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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361 - Chapter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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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1화

서인경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이어지는 것은 밤빛처럼 낮게 울린 연기준의 목소리였다.“본왕은 단 한 번도 서가군을 손에 넣을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너를 이용하려 한 적도 없고. 안심하고 이곳에 머무르거라. 넌 그냥 본왕의 소식을 기다리면 된다.”한때 마음속을 옥죄던 모든 의심과 벽이 이 짧은 한마디로 무참히 찢겨 나갔다. 서인경은 가슴 속 어딘가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고 그와 동시에 연기준의 눈빛에 스치듯 스며든 실망과 쓸쓸함을 엿보았다.결국 그녀는 왕부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문지기와 호위는 더 촘촘히 늘어서 있었고 세상은 그녀와 단절된 듯 고요했다.바깥 세상에서는 서회윤 장군의 실종 소식을 두고 온갖 추측이 나돌았다.차루의 설서인들은 기묘한 이야기를 꾸며내며 이 사건에 기름을 붓듯 떠벌렸다. 그러나 조정의 관리들에게 그의 생사는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이 염려한 것은 오직 하나.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서가군이 최종적으로 누구의 손에 귀속되느냐 하는 점이었다. 심지어 서가군의 장졸들마저도 마음이 들끓었다. 자신들의 운명이 어디로 향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으니.이튿날 새벽, 숙귀비는 완전한 무장 차림으로 대전 위에 서 있었다. 그 위풍당당한 모습 앞에서 조정의 목소리는 일제히 들끓었다.“한낱 후궁의 빈비가 어찌 일국의 군을 거느릴 수 있단 말입니까! 폐하, 이 일은 만만히 여길 수 없습니다!”“숙귀비, 우리 조정에는 조종을 금하는 조훈이 있습니다. 이 대목은 반역의 조짐이 아닙니까?”“열다섯 째 황자는 아직 어린데 지금부터 이런 계획을 꾸미다니! 당신의 야심이 드러난 것 아닙니까!”“이건 단순히 숙귀비의 뜻이 아니라 서회윤이 미리 꾸며놓은 술책일지도 모릅니다. 군권을 열다섯 째 황자 손에 얹으려는 계략이겠지요!”숨 가쁜 비난 속에서 숙귀비의 눈빛이 번뜩이며 대전 안을 휩쓸었다. 그녀는 후궁 깊숙이 갇혀 산 세월이 있었으나 한때 전장을 누비던 장수의 기개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매서운 기운에 말하던 대신은 본능적으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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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2화

백관들 중 단 한 사람도 입을 열지 않았다. 황제가 방망이를 들어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 대전 안 깊숙이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잠깐.”늙은 듯 하지만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린 목소리. 황제는 당장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켜버렸다.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태황태후가 황후의 부축을 받으며 느린 걸음으로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의 목소리는 허공을 가르며 울렸다.“애가가 반평생을 살아왔으나 후궁의 빈비가 병권을 쥐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너는 지금 우리 연 가의 황실의 법도를 부수려 하는구나. 훗날 내가 눈을 감으면 어찌 조상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단 말이냐!”황제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부복하듯 말했다.“황조모,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숙귀비는 단지 병권을 대신 맡아두는 것일 뿐, 서 노장꾼께서 돌아오시면 곧장 회수될 것입니다.”태황태후는 콧김을 세차게 내뿜었다.“진국은 연 가의 진국이다. 천하는 황제의 백성이요. 모두 황제의 것이지. 조정에는 문무 인재가 끊이지 않는데 어찌하여 후궁의 여인을 끌어내야 한단 말이냐? 이리 한다면 열국이 웃으며 말할 것이다. 진국에는 사내가 없다고! 너희들, 높은 벼슬과 녹봉을 쥐고도 여인 하나를 앞세운다면 너희들은 도대체 어디에 써란 말이냐!”그 말은 대전을 가득 울리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백관들은 떨며 무릎을 꿇고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태황태후, 성을 가라앉히소서. 미신이 죄를 지었사옵니다!”대전 안은 삽시에 고요해졌다. 검은 물결처럼 엎드린 군중 속에서 오직 연기준과 숙귀비만이 우뚝 선 채 버티고 있었다.태황태후의 눈빛은 가시 돋친 듯 숙귀비를 위아래로 훑었다.“숙귀비, 폐하가 그대를 아끼니 제멋대로 날뛰는구나. 잊지 말거라, 이 후궁에는 애가가 있고 황후도 있다. 이토록 중대한 일을 우리와 상의 한 번 하지 않다니... 그 죄를 어찌 묻는 게 옳을까!”숙귀비는 곧게 허리를 세웠다. 오늘만큼은 물러설 수 없음을 그녀 스스로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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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3화

