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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1화

설장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지금껏 살아남은 게 무슨 소용이냐? 일불락의 후손으로 태어나 놓고는 그 미천한 인간 세상의 기술 하나 제대로 익히지 못했으니 앞으로 대체 무슨 수로 일불락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것이냐? 그녀는 자질이 둔하고 희망이 없으니 난 이미 포기했다. 한데 그녀가 낳은 저 아기는 다르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나가도 좋다. 하나 아기는 반드시 두고 가야 한다.”봉한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목소리가 높아졌다.“왕비 마마께서 아기를 두고 떠날 리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왜 설장로님의 집착을 남한테 강요하시는 겁니까? 저희 어머니께서 늘 그랬습니다. 일불락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요.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입니다.”탁!설장로는 그대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눈빛이 매서워졌다.“제멋대로 하지 말거라. 막수한 그놈도 내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리는데 누가 너더러 이렇게 버릇없이 말하라고 하였느냐? 입 한 번 더 놀리면 그날 네가 신수를 불러내고 천지의 이치를 속여 그 여인을 구했다는 사실을 전부 폭로하겠다! 신분을 숨기고 싶다 했었지? 내가 당장 세상에 알리겠다!”“당신!”봉한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더는 반박하지 못했다.봉한설이 서인경에게 정체를 숨긴 건 연기준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며 정체를 밝히는 것을 말렸었다. 만약 그 비밀이 세상에 새어나간다면 권력자들의 칼끝은 서인경을 향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저 서인경이 평범하게 살아가길 원했다.하지만 설장로는 달랐다. 수십 년 동안 눈 속에서 버텨온 노인은 여전히 야망을 품고 있었다. 서인경이 진실을 알고 자신과 함께 일불락의 이름으로 세상을 다시 흔들길 바랐다. 그게 바로 설장로가 바라는 부흥이었다.봉한설은 이를 악물었다. 그 노인의 야망이 위험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방 안에서는 서인경이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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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2화

연강헌은 지금 십자가에 묶인 채, 사흘 밤낮을 굶은 상태였다. 그의 온몸은 한층 더 말라붙었고 초췌하기 그지없었다.그때, 드디어 연기준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강헌은 마른 입술을 힘겹게 벌렸다.“폐하께서는 황숙께서 이러는 걸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 저를 풀어주신다면 전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하겠습니다.”연기준은 사흘 내내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버텨왔다. 그의 얼굴 역시 피폐했지만 그 검은 눈동자 속에는 여전히 서릿발 같은 살기가 번뜩였다.“폐하께서 알면 어쩌겠느냐? 본왕이 내 아내와 아기의 원수를 갚겠다는데 그가 뭐라 할 수 있겠느냐?”그 말을 마치자 옆에 있던 장졸의 칼날이 번쩍이며 뽑혀 나왔다. 차가운 빛이 연강헌의 눈앞을 스치자 그는 목이 덜컥 조여들며 두 다리가 떨렸다.“황숙, 전… 전 황숙의 친조카입니다.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전… 황숙모를 해치려던 게 아닙니다. 저도… 저도 황숙모를 좋아했습니다.”연기준이 한 걸음 다가서자 칼끝도 함께 연강헌의 목으로 다가왔다. 칼날이 살에 닿자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순간, 연강헌은 연기준의 눈 속에서 진짜 살의를 보았다.그때 관서윤이 급히 달려왔다. 연기준이 움직였다는 소식에 제일 먼저 뛰어온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을 보고 그녀는 얼어붙었다.“왕야, 부디 다시 생각하십시오. 변방의 전세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이 시점에 내분을 일으키는 건…”“무방하다. 바깥 상황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내부 문제를 정리해야겠지.”그 말을 내뱉은 순간, 연기준은 잠시 멈칫했다. 그 문장은 서인경이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는 그녀도, 그녀의 말도 전부 잊지 않았다. 폐허 속에서 사흘 밤낮을 앉아 있던 그 시간 내내, 그녀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 홀로 남겨진 자신을 곱씹었다.그는 정말로 서인경이 사라졌다고 여겼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연기준의 손바닥엔 작은 오색 유리구슬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건 어족 사람이 신수를 부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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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3화

