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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521 - Chapter 530

726 Chapters

제521화

그 바위처럼 보이던 것은 뜻밖에도 한 마리 거북이었다.이런 곳에 거북이가 있다니!서인경은 거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마주 보았다.“미안하구나.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바위인 줄 알았거든. 괜히 깨워서 미안하다.”거북이는 이제 막 잠에서 깬 듯 느릿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서인경을 본 순간 한 번 멈칫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목을 쭉 펴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서인경은 그가 할 말이 있는 것을 느꼈지만 수어를 알지 못하니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래도 설명은 해야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무례를 범하려던 건 아니다. 너희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 이곳에 들어온 것이다. 혹시 어디서 수어를 배울 수 있는지 아느냐? 부탁인데 나한테 알려주면 안 되겠느냐?”어쩔 수 없었다. 서인경은 이곳에 들어온 지 한참 지났지만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녀가 마주친 건 산토끼와 꿩, 그리고 이 큰 거북이가 전부였다.서인경은 눈앞에 있는 것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거북이는 두어 순간 멈추더니 게으르게 눈을 감고는 고개를 껍질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그녀는 이 거북이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그저 서인경이 수어를 할 줄 모르기에 거북이는 그녀에게 시간조차 쓰기 싫어하는 듯했다.서인경은 한숨을 내쉬고 막대기로 만든 지팡이에 몸을 맡겨 다시 길을 걸었다. 그녀가 자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껍질 속으로 숨었던 거북이가 다시 느릿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거북이는 서인경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사람의 언어로 낮게 소리를 냈다.“백 년이 넘는 세월 끝에 드디어 돌아왔구나! 다만 이 길에는 흉한 일이 많다. 이뤄낼 수 있다면 큰 성취요, 실패한다면 너도 네 조상들을 따르게 되리라.”그 목소리는 노인의 것이었고 세월의 풍상을 머금은 낮고 깊은 울림이었다. 아쉽게도 서인경은 이미 멀리 가버려 그 말을 듣지 못했다.그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하늘에서 흩날리던 눈발은 땅에 닿자마자 녹아내려 만수림에는 눈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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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2화

독초 구역을 빠져나오자 산기슭 맞은편에 한 마리 늙은 늑대가 땅에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늑대는 온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새끼 늑대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새끼 늑대의 회색 털은 입가에서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누가 봐도 오래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늙은 늑대는 숨이 거의 끊어질 듯한 새끼를 품에 안은 채 낮게 울부짖었다.늑대는 원래 경계심이 강한 짐승인데 지금은 서인경이 다가오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서인경은 생각했다. 슬픔과 사랑은 이 세상 모든 생명에게 전부 통하는 감정이라고. 처음엔 무섭게만 느껴졌던 이 숲도 이제는 조금 다른 빛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훗날, 서인경은 오늘 이 순간의 생각을 후회하게 된다.지금 눈앞의 처연하고 애달픈 풍경을 바라보며 서인경은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조금은 비열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땅에서 은혜로 신뢰를 살 수 있다면, 그건 살아남기 위한 현명한 거래라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비열하면 뭐 어때? 일단 살아남아야지.’서인경은 천천히 늙은 늑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발아래 나뭇가지를 밟아 딱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늙은 늑대는 번개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은 본능적인 경계와 살기로 번뜩였다. 서인경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걸음을 멈추며 숨을 삼켰다.“괘, 괜찮다… 오해하지 말거라. 난 해치러 온 것이 아니다. 네 아이를 좀 볼 수 있겠느냐? 혹시 내가…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늙은 늑대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서인경을 노려보았다. 늑대는 그녀가 하는 얘기를 하나도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서인경은 몇 번이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두 생을 살아오며 이렇게 가까이서 맹수를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 둘 사이의 거리는 채 다섯 걸음도 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는 어떤 장벽도, 무기도, 보호막도 없었다. 늑대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를 찢어 삼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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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3화

