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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1화

“여설아... 그 늙은 여인은 원래부터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 여자가 굳이 네 아이를 데려갔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느냐?”서인경은 그 말에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이건 길을 걷던 여자가 변태에게 희롱을 당했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 피해자를 손가락질 하는 꼴 아닌가? 왜 그 변태가 다른 여자도 아닌 그녀를 골라 희롱했는지 생각해 보라면서 말이다.서인경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진심으로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한 여인의 목소리였다.“오라버니, 이곳에는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보통 인물은 아닌 듯한데요.”“그게 뭐가 중요한 것이냐? 내쫓으면 그만이지! 우리의 수행을 방해하고 있지 않느냐?”“그놈의 수행! 백 년 넘게 수행했는데 이제 그만 좀 하십시오. 오라버니는 아니어도 저는 이미 질렸습니다. 예전처럼 밖에 나가서 먹고 마시고 놀면 얼마나 좋습니까? 고기 맛이 그리워 아주 죽을 지경입니다!”“여덟 째 누이, 그런 말 하지 말거라. 수행하는 사람은 고기 따위 입에 담으면 안 된다. 우린 채식을 해야 오래 산단 말이다.”“저는 오히려 여덟 째 누이 말이 맞다고 봅니다. 인생은 즐겨야지요. 며칠에 한 번씩 나가서 술 마시고 미녀들과 이야기 나누던 그 시절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지금처럼 싱거운 나날보단 훨씬 낫지요.”“허, 그 입 닥치거라! 네가 얘기하고 싶은 건 미녀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대화하는 것이겠지.”“아미타불! 죄를 지었습니다! 출가한 몸으로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하다니! 성조께서 노하시겠네!”“됐다, 이 대머리 중놈아. 너는 경전 좀 그만 읽거라. 너도 나가고 싶어 한다는 걸 다 안다.”“함부로 입에 담지 마십시오. 성조께서 들으시면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네가 입을 다문다고 모르는 줄 아느냐? 그래, 어디 한 번 계속 그렇게 모르는 척 시치미 떼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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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2화

“희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녀의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리면 되지 않겠느냐?”“내 보기엔 여설아가 그 아이를 데리고 간 것도 틀린 일은 아니다. 저런 어미 밑에서 자란다면 성조의 반이라도 따라 배울 수 있겠느냐?”서인경은 처음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따져 물었다.“그게 무슨 뜻입니까? 설장로께서 제 아이를 빼앗아 간 게 옳은 일이라도 된단 말입니까?”잠시 후 낮고 노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물론 이유가 있지. 일불락이 멸망한 건 그때의 여수장이 감정에 휘둘려 간신들에게 이용당했기 때문이다. 그 후 우리는 네 어미가 자라기를 기다렸지. 희망이 생긴 줄 알고 말이다. 한데 네 어미 역시 다른 나라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일불락 부흥의 짐을 지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너도 마찬가지지 않느냐? 우린 또 한 번 기대했건만 결국에는 네 사사로운 일 때문에 찾아왔다는 것이 아니더냐! 여인이 큰일을 이루리라 기대한 건 역시 망상에 불과했구나. 그때 성조께서 수장의 자리를 딸에게 물려주지 않고 재능 있는 사내에게 넘겼더라면 일불락이 어찌 멸망할 수 있었겠느냐! 성조의 한 세대의 명성을 이렇게 허비하다니. 우린 또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이냐?”서인경은 그제야 이해했다. 이들은 한 민족의 흥망을 모두 한 여인에게 뒤집어 씌우려 하고 있었다. 마치 후대 사람들이 당나라의 멸망을 양귀비 탓으로, 청나라의 멸망을 자희태후 탓으로 돌린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역사의 흐름이란 결코 한 사람, 아니 한 왕조의 뜻만으로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녀가 나라를 망친다는 말은 언제나 여인에게만 부당했다.서인경은 분이 치밀어 그들과 맞섰다.“일불락의 부흥이라… 말로 한다면 참 쉬운 것이지요. 한데 당신들은 아십니까? 바깥세상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이 땅을 노리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한때 일불락이 멸망한 건 탐욕스러운 자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걸 막을 수 있었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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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3화