연풍도 그제야 깨달았다. 이 일의 뒤에는 분명 더 큰 손이 있을 것이다.그는 곧 정신을 다잡으며 말했다.“예, 바로 조치하겠사옵니다.”연기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막수한이 아직 막북에 있는지 확인하고 본왕을 대신해 그와의 만남을 주선하거라.”연풍은 즉시 대답했다.“예.”그 시각, 막수한은 설산의 어느 지하 얼음동굴에서 한 얼음 조각상을 지키고 있었다. 그 얼음 조각상은 멀리서 보면 사람의 형체 같았고 가까이서 보면 더더욱 그랬다. 그 안에 봉인되어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의 형태를 한 백발의 노인이었다.그 노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능지국의 위풍당당한 대장군 단안이자 진국의 실종된 노장군 서회윤이었다.지금의 그는 손에 장창을 쥐고 얼음 속에 갇힌 채 꼿꼿이 서 있었다. 연풍이 전한 소식이 막수한에게 닿은 것은 이미 한 달 뒤였다. 그를 찾는 일이 연풍에게는 쉽지 않았다. 보낸 전서구들은 몇 번이나 허탕을 쳤고 막수한의 기운이 조금 회복된 후에야 한 마리의 전서구가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그때의 그는 얼굴이 창백했고 기력을 거의 다한 모습이었다. 그것도 한 달간의 요양 끝에 겨우 이런 정도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서구가 차가운 얼음동굴을 뚫고 들어와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는 편지통을 떼어내고 펼쳐 보았다.잠시 후, 그의 얼굴에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이 스쳤다. 그는 얼음 조각상을 향해 웃어 보였다.“당신이 좋은 배필을 골라주셨군요. 그가 자기 사람을 저버리지 않는 한 우리 지하흑시는 영원히 그를 섬길 것입니다.”그에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음 속의 사람은 눈을 감고 있었고 막수한의 말을 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익숙한 듯 그저 종이를 정리하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얼음동굴을 나섰다.그가 막 자리를 뜨자 얼음 속에 갇힌 사람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서서히 열렸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그 눈은 다시 무겁게 내려앉았다.설산의 한 봉우리 꼭대기.연기준은 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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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4화

봉한설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막수한이 막북으로 와서 연기준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알게 된 일이었다.대장로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다.장녀의 이름은 봉수정. 지금은 그의 아내였다.그리고 차녀는 봉수안, 한때 한 남자를 사랑해 가족과의 연을 스스로 끊은 여자였다.그 뒤로 십여 년 동안 봉수안의 행방은 묘연했고 그들은 다시 봉수안을 보지 못했다.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들려온 소식은 이미 그녀가 세상에 없다는 것. 그 대신 그녀가 남긴 딸이 하나 있었고 그 아이는 연기준에게 거두어져 결국 서인경 곁에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마치 하늘이 짠 인연처럼 느껴졌다.“왕야, 혹시 봉한설과 수안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께서 수십 년 동안 날마다 그 두 사람을 그리워하셨습니다. 그녀들이 그 세월 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연기준은 멀리 바라보다 그 혼란스러웠던 세월을 떠올렸다.“본왕이 처음 봉 장군을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서 씨 부인의 곁을 따르던 여장군이었습니다. 그녀는 용맹하고 전술에 능했으며 사람 또한 온화하고 친절했지요. 서 씨 부인과는 마치 친자매처럼 다정하게 지냈고 전장에서도 늘 함께 싸웠으며 아무리 위험해도 서로 떨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미 그때부터 서 씨 부인이 일불락의 후손임을 알고 있었고 그 사명을 대신해 살아가고 있었지요.”“화사독 전투 이후, 서 장군과 서 씨 부인은 모두 독기로 인해 전장에서 전사했고 봉 장군 또한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임종 직전, 봉한설을 본왕에게 맡기며 반드시 일불락 후손의 곁으로 보내달라 유언을 남겼지요.”막수한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낮게 물었다.“그 남자는요?”연기준은 고개를 저었다.“본왕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한데 봉 장군의 말로는 그 남자는 능지국 황실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본국의 부름을 받고 돌아가기 전, 그녀와 약속했습니다. 국내 사무를 정리하는 대로 모녀를 데리러 오겠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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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5화

