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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1화

호롱이의 뜻도 그 미소년이 말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서인경은 뜻밖이었다. 벼랑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는데 오히려 그 덕에 이런 두 명의 추종자를 얻을 줄이야.그녀는 그들에게 일어나라 손짓하고 미소년에게 물었다.“내가 널 뭐라고 부르면 되겠느냐?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미소년이 대답했다.“어머니께서 저를 낳으신 곳은 온천 옆의 그 대추나무 아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제 이름을 조빈이라 지으셨지요.”“조빈?”서인경은 이름을 한 번 읊조렸다.“꽤 듣기 좋구나.”그렇게 조빈과 호롱이는 그 산골짜기 아래에서 맹세를 세웠다.이 생애, 서인경을 따르며 결코 배신하지 않겠노라. 만약 그 맹세를 어긴다면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서인경은 그런 맹세를 듣고도 그리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그렇게 무섭게 말하지 말고 어서 와서 불 좀 쬐거라. 몸을 녹여야 하지 않겠느냐?”호롱이는 서인경 곁에 앉았지만 조빈은 움직이지 않았다.“왕비 마마, 이 근처에 있는 짐승들이 어디 사는지 압니다. 제가 몇 마리 잡아와 허기를 달래드리겠습니다.”서인경은 무심결에 호롱이를 바라보았다.“너는 만수의 왕이라며? 이곳의 짐승들은 다 네 부하이지 않느냐? 우리가 먹어도 괜찮겠느냐?”호롱이가 고개를 저으며 조빈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짐승들은 설산의 수호신이지만 산토끼나 들꿩 같은 건 아닙니다. 그런 건 먹어도 괜찮지요.”서인경은 그제야 안심하고 조빈에게 재빨리 다녀오라 일렀다.호롱이는 물속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기에 몸의 기능이 꽤 약해져 있었다. 서인경은 그를 사람처럼 여기며 몸을 다스리는 한약을 지어주고 약왕곡의 온천수를 떠다 마시게 했다.봉한설은 사람과 짐승이 말을 나누지도 못하면서 묘하게 조화롭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돌고 돌아,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되었구나.만수의 왕을 구했다는 건 곧 설산의 부흥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머지않아 이 설원의 땅에는 반드시 평온치 않은 날이 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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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2화

“감히… 당신이?”입을 연 순간, 들려온 것은 젊은 소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와 달리 얼굴은 세월이 묻은 중년 여인의 것이었기에 그 목소리와의 불협화음이 더욱 섬뜩하게 느껴졌다.연기준은 담담히 그녀를 바라보았다.“능지국은 이미 멸망했다. 이제 너에게 무슨 의지할 언덕이 남았느냐? 들어나 보자꾸나.”중년 여인은 허리를 곧게 펴고 자신이 가진 마지막 비수를 꺼내듯 당당히 말했다.“저는 일불락 여족의 후손입니다. 섭혼술, 수어 그리고 점성술에 능하지요. 만약 저를 거두신다면 당신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그녀는 연기준이 이 말에 흔들릴 거라 믿었다.당초 단무진도 이 말을 듣자마자 주저 없이 자신을 곁에 두었으니까. 연기준은 명성이 드높은 진국의 상왕인데 어찌 야망이 없겠는가?그러나 뜻밖에도 연기준은 가볍게 웃었다.“예전부터 들었다. 일불락의 여족 후손이라면 이제는 여설아 한 사람만 남아있다고 말이다. 그럼 너는 대체 어느 갈래의 피를 이었다는 것이냐?”중년 여인은 잠시 얼어붙었다. 연기준이 여설아의 이름까지 알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여설아. 백 년을 살아온 여족의 대장로. 그녀는 모든 여족이 두려워한 존재였다.“그럴 리 없습니다! 여설아는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눈사태에 묻히는 걸 직접 본 사람도 있단 말입니다! 이 세상에 남은 여족의 후손은 이제 저 하나 뿐입니다. 저는 일불락의 유일한 계승자입니다! 그러니 왕업을 이루고 싶다면 저 말고는 도와줄 수 있는 자가 없지요!”연기준의 눈빛은 마치 가련한 개미를 내려다보는 듯했다.“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한 가지만 알려주지. 여족의 후손은 너만이 아니다. 너희의 대장로인 여설아는 지금도 멀쩡히 살아 있다.”중년 여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연기준을 바라보았다.“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녀가 눈사태에 묻히는 걸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 있단 말입니다. 한데 어찌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연기준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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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3화