연기준은 자신을 향해 살인이라도 할 듯 쏟아지는 시선들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말을 이어갔다.“공적이란 남이 안겨주는 것이 아니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스스로 쌓아 올리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훗날 누구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사옵니까? 본왕 또한 옛날 서가군에서 단련을 쌓았습니다. 대황자께서도 서가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이옵니다. 숙귀비의 성정은 그 시절 서 소장군보다 훨씬 온화하옵니다. 본왕이 겪었던 고생도 대황자의 차례에서는 훨씬 가벼워질 것이지요.”연기준의 말이 이어질수록 연강헌의 안색은 파랗게 질리다 못해 잇따라 변해갔다.“황숙의 뜻은, 본 황자더러 숙귀비에게 가서 허드렛일이나 하라는 것입니까?”연기준은 고개를 저으며 바로잡았다.“숙귀비는 일군의 통솔자다. 부장이 따로 있으니 신참이 끼어들 자리는 애초에 없다. 본왕은 그때 말 먹이를 주고, 서 소장군의 발 씻을 물을 나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니 대황자도 둘 중 하나를 택하면 된다.”순간, 대전은 다시금 고요에 잠겼다. 귀하게만 자라온 대황자에게 말먹이 주는 일을 시키고, 더구나 한낱 여인의 발 씻을 물을 떠다 주라니... 이런 미친 소리를 입 밖에 낼 수 있는 자는 오직 연기준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뻔뻔스럽지 않았다. 담대히 자신의 지난날을 본보기 삼아 말했기에 누구도 그 말에 흠을 잡을 수 없었다.연강헌의 얼굴은 이미 붉게 부풀어 오른 간고기빛이 되었고 황후의 낯빛마저 잿빛으로 가라앉았다. 태황태후는 분노에 치를 떨다가 거의 의식을 잃을 지경이었다.“그만하거라! 너는 그때 우리 진국의 아홉 째 황자였고 지금은 상왕이다. 서회윤 따위가 감히 너에게 그런 일을 시켰다니... 이는 대역무도한 짓이다. 구족을 멸해야 마땅하지!”연기준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서 노장군께서 시킨 일이 아니옵니다. 본왕 스스로 원했던 일이지요. 서 노장군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오늘의 상왕 또한 없었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태황태후께서는 서가군에게 감사를 표해야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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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4화