연기준은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본왕은 능지국 안에 일불락 혈통이 있다고 봅니다. 아마 그것은 여족일 것입니다. 그 자가 능지국을 도와 비술을 써서 사람을 해치고 있지요. 이것이 바로 오늘 본왕이 막 성주를 찾아온 이유입니다. 그 자를 제거하지 않으면 열국은 영원히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잊힌 일불락이라는 민족 역시 다시 천하의 눈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지요. 그때가 오면 그녀도, 그리고 지하흑시도 모두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그는 과거를 떠올렸다. 세상의 야심가들은 그곳의 비술과 보물을 얻기 위해 모두 일불락을 차지하려 들었다. 심지어 단 한 사람이라도 붙잡아 꼭두각시로 부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세력을 넓히고 천하를 제패할 수 있는 열쇠가 되었다.능지국 역시 그랬다. 오직 섭혼술 하나만으로 진국에서 가장 명망 높던 대장군을 그들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그 시절, 일불락의 수십만 백성은 끝내 자신들의 고향을 지켜내지 못했다.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살 바에야 그들은 차라리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다.그 처참한 광경을 연기준은 결코 서인경에게서 반복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찾은 단 하나의 길은 모든 원흉을 찾아내어 싹부터 잘라내는 것이었다.막수한 또한 그 이치를 알고 있었다. 그는 책을 품속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왕야, 안심하십시오. 이 일은 제게 맡기시면 됩니다. 일불락을 배신한 자는 반드시 어족의 손으로 직접 정리하게 만들 것입니다.”연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막 성주께 신세를 지겠습니다. 노장군께서는 어떠하십니까? 본왕이 언제쯤 그분을 데려올 수 있겠습니까?”막수한의 얼굴에는 난감함이 스쳤고 무력한 한숨을 내쉬었다.“빙봉술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 그때까지 그분이 살아 계신다면 그때 다시 의논하시지요.”연기준은 미간을 찌푸렸다.“그토록 심각합니까?”막수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천의란 게 그렇지요. 원래라면 설장로께서 섭혼술의 시전을 막아내고 무사히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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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6화

연기준이 늘 그리워하던 사람은 막 아기에게 젖을 먹인 참이었다. 아기는 울지도 보채지도 않았다. 무척 얌전했고 특히 어머니를 볼 때마다 입을 활짝 벌려 웃곤 했다.다만 먹는 양이 너무 많았다. 하루에 열댓 번은 꼭 먹어야 했고 매번 트림이 나올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손으로 서인경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고 입을 벌려 가슴 쪽으로 파고들었다. 어찌나 집요한지 아무리 달래도 놓지 않았다.사람들은 젖은 곧 어미의 피라 했다. 서인경은 매일 자신의 몸이 조금씩 비워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눈앞의 작고 탐욕스러운 생명 앞에서는 단 한 번도 탓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꼬막이를 재운 뒤, 서인경은 침상에 누워 잠에 들 듯 말 듯 눈을 감았다. 의식이 점점 아득해지던 순간, 그녀는 꿈에서 연기준을 보았다.그는 다시 전장에 나갔다. 이번에는 진정한 상왕처럼 눈에 보이는 적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그의 군대는 능지국의 모든 병력을 전멸시켰다. 능지국 국왕은 사라진 단안 대장군을 찾지 못했고 계략을 꾸미던 귀면부장 또한 행방이 묘연했다. 지금 능지국 안에는 쓸 만한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수년 전처럼, 진국의 상왕 앞에서 능지국은 날개 꺾인 병아리와 다름없었다. 역사는 반복되었다. 다만 그 주인공이 예전의 열셋 째 황자에서 오늘의 연기준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능지국의 군주가 마침내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는 서둘러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그 사신이 진국 군영 앞에 도착하자 연기준은 단 한 마디 말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직접 칼을 빼내어 군중 앞에서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세상 사람들은 말했다.상왕의 아내와 아기가 막북에서 죽어 상왕이 미쳐버렸다고.전쟁 중이라도 사신은 죽이지 않는다는 불문율조차 그에겐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그는 황제의 휴전 칙명을 어기고 서가군을 이끌어 능지국의 수도로 진격했다. 그 깃발에는 한 문장만이 새겨져 있었다 .“서회윤과 서인경의 원수를 갚는다.”서가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전장은 살기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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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7화

