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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501 - Chapter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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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1화

이번 일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은 같았고 막수한은 여전히 단무진에 대한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그자가 그동안 한설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면 혹시 왕비 마마의 정체가…”막수한이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자 연기준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럴 리 없습니다. 단무진은 그저 한설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본왕의 은혜를 갚기 위해 왕비 에게 죽도록 충성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만약 그녀의 진짜 신분을 알았다면 진작에 자신의 딸이라며 찾으러 왔을 테지요.”서인경의 신분을 알게 된다면 어느 권력자나 결코 그녀를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막수한은 입꼬리를 비웃듯 올렸다.“이안이 저승에서 이 꼴을 본다면 자신이 그때 그런 자를 택했던 걸 후회하지 않겠습니까?”봉이안이 후회할지 말지는 연기준도 알 수 없었다.그는 예전에 서인경에게 딸을 하나 갖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훗날 누군가 단무진처럼 자신의 딸을 속여 데려간다면 그는 그 남자를 갈기갈기 찢어 개 밥으로 던져버릴 것이다.한편, 눈 덮인 절벽 아래에서는 산바람이 휘몰아쳤다. 산 위보다도 더 매서운 추위였다. 메마르고 날카로운 냉기와 칼날 같은 바람이 얼굴을 아프게 베어내는 것 같았다. 두터운 눈밭 한가운데 두 사람의 형체가 찍힌 커다란 구덩이 두 개가 파여 있었다.서인경이 눈을 뜬 순간 새하얀 빛이 눈앞을 뒤덮었고 눈부신 광채에 그녀는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서인경이 조금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왕비 마마! 왕비 마마, 드디어 깨어나셨군요!”서인경은 천천히 눈을 뜨고 빛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점점 눈앞의 풍경이 또렷해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익숙한 얼굴이었다.봉한설이었다.다만 지금 그 맑은 얼굴엔 붉은 동상 자국이 퍼져 있었다. 곳곳에 얼음이 갈라진 듯한 상처가 번져, 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서인경은 숨을 고르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러자 봉한설이 얼른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했다. 그제야 서인경은 한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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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2화

“한설!”서인경이 급히 몸을 낮추어 그녀를 살폈다.“왜 그러는 것이냐?”봉한설은 두 손으로 눈을 감싸 쥐고 신음했다.“아파! 아파요! 왕비 마마, 눈이 너무 아픕니다!”서인경이 한설의 손을 떼어보자 그녀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부어 있었고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봉한설이 본능적으로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려 하자 서인경이 재빨리 그 손을 붙잡았다.“움직이지 말거라. 이건 아마 설맹(雪盲: 눈이 많이 쌓인 곳에서, 눈에 반사된 햇빛의 자외선이 눈을 자극하여 일어나는 염증)일 것이다. 눈 속에 너무 오래 있어서 반사된 자외선에 눈이 손상된 것이지.”그 말을 듣자 봉한설은 더 불안해하며 소리쳤다.“왕비 마마, 저 이제 평생 앞을 못 보는 건 아니겠지요?”서인경은 서둘러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괜찮다. 걱정 말거라. 설맹은 일시적인 실명일 뿐이다. 며칠만 지나면 다시 앞을 보게 될 테니 일단 동굴로 들어가서 쉬자꾸나.”그제야 봉한설은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고 서인경의 부축을 받으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봉한설은 일시적으로 눈먼 환자가 되었기에 불을 피우는 일은 당연히 서인경이 맡아야 했다. 마찰로 불을 내는 일은 그녀 인생 처음이었다.봉한설의 말에 따라 몇 번이고 시도하다가 손바닥이 벗겨져 피가 배어 나올 즈음에서야 겨우 한 줄기 불씨가 튀었다. 서인경은 그 귀한 불씨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옷자락을 찢었다. 불씨가 천 조각에 닿자 순식간에 불길이 일었다.불이 안정적으로 치솟자 서인경은 깨끗한 눈을 한 줌 떠다가 불 위에 올린 후 눈을 녹였다. 그 물로 봉한설의 눈을 씻겨주고는 옷자락 천으로 그녀가 눈을 뜨지 못하게 덮어 주었다. 모든 일을 마친 뒤에야 서인경은 자리에 앉아 자신과 봉한설의 동상 자국을 살펴보았다.“보아하니 우리는 하루 넘게 기절한 것 같구나. 하룻밤 만에 이렇게 심하게 어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서인경이 그렇게 말하자 봉한설은 눈을 감은 채 다시 성질을 냈다. 그녀의 입에서 쏟아지는 욕설은 설장로의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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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3화