“성조께서 살아 계신다 해도 우리에게는 예의를 차려야 하거늘, 어린 계집아이가 감히 사람을 다치게 하다니! 참으로 제멋대로구나!”서인경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세 번째 팔괘 기둥 아래였다.그 사람 역시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나 목소리만은 선명하게 들려왔다.그들이 그저 입만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한 서인경은 더욱 대담해졌다.“입만 놀릴 줄 알지! 말로만 떠드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 겁니까? 다들 능력이 출중한 것 같으신데 왜 그때는 일불락을 구하지 못한 겁니까? 지금 와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겁쟁이들!”“너, 너… 말을 너무 막 뱉는구나. 이리 오너라! 내가 성조님을 대신해 혼 좀 내주마!”서인경은 오른편 두 번째 팔괘 기둥 아래의 노인을 돌아보았다.“제 입이 거칠든 말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쪽은 저를 혼낼 자격도 없습니다. 그리고 괜히 성조님을 들먹이지 마세요. 당신들 말대로라면 그분은 제 조상이지 않습니까? 살아 계신다면 당연히 제 편을 들지, 당신 같은 외인들 편을 들 리가 있겠습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또 다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입 다물 거라! 우리가 성조를 따라 이 땅을 지킬 때, 너는 어디서 기어 나왔는지도 모를 때였다! 웃어른을 대하는 태도가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구나. 넷째 형님께서 말한 대로다! 잡혈은 그저 잡종일 뿐, 일불락의 피가 한 방울도 흐르는 것 같지 않구나! 일불락의 부흥은 이제 헛된 꿈이 되었단 말이다!”서인경은 그 말에 고개를 젖혀 하늘을 향해 크게 비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은침을 날려 오른쪽 첫 번째와 두 번째 팔괘 기둥 아래의 노인 둘을 동시에 쓰러뜨렸다. 아까 떠들어대던 자들이 바로 그 둘이었으니까. 단번에 세 사람을 쓰러뜨리자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 반격은커녕 욕설 한마디조차 입 밖에 내지 못했다.잠시 정적이 감돌자 한 여인이 입을 열었다.“우선 흥분을 가라앉히거라. 침을 거두고 천천히 이야기하자꾸나.”여인의 심정은 역시 여인이 가장 잘 헤아릴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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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4화

서인경은 신화 같은 이야기에 잠시 현실감이 사라졌다.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것이 자신의 출생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순혈이 그렇게 대단한데 왜 외적의 침입을 막지 못한 것입니까? 세상에 무적이라면 누구도 당해낼 수 없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여인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이건 나의 객관적인 분석이니 기분 나빠하지 말거라. 그리고 은침을 꺼낼 생각도 하지 말고!”서인경은 두 손을 벌리며 말했다.“지금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으니 말씀하세요.”그 여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그때의 여수장은 설산 변방을 순찰하다가 외족 사내 한 명을 구했단다. 우리는 즉시 그 사내를 죽이라며 강하게 반대했지만 뜻밖에도 수장은 그 사내에게 마음을 주고는 몰래 숨겨버렸지. 그리고 그 사내는 여수장을 이용해 이곳으로 들어오는 방법을 외부에 누설했다. 그 일로 우리의 설산은 전부 멸망해 버렸고 일불락도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지.”서인경은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숨을 내쉬었다.“조물자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 많은 능력을 주었다 해도 희로애락은 평범한 인간들과 다를 바 없군요. 여수장께서 사람을 잘못 본 책임은 있지만 모든 잘못을 그분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이곳은 이미 사람들이 눈독을 들인 곳이라 침입은 결국 시간문제였을 거예요.”그 여인은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우리가 그걸 모를 리 있겠느냐? 다만 분하고 억울할 뿐이다. 예전 우리의 삶이 얼마나 자유로웠는지 너는 모르겠지. 지금처럼 밖의 햇빛 한 줄기조차 보지 못한 채 수백 년 동안 이 좁은 땅에 갇혀 살아갈 줄은 아무도 몰랐단 말이다.”서인경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누가 당신들을 이곳에 가둔 것입니까?”“성조께서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법력을 펼쳐 우리를 이곳에 가두며 당부하셨다. 큰 사명을 맡을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 한 절대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팔대호법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하셨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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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5화