서인경 역시 긴장으로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란하게 뛰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늑대 무리와 우정을 맺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였다. 그녀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숨을 죽인 채 새끼 늑대의 상태를 살피던 서인경은 옆에 널린 독초 무더기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중 한 포기의 잎이 반쯤 뜯겨져 있었다. 새끼 늑대는 그걸 잘못 먹은 게 분명했다.원인을 알아낸 서인경은 신식을 써서 약왕곡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약초밭으로 가서 해독에 쓸 수 있는 몇 가지 약초를 재빨리 뽑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혹시 모를 오해를 피하기 위해 늑대를 향해 미리 조심스럽게 설명했다.“네 새끼는 이 약초를 먹으면 살 수 있다. 다만 지금은 입을 벌리지도 씹지도 못하니 내가 직접 해독초를 씹어서 약즙을 만들어 먹일 생각이다. 괜찮겠느냐?”늙은 늑대는 망설였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그저 서인경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허락을 얻어낸 서인경은 즉시 움직였다. 다행히 새끼 늑대는 미약하게나마 반응했고 서인경은 무사히 약을 다 먹일 수 있었다. 그녀는 곧 약왕곡에서 온천수를 조금 꺼내와 새끼 늑대의 입가에 흘려주었다.늑대는 서인경이 허공에서 물을 꺼내오는 것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시선에는 경계심과 의아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천천히 설명했다.“내겐 조금 특별한 능력이 있다. 이건 그저 평범한 물이 아니라 일불락 유적의 중심부에 있는 온천수에서 가져온 것이다. 몸을 회복시키는 데 아주 좋지. 이 물을 마시면 네 새끼는 곧 깨어날 것이다.”일불락의 유적지.그 말을 듣는 순간 늙은 늑대의 눈빛이 깊게 흔들렸다. 그는 서인경을 바라보다 그녀의 목에 걸린 혈적자를 발견했다. 그 순간, 늑대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떨렸다.백 년이 넘은 지금, 이 물건이 다시 세상에 나타나다니.서인경은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물을 약간 더 떠서 새끼 늑대의 몸을 닦았다.“앞으로 네 동족들에게 전해 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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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4화

혈적자는 서인경의 행동을 강하게 반대하는 듯했지만 그녀의 태도는 단호했다.“이런 것들은 사람에게 해만 끼칠 뿐, 단 하나의 이로움도 없다. 한 번이라도 악한 자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세상은 파멸할 수도 있단 말이다. 그러니 절대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나도 이것들을 약왕곡에 들여 넣지 않을 것이다. 또다시 탐욕의 표적이 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서인경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횃불을 독초밭에 던졌다.횃불이 떨어지는 순간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번쩍 타올랐다. 하늘로 치솟은 불꽃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세상 사람들이 보물이라 떠받드는 그 독초들은단 한 줌의 망설임도 없이 불길 아래에서 재로 변해갔다. 공기 속에는 식물이 타는 그을음 냄새와 함께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섬뜩한, 고기가 타는 냄새가 섞여들었다.서인경이 불길 너머를 바라보자 불탄 자리에는 이미 새까맣게 그을린 짐승의 사체들이 드러나 있었다. 이 독초들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갔는지,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더욱 확신했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혈적자는 처음에 뜨겁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눈부신 빛을 내뿜었다. 하지만 서인경은 눈을 찌르는 그 빛에도 흔들리지 않고 두 눈을 가려가며 독초들을 불태웠다.이 순간, 서인경은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이 독초들이 세상 밖으로 흘러나간다면 세상이 어떤 꼴이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자가 이런 끔찍한 독초들을 이곳에 심은 것일까? 그리고 그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심지어 독의 제왕이라 불리던 도팔천조차 자신의 흑수암에 독초 하나 심어 두지 않았었다. 그런 그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었다니... 그 생각만으로도 서인경은 등골이 서늘해졌다.한편, 뒤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하고 있던 늙은 늑대의 검은 눈동자는 지금 이 순간 불빛을 받아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서인경이 생각에 잠긴 사이, 앞의 독초들은 이미 재로 변해버렸다. 혈적자는 한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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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5화