서인경은 이렇게 매서운 한풍이 몰아치는 절벽 아래에서 오아시스를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천이었다. 약왕곡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했지만 물속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는 어딘가 달랐다. 광물질이나 약초 성분이 일치하지 않았고 눈앞에 있는 온천은 외상의 회복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것 같았다.온천 주변은 다른 곳보다 훨씬 따뜻했고 그 한가운데는 겨울대추나무 한 그루가 꼿꼿이 서 있었다. 그 나무는 작았기에 서인경이 서 있기만 해도 손이 닿을 정도였다. 다만, 누군가 이미 따간 것인지 아니면 본디 결실이 적은 것인지 온 나무를 다 합쳐도 열매는 고작 열몇 개 남짓이었다.서인경은 너무 배가 고팠기에 그중 하나를 따서 옷자락에 몇 번 문지른 뒤 그대로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하고 달달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그 열매는 순수한 자연의 단맛이라 독이 없고 몸에 해롭지도 않았다.서인경은 그제야 안심이 되어 한 알을 다 먹고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나머지 열매들을 잇달아 따냈다. 치맛자락을 펴서 세어보니 모두 열한 알.배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허기를 달래기엔 충분했다.막 돌아서려던 찰나 서인경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그녀 앞을 뒤덮더니 순식간에 빛을 삼켜버렸다. 그 모습에 서인경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 같았다.그녀의 시선 끝에는 다섯 층 높이의 괴물 같은 존재가 서 있었다. 두 눈은 거대한 등불처럼 번쩍였고 깜박임 없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서인경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은 힘이 풀려버렸고 품에 안고 있던 붉은 대추들이 연이어 굴러떨어졌다. 그중 하나가 괴물의 발끝까지 굴러가자 길이 한 자쯤 되는 발이 거세게 그것을 짓밟았다.대추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서인경은 다시 한번 온몸을 떨었다. 자신이 마치 새끼 병아리라도 된 것 같았고 지금 당장 괴물에게 집혀 휘둘릴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두 손을 모아 약하게 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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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4화

“이 온천은 지하수와 연결되어 있다. 가서 그 아래에 사는 심해어 한 마리를 잡아 오거라. 그러면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해주마.”서인경은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온천 쪽을 바라보았다. 겉보기엔 잔잔하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뿐, 그 아래가 지하수와 통한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서인경이 잠시 머뭇거리자 그 거대한 존재는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갈 것이냐? 말 것이냐?”등불처럼 번쩍이던 두 눈이 더욱 환하게 빛났다.서인경은 만약 자신이 그 괴물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 한 길이나 되는 발에 밟혀 즉시 진흙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어쨌든 잘못은 자신에게 있었으니까.서인경은 침을 꿀꺽 삼키고 손가락 하나를 들어 다시 확인했다.“정말 제가 그 심해어 한 마리만 잡아오면 놓아주실 거니까?”등불 같은 눈 속의 불길이 약간 가라앉았다.“나는 내가 뱉은 말은 지킨다. 꼬맹이 하나 속여서 뭐 하겠느냐!”서인경은 조금 억울했지만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꼬맹이면 뭐 어떠랴? 키로 따지면 그녀는 확실히 애송이에 불과했다.다행히도 21세기의 서인경은 수영을 조금 배웠었다.그 기술을 이럴 때 써먹지 언제 써먹겠는가?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온천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괴물이 말한 대로 이 온천에는 뭔가 비밀이 있었다. 발을 넣어보았으나 바닥이 닿지 않았다.서인경은 한 손으로 가장자리를 잡고 조심스레 몸을 낮추며 발끝으로 바닥을 찾아보았다. 안정감을 느껴야 손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 온천은 끝이 없는 것인지 물이 벌써 가슴까지 차올랐는데도 여전히 바닥에 닿지 않았다.그녀가 더듬거리며 내려가자 괴물은 인내심을 잃은 듯했다. 보기에도 답답했는지 그녀가 준비할 틈도 주지 않고 거대한 손으로 서인경의 머리를 강하게 눌렀다.“푸억—!”예상치 못한 행동에 그녀는 한 모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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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5화