하지만 서인경은 그들의 꿈을 짓밟고 싶지 않았기에 굳이 자신의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당신 말대로라면 순수한 일불락의 혈통만이 수어를 할 수 있다는 뜻이군요. 그럼 제 피는 이미 불순한데 설장로께서는 왜 저를 밀어 떨어뜨리고 제 아이까지 빼앗으려 한 것입니까? 제 아이의 피는 저보다 더 불순할 텐데요.”“그건….”여인은 한참 동안이나 침묵하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피를 바꾸면 되지 않느냐? 몸속에 순수한 일불락의 피가 흐르기만 한다면 수어는 자연스레 터득하게 될 것이고 이곳의 짐승들도 너를 보면 본능적으로 경배하게 될 것이다.”서인경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이 세상에 일불락의 후손은 저 하나뿐인데 도대체 누구와 피를 바꾸라는 것입니까?”여인이 아직 말을 잇기도 전에 서인경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전 안 할 겁니다! 피가 기준이 된다면 그건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 제가 아니라는 뜻이겠죠. 그럼 됐습니다, 전 이만.”서인경은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피를 바꾸는 일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고 무엇보다 그 일로 인해 서 가와의 인연이 끊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그녀는 분명, 일불락과 서 가의 피가 뒤섞인 후손이었다. 스무 해 넘게 서 가의 피가 그녀의 몸속에서 흐르고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다른 피로 바꾼단 말인가?백 년 동안 사람 구경 한 번 못했던 그들은 그녀가 진짜 떠나려 하자 서둘러 가로막았다.“잠깐, 잠깐! 너무 흥분하지 말거라!”“그래, 다시 돌아오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그러자 서인경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그럼 피를 바꾸는 방법 말고도 다른 길이 있다는 뜻입니까?”여인은 못마땅한 듯 콧소리를 냈다.서인경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유치한 계책일 뿐이라는 것을.그녀는 다시 여덟 사람 앞에 서며 정중히 말했다.“부디 가르침을 아끼지 말아 주세요.”여인은 서인경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성조께서 이곳을 봉인하실 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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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6화

여인은 서인경이 마침내 마음을 돌린 줄 알고 다급히 말했다.“뒤로 여덟 걸음 물러나 보거라. 발밑에 나무판이 있다. 그걸 들어 올리면 알게 될 것이다.”서인경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움직였다. 과연, 흙 속에는 나무판 하나가 박혀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막대기를 하나 집어 들어 천천히 나무판을 들어 올렸다. 틈이 벌어질수록 살을 파고드는 냉기가 점점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나무판이 완전히 열린 후 서인경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이 사람은 누구입니까?”“일불락의 마지막 생존자이다. 그녀는 살아 있을 때 스스로 얼음 속에 갇히는 것을 택했지. 그래야 나중에 꺼냈을 때도 몸과 피가 신선한 채로 남아 후대 사람들이 곧바로 사용될 수 있을 테니까.”서인경은 그 대답에 충격을 받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시선은 나무판 아래, 투명한 얼음관에 꽂혔다. 그 안에는 한 명의 소녀가 누워 있었다. 단정한 얼굴에 꽃 같은 나이. 두 눈은 꼭 감겨 있고 두 손은 가슴 위에 포개어 얹혀 있었다. 마치 평온히 잠든 듯한 모습이었다.스스로 원했다는 말은 서인경도 믿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보다 더한 잔혹함이 밀려왔다. 산 채로 얼어 죽는다는 건 몸속의 온기가 서서히 사라지는 걸 온전히 느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채로 땅속에 묻히는 것만큼이나 잔인한 일이기도 했다.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일불락의 부흥에 대한 그들의 집착은 서인경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다. 설장로도, 눈앞의 여덟 장로도, 그리고 저 밖의 성조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죽기 직전까지도 이 모든 걸 그렇게 치밀하게 설계했을 리가 없었다.서인경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여덟 장로를 바라보았다.“피를 바꾸어야 이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결계를 깨는데 필요한 건 제가 아니라 일불락의 순수한 피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의 피 한 방울만 취하면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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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7화