봉한설은 말문이 막혔다.대체 누가 어른은 잠도 못 잔다고 했는가?“이건 무슨 약입니까?”“젖을 돌게 하는 약이다!”“그럼 일단 여기에 두세요. 왕비 마마께서 깨어나시면 제가 드리겠습니다.”설장로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유난은! 지금 당장 깨우거라. 안 그러면 너희 둘 다 내쫓아 버리겠다. 다시는 그 아기를 보지도 못하게 해 주마.”“당신…”서인경이 몽롱한 눈을 떴다. 그녀의 목소리는 약하고 탁했다.“가져오거라.”봉한설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고 황급히 그릇을 들어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설장로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서인경이 순순히 약을 들이켜자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방 안에 둘만 남게 되자 봉한설은 참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왕야께서 계셨다면 이렇게 두진 않았을 텐데요. 왕비 마마께서 막 회임했을 때부터 왕야께서는 유모를 들이기 위해 사람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왕비 마마께서는 이렇게 고생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서인경은 약을 다 마시자 정신이 조금 또렷해졌다. 그녀는 빈 그릇을 봉한설에게 건네며 창밖을 힐끗 보았다. 설장로의 그림자가 창가를 스쳐 지나갔다.“저분께서 나한테 대하는 태도가 이상하지 않느냐? 딱히 좋은 사람이라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 모자를 구해준 분이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보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란 말이지. 한데 왜 이렇게 날 미워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분께서 하는 모든 일들은 전부 꼬막이를 위한 것 같단 말이지. 그리고 굳이 꼬막이를 여기에 남겨두려는 이유가 무엇일까?”설장로는 서인경의 모유가 잘 돌도록 온갖 수단을 다 썼다. 하루 세 끼는 물론이고 보약과 고기탕을 아낌없이 올려주었다. 그 양과 기름짐은 이미 도를 넘을 정도였다.만약 서인경에게 기름기를 풀고 속을 씻어주는 약왕곡의 약재가 없었다면 지금쯤 몸이 불어나 걷지도 못했을 것이다. 약을 다 마신 서인경은 습관처럼 장을 풀어주는 따뜻한 차를 우려냈다. 그녀는 차를 마시며 봉한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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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8화

서인경은 두툼한 솜 망토를 몸에 둘렀지만 코끝이 시려 훌쩍훌쩍 소리를 냈다. 그녀와 봉한설은 서로를 부축하며 걸었지만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설장로 한 늙은이의 걸음만큼도 따라가지 못했다.산 중턱에 다다랐을 무렵, 서인경은 더 이상 힘이 남지 않아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장로님께서는 대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시려는 겁니까? 꼬막이가 깬 후 제가 보이지 않는다면 울 겁니다.”설장로가 뒤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헐떡이며 거의 개처럼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고 그 늙은 눈동자엔 노골적인 경멸이 비쳤다.“카멘만도 못한 약골들 같으니라고! 훈련이 모자라구나!”카멘은 설장로가 기르는 고양이 같기도 하고 호랑이 같기도 한,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몸집은 평범한 새끼고양이만 했지만 가끔은 놀라울 만큼 얌전해서 누구 손에나 순순히 안기곤 했다. 몇 번은 서인경의 방으로 들어와 꼬막이와 나란히 누워 자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위험을 감지하면 눈빛이 번뜩이며 순식간에 맹수가 되어버린다. 카멘의 이마에는 흐릿하게 ‘왕’ 자가 새겨져 있어 그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서인경은 예전에 그 녀석이 단숨에 지붕 위로 뛰어올라 날아가던 새 한 마리를 낚아채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 정확도는 활쏘기에 능한 인간과 비교해도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그녀는 늘 의아했다. 이곳은 혹독한 추위가 끝없이 몰아치는 곳이다. 자신은 매일같이 얼어붙을까 두려워 방에서 나가지도 못하는데 어째서 이곳의 생물들은 마치 추위를 전혀 느끼지 않는 것처럼 멀쩡히 살아 있는 걸까?설장로는 냉소 섞인 한마디를 던지고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어조로 앞서 걸었다.“다 왔다. 빨리 따라오거라. 내 귀한 시간을 낭비하게 하지 말란 말이다.”서인경과 봉한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 시선 속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체념이 서려 있었다.또다시 한참을 걸은 끝에, 설장로가 마침내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설산 꼭대기의 한 절벽 위였다.밤은 깊고 고요했다. 엷은 달빛이 산 정상의 윤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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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9화