그녀는 설산에서 걸어 나온 뒤로 매일같이 이런 꿈을 꾸었다.그런데 오늘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했다. 여족뿐만 아니라 어족도, 심지어 일불락의 수장 일족도 모두 살아있다고.도대체 누가 그녀를 속이고 있는 것일까?중년 여인은 죽었다. 죽는 순간에도 얼굴에는 여전히 분노가 가득 남아 있었다.막수한은 장검을 거두고 연기준을 바라보았다.“이 여인은 여족의 작은 지류에 불과하니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다만 설장로의 공력으로도 설산 밖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이 현실인데 그녀는 설산을 빠져나와 능지국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렇다는 건 분명 누군가가 뒤에서 도와줬기 때문이겠지요. 아마 그 뒤에는 훨씬 더 거대한 손이 있을 겁니다.”연기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얼굴빛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저도 그게 가장 두렵습니다. 한설, 그 아이는 일불락 사람들을 전적으로 믿고 있으니 설산 안에 들어가면 누구에게도 경계심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다 그들이 그곳에서 위험한 상황에 마주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 됩니다.”막수한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지금 설산 깊은 곳의 절벽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서인경은 하루 밤낮을 지내며 지친 몸을 눕히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봉한설은 동굴 밖에서 지키며 조빈에게 사냥을 더 시켜 모두의 저녁을 준비하게 했다.조빈은 호롱이와 함께 가겠다 했지만 봉한설이 막아섰다.“이 일대는 내가 익숙하지 않다. 그러니 왕비 마마를 지키려면 호롱님께서 곁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조빈은 더 말하지 않고 그녀의 뜻을 따랐다.그를 내보내고 나서 봉한설은 호롱이와 함께 동굴 입구에 앉아 서인경을 지켰다. 그 둘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봉한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있잖습니까... 왜 왕비 마마께서는 호롱님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겁니까? 전 호롱님을 처음 봤을 때부터 호롱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다 들렸는데 말입니다.”호롱이 역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낮게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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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4화

조빈은 겨우 반 시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열 마리 넘는 꿩들을 잡고 돌아왔다. 그는 그것들을 밧줄로 꿰어 한 줄로 묶었다. 꿩들을 끌고 오는 걸음마다에는 울음소리가 이어졌고 땅바닥엔 푸드덕거린 흔적과 흩날리는 깃털만이 남았다.고운 미소년 같던 조빈의 모습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온통 닭 잡는 신선 같았다. 어떻게 봐도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묘하게 어긋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능숙한 손놀림으로 밧줄을 나뭇가지에 매달고는 봉한설과 호롱이 옆에 앉았다.“이번엔 다 살아있는 놈들입니다. 키우면서 하나씩 잡아먹읍시다. 그러면 나가기 전까지는 늘 신선한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봉한설이 흘깃 그를 보며 물었다.“한데 왕비 마마께서는 아직 수어를 배우지 못하셨다. 설령 위로 올라간다 해도 위에 있는 그 늙은 마녀가 왕비 마마를 놓아줄 리 없다. 그 여자가 왕비 마마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린 건 분명 일불락의 능력을 위한 것이니까.”“늙은 마녀요?”조빈이 놀란 눈으로 한설에게 되물었다.“어떤 늙은 마녀 말입니까?”봉한설이 대답했다.“모르는 것이냐? 여족의 대장로, 여설아 말이다. 그 여자가 왕비 마마를 밀어뜨린 장본인이거든.”그 말을 듣자 조빈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변했다.“그럴 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봉한설은 이상하다는 듯 조빈을 바라보았다.“너는 여족이 아니었느냐? 한데 대장로께서 아직 살아 있다는 것도 몰랐단 말이냐?”조빈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몰랐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늘 여족은 이제 저희밖에 남지 않았다고요 말했거든요. 분명 다들 죽었다고 했는데...”봉한설은 의아해하며 미간을 찌푸렸다.“우리? 여족 중에 너 말고 또 누가 있는 것이냐?”조빈은 머리를 긁적였다.“음…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몇 해 전에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여족에는 저와 고모, 단둘뿐이지요. 한데 1년 전, 고모는 실종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한 해가 다 가도록 사람 구경을 해 본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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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5화