서인경의 마음은 끝없이 흔들렸다.일불락. 그 이름 자체는 그녀가 결코 손대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그녀는 결코 이곳을 부흥시키고 싶지 않았다. 세상의 야심가들이 다시 들끓는 것도, 이 땅이 또다시 무고한 재앙을 겪는 것도 원치 않았다.하지만 운명은 서인경을 이 세계로 끌어들였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녀를 이곳까지 밀고 왔다. 이제 모든 것은 그녀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잠시 망설이던 그때, 갑자기 밖에서 들려온 늑대의 비명과 호랑이의 포효가 적막을 깨뜨렸다.서인경은 잠시 몸이 굳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지체하지 않고 곧장 달려 나갔다.그 시각, 바위벽 바깥의 동굴 안은 엉망이었다. 마치 도적떼가 들이닥친 것처럼 모닥불은 넘어지고 불씨가 사방으로 튀어 흩어졌으며 제단과 공물, 향로는 모두 땅에 나뒹굴었다. 벽에 걸린 성조의 초상화는 찢겨 나가 불씨가 튀어 반쯤 타버린 상태였다.벽 속의 암격 또한 텅 비어 있었다. 상자가 사라진 것이다.서인경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그 안에 있던 반지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간다면 모든 게 끝날 것이다. 그녀는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달렸다.동굴은 낮은 산비탈 중턱에 있었고 주변은 잡초와 덩굴로 뒤덮여 시야가 거의 가려져 있었다. 그 덕에 지금껏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것이다. 서인경은 손으로 잡초를 헤치며 밖을 내다보았다.산 아래에서는 늙은 늑대와 새끼 늑대가 한 무리의 호랑이들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단번에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늙은 늑대의 발밑에 깔린 상자였다. 호랑이들은 분명 그 상자 속의 반지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새끼 늑대는 늙은 늑대의 몸 뒤에 몸을 숨겼다. 어제 막 깨끗하게 씻어낸 털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눈빛 속에서도 그 작은 늑대는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그것이 자신이 가진 전부의 용기였다. 그러나 그 용맹이 성난 호랑이 무리 앞에서는 아무런 위력도 없었다. 지금의 상황으로 본다면 호랑이들이 한 번이라도 몸을 던지면 늙은 늑대와 새끼 늑대는 단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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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8화

서인경의 심장은 북을 쳐대듯 거세게 뛰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그녀는 눈앞의 맹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리의 맨 앞에 선 호랑이는 살기를 머금은 눈으로 서인경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마지막엔 그녀의 꽉 쥔 주먹에 시선을 고정했다.서인경은 그 시선을 따라 손을 내려다보았고 순간 심장이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역시 이곳의 짐승들은 밖의 것들과 달랐다.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호랑이가 반응하기도 전에 서인경은 재빨리 손을 들어 가루를 한 움큼 뿌렸다. 그러나 뜻밖에도 호랑이는 피하지 않고 그 가루를 정면으로 맞으며 그대로 달려들었다.서인경은 급히 몸을 뒤로 빼며 가까스로 그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앞은 막았어도 뒤는 막지 못했다. 등 뒤에서 또 한 마리의 호랑이가 갑자기 뛰어오르더니 그녀의 어깨를 갈고리 같은 발톱으로 움켜쥐었다. 거대한 힘이 온몸을 덮쳤고 서인경의 몸은 허공으로 던져졌다.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땅에 고꾸라졌고 온몸에는 뼈마디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늙은 늑대와 새끼 늑대는 재빨리 달려와 서인경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호랑이 무리뿐 아니라 주변의 늑대 무리까지도 살기를 띤 눈으로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서인경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늙은 늑대와 새끼 늑대의 곁에 다가섰다. 상황이 어지러워 제대로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늑대들도, 호랑이들도 모두 적대적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서인경을 향해 있었다.그녀는 늙은 늑대의 발밑에 깔려있는 상자를 보고는 재빨리 몸을 낮추어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용두반지가 놓여 있었다. 서인경은 주저 없이 그것을 꺼내 손가락에 끼웠다.“이걸 원하는 것이냐? 나는 일불락의 후손이다. 우리 앉아서 이야기를...”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강렬한 바람이 일더니 동시에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터졌다.서인경이 돌아봤을 때, 새끼 늑대는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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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9화