“그거야! 서 노장군께서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서가군의 귀속을 두고 이렇게 서두르다니... 좀 이른 것 같지 않습니까?”소식이 전해진 이래 아무도 서회윤의 생사를 직접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가 정말 죽었다면 서가군은 반드시 요동칠 터였다.서왕의 말은 모두가 속으로 꺼리던 금기를 찔러냈다. 백관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시선을 피했다.황제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저 임시로 과도기를 넘기자는 것 아니겠느냐? 서가군은 누군가가 나서서 대세를 붙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군은 우두머리 없는 뱀처럼 흩어져 누군가는 틈을 타서 쳐들어올 것이다. 지금 야랑국의 황자와 태자가 우리 조정에 있는 만큼 혼란을 허락할 수 없다.”서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폐하의 말씀, 참으로 옳으시옵니다. 한데 방금 노신의 귀에 흘러든 게 있었던 것 같기도…”그는 애써 머리를 굴리며 한참이나 끙끙대더니 불현듯 눈꺼풀이 번쩍 열렸다.“아, 기억났사옵니다. 누가 방금 시합을 하자 했던 것 같던데. 그것도 괜찮지 않겠사옵니까? 무장은 무력으로 사람을 제압하는 법. 이긴 자의 말을 따르는 게 도리 아니겠사옵니까?”그러자 태황태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서왕,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하느냐? 깊은 궁중의 후비가 조정에 개입하다니... 이는 조상께서 결코 허락지 않으신 일이다. 무엇을 겨룬단 말이냐? 애가가 지금 당장 그녀의 빈비 자리까지 폐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자비다.”서왕은 난처한 얼굴로 황제를 흘끗 보았다.“조상의 법도라 한들, 결국 사람이 만든 것이옵니다. 폐하께서도 조금 전 말씀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대세를 안정시키는 일이라고.”태황태후의 낯빛이 번개처럼 바뀌었다.“입 다물거라! 서왕, 노망이 들었구나!”이 말에 서왕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그, 그렇다면… 노신은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폐하께서 다른 이에게 물어보심이 옳을 듯하옵니다.”황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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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5화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태황태후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애쓰고 있었으나 서인경은 단 한 점의 자비조차 베풀 생각이 없었다.“후궁은 조정에 간여할 수 없다는 조상의 법도 숙귀비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지요. 지금 이 자리에서 논하는 조정의 중대사에 태황태후와 황후께서 계신 것 또한 합당치 않사옵니다.”태황태후의 얼굴빛이 단박에 변했다.“너… 기준, 네가 그녀를 오게 한 것이냐?”창끝은 곧장 연기준을 겨누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빛은 더욱 어두워졌다.“폐하, 이 일은 중대사이옵니다. 본왕의 생각으로는 차라리 시간을 두고 깊이 논의하는 편이 옳겠사옵니다.”이 말은 황제의 뜻과 딱 들어맞았다. 황제는 곧 결정을 내렸다.“퇴조하거라.”금란전을 벗어나자 서인경은 바깥의 태양이 조금도 따뜻하지 않다고 느껴졌다.연기준은 그녀 곁으로 다가와 손목을 붙잡았다. 힘을 준 것도 아닌데 서인경 손목에서는 불에 덴 듯한 뜨거움이 전해져 왔다.“폐하께서는 결코 서가군이 본왕 손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서인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감정 한 줄기 묻히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접수하려는 건 왕야가 아니라 저입니다.”연기준의 가슴은 묵직하게 저려왔다.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그의 얼굴빛은 새하얗게 질렸다.“너... 본왕과의 인연을 그렇게나 끊어내고 싶은 것이냐?”서인경은 고개를 떨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마음속으로 수백번 다짐해 왔었다. 만약 대전 위에서 황제가 상왕비라는 신분을 들먹였다면 그녀는 주저 없이 화이를 청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오래전부터 원해온 일이 아니던가.죽은 듯한 침묵 속에서 연기준의 마음은 조각조각 얼어붙고 있었다. 분노는 솟구치지 않았고 남은 것은 끝 모를 어둠뿐. 그 어둠이 서서히, 조금씩 그의 빛을 삼켜가고 있었다.“서인경, 넌 정말 마음이란 게 있기는 한 것이냐?”서인경은 생각했다. 원래의 ‘그녀’는 분명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갉아먹히듯 소모되었고 안락당의 높은 담장 안에 갇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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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6화

서인경이 완전히 깊은 잠에 빠진 뒤, 연기준은 방 문을 닫고 전정으로 나섰다.그때, 열댓 명의 암위들이 일렬로 서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연기준이 나오자 그들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렸다.“저희가 임무를 다하지 못했사옵니다. 왕야께서 벌을 내리소서.”그들은 모두 왕부를 지키는 자들이었다.아침에 출문하기 전 연기준은 이미 명백히 분부했었다.“서인경이 결코 문밖을 나가지 못하게 하거라.”그러나 그들은 단 한 사람도 막아내지 못했다.“그녀는 어떻게 나간 것이냐?”선두에 선 암위가 답했다.“왕비께서는 비수를 자신의 목에 들이대며 죽음을 무릅썼사옵니다. 그래서 저희는 감히 막지 못했사옵니다.”연기준의 마음속에서 싸늘한 웃음이 흘렀다. 저 여인, 참으로 목숨까지 걸며 나서는구나.“모두 삼십 군곤을 받거라.”암위들은 조금의 원망도 보이지 않고 일제히 응했다.“명 받들겠사옵니다.”암위들이 물러난 뒤 연풍이 연기준 곁으로 다가왔다.“왕야, 소신이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사옵니다. 왕비와 관련된 일이옵니다.”연기준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번뜩였다. 말은 없었으나 후속을 재촉하는 기세가 분명했다.“왕비께서 단평안을 찌른 날, 사실은 그 자가 평이를 납치했기 때문이었사옵니다. 소신은 늘, 단평안이 평이가 예전에 왕비를 도와 자신을 다치게 한 일을 원한 삼아 그런 짓을 저질렀다 여겼사옵니다. 하나 우연히 알게 된 바, 그날 주루에는 단여월과 야랑국의 팔황자도 함께 있었다 하옵니다. 단평안과 진보이가 집에서 다툴 때 흘린 말에 따르면 평이를 납치하라 부추긴 이는 바로 단여월이었다 하옵니다. 평이를 붙잡으면 왕비가 반드시 올 거라고 말한 걸 보면 단평안의 진짜 목표는 왕비였던 것 같사옵니다.”연기준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먹구름처럼 어두워졌다.“단여월에게 그런 머리는 없다.”연풍은 순간 멈칫했다.“그렇다면… 단은설?”연풍은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섰다. 그는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단은설이… 왕야께 품은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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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7화

