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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611 - Chapter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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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1화

하지만 모든 이가 진방옥이 죽었다고 말해도 서인경은 어딘가 잘못됐다고 느꼈다.이 세상에 이유 없는 타임슬립 따위는 없을 테니까.그녀 자신도 그랬다. 서인경은 이곳으로 건너와 원래 몸 주인이 감당하지 못한 책임을 짊어졌고 멸망한 일불락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사명을 이어받았다.그렇다면 진방옥은?그녀가 들은 바에 따르면 진방옥의 성격이 돌변한 것은 오 년 전이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자기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건너왔다는 뜻인데...그는 도대체 왜 건너온 것일까? 그저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진 가의 큰아들로,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살다가 한차례 전투에서 허무하게 죽기 위해서? 그렇다면 운명이 그를 이 세계로 불러들인 의미는 무엇일까?하지만 정말 죽지 않았다면 그는 어디로 간 걸까? 왜 연기준조차 모른단 말인가?서인경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의문이 남았다. 왠지 다시 진방옥을 만나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시신 없는 의관총 때문에 영당(灵堂:영구나 영정을 모신 방)은 단 하루만 차려졌다. 서인경은 그날 해가 지기도 전에 서회윤의 전장 갑옷을 담은 관을 직접 묻었다. 조문객들이 모두 돌아가자 장군부는 순식간에 텅 비어 버렸다. 수십 명의 하인과 하녀들이 상복을 입고 조용히 앞뜰에 줄지어 섰다. 서인경은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인 은전 자루들을 바라보다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너희들 중에는 장군부에서 수십 년을 보낸 이도 있고 이제 막 들어온 이도 있다. 할아버지는 늘 너희들을 믿으셨고 가족처럼 여겼다. 그동안 할아버지를 보살펴 주고 장군부를 지켜줘서 고맙다. 한데 이제 장군부를 지키던 사람은 떠났고 이곳은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서재를 제외한 다른 방 안의 물건들 중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가져가도 좋다. 그리고 이 자루마다 열 냥씩의 은전이 들어 있으니 새 삶을 찾는 밑천으로 삼거라.”서인경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 사이에서 곧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늙은 부관은 이미 눈물이 온 얼굴을 덮을 정도였다.“왕비 마마,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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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2화

마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멈춰 섰다. 마차 밖에서는 연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왕야, 왕비 마마, 열셋 째 황자께서 뒤쫓아오셨사옵니다.”서인경은 곧바로 연기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온 것입니까?”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마차 밖에서 열셋 째 황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황숙모께 문안드립니다. 저는 어젯밤에야 돌아왔기에 유청 아우에게 선물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금 사람을 시켜 옷 한 벌 마련해 왔습니다. 아홉 째 황숙, 황숙모, 귀한 아드님을 얻으신 것을 축하드리며 유청 아우가 평안하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드립니다.”연기준은 손끝으로 마차 창의 발을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열셋 째 황자가 공손히 붉은색 작은 옷 한 벌과 정교하게 만든 호두(虎头) 신발 한 켤레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정성스러운 마음이구나. 연풍, 받거라.”연풍은 곧바로 선물을 받아 마차 안에 넣었다.열셋 째 황자는 여전히 예를 갖춘 자세를 유지한 채 말했다.“황숙, 황숙모를 댁까지 모시겠습니다.”차발이 내려지고 마차는 다시 앞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서인경은 옷과 호두 신발을 펴서 보았다. 천이 아주 고급진 걸 보니 누군가가 정성껏 고른 것이 분명했다.“열셋 째 황자는 매사에 열심히고 하는 일마다 흠잡을 데가 없는데… 왠지 모르게 이상합니다.”연기준은 여전히 꼬막이를 품에 안은 채 그 옷을 힐끔 쳐다보았다.“그는 황릉에 있을 때 매달 폐하께 참회문을 올렸다. 삼 년 동안 고생을 많이 했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기에 폐하께서는 오늘 새벽, 그의 황자 신분을 회복시켜 주셨지. 그러니 내일부터는 백관들과 함께 조참에 들 수도 있다.”“반면, 대황자는 황후의 후원 덕에 이미 경성 내에서 뿌리가 단단하다. 하 씨가 사라진 지금 폐하는 오히려 대황자를 더 신임하지. 한데 열셋 째 황자는 조정 내 세력이 깨끗하지 않느냐.”서인경은 자신이 미리 가졌던 불안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역시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란 없었다. 황실 사람들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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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3화