서인경은 낮이 저물고 밤이 찾아올 때까지 두 늑대를 따라 굽이진 산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길이 얼마나 꼬불꼬불한지 그녀는 몇 번이고 방향을 잃을 것만 같았다. 서인경은 여러 번 멈춰 서서 늑대에게 물었다.“도대체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그러나 늑대는 말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옷자락을 이로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서인경은 이 늑대가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란 걸 알기에 따라왔지만 이쯤 되니 인신매매범에게 끌려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길 중간에 몇 번이나 쉬어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마침내, 두 늑대는 그녀를 이끌고 한 줄기 물이 떨어지는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물줄기가 흐르는 동굴 입구는 사방이 뚫려 있었기에 찬 바람을 막아줄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서인경은 동굴 아래에 서서 달빛을 빌려 지형을 살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둥근 달과 수많은 별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그녀는 이곳의 지세가 굉장히 높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마 두 마리 늑대는 자신을 정상까지 데려왔을 것이다.그녀가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옷자락이 또 한 번 당겨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늙은 늑대가 그녀의 옷을 물고 안쪽으로 가자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굴 안쪽은 달빛이 닿지 않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그렇다고 해서 늑대들에게 불을 피워달라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나뭇가지와 마른 나무토막을 찾아내 익숙한 손놀림으로 마찰을 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불씨가 튀어 올랐다. 이 며칠 사이, 서인경은 불 피우는 법을 거의 마스터해버릴 정도였다.불이 피어나자 그녀는 두 늑대와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서인경은 들어서자마자 불을 더 모아 횃불을 만들어 동굴 안을 밝혔다.이곳이 두 늑대의 보금자리인 줄 알고 무심히 고개를 들던 서인경은 그 안의 광경에 숨이 멎을 뻔했다.너무나 낯익은 장면이었다.순간, 그녀는 마치 흑수암에 들어섰던 그날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약왕곡에서 보았던 그 동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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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6화

그 안에는 반지 하나가 고요히 놓여 있었다. 반지 위의 문양은 몸을 틀어 머리를 치켜든 용의 형상이었다. 그 모양새는 현대의 드라마에서 본, 조직 보스의 전용 물건과 별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 반지를 끼게 된다면 마치 전군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힘을 거머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서인경은 뭔가를 눈치채고 고개를 돌려 늙은 늑대에게 물었다.“이건, 일불락의 수장만이 가질 수 있는 신물인 것이냐?”늑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확신이 선 서인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상자를 다시 덮었다. 늑대는 그 모습을 보더니 즉시 흥분해 두 발로 바닥을 긁기 시작했다.“아직은 앞으로의 길을 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불락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지금은 그저 수어를 익히고 다시 절벽으로 돌아가 설장로에게 내 아들을 돌려받는 게 우선이다. 이 신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마.”늑대가 고개를 저으며 길게 울부짖었다. 그러나 서인경은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었다.그녀가 만수림에 들어온 것은 일불락의 짐을 짊어지기 위함이 아니었다. 일불락은 너무나 많은 역사의 영광과 수치를 품고 있었고 이 땅의 가장 깊은 기억이자 외세의 평화를 좌우하는 무게였다.서인경은 그만한 용기가 없었고 감히 그것을 이어받을 자신도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그저 남편과 아들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그래, 그녀의 남편.그녀는 지금 연기준이 그리웠다. 예전에는 죽을 힘을 다해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는데 이제는 죽을 힘을 다해 그에게 돌아가고 싶어졌다. 꼬막이의 친아버지이기도 한 그 사람은 결국 그녀 인생의 한 조각이 되어버렸다. 서인경이 끝내 반지를 가져가지 않자 늑대도 서서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늑대는 더 이상 그녀에게 억지로 권하지도 않았다.서인경은 이 일이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했기에 상자를 단단히 닫고는 다시 초상화 뒤편의 자리에 돌려놓았다.지금 그들은 긴 여정을 걸어와 모두 지쳐 있었다.마침 쉴 수 있는 동굴이 있으니 서인경은 깨끗한 자리를 골라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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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7화