전체 과정은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마치 뼛속 깊이 새겨진 본능처럼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서인경은 자신이 어떻게 해냈는지 알지 몰랐다. 자물쇠가 풀리는 걸 보고서야 그녀는 잠시 자신의 몸놀림에 의문을 품었다.물속에서 그렇게 오래 숨을 참을 수 있다는 것도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마치 자신 안의 알 수 없는 기능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듯했다.막북.이 땅은 그녀에게 너무도 몽환적이고 불가사의한 곳이었다. 그녀가 생각을 이어가기 전에 안쪽에서 철창의 문이 밀리더니 한 마리의 짐승이 뛰쳐나왔다. 그것은 서인경의 팔을 낚아채고는 엄청난 속도로 물 위를 향해 끌어올렸다. 그 속도는 서인경이 혼자 헤엄칠 때보다 수십 배는 더 빨랐다.그녀는 확신했다. 이 짐승은 분명 누군가에게 당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몸놀림을 가진 존재를 어떻게 물속에 가둘 수 있었겠는가?잠시 후 점점 시야가 밝아지고 가슴을 짓누르던 압박도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의 눈앞이 확 트이더니 그 둘은 함께 물 위로 튀어 올랐다.새찬 공기가 얼굴을 스쳤고 서인경은 숨을 몰아쉬며 물가로 몸을 던졌다.“컥, 컥, 컥!”그녀는 한참을 기침하고 나서야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고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그녀는 협곡 한가운데 누워 있었다. 등 뒤로는 산이 우뚝 서있었고 앞으로는 강물이 흘렀으며 물살이 그녀의 발끝을 부드럽게 스쳤다.그제야 서인경은 짐승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 이마에 옅게 새겨진 ‘왕’ 자를 보고 그것이 호랑이임을 알아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독히 말라빠진 생기 잃은 호랑이였다.그 거대한 몸은 축 늘어져 있었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땅에 쓰러져 버렸다.지금의 모습은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라 그저 혹독한 학대 끝에 살아남은 노인 같았다. 너무 오랫동안 물속에 갇혀 있었던 탓일까? 몸의 털은 거의 다 빠져 드러난 갈비뼈가 선명하게 솟아 있었다.서인경은 그것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이런 방식으로 한 마리 짐승을 학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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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6화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냥 먹을 것 좀 구해올 생각이다. 체력을 회복해야 여기서 나갈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이번에 호랑이는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서인경은 그제야 안심하고 자리를 뜰 수 있었다. 그녀는 해변을 한 바퀴 돌다가 한 바위틈 속에서 작은 웅덩이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안에는 여러 생물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물고기, 새우, 게, 굴까지.서인경은 보물을 찾은 듯한 기분에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그물 하나를 구해 살아 있는 것들을 한가득 건져 올렸다. 다시 돌아왔을 때, 호랑이는 여전히 아까 그 자리에서 서인경이 사라진 방향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돌아온 걸 보자 비로소 호랑이의 눈빛이 생기를 되찾았다.서인경은 잡은 것들을 호랑이 앞에 던져 놓으며 말했다.“산속에서 사는 네가 이런 걸 좋아하진 않겠지만 지금은 달리 먹을 게 없으니 이것으로 허기를 달래자꾸나. 기운을 얻어야 길도 찾고 다른 먹을 것도 구할 수 있지 않겠느냐?”호랑이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서 먹기 시작했다.호랑이는 날것을 먹을 수 있었지만 서인경은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몰래 몇 마리의 생선을 약왕곡 안으로 던져 넣고 안에서 불을 피워 구워 먹기로 했다.그녀는 이번에 살아서 나간다면 꼭 약왕곡 안에 먹을거리 저장소라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닭이나 오리, 물고기를 길러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다음에 또 이런 상황을 맞는다면 겨우 대추 열두 알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녀는 생각만 해도 억울했다.호랑이가 음식을 먹는 동안 서인경의 의식은 약왕곡으로 들어가 빠르게 생선을 구워냈다. 그녀는 허겁지겁 먹어치웠고 한 접시를 다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온몸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약왕곡에서 돌아왔을 때, 호랑이도 이미 배를 채운 뒤였다. 호랑이는 그녀의 곁을 빙빙 돌며 걷고 있었는데 털이 하나도 없는 모습은 다소 섬뜩했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맑고 반짝였으며 오히려 사랑스러워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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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7화

