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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1화

“직접 보셨겠지요? 그녀는 지금 진국의 상왕비로 잘 살고 있습니다. 곧 아이도 낳을 예정이지요.”입을 연 남자는 두터운 잿빛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이마와 눈을 가린 탓에 얼굴은 분간되지 않았지만 만약 서인경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봤을 것이다.지하흑시의 동성 성주인 막수한이었다. 그의 곁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이 서 있었다. 얼굴엔 깊은 주름이 패였고 세월의 흔적이 짙게 깃들어 있었으나 그 눈빛은 매처럼 날카롭고 거울처럼 맑았다. 한눈에 봐도 남에게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고 평생 권모와 생사를 견뎌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막수한은 그녀 앞에서 감히 조금의 무례도 범하지 못했다. 노부인은 문틈 사이로 서인경을 바라본 채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닮았다… 한데 완전히 같진 않구나. 정말 사람을 잘못 찾은 게 아니냐?”막수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설장로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혈적자가 주인을 헷갈릴 리 없습니다. 다만 그녀의 몸에 절반은 외인의 피가 섞여 있어 모습이 조금 바뀐 것일 뿐입니다.”혈적자라는 말에 그녀의 눈빛엔 잠시 확신의 빛이 스쳤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외인의 피라는 말이 이어지자 그녀의 얼굴에는 곧바로 불쾌한 기색이 번졌다.“천한 외족의 피라니… 참으로 더럽게 섞였구나. 그놈의 운도 지독하지.”막수한은 노부인의 혈통 집착을 잘 알고 있었다. 괜히 맞서봤자 소용없었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며칠 전, 네 어미가 내 구역을 침범해 구하려 했던 자가 그게 바로 그녀의 혈육이더냐?”막수한은 즉시 허리를 굽혔다.“예. 그녀를 키운 조부이자 지금 설산에 갇혀 있는 분입니다. 정치적 분쟁에 휘말려 생사가 위태로워졌지요. 그때 설장로께서 나서 주시길 청했지만 제 말을 믿지 않으시고 부탁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무단으로 들어가 사람을 구한 것입니다. 무례를 범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설장로는 코웃음을 쳤다.“노부가 만약 허락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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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2화

서인경은 웃으며 말했다.“전 이때까지 한설이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일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연기준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의 배를 쓸어내렸다.“오늘은 얌전했느냐?”서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뭐, 그럭저럭요. 한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이 여인사당이 정말 한설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성스러운 것입니까? 이상하게 이번 일은 좀 장난스럽다는 느낌이 안 들어서요.”연기준은 짐짓 꾸짖듯 웃었다.“보살님 앞에서 함부로 입 놀리면 방금 빈 소원은 다 허공으로 흩어진다.”서인경은 그를 바라봤다. 연기준이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장수였다. 손에는 피가 마르고 발아래엔 뼈가 깔린 사내였다. 그런 사람이 신이나 부처를 믿을 리 없었다. 그가 믿는 건 언제나 자기 손에 쥔 칼 한 자루뿐이었다. 그런데도 오늘 그가 굳이 자신을 여기에 데리고 온 이유는 무엇일까?연기준은 그녀의 눈빛 속 의문을 읽어냈다. 그는 몸을 약간 숙여 입가에 비밀을 머금은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곳은 단지 눈을 속이기 위한 곳일 뿐이다. 조금 뒤에 본왕이 더 중요한 일을 보여주겠다. 서 노장군과 관련된 일이지.”서인경의 눈빛이 번쩍였다.“할아버지요? 그분께서 이 근처에 계신 겁니까?”연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이따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본왕을 따라오거라.”그는 봉한설과 암위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서인경을 데리고 여인사당을 나섰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천천히 눈 덮인 설산을 지나갔다. 하얀 설경이 끝없이 이어지고 멀리서 야수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려왔다.서인경은 어쩐지 불안해져 입을 열었다.“갑자기 짐승이 튀어나와 저희를 잡아먹으면 어떡합니까?”연기준은 미소를 띠었다.“그럴 일은 없다.”말발굽 소리가 눈 위에 부드럽게 찍히며 그들을 한 산골짜기로 데려갔다. 서인경은 처음으로 눈 덮인 골짜기라는 것을 보았다. 겨울인데도 그곳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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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3화