서인경은 숙귀비가 죽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남경 전장에는 맹경운이 병력을 이끌고 지원을 나갔고 진방옥도 그녀의 편지를 받고 여국을 돕는 것을 포기했다. 여국은 변방 소국이라 애초에 위협거리가 되지 못했고 진방옥을 잃은 그들은 진국과 맞설 힘이 없었을 것이다.숙귀비는 여러 해 동안 군을 지휘하지 않았기에 연기준처럼 신속하게 병사를 쓰지 못하겠지만 여국 같은 전력 앞에서 그리 허망하게 목숨을 잃을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서인경은 백성들이 한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그녀의 영혼은 흐릿하게 떠돌아 능지국의 옛 궁궐 쪽으로 흘러갔다. 그때, 한 사람이 쇠사슬에 손발이 묶인 채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큰 눈이 쏟아지는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기에 그 모습은 너무나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 사람이 관서윤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를 보자 서인경은 커다란 불길 속에서 목숨이 위태로웠던 그날 밤의 일을 떠올렸다. 그 사건은 분명 관서윤과 연강헌이 함께 꾸민 음모였다. 그녀는 관서윤이 몹시 미웠다. 그날 밤의 사건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설장로에게 납치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 같은 절망에 내몰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진국이 크게 승리했는데 자신은 왜 이런 처지에 놓여야 하는지 서인경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자기 아들을 보는 것마저 허락 받아야 할 처지 아닌가?신경 쓸 틈도 없이 서인경의 영혼은 곧장 궁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때, 연기준은 부하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능지국은 국에서 성으로 격하되어 능지성이라 불리게 되었고 막북 변방의 관원이 인수해 이 기간 동안 대대적인 개혁을 벌여 진국의 법을 보급하고 있었다. 서인경은 연기준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아래에서는 대신들이 신중하게 그에게 보고하고 있었고 그는 창밖에서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보고를 듣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정신이 팔린 듯한 모양새였다. 대신들의 보고가 끝나자 연풍은 연기준을 일깨워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그는 대신들을 한 번 쓸어보고는 입을 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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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8화

연기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저녁 식사 준비할 때, 만나도록 하마.”“네.”연풍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의 말이 막 끝나려는 찰나, 바깥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왕야, 관서윤 장군께서 면담을 청하시옵니다!”연기준은 손에 들고 있던 접본을 덮었다.“들여보내거라.”잠시 뒤, 조금 전 눈길에서 본 그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다. 예전에는 막북을 지키던 위풍당당한 장군이었지만 지금은 죄인의 몸이었다. 죄수복을 입은 관서윤의 손과 발에는 쇠사슬이 묶여 있었기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그녀가 앞으로 다가왔지만 연기준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관서윤의 몸은 떨렸고 입술은 추위로 인해 퍼렇게 질려 있었다.“왕야께서 시킨 대로 이미 사흘 동안 거리에서 치욕을 당했습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연기준은 고개를 들어 벌레 보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만족하지 않는다. 본왕이 아직 그녀의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 그나마 네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다행으로 여기거라.”그 한마디가 관서윤의 마지막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사흘 동안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던 그녀가 그 순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무엇 때문입니까? 저희는 더 먼저 알던 사이였지 않습니까? 제가 왕야를 더 오래, 더 진심으로 좋아했단 말입니다. 한데 왜 저는 단 한 번도 봐주지 않는 것입니까? 그 서인경이 대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저를 이렇게 짓밟느냐 말입니다.”연기준은 요동치는 그녀의 감정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본왕이 널 지금껏 살려둔 건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네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데 넌 이제 쓸모가 없구나.”가볍게 던진 그 한마디가 관서윤의 모든 길을 단칼에 끊어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저는 공신의 자식입니다! 제 부모님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어요! 황제의 명이 없는데 감히 저를 죽이려 하다니요!”그러나 연기준의 눈에 비친 관서윤의 모습은 불길 속에서 죽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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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9화