다행히 설맹증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봉한설이 한참 더 쉬고 나자 눈앞의 빛이 점차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녀는 밖의 하늘을 볼 수 있었다.해가 지려했지만 서인경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봉한설은 걱정이 밀려와 결국 직접 나가서 찾아보기로 했다. 온천 근처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거대한 괴물이 온천가에 쪼그리고 앉아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았다.“아니겠지, 아니겠지… 설마 그분까지 호롱님을 구하지 못한 건 아니겠지? 그분은 그렇게 약하지 않을 텐데... 설마 물에 빠져 죽은 것일까? 그렇다면 난 대역죄인이 될 텐데... 지금이라도 죽어서 사죄해야 하나…?”봉한설은 그 중얼거림을 똑똑히 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왕비 마마를 밀어버린 것이냐?”그 거대한 존재는 고개를 홱 돌리며 등불 같은 두 눈을 번쩍였다.“그대는 누구십니까?”봉한설은 그대로 달려가 괴물을 밀쳐냈다. 하지만 괴물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녀가 튕겨 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봉한설은 치를 떨며 반쯤 몸을 일으켜 괴물을 노려보았다.“내 성은 봉이다. 아까 네가 밀어 떨어뜨린 그분과 함께 온 사람이지.”봉이라는 성을 듣자 괴물의 몸이 순간 굳었다. 그러고는 이내 적의를 거두며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당… 당… 당신은, 혹시… 어족입니까?”봉한설은 일어서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왕비 마마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너의 진신(真身: 진실한 신체) 을 멸하여 영원히 윤회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괴물은 덜덜 떨었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았기에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봉한설은 지금 따질 겨를도 없었다. 그녀가 곧장 물속으로 뛰어들려는 찰나 괴물이 한 손으로 그녀를 휙 쳐냈다.“어족은 물에 약합니다. 그러니 들어가면 죽음뿐이에요.”봉한설은 바닥에 엎어지며 분노와 초조함으로 이를 악물었다.“왕비 마마를 혼자 물속에 두는 것보단 차라리 그게 낫지! ! 너는 몰랐겠지만 그분은 지난 이십 해 동안 진국에서 살았다. 그분은 수영도 할 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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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8화

괴물은 한 치의 숨김도 없이 모두 털어놓았다.“저는 여족 사람입니다. 예전에 일불락이 멸족 위기에 처했을 때, 제 증조할아버지께서 목숨을 걸고 회임하신 증조할머니를 밖으로 피신시켰지요. 그 뒤 증조할머니께서는 제 할아버지를 낳고 할아버지께서는 또 제 아버지와 고모를 낳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또 저를…”봉한설은 질렸다는 듯 손을 들어 제지했다.“그만! 누가 네 집 족보를 듣고 싶다 했느냐? 네 아버지께서 너를 낳았다는 건 나도 안다. 설마 네가 아버지를 낳았겠느냐?”괴물은 말문이 막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위세 당당하던 그가 지금은 봉한설에게 꾸중 듣는 손자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그는 속으로 감탄했다. 예전에 증조할머니께 들은 적이 있었다. 어족은 여족에게 천적 같은 존재라고. 과연, 실제로 그녀를 마주하자 괴물은 꼼짝없이 제압당해 버렸다.봉한설은 귀찮다는 듯 말을 이었다.“마지막으로 묻겠다. 왕비 마마께서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왜 물에 들어가게 한 것이냐? 도대체 무슨 이유로 물속에 밀어 넣은 것이냐 말이다.”괴물은 솔직히 대답했다.“호롱님을 구하려고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분만이 호롱님을 구할 수 있단 말입니다.”봉한설이 눈썹을 찡그렸다.“호롱님? 그게 무엇이냐? 짐승 이름인 것이냐?”괴물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호롱님은 호랑이입니다. 저희 설산의 진산보물(镇山之宝) 이지요. 그 옛날 일불락이 함락된 것도 인간들이 호롱님을 유인해 호수 밑에 잡아두었기 때문입니다. 만수(万兽)의 왕이 사라지니 짐승들은 혼란에 빠졌고 그 틈을 인간들이 파고든 것이지요.”그 말은 사실이었다. 봉한설은 어머니의 기록을 통해 그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일불락은 사방이 설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인간이 그곳을 침입하려면 살인적인 한기를 뚫고 들어와야 할 뿐만 아니라 먼저 늑대 무리와 호랑이 무리의 방어선을 통과해야 했다. 수많은 짐승들 중에서도 이 두 종족이 가장 사나웠기에 설산을 지키는 첫 번째 방벽이 되어주었다.그들 중에서도 왕은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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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9화