그녀는 화철자를 펴 불씨를 불어넣고 잠깐 연기준을 훑어보았다.“홍주는 한 번 붙으면 잘 번지고 독기 또한 강하게 빠져나와서 대략 오백에서 육백 미터쯤까지 퍼질 것입니다. 제가 이걸 던지면 왕야께서는 즉시 말에 박차를 가해 밖으로 달리십시오.”연기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굳게 고삐를 쥐었다. 서인경이 막 움직이려 하자 연기준은 다리를 말배에 꽉 끼웠다.화철자는 홍주의 가지 위에 떨어졌고 뿌리 쪽으로 굴렀다. 불꽃이 튀어 오르더니 순식간에 큰 불길로 번졌고 깊숙한 곳에서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서인경은 연기준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붉은 꽃과 흰 눈이 어우러진 광경을 응시했다. 그 빛깔이 점점 멀어지고 말이 모퉁이를 돌아 설산 골짜기를 벗어날 때에야 그 붉은색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만약 독기만 없었다면 그 장면은 참으로 아름다웠을 것이다.서인경은 잠깐 감탄했다.“홍주는 일불락 사람들이 길러낸 거라더니… 외적을 막는 장치었군요. 이런 데서 홍주를 심을 만한 인간이라면 그 재주는 실로 대단할 겁니다.”골짜기를 빠져나온 서인경은 몸을 돌려 연기준을 보았다.“불편한 데라도 있습니까?”연기준은 숨을 삼키며 솔직히 말했다.“조금 들이 마신 것 같다. 목이 따끔거리는구나.”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연기준은 아까 일부러 속도를 내지 못했었다. 서인경의 배가 흔들릴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재빨리 품에서 해독환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것은 약왕곡에 있을 때 그녀가 직접 배합해 만든 약이었다. 이 시대의 약재 성분은 훨씬 순수했고 온천수와 함께 쓴 덕에 해독 효과가 훨씬 좋았다.연기준은 입을 벌려 환약을 삼켰고 서인경은 말 등에 붙어 한눈도 팔지 않고 그를 지켜보았다.“어떻습니까?”“목이 촉촉해졌고 위가 타는 듯한 느낌이 가라앉았다.”서인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됐습니다. 이번 약 배합은 제대로 맞았나 보군요.”연기준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넌 본왕을 실험 대상으로 쓰는 것이냐?”서인경은 자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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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4화

연기준과 서인경은 천천히 말을 달렸고 하늘이 붉게 물든 황혼이 된 무렵에야 여인사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서인경이 들어서자 황금빛 석양에 잠긴 보살상이 마치 따스한 불광을 두른 듯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그 보살상은 정말로 중생을 제도하는 신과도 같았다.봉한설은 이미 보살상의 위아래를 깨끗하게 닦아 먼지 한 점 남기지 않았다. 그 마음의 정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느껴질 만큼 순수하고도 간절했다.일을 마친 후 일행은 군영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능지국, 장군부.처음에 단안이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말한 이유가 있었다. 정말로 그들이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병력과 군수품이 충분히 갖춰지고 진국의 상왕과 한 번 겨뤄보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그때, 능지국의 황제는 도리어 휴전을 명했다.단안은 어리둥절했다. 몇 차례 상소를 올리려 했지만 귀면부장이 번번이 가로막았다.“대장군, 조금만 진정하십시오. 폐하께서는 이제 막 넷째 황자를 얻으셨습니다. 지금 온 나라가 경하하는 마당에 사면령까지 내리셨지요. 이 길일에 전쟁을 일으켜 넷째 황자의 복을 꺾고 싶지 않으신 겁니다.”단안은 분노가 치밀어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지금 중요한 게 나라인 것이냐 아니면 애새끼인 것이냐? 지금 우리 군은 병력도 군수도 넉넉하다! 진국은 남경에서 전란이 끊이지 않아 병력도 재정도 이미 지쳐 있지.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공격해야 할 때가 아니더냐! 남경이 숨 돌리고 원군이 도착하면 그땐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단 말이다!”그의 고함이 이어졌지만 귀면부장은 묵묵히 상소문을 눌러 두며 말했다.“대장군 말씀이 옳습니다. 한데 폐하께서는 자손이 없으십니다. 앞선 세 황자는 모두 요절하셨지요. 넷째 황자는 폐하의 유일한 희망이며 어쩌면 미래의 태자이기도 합니다. 태자는 곧 나라의 근본이니 그 근본을 위하는 일 또한 국사입니다. 대장군께선 부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단안은 이를 악물었다.“그래서 도대체 얼마나 기다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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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5화