봉한설은 충성을 보이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아닙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왕야의 장원에서 자랐습니다. 막북에는 처음 왔고 이분도 처음 뵙습니다.”그 말,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진실과 거짓을 절반씩 섞어서 말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정말 설장로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봉한설이 세상을 막 알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이미 이 여인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겁먹은 봉한설의 얼굴을 본 설장로는 또다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냉소를 흘렸다.“난 이런 멍청한 인간은 본 적이 없다!”서인경은 그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멍청한 인간? 그녀 자신도 인간이지 않은가?설장로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려 발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을 가리켰다.“너희 두 사람 모두 손발이 멀쩡하지? 노부인은 더 이상 너희 따위에게 밥 해 먹이고 재워줄 생각이 없다. 오늘 여기서 뛰어내리거라. 만약 목숨을 건져 다시 올라올 수 있다면 그땐 인정해 주겠다.”서인경과 봉한설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그 절벽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어두웠다. 그녀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건 명백히 죽으라는 뜻이었다.서인경은 반사적으로 봉한설을 품 안으로 감싸안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장로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한데 더는 저희를 두고 싶지 않다면 그냥 내보내십시오. 저희는 원한도 없고 앙금도 없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설장로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마치 그 얼굴에 겹쳐진 또 하나의 그림자를 마음 깊이 새기듯 말이다. 그녀의 표정은 차분했으나 목소리는 칼날처럼 냉정했다.“흥! 눈 아래의 절벽에서 죽는 건 너희 같은 것들에겐 과분한 복이다. 감히 내게 대꾸를 하려는 것이냐?”말이 끝나자마자 설장로는 손을 휙 하고 휘둘렸다. 순식간에 눈보라가 몰아치더니 귀를 찢는 듯한 찬바람이 불어왔다. 잠시 후, 하얀 눈발이 하늘을 덮었고 그들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봉한설이 본능적으로 외쳤다.“왕비 마마, 절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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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0화

그가 처음으로 열셋 째 황숙 연도현을 따라 능지국의 땅을 밟았던 그날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두 손을 등 뒤에 얹고 냉랭한 눈빛으로 옥좌 위의 사내를 바라보았다.“능지국을 돕고 있는 일불락의 후손은 어디 있습니까?”단무진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일불락 후손이라니? 짐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구나.”“잡아떼는 것입니까?”연기준은 입가를 살짝 비웃듯 올렸다.“괜찮습니다. 본왕의 장졸들이 오늘 능지국 왕궁을 샅샅이 뒤집어 놓을 것이니까요. 저희가 설마 그 자 하나를 못 찾아내겠습니까?”그 말에 단무진은 당황했으나 잠시 후 곧 분노가 치밀었다.“연기준! 너희 진국의 폐하께서 여러 차례 화친을 명하셨다! 네가 성지를 거역한다면 폐하께서 너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느냐?”하지만 연기준은 태연했다.“누군들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싶지 않겠습니까? 능지국이 진국의 영토가 된다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시겠지요.”그 말은 단무진의 약점을 정통으로 찔렀고 그의 눈 속의 불안은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다.“연기준, 네 야심은 연도현보다 더 크구나! 진국의 폐하께서 너를 곁에 두는 것이 복인지 화인지 알 수가 없군!”연기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열셋 째 황숙께서는 자비로워 그대 능지국에 마지막 체면이라도 남겨주었지요. 한데 본왕의 처자식은 그대에게 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무엇을 더 고려해야 한단 말입니까?”단무진은 다시 격노했다.“헛소리다! 짐은 네 처자식을 해친 적이 없다! 이는 억지 누명이다! 더구나 봉한설 그 아이가 함께 있지 않느냐? 그녀가 어찌 막북에서 죽을 수 있단 말이냐? 그 아이는 제 어미처럼 우직하고 고집스럽다! 감히 금술을 써서 사람을 구하다니! 네 처자식은 절대 죽었을 리 없다! 이 누명, 우리 능지국은 절대 덮어쓰지 않을 것이다!”연기준의 눈빛이 차갑게 식으며 마음속 추측이 굳어졌다.“역시 당신이 그때의 그 사내였군요. 그동안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들을 찾지 않았던 것입니까?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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