼쳐진 밤하늘에 머무르자 문득 그 여자가 그리워졌다.서인경이 혼자서 꼬막이를 데리고 후궁의 상황을 버텨 낼 수 있을까. 만약 사람들이 그가 경성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태상황은 틀림없이 대신들과 손잡고 그녀를 공격할 것이다.다행히도 그는 미리 대비해 두었다. 그녀가 대응할 수 있도록 충분한 사람들을 남겨 두었다. 그러니 부디 모든 일이 무사하기를.*다음 날 아침.서인경은 이른 시간에 일어났고 꼬막이 역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옷에는 자주색 문양이 수놓아져 있어 어린 몸에도 귀한 기품이 드러났다.“모후, 저도 궁연에 갑니까?”서인경은 고개를 저었다.“너는 가지 않는다. 곤녕궁에서 봉한설과 평이와 놀거라.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말썽 부리지도 말고, 절대 밖에 나가지도 말거라. 알겠느냐?”꼬막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게 무슨 재미가 있단 말인가.서인경은 그 표정을 보고 웃으며 달래 주었다.“네가 그 약속을 지키면 네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억지로 공부하지 않게 해주마.”그 말을 듣자 꼬막이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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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8화

대전을 지나 서인경은 안쪽 내전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손에는 일불락 사기가 들려 있었다.두툼한 그 책은 이미 수없이 넘겨 본 터라 내용은 거의 외울 정도였다.연기준이 곁에 있을 때면 둘은 종종 이 책을 펼쳐 놓고 함께 이야기하곤 했다. 그 속에서 화족에 대한 흔적을 찾아 보려 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꼬막이가 짚어 주었던 부분을 제외하면 다시 살펴보아도 유의미한 단서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서인경은 다시 한 번 천 년 전 일불락에서 벌어졌던 그 전투의 기록을 읽어 내려갔다. 잠시 후, 마지막 장을 덮고는 책을 내려놓고 긴 의자에 몸을 기대어 뒤로 누웠다.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문밖에서는 안포가 지키고 있었다. 가끔씩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느 대신이 궁에 들어왔는지, 그 곁에는 누가 함께 왔는지 그는 계속해서 보고하고 있었다.서인경은 조용히 그 말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사람들을 하나씩 정리해 갔다.오늘 궁연에 참석한 이들 가운데에는 그저 구경 삼아 온 사람도 있고, 연기준이 정말 후궁에 없는지 확인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 궁연에서 일을 벌여 연기준이 없는 틈을 타 황후와 태자를 공격하려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배후가 누구든 서인경은 반드시 그들을 끌어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수세에 몰린 채 언제든 또 다른 화를 맞게 될 테니까.*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와 운 유모가 안으로 들어왔다.태자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황숙모. 오늘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황숙모께서는 유청을 데리고 먼저 피하십시오. 전조의 일은 제가 막아 보겠습니다.”서인경은 태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진심이었다.그녀는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태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직 그런 상황까지 온 것은 아니다. 설마 너도 연기준이 없으면 내가 당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느냐?”태자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곧 서인경의 시선을 받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황숙께서 계시지 않으면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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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9화