시종의 이름은 장평이었다. 단안이 장군부에 온 이후 귀면부장이 그의 곁에 붙여둔 인물이었다. 시중을 든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감시였다.단안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나라, 능지국의 사람들은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도 몰랐고 자신의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장군부 안에 있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당신은 이 나라의 대장군입니다.”그의 사명은 단 하나였다. 진국을 무찌르고 진국의 성을 함락시키는 것. 그들은 거기엔 그의 가족을 죽인 원수들이 있다고 했다.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누군가 미리 짜놓은 길 위를 걷듯 그렇게 살아왔다. 전쟁터에서는 천부적인 전투 감각이 몸에 새겨져 있었다. 그 능력 하나만은 타고난 듯 완벽했다.그러나 두 군대가 맞붙은 전장에서 칼을 휘두르고 피가 튀는 그 순간에도 그의 가슴은 조금도 시원하지 않았다. 적의 피가 튀어 얼굴을 덮을 때마다 그 뜨거운 냄새는 그를 구역질 나게 했다.요 며칠 사이, 그의 머릿속에는 자꾸 한 여인의 얼굴이 스쳤다. 서재 문을 박차고 들어와 그를 할아버지라 부르던 여인.나중에서야 알 수 있었다. 그 여인이 바로 상왕의 왕비였다는 것을.어딘가 마음속 깊은 곳이 뒤흔들렸다. 그는 그 상왕과 다시 한번 맞붙고 싶었다. 싸움이라기보다는 그를 통해 무언가 진실의 단서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사실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다만 그 전쟁이라는 명목 아래 이 폐쇄된 세상 밖의 공기를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었을 뿐.능지국의 사람들은 언제나 같은 말을 했다. 그 완벽한 일치 속에서 단안의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에게 진실을 말해 줄 자는 아무도 없었다거리 모퉁이의 주점 2층.단안은 혼자 창가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술맛은 영 형편없어 입에 한 모금 머금을 때마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나 들리는 말로는 이게 이 지역에서 가장 좋은 술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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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6화

능지국이 진국의 정세를 꿰뚫고 있듯 연기준 또한 능지국 내부의 동향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이 몇 달 동안, 관서윤과 연강헌은 매일같이 연기준을 압박하며 전쟁을 촉구했다.“능지국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건만 요즘은 잠잠하니 내부에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그 허점을 찔러야 할 때지요.”“황숙, 군을 이끌고 멀리 북변까지 와서는 어찌 손만 놓고 계십니까? 장정 수만의 병력에 하루 군량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전부 백은이 녹아내리는 셈이란 말입니다.”“지금 진국의 병력과 군수는 대부분 남경에 투입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 머무를수록 군량만 낭비됩니다. 더 기다릴수록 불리해진단 말입니다.”“황숙께서 차일피일 출병을 미루는 것은… 혹시 서 가를 염두에 두신 겁니까? 서회윤은 이미 역적입니다. 폐하께서도 잡아들이라 명하셨지요. 한데 황숙께서 아직도 성지를 따르지 않는다면 이것은 항지요, 곧 성명을 거역하는 것입니다.”연기준은 그들의 귀에 거슬리는 잔소리를 몇 달째 참아왔다.그리고 오늘, 마침내 결심했다. 전쟁을 시작하기로.그는 친히 병사를 점검하고 장수를 임명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챙기며 출정 준비를 마쳤다. 서인경은 직접 그에게 갑옷을 입혀주며 말했다.“할아버지를 구하는 게 급하긴 하지만 왕야께서도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합니다.”연기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불룩한 배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걱정되느냐?”서인경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아이에게…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그 순간, 배 속의 작은 생명이 마치 아버지의 목소리를 알아듣기라도 한 듯 힘차게 두 번 발길질을 했다. 연기준의 얼굴엔 미소가 번지고 눈빛이 부드러워졌다.“걱정 말거라. 본왕은 이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자라는 것도 다 지켜볼 것이다.”그는 가볍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기다리거라. 돌아오겠다.”서인경은 차가운 갑옷에 뺨을 기댄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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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7화