연풍은 크게 놀라 얼이 빠졌다.그의 왕야가 언제부터 여인의 수다에 흥미를 보였단 말인가?“그리고…”연기준의 눈빛이 돌연 싸늘하게 식어갔다.“장원의 사람들을 불러들여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게 하거라. 그리고 단은설은 이제부터 장원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하거라. 단 가의 모든 황가 생계를 끊어버리고 대황자부와 단 가에 각각 ‘큰 선물’을 보내거라.”연기준의 짧은 한마디 한마디가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연풍의 등골은 오싹할 만큼 식어갔다.서인경은 깊은 잠 속에서도 편히 쉬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혈을 짚어 억지로 잠을 들게 한 듯. 꿈속에는 온통 전란의 불길과 서회윤의 흐릿한 얼굴이 어른거렸다.그녀는 꿈결에 놀라 눈을 떴다.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고 방 안에는 희미한 등불만 깜빡이고 있었다.방 건너편에서 사내는 넓은 어깨를 등받이에 기댄 채 앉아 손에 든 주서를 넘기고 있었다. 침상 위에서 기척이 나자 그의 시선이 주서에서 옮겨져 어둑한 빛에 잠긴 서인경에게 머물렀다.“깨어났느냐?”서인경은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몸이 조금만 움직이자 덜컹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그녀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몸에서 묘한 감각이 느껴오자 급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침상 끝. 굵은 쇠사슬이 그녀의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길이는 고작 한 자 남짓. 그녀의 움직임은 오직 이 침상 위에만 가두어져 있었다.서인경의 얼굴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무슨 뜻입니까?”연기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네가 본 그대로다. 죽음을 미끼로 본왕을 위협하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설령 한 구의 시체가 되더라도 넌 상왕부를 벗어날 수 없지.”서인경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치욕과 분노에 휩싸였다.“무슨 권리로 제 자유를 빼앗는단 말입니까!”연기준은 그녀의 곁에 다가와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쓸어내리려 했으나 서인경은 몸을 홱 피하며 거부했다.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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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8화

연기준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숙귀비는 이미 결정했다. 열다섯 째 황자를 태황태후의 침궁에 두기로. 어쨌든 그는 연 가의 혈맥이자 그녀의 증손이다. 비록 몸에 서 가의 피가 흐른다 해도 태황태후는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서인경은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왕야 말은… 고모께서 열다섯 째 황자를 궁에 남겨 태황태후의 인질로 삼았다는 겁니까?”연기준은 낮게 반박했다.“그렇게 거칠게 말하지 말거라! 태황태후 곁에 두는 편이 목숨이라도 지킬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정말 그 아이가 황후 손에 남길 바라느냐?”서인경은 단숨에 연기준의 소매를 움켜쥐었다.“열다섯 째 황자는 고모의 목숨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어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연기준은 그녀 눈 속에 어른거리는 애틋한 안쓰러움을 보았다. 그녀는 서 가의 사람이라면 모두 아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은 예외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연기준의 가슴은 알 수 없는 고통으로 저려왔다.“그녀는 너를 지키기 위해서다. 부디 그녀를 실망시키지 말거라.”그 말만 남기고 연기준은 소매를 뿌리치고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서인경은 한참이나 정신을 가누지 못했다. 결연히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속은 마치 만 근의 돌덩이가 가득 내려앉은 듯 숨조차 쉬기 버거웠다. 이 광경은 전생의 기억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모두가 밖에서 피와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칠 때 그녀만은 높디높은 담장 안에 갇혀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장원.한설은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검을 정성스레 갈아내고 있었다. 나무결은 이미 반들반들 윤이 나 거친 느낌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육승에게서 빌려온 밀랍을 정교히 문질러 발라주고 있었다.나무검에 밀랍을 입히는 광경은 육승에게도 처음이었다.하지만 그는 곧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왕비와 왕야의 아이를 위해 준비하는 것임을.그래서 그는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마치 대단한 의식을 참관하듯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연풍이 들어섰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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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9화