그 괴물은 감히 성을 내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그분께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도 함께 묻히겠습니다.”그 말에 봉한설은 또다시 주먹질과 발길질을 퍼부었다.“닥치거라! 죽는 건 너 혼자 하거라! 네 가족들과 함께 저세상으로 가란 말이다.”괴물은 얻어맞으면서도 반항 한번 못하고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제 가족은 이미 이 세상에 없습니다! 다 죽었단 말입니다!”그때, 봉한설의 눈에 바닥에 굴러다니던 대추가 들어왔다. 그걸 보는 순간 다시 화가 치민 그녀는 대추를 집어 들고 괴물에게 던졌다.“고작 몇 알의 썩은 대추 때문에 왕비 마마를 물에 빠뜨린 것이냐? 그냥 너를 죽이는 게 낫겠다! 내 너를 죽여버릴 것이다!”괴물은 그녀의 공격을 피하며 변명했다.“그것은 썩은 대추가 아닙니다. 진짜 천년선조수에서 난 대추 열매란 말입니다!”오히려 그 말이 봉한설의 화를 더 돋웠다. 그녀는 대추를 괴물에게 더 세게 던지며 외쳤다.“천년선조수는 개뿔! 몇백 년 전에 이 나무는 왕비 마마의 댁에서 제일 값도 못 치는 물건이었단 말이다. 아직도 감히 왕비 마마를 속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냐?”서인경은 그 광경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괴물이 이렇게 허약할 줄 알았다면 굳이 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바로 그때, 뒤쪽에서 호롱이가 크게 울부짖었다. 앞쪽에 있던 봉한설은 손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뭇가지 아래 서 있는 서인경을 발견하자 그녀의 눈이 반짝이며 기쁨이 번졌다. 봉한설은 다급히 그녀에게 달려가며 외쳤다.“왕비 마마! 드디어 돌아오셨군요!”하지만 서인경은 그녀가 한 발자국 남짓 다가오자 손을 들어 막았다.“가까이 오지 말거라. 내 몸은 이미 젖었다.”하루 종일 물에 젖어 있었지만 춥다기보다는 온몸이 싸늘했다. 그제야 봉한설도 그녀의 옷이 흠뻑 젖은 걸 보고는 급히 손을 잡아끌었다.“불이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어서 들어가 몸 좀 녹이셔야지요. 제가 옷도 말려드리겠습니다.”서인경은 끌려가면서 뒤를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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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0화

그들은 모두 동굴 안으로 들어가 서인경 곁에 모일 수 있는데 왜 자기만 큰 덩치 때문에 눈 한 쌍조차 들이밀 수 없단 말인가? 그는 버티고 서서 두 눈을 동굴 입구에 들이민 덕에 바깥의 햇빛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그러자 안쪽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제 서인경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너는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큰 것이냐? 조금이라도 작아질 수는 없는 것이냐?”거대한 사내가 서운한 얼굴로 말했다.“저희 증조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를 낳기 전 피난길에서 독에 중독되셨습니다. 그 뒤로 저희 할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독을 품고 있었지요. 그래서 몸집이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합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제 고모와 아버지를 낳았는데 아버지는 대부분 지금 제 모습처럼 큰 형상을 유지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다 드물게 잠시 정상 사람 크기로 변할 때도 있었지요. 한데 제 차례에 와서는 독이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저는 한 번도 작아진 적이 없어요. 언제나 이 모양 그대로였습니다.”마지막에 그 거대한 괴물의 시선을 서인경에게로 옮겨졌다.“존귀하신 진국의 왕비 마마, 의술을 익히셨다 들었습니다. 제 병을 한번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서인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고서에서 그런 독에 대한 기록을 본 적이 있었다. 사람의 체형에 영향을 주고 모태로 유전되며 대대로 갈수록 심해지는 독이었다. 그리고 외형상의 발현은 남자에게만 전해지고 여자에겐 나타나지 않는다.즉, 거대한 괴물의 집안은 모두 그 독을 품고 있지만 남자들은 외형에서 드러나고 여자들은 티가 나지 않아 멀쩡해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이 자식을 낳게 된다면 그 독은 여전히 아이에게 유전될 터.서인경은 현실에서 이런 독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입구로 다가가 괴물의 맥을 짚어보았다.독의 기운을 확인한 뒤 그녀는 자신의 신식을 약왕곡으로 들여보내 곧바로 해독약을 배합했다. 그녀는 몇 가지 약초를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지금은 약환을 만들 시간이 없다. 그냥 생으로 섞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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