봉한설이 그 한마디를 외치자 문밖의 장졸들은 놀라 허둥지둥 뛰어가 사람을 부르기 시작했다.서인경은 부축을 받아 침상에 앉았다. 허벅지 아래는 이미 축축이 젖어 있었고 몸 전체를 휘감는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무리 침착하려 해도 그 아릿하고 깊은 통증은 그녀의 심장을 위아래로 뒤흔들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봉한설의 손을 꽉 붙잡았다. 두 사람의 얼굴은 모두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이를 낳지 않는 봉한설이라도 지금의 고통은 그녀에게도 다르지 않았다.“왕비 마마, 무서워하지 마세요, 제발요. 산파가 금방 올 겁니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세요!”서인경은 침상에 누워 봉한설을 안심시켜주고 싶었지만 입 안이 타들어가듯 아파서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봉한설은 불안에 질려 문밖을 향해 외쳤다.“산파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가까운데 왜 아직도 안 오는 것입니까?”연기준은 이미 산파를 불러 두었고 그녀는 바로 뒤편 천막에 머물고 있었다. 그 짧은 거리라면 이 정도의 소란쯤은 진작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오래 기다려 나타난 것은 산파가 아닌 뜻밖의 인물이었다.연강헌.그는 천막의 발을 걷으며 입가에 음산한 미소를 걸고 천천히 다가왔다.“어이쿠, 참 절묘하네요. 황숙이 막 떠나자마자 황숙모께서 해산이라니… 보아하니 이 아이와 황숙은 애초부터 인연이 없었나 봅니다.”봉한설은 즉시 서인경 앞을 가로막았다.“누가 당신을 들이라고 했나요? 당장 나가세요!”연강헌의 웃음은 더 깊어졌다. 서인경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으며 고통으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모습은 오히려 그에게는 쾌감이었다.“황숙모께서 출산하신다기에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가 해서 와봤습니다.”봉한설의 눈에 불길이 번졌다. 그녀는 손끝이 떨릴 정도로 분노하며 소리쳤다.“꺼지십시오! 여긴 황자께서 설 자리가 아닙니다! 밖에 누구 없습니까! 이리 와 보십시오!”그녀가 몇 번을 외친 끝에야 천막 밖에서 서둘러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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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8화