서인경은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황제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후궁을 전장으로 내몰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자신의 아들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자가 연기준을 믿을 리 있겠는가? 황제는 그저 숙귀비가 여인이니 자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고 그녀를 손아귀에 쥐기 쉬운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서인경은 더 가까이 다가가 연기준과 환관이 무슨 말을 나누는지 듣고 싶었다.그러나 그때, 갑자기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기운이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그녀를 확 끌어당겼다. 서인경은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동굴 안이었고 연기준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그녀는 곁에 서 있는 늙은 늑대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방금 이 늑대는 앞발로 그녀를 쳐서 깨운 것이었다.아직도 숙귀비의 죽음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았기에 서인경의 가슴속에는 묘한 불안감이 일었다.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서 가는 이제 네 명밖에 남지 않았는데 숙귀비는 생사조차 알지 못하고 할아버지 행방은 묘연했으며 열다섯 째 황자는 궁궐에 갇혀 버렸다. 그리고 자신은 어떠한가? 설산에 갇혀 언제 빠져나갈지 알 수조차 없는 상황 아니던가. 서 가는 과연 언제 다시 모일 수 있는 것일까?서인경의 기분은 점점 가라앉았다. 늑대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 채 벽 쪽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서인경이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두 마리의 야생 꿩이 날개를 퍼덕이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늑대는 생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서인경은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다짐했다.‘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어.’서인경은 일어나 꿩을 들고 약왕곡의 샘물에 던져 깨끗이 씻어낸 뒤 불 위에 걸어 두었다. 늙은 늑대는 그녀의 익숙한 손놀림을 바라보다가 가까이 다가와 냄새를 한 번 맡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서인경은 아직도 수어를 배우지 못했기에 그가 무슨 뜻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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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0화

서인경은 횃불을 높이 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쪽은 길이 수십 미터쯤 되는 통로였다. 얼마 걷지 않아 그녀는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막힌 건가?서인경은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뻗어 벽을 밀어보았다. 무게가 꽤 나가는 단단한 돌벽이라 밀리지 않았다. 그녀는 횃불을 들어 사방을 비추다가 벽 한가운데 위쪽에 움푹 들어간 자국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손가락으로 그 자국의 윤곽을 더듬자 익숙한 모양이 그려졌다. 그녀는 문득 깨달은 듯, 목에 걸린 혈적자를 꺼냈다. 발끝으로 몸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그 자국 안에 혈적자를 맞춰 넣었다.놀랍게도 그 오목한 자국의 형태는 혈적자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혈적자가 닿는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돌벽이 흔들리더니 거대한 석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틈이 점점 넓어지자 안쪽에서는 차가운 습기가 밀려 나왔다. 바깥보다 온도가 훨씬 낮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희미한 소리까지 들렸다.서인경은 몸을 떨며 횃불을 더 높이 들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으면 걸을수록 물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그녀는 그것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울림과 메아리로 미루어 앞쪽에는 아주 넓은 공간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몇백 미터쯤 더 걸었을까. 저 앞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서인경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굴곡진 길의 끝에서 몸을 돌리자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숨이 멎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앞에는 높이가 수십 미터나 되는 거대한 동굴이 있었는데 공간은 텅 비어 고요했고 물방울은 천장 위에서 떨어져 벽 모퉁이의 작은 시내로 흘러들었다. 그 물길은 북쪽으로 흘러가며 벽 밑으로 스며들었는데 아마도 외부로 향하는 것 같았다. 양쪽 벽에는 꺼지지 않는 등잔 수십 개가 걸려 있었고 동굴의 정중앙에는 약왕곡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팔괘진이 있었다. 그 주위를 감싸듯 여덟 개의 팔괘 기둥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고 그 기세는 웅장하고 신성했다.각 기둥 아래에는 백발의 노인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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