흑수암의 약왕곡, 도팔천.동굴 속, 어머니와 똑같이 생긴 그 그림.혈적자 펜던트.지하흑시에 존재하는 그 신비로운 대장로.과거의 모든 장면이 마치 주마등처럼 서인경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알고 보니 그녀가 이 세상으로 넘어온 그 순간부터 모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어쩐지...혈적자 펜던트가 그녀를 주인으로 인정한 것도,약왕곡이 그녀의 공간이 된 것도,지하흑시가 갑자기 그 아이들을 받아들인 것도,모든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막효연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치 오래된 인연처럼 마음이 통했던 것도,봉한설이 목숨 걸고 그녀를 따랐던 것도,처음으로 어머니의 출생을 물었을 때 할아버지께서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도,이제 와 생각해 보니 모든 게 다 맞물려 있었다.그녀는 일불락의 수장 일족 후손이었다. 백여 년 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던, 의술, 독술, 수어와 점성술에 능하다던 그 신비한 부족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었다.이제 생각해 보면 아마 연기준도 이미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이 서인경의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수많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그는 언제 그녀의 출신을 알게 된 걸까? 혼인하기 전이었을까, 아니면 혼인한 후였을까? 그녀가 화리를 요구하기 전이었을까, 아니면 그 이후였을까?혹시…그가 끝까지 화리를 허락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가 일불락의 수장 일족 후손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그 신분이라면 누구든 세상을 손에 쥘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 생긴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연기준은 정말로 한 번도 그것을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일까?꼬막이를 회임한 뒤부터 서인경은 자신이 왜 이 세상으로 넘어왔는지를 거의 잊고 살았다. 그녀는 연기준이 자신에게 한없이 세심하고 다정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그녀는 어쩔 수 없이 연기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그 다정함 속에 과연 얼마만큼의 진심이 담겨있었던 걸까? 혹시 그 모든 것은 그녀의 신분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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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6화

서인경은 너무 지쳐 있던 탓에 밖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으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눈을 번쩍 떴을 때, 밖은 이미 어둑하게 저물어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세 개의 그림자가 불가에 쪼그리고 앉아 닭을 굽고 있었다. 아마 방금 전까지 즐거운 대화를 나눈 게 아니었기에 지금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이리라.서인경은 악몽을 꾸었던 터라 놀란 가슴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봉한설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서인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일을 내던지고 급히 달려가며 물었다.“왕비 마마, 깨어나셨군요! 배고프지 않으십니까? 뭐라도 드세요.”서인경이 방금 꾼 꿈은 모두 연기준과 관련된 것이었다. 꿈속에서 그 둘은 완전히 갈라섰고 꼬막이의 양육권을 두고 다투었다. 하지만 서인경은 완전히 패했고 꼬막이는 연기준의 품에 안겨 떠나버렸다. 그는 서인경에게 이번 생에는 꼬막이를 볼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등을 돌렸다.눈을 뜨고서야 꿈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가슴속의 먹먹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벽에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너희들 먼저 먹거라. 난 별로 입맛이 없다.”조빈은 고모의 일이 밝혀진 뒤로 서인경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걸렸다.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왕비 마마, 그래도 뭐라도 좀 드세요. 이곳은 일찍 어두워집니다. 날이 다시 밝으려면 아직 여섯, 일곱 시진은 남았어요. 굶으시면 더 힘드실 겁니다.”서인경은 진짜 배가 고프지 않았다. 방금 전, 잠에서 한 번 깼을 때 몸이 좋지 않아 약왕곡의 온천에 들어가 몸을 덥히고 낮에 남은 생선을 조금 먹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빈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던 그녀는 손을 뻗어 음식을 받아들었다.“고맙다.”서인경이 받아들자 조빈은 그제야 안도한 듯 활짝 웃었다.“별말씀을요. 왕비 마마, 걱정 마세요. 내일 제가 꼭 나가는 길을 찾아드릴게요.”“나갈 방법이 있느냐?”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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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7화