비수에는 이미 호랑이의 피가 묻어 있었고 붉은 방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뚝뚝 떨어져 땅을 적시고 있었다. 호랑이는 경계하듯 뒤로 물러섰고 서인경은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인간의 이치를 깨달았다면 이 사실을 알겠지. 이 반지는 오직 일불락의 후손만이 낄 자격이 있다. 너희가 이걸 빼앗으려는 건 대체 누구의 명령을 받은 것이냐?”늑대 무리와 호랑이 무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설령 대답을 한다 해도 서인경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터였다.그녀는 천천히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내 들었다. 그리고 비수를 들어 반지의 용두 위에 갖다 댔다. 그 순간, 현장은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졌다.“차라리 이걸 부숴버릴지언정 절대 나쁜 자의 손에 넘기지 않을 것이다. 만약 너희가 정말 사람의 마음을 안다면, 그리고 이 땅을 위한다면, 잘 생각해 보거라. 그자가 정말 이 땅을 위한 사람인지, 아니면 이 반지를 이용하려는 자인지를 말이다.”그녀가 정말 반지를 부숴버릴까 두려웠던 것일까?늑대와 호랑이 무리들은 더 이상 앞으로 다가오지 못했다.그때였다. 뒤편 숲에서 바람이 휙 하고 불어오더니 어딘가에서 그림자가 하나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인경은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형체였다.그 그림자가 사라지자 늑대와 호랑이 무리들도 마치 부름이라도 받은 듯 일제히 방향을 틀어 떠나갔다.그녀는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 역시, 저들은 그 반지를 정말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모두가 떠난 뒤, 서인경은 급히 늙은 늑대에게 지혈초를 먹였다. 그리고 곧장 새끼 늑대 쪽으로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다행히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새끼 늑대는 강한 충격으로 뼈가 여러 군데 부러졌고 오장육부가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이런 부상은 조금만 잘못 손을 써도 즉시 목숨이 끊길 것이다.서인경은 상처를 확인한 뒤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 끝에는 이미 기력이 다한 늙은 늑대가 있었다.“아직 살아 있다. 반드시 살려낼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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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0화

“그는 성조가 남긴 단 한 알의 장생불사약을 훔쳐 먹고 불사의 몸을 얻었다. 한데 그 자의 육신이 진짜 죽거나 다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목숨은 일불락의 혈맥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 즉 일불락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는 결코 죽지 않는다.”일불락의 혈맥. 이제 그 피를 잇고 있는 사람은 서인경과 그녀의 아들 꼬막이 뿐이었다.그 사내는 처음부터 일불락의 후손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숨어서 집요하게 일불락의 용두반지를 빼앗으려 했던 이유 역시 이 일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서인경은 용두반지를 들어 올리며 팔대 장로들을 향해 물었다.“이건… 당신들이 분명히 알고 있는 물건이겠지요? 그에게 정말 중요한 겁니까?”장로들 중 한 사람이 대답했다.“그것은 이 땅의 최고 통치자만이 가질 수 있는 상징이다. 일불락 후손의 피를 그 위에 떨어뜨리면 설산의 용맥이 깨어나게 된다. 그 순간, 그 반지를 가진 자가 곧 이 땅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 그것은 이 땅의 마지막 문을 여는 열쇠다.”서인경은 손에 든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 위에 조각된 용의 머리를 멍하니 응시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토록 작은 반지가 이 땅의 모든 생명과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니.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영혼을 찌르는 듯 울려 퍼졌다.“이제 와서… 너는 정말 이 땅을 남에게 내어줄 생각이냐? 만약 그자가 이곳을 차지한다면 바깥세상에 평화가 남아 있을 것 같으냐?”서인경은 천천히 반지를 손바닥 안에 꼭 쥐었다. 그녀에게 다른 선택이 있었던가? 적은 이미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언제든 다시 들이닥칠 기세였다. 방금의 대응은 고작 시간을 벌기 위한 계책일 뿐. 다음번에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지도 모른다.그때가 되면 죽는 건 그녀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늙은 늑대와 새끼 늑대, 그리고 백 년을 버텨온 팔대 장로들까지 모두 사라질 터였다. 그리되면 이 땅은 악인의 손에 떨어지고 온 세상은 다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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