서인경 자신이라면 약왕곡으로 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남는 건 한 줌의 영혼뿐이었다. 그녀는 봉한설을 데리고 갈 수도, 이 육신을 지킬 수도, 뱃속의 아기를 품을 수도 없었다.그렇다고 해서 봉한설을 자기와 함께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인경은 통증을 참으며 봉한설을 바깥으로 밀어냈다.“어서 나가거라. 날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가란 말이다.”하지만 봉한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서인경을 꼭 끌어안고 불길 속에서 함께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안 됩니다. 전 왕비 마마를 혼자 두고 나갈 수 없어요. 살면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 겁니다!”그러나 봉한설은 아직 어린 아가씨였다. 지금의 서인경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몇 번이나 들어 올리려 했지만 끝내 옮기지 못했고 마지막에는 자신마저 침상 위로 넘어지며 떨어졌다.불길이 집어삼키는 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천막 안의 열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치솟았다. 짙은 연기가 눈을 시리게 했고 시야는 서서히 흐려져 사람 모습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매캐한 연기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봉한설의 눈은 핏발이 서서 벌겋게 부어 있었고 절망이 그녀의 눈빛에 짙게 배어났다.서인경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졌다. 몸은 타는 듯했고 손가락 하나 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완전히 기절하기 직전 봉한설은 이빨을 꽉 물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그 순간, 막북의 하늘이 이상하게 뒤집혔다.방금 전까지 밝던 하늘이 우레와 함께 짙은 먹구름에 뒤덮이며 순식간에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사방에서 짐승들의 울부짖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고 그 소리는 귀를 찢듯 요란했다. 마치 하늘과 땅이 함께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그날의 막북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광경이었다.앞쪽 전장에서의 살육은 그 소리와 함께 모두 멈췄다. 연기준은 하늘을 덮은 그 기이한 변화를 바라보며 눈빛이 핏빛으로 변했다. 그는 말에 올라타자마자 광인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그날, 설산은 완전히 얼어붙었고 일불락의 유적지는 그 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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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9화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서인경은 황급히 아기의 바지를 벗기려 했다. 그러자 봉한설이 깜짝 놀라며 급히 손을 막았다.“아아, 안 됩니다! 춥잖아요. 남자아이에요. 제가 확신합니다!”서인경은 그제야 손을 거두었다.“내가 얼마나 오래 잔 것이냐? 그리고 여긴 어디냐? 아까 그 노부인은 누구고? 전선은 지금 어떤 상황인 것이냐?”서인경의 머릿속에는 풀리지 않은 의문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아기를 낳았지만 전생에서는 신생아들을 수없이 봐왔었기에 아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서인경의 아기는 또렷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태어난 지 하루 이틀이 된 갓난아이가 아니었다. 서인경은 자신이 아주 오랜 시간을 놓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봉한설은 고개를 숙였고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서인경은 그 모습을 보고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봉한설은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왕비 마마, 질문이 너무 많습니다. 차근차근 다 말씀드릴게요.”그렇게 반 시진이 지나서야 서인경은 마침내 모든 걸 알게 되었다.봉한설의 말에 따르면 생사의 기로에 선 그 순간 그들을 구한 사람은 바로 방금 전의 그 노부인이었다고 한다.봉한설은 일의 전말을 차근차근 설명했다.“그분은 일불락의 방계, 여족의 마지막 후손입니다. 다들 설장로라고 부르지요. 여족은 섭혼술과 수어에 능하고 별자리로 길흉을 점칠 줄 안다고 합니다. 그날 설장로께서 우연히 군영 근처를 지나다가 누군가 위험에 처한다는 징조를 보고 수어로 신수를 불러내 도천환일의 환술을 써서 저희를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한데 그때 왕비 마마의 상태가 너무 위태로워서 자칫하면 산모와 아기 모두 위험할 뻔했지요. 설장로께서는 왕비 마마와 아기를 살리기 위해 저희를 일불락의 유적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여족의 비전 의술로 두 분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다만 실혈이 너무 심해 기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왕비 마마께서는 한 달을 꼬박 혼수상태로 지내셨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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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0화

설장로는 서인경이 절대 나가지 못하리라 확신하며 아예 문조차 닫지 않은 채 노기 띤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서인경은 고집스럽게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아기를 품에 안고 그대로 문을 향해 걸었다.“길이란,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내가 들어올 수 있었다면 나가지 못할 이유도 없지.”하지만 문을 나서는 순간 서인경은 자신이 너무 큰소리를 쳤다는 걸 깨달았다.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설역. 하얗고 끝없는 바다처럼 사방이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그녀들이 머무는 집은 광활한 설원 한가운데 덩그러니 세워진 작은 집 한 채였다. 주변에는 길조차 없었고 사방은 눈으로 둘러싸여 밖을 나서는 순간 방향 감각마저 완전히 사라질 터였다.서인경은 얼굴이 굳은 채로 봉한설을 바라보았다.“우린 대체 어떻게 들어온 것이냐?”봉한설은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저도 모릅니다. 들어올 때는 이미 기절해 있었거든요. 눈을 떴을 땐 여기였어요.”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여기는 일불락 유적지의 중심축이자 한때 일불락 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었다.서회윤에게 섭혼술을 시도했던 장소는 그 왕궁의 외곽에 불과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일생을 다해도 이곳까지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그동안 설장로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십 겹의 결계를 걸어두었다.그 결계는 오직 그녀 자신, 혹은 자신보다 높은 혈통의 일불락 후손만이 열 수 있는 것들이었다.그녀는 봉한설을 철저히 경계했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그녀를 일부러 기절시켜 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봉한설은 어떻게 들어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자신이 결계를 열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하지만 서인경은...봉한설은 그 생각에 입술을 꼭 다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이야기는 너무 큰 대가를 치를 수도 있었기에 감히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될 일이었다. 서인경의 시선은 끝없이 펼쳐진 설원 위에 머물렀다. 작은 집 바깥의 눈은 무려 반 자나 쌓여 있었다. 이대로 억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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