“변통을 나르는 어린 내시에게 전갈을 보내거라. 본궁이 연기준이 궁에 없는데도 감히 궁연을 연 이유는 이미 장생불사 약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라고. 본궁은 죽지 않는 몸이 되었으니 오늘 궁연은 바로 연 씨의 강산을 서 씨의 강산으로 바꾸는 자리라고 말이다.”태상황이 평생 집착하는 것은 오직 장생불사 약이었다. 그에게 장생불사 약만 손에 들어온다면 자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적의 존재가 될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뒤에 있는 그 사람도 포함이었다.육승은 서인경의 지시를 듣자마자 곧바로 일을 처리하러 나갔다.서인경은 태자의 손을 잡고 천천히 궁연이 열리는 전각을 향해 걸어갔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떠들썩한 소리가 점점 커졌다.궁연 전에 퍼진 소문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탓인지 사람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했다. 모여 서 있는 대신들 사이에서는 낮고 뒤섞인 속삭임이 끊이지 않았다.“밖에서 떠도는 소문이 사실인가? 황후 마마께서 정말 폐하가 계시지 않는 틈을 타 반역을 꾀하는 건 아니겠지?”“나는 꽤 그럴듯하다고 보네. 황후 마마께서는 친아들이 있음에도 태상황의 열다섯 째 황자를 태자로 세웠네. 그 이유가 뭐겠는가? 결국 그 열다섯 째 황자가 서 씨 집안 사람이기 때문이지.”“침상에서 불어넣는 바람이 참 대단하군. 예전에 그토록 명성이 높던 상왕이 이렇게 귀가 얇은 사람일 줄 누가 알았겠나.”“이 황후라는 사람… 나라를 망칠 상이로군.”그 말을 듣고 있던 한 사람이 곧바로 반박했다.“그건 말이 안 됩니다. 지금의 대황자도 서 씨 집안 혈통 아닙니까? 태자께서 황후 마마의 친아들이든, 사촌이든 결국 서 씨의 피를 이은 건 마찬가지인데 굳이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있겠습니까?”그 말을 한 사람은 맹국공부의 장남이자 맹은영의 오라버니인 맹경휘였다.그러자 호부 상서 손산이 코웃음을 쳤다.“그야 명분을 쌓기 위해서겠지. 게다가 대황자는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았네. 앞으로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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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0화

서인경을 이렇게 얼버무리게 둘 수는 없었다.손산이 상황을 보자마자 곧장 앞으로 나섰다.“황후 마마께 여쭙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이처럼 큰 궁연인데 어째서 황후 마마와 태자만 계신 것입니까?”이 질문은 사실 대전에 모인 모든 사람이 궁금해하던 것이었다.그동안 황제는 중병이라는 말만 전해졌던 터라 요즘 궁 밖에서는 온갖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어떤 이는 황제가 황후에게 연금되었다고 말했고 또 어떤 이는 황제가 이미 경성을 떠난 틈을 타 황후가 대신들을 불러 세력을 모으려 한다고 했다. 심지어는 황제가 이미 살해되었고 지금 진국의 강산은 서 씨 가문 손에 넘어갔다고까지 떠들어대는 자들도 있었다. 서인경이 서 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옛 장군부의 영광을 되찾으려 한다는 말까지 덧붙여졌다.이처럼 온갖 유언비어가 뒤섞여 대신들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의문이 쌓여 있었다. 오늘 그들은 반드시 진실을 확인하고자 했다.서인경의 시선이 대전을 천천히 훑었다.그러다 문득 맹국공 곁을 보았다. 예전 같으면 늘 함께 있던 사람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서왕과 서왕비는 어디 있느냐?”풍 내관이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군주께서 갑자기 병이 났다고 합니다. 그 일로 서왕과 서왕비께서는 궁으로 오시던 도중에 급히 돌아가셨습니다. 조금 전 사람을 보내 사죄를 전했습니다. 오늘 궁연에는 참석하지 못하니 황후 마마의 용서를 구한다고 말입니다.”서인경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이상했다. 병이 나기에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그녀는 슬쩍 아래쪽에 서 있던 육승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육승은 뜻을 알아차리고 곧장 대전을 빠져나갔다.서인경은 다시 계속 문제를 걸어오던 손산을 바라보았다.“손 대인은 본궁에게 꽤 불만이 많은 듯하군.”손산은 오늘 누군가 뒤를 봐 준다는 자신감이 있었는지 목을 꼿꼿이 세우며 물러서지 않았다.“백관이 이미 여러 날 폐하를 뵙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폐하의 병세도 석연치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를 의심할 권리가 있습니다. 황후 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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