봉한설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서인경의 팔을 붙잡았다.“왕비 마마, 위험을 무릅쓰지 마십시오. 만수림의 짐승들은 다른 곳과 다릅니다. 그곳의 짐승들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았기에 몸집이 거대하고 성격이 사납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지금 이 상태로 들어간다면 살아 돌아오기는 힘들 것입니다.”서인경은 미소를 지으며 봉한설의 손을 가볍게 눌러 안심시켰다.“어디의 짐승이 약육강식이 아니더냐? 사람도 마찬가지다. 걱정 말거라. 내가 만수림에 들어갈 용기조차 없다면 앞으로 닥칠 일에 더 맞설 수 없겠지. 그렇게 된다면 나중에는 내 가족도 지켜내지 못할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지 않겠느냐?”서인경의 말이 옳다는 걸 봉한설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서인경을 이렇게까지 몰아넣는 걸까?그녀를 그저 상왕의 아내로, 평안히 한 생을 누릴 수 있게 내버려 둔다면 어디가 덧나는 것일까?비록 그녀는 어족의 후예고 어머니처럼 수장 일족에 충성하지만 복국을 위해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봉한설은 이를 악물었다. 이 모든 일을 꾸민 장본인을 생각하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언젠가 그 여인을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이리라.한편, 서인경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다른 이들이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한 밤, 오직 그녀만이 고요하고 평온했다. 겉으로는 잠든 듯 보였지만 그녀의 신식은 약왕곡으로 들어가 있었다. 야수들을 제압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독약을 한 가지씩 조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짐승은 인간보다 힘도 세고 체격도 크니 서인경은 철저히 대비해야 했다.독약을 다 만들고 나니 탁자 위에는 작은 산처럼 병들이 수북이 쌓였다. 준비할 수 있는 건 모두 끝내고 나서야 그녀의 신식은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깊이 잠들어 있었고 불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서서히 냉기를 머금고 있는 동굴 속에서 서인경은 조용히 일어나 불가에 나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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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8화

동쪽 하늘에 떠오른 해는 설원의 고요함과 어둠을 깨뜨렸다.동굴 안에서 그들은 말없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서인경은 걱정으로 모두의 얼굴이 굳어있는 것을 보고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나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견식을 넓히러 가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시무룩해 하면 내가 어찌 마음 놓고 갈 수 있겠느냐?”봉한설은 여전히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왕비 마마, 제발 저도 데리고 가세요. 왕비 마마를 혼자 놔두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단 말입니다.”서인경은 고개를 저었다.“안 된다. 너는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꼬막이는 네가 맡거라. 나는 설장로를 믿을 수 없다. 네가 어떻게든 꼬막이를 설장로 손에서 빼앗아 연기준에게 데려다줘야 한다.”연기준은 어쨌든 그 아이의 친부였다. 그는 분명 아이에게 가장 좋은 길을 만들어줄 것이다.봉한설은 근심과 슬픔이 뒤섞인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꼬막이는 서인경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에 그녀 또한 서인경이 아무 걱정 없이 떠날 수 있게 해야 했다.“좋습니다. 한데 상황이 악화되면 바로 빠져나와야 합니다. 꼬막이도 왕비 마마 없이는 안 될 테니까요.”서인경은 부드럽게 웃으며 봉한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걱정 말거라. 나도 목숨이 아까운 줄은 안다. 밖에는 아직 나를 기다리는 이들이 많으니 함부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그 말을 마치고 서인경은 한동안 침묵해 있던 조빈과 호롱이를 바라보았다.“너희도 이곳을 잘 지키거라.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이 설원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기억하거라. 우리 조상들처럼 차라리 이곳을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도 이곳의 힘을 빌려 세상을 뒤흔들 게 해서는 안 된다.”조빈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명 받들겠습니다. 왕비 마마, 안심하십시오. 저희는 목숨 걸고 이곳을 지키겠습니다.”호롱이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조빈의 말에 맞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은 그렇게 조용히 아침을 마쳤다.잠시 후, 조빈이 앞장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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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9화