두 대의 마차가 상왕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석양이 서쪽으로 기울자 왕부의 화원은 더욱 빛나 보였다.한설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호청의 팔을 잡아끌며 뜰 안으로 달려갔다.“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어서 저를 데려가세요!”호청은 끌려가면서도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왕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가씨는 제 먼 친조카라 해야 합니다. 절대 입을 잘못 놀리지 마세요.”한설은 성가시다는 듯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압니다! 제가 의원님보다 더 잘 안다니까요. 어서 안내나 하십시오!”호청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저기입니다. 저 모퉁이만 돌면 됩니다. 문 앞에 호위가 선 곳 말입니다.”한설은 호청을 내버려두고 바람처럼 홀로 달려갔다.서인경은 점심도 제대로 들지 못했고 저녁은 더더욱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발목에 매인 쇠사슬을 붙잡고 한나절을 씨름했다. 결국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자물쇠를 열려면 열쇠가 필요하거나 아니면 발목을 잘라내야 했다.마음은 서가군의 소식으로 가득 차 불안했고 가슴속은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평이는 왕비가 걱정스러워 그저 밥그릇을 들고 옆에 앉아 애원하듯 말했다.“마마, 부디 조금이라도 드시옵소서. 저녁에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그때 잘 말씀드리면 되잖습니까?”서인경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대꾸했다.“그에게 부탁하느니 차라리 개에게 부탁하는 게 낫겠다!”죽처럼 묽은 밥을 흘끗 보고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그냥 거기 두거라. 이따가 마시마. 한데 그는 어디로 간 것이냐?”평이가 대답했다.“듣자 하니 대황자께서 단여월을 내치려 하셨답니다. 그래서 왕야께서 급히 궁으로 불려가셨사옵니다.”서인경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막 혼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평이는 말하면서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듣자 하니… 대혼의 첫날밤부터 단여월이 대황자께 계속 약을 먹여 몸을 해쳤다 하옵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만…”“그만, 뭐?”서인경은 노골적으로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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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0화

아침저녁으로 그리던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한설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 두려운 듯 움츠러들었다. 두 다리는 덜덜 떨렸고 간신히 방 안으로 들어섰으나 침상 머리에 앉아 있는 서인경을 바라보며 더는 발을 내딛지 못했다. 혹여 이 모든 게 꿈이라 한 발짝만 더 내디뎌도 산산이 부서져 버릴까 두려워서였다.서인경의 검은 머리카락은 흐트러진 채 어깨에 흘러내렸고 순백의 속옷과 어우러져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분첩조차 바르지 않았으나 맑고 곱게 그려진 이목구비는 한설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다.한설은 넋을 잃은 듯 바라보다가 마침내 서인경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네가 호청 의원의 먼 조카이냐? 이름이 무엇이냐?”이 부분은 미리 입을 맞춰 두지 못한 터라 호청이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불쑥 외쳐버렸다.“왕비께 아룁니다! 제 이름은 봉한설, 그냥 한설, 혹은 설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서인경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미간이 살짝 치켜올라가더니 눈앞의 아이를 보고 다시 호청를 흘끗 돌아보았다.“설이? 의원님의 그 먼 친조카 이름이 한설입니까?”묘한 뜻이 담긴 물음이었다. 호청은 다리에 힘이 빠진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얼굴 가득 민망한 기색에 당장이라도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가 한 발 늦은 것이 화근이었다.서인경이 과연 무엇을 오해했을지 알 수 없었다. 그제야 한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지어준 이름이자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어떤 간절한 기대가 담긴 이름이었으니. 그러나 세상에, 똑같은 별칭을 가진 이가 있다는 것은 그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한때 단 가로 쳐들어가 똑같이 ‘설이’라 불리는 단은설의 이름을 강제로 바꿔주고 싶을 정도였다.서인경이 오해할까 두려워 봉한설은 급히 손을 내저으며 해명했다.“왕비, 제 이름은 왕야께서 지어주신 게 아닙니다. 그 안에 무슨 그리움을 담았다는 뜻은 전혀 없지요!”서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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