순간, 그녀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이 일의 이면에는 분명 단순하지 않은 무언가가 숨어 있다고.서인경은 호롱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호롱이는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뒷다리를 굽히며 한쪽 앞발을 서인경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그의 발을 꼭 쥐었다.“정말 똑똑하구나.”그녀는 손을 맞잡은 채로 호롱이의 몸을 조심스레 살폈다.예전에 “동물의 세계”를 볼 때, 내레이션에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수컷 호랑이는 머리가 더 크고 꼬리가 더 길다고. 하지만 지금은 비교 대상이 없으니 서인경은 호랑이의 암수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만수림에 들어가 다른 호랑이를 만나면 꼭 비교해 봐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호롱이는 서인경이 작별을 고한다는 걸 알아차린 듯 커다란 눈동자에 걱정을 가득 담았다. 그녀는 호롱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걱정 말거라. 내가 먼저 네 집에 가볼 것이다. 지금 네 땅이 어떤 모습인지 보고 오마.”호롱이는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한 시진쯤 걸어 한 봉우리의 설산을 에돌았을 때 서인경은 멀리서 보이는 광경에 숨이 멎었다. 눈앞에는 한없이 붉게 물든 숲이 펼쳐져 있었다.홍주림(红殊林).낯설지 않은 식물과 익숙한 장면.서인경은 이 풍경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조빈은 붉은빛으로 물든 숲을 가리키며 설명했다.“저곳이 바로 만수림의 입구입니다. 홍주는 일불락 사람들이 자주 쓰던 진법이지요. 저는 어릴 때 장난삼아 저곳에 두 번 들어갔었는데 매번 아버지에게 귀가 잡혀 끌려 나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곧 누군가가 이곳에 찾아올 테니 저에게 설산을 잘 지켜야 한다고 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분은 왕비 마마셨나 봅니다.”그러나 조빈의 아버지는 이미 스무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그가 가리키는 사람은 서인경이 아닌 그녀의 어머니였을 터. 다만 그도 서인경의 어머니가 왜 이곳에 오지 못했는지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홍주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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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0화

연기준은 창가에 서서 남쪽 전선에서 막 도착한 보고를 듣고 있었다.연풍이 조용히 그에게 보고했다.“숙귀비께서는 마지막으로 여국의 수도를 함락시키던 전투에서 적군의 매복에 걸려 불길 속에서 전사하셨다고 하옵니다. 기습을 받아 전신이 불에 탔기에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마지막까지 군사를 이끌고 싸운 이는 맹 장군이었다 하옵니다.”연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발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요 며칠, 막북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과 대지는 끝없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세상 전체가 한 장의 설경처럼 잠겨 있었다. 그 차디찬 풍경 속에서 그는 문득 생각했다.지금 설산 어딘가에 갇혀 있을 그녀는… 과연 무사할까?한동안 침묵하던 연기준은 낮게 물었다.“밖에서는 이 일에 대해 뭐라고들 하느냐?”연풍이 답했다.“모두 서 노장군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숙귀비의 죽음이 아버지의 죄를 씻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었는지를 알고 싶어 하옵니다.”연기준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허! 폐하께서도 지금 서 가의 죄명을 어떻게 정할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같은 전장을 밟았던 자로서 연풍은 그의 말속에 담긴 냉혹한 체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피와 살로 싸운 장수들이 결국 황권의 의심과 권세의 계산 속에서 쓰러져야 하는 그 무력함.숙귀비의 죽음에 대해서도, 서가군을 향한 황제의 계산에 대해서도 연기준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황제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머지않아 서 가는 진국의 조정에서 사라질 운명이었다.그는 다시 물었다.“대황자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연풍이 답했다.“이미 수도에 도착했사옵니다. 오던 길에 누군가 그에게 접근했는데 조사해 보니 그 자는 야랑국의 사람이었사옵니다.”연기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예정임... 역시 그놈이었군.”연기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능지국에서 자신을 막았던 그 가면 쓴 남자가 바로 예정임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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