평이가 봉한설의 뒤에서 살짝 머리를 내밀었다.“둘은 또 왜 저러는 것이냐?”봉한설은 익숙하다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부부 간의 정취입니다. 언니는 아직 몰라요.”꼬막이는 품에서 여러 번 소리를 냈다. 봉한설의 말이 맞다는 듯 자기주장에 찬 동조였다.한편, 연기준은 서인경을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그대로 문틀에 눌러버렸다.“넌 본왕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아니면 본왕이 뭔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불안해진 것이냐?”서인경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다시 태어나거나 시공을 건너는 일 따위는 너무 비현실적이었으니까. 그걸 정말 말해버리면 연기준은 그녀의 정신이 나갔다고 의심할 것이다.“폐하 곁에 있는 건 호랑이 옆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조정의 형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니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냥 선의로 한마디 해준 것뿐입니다.”연기준의 시선이 그녀를 꿰뚫었다.“전에 넌 내가 서 가를 해칠까 봐 걱정하더니 이젠 내가 너희 모자를 지켜주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냐? 본왕이 너한테는 그렇게 쓸모없는 인간이더냐?”분노와 짜증, 거기에 묘하게 섞인 서운함과 체념이 함께 번졌다. 이런 상왕의 얼굴은 아마 세상에서 서인경만 본 적이 있을 것이다.서인경은 조용히 그의 옷깃을 고쳐주며 허리에 매어둔 상포를 풀어 주었다. 그녀의 동작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웠으며 자신이 마치 다정하고 이해심 깊은 부인처럼 보이길 바라는 듯했다.“그렇게 자신을 깎아내리지 마세요. 당신은 진국의 영웅이고 저와 꼬막이의 버팀목입니다. 앞으로 저희는 모두 당신에게 의지해야 하잖아요.”연기준은 과하게 부드러운 그녀의 몸짓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본왕을 의지한다는 느낌은 눈곱만큼도 못 받았다. 오히려 너는 일불락을 이끌고 진국을 짓밟을 준비를 하는 것 같던데.”그 말에 서인경은 더 이상 연기할 마음이 싹 사라져 거칠게 상포를 확 잡아당겼다.“믿든 말든 알아서 하십시오. 전 꼬막이를 보러 갈 것입니다.”서인경이 돌아서려는 순간 연기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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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4화

“제가 당신을 업신여길지 말지는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뭐, 제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해 준다면 데릴사위의 복지에 대해서 좀 더 고민해 보도록 할게요.”연기준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무슨 질문인 것이냐?”“진방옥, 정말 죽은 겁니까?”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연기준의 동작이 잠시 굳었다. 서인경이 왜 진방옥의 죽음을 의심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죽지 않았다. 대신, 실종되었지.”서인경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실종이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연기준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들려주었다.“마지막 전투 때, 맹경운은 이미 진방옥을 여국에서 구해냈다. 군대가 귀환하던 중, 갑자기 큰 눈이 쏟아졌고 병사들은 시야가 막혀 각자 살기에도 급급해 잠시 진을 치고 쉬었지. 한데 눈이 그치고 나니 진방옥이 사라진 것이다. 맹경운조차 그가 언제 사라졌는지 눈치채지 못했다.”서인경은 오히려 확신이 깊어졌다.“그는 분명 살아 있습니다. 아마 그의 화약 제조 능력을 노린 누군가가 납치해 갔을 겁니다. 그리고 저희 외에 진방옥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그의 가족뿐이지요.”연기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대황자?”그녀의 얼굴빛이 단단히 굳었다. 서인경은 본래부터 대황자에 대한 인상이 극도로 나빴는데 지금은 그를 당장이라도 죄로 엮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대황자와 진가이를 잘 지켜보십시오. 혹시 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연기준은 곧 연풍에게 명령을 내렸다.그때, 서인경은 장군부에서 가져온 현빙보검이 떠올라 연풍에게 그것을 들여오게 한 뒤 연기준에게 건넸다.“이 검에 특별한 것이 있는지 좀 봐주세요. 단 씨부인은 왜 그토록 이 검에만 집착했던 걸까요?”연기준은 검을 받아 들고 칼집에서 천천히 뽑아 들었다.한눈에 보기에도 두 동강 난 검이었다. 칼날은 은빛으로 번쩍였고 잘 닦여 있어 싸늘한 기운을 뿜었다. 분명 서 노장군이 애지중지하며 보관했던 그 검이었다. 비록 부러졌지만 여전히 보배처럼 다루어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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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5화

연기준은 현빙보검을 꼼꼼히 살펴보았으나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서인경도 더는 얽매이지 않고 조심스레 검을 싸서 보관했다.“어쨌든 단 가 사람들 손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됐습니다. 나중에 예정훈을 만나게 된다면 물어봐야겠어요. 혹시 그가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봉한설의 품에 안겨 있던 꼬막이는 곧 엄마 아빠를 찾아대며 칭얼대기 시작했다.연기준이 있을 때는 대부분 그가 꼬막이를 달래주었고 아이 역시 울거나 떼쓰지 않았다.한 사람은 군무를 살피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책상 위에 엎드려 군무를 보고 있는 사람을 감독하고 있었다. 그 광경은 그야말로 평화로웠다.그러다 어느 순간, 연기준은 일정한 규칙을 발견하게 되었다.꼬막이가 한 번씩 짧게 우는 건 배가 고플 때였고 입을 벌리고 길게 연속으로 울어대는 건 볼일을 다 본 뒤였다.서인경은 연기준이 타고난 아빠 체질일 거라고 단언했다.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며칠이 흘렀다.단은설의 귀비 책봉식은 정오에 치러졌다. 궁에서는 얼마 전 귀비 한 명이 세상을 떠난 데다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번 단은설의 책봉은 규모를 간소히 했다. 그저 황족과 단 가 친척들이 대전에 모여 식사 한 끼를 함께하는 정도였다.서인경은 속으로 투덜거렸다.‘이건 그냥 양가 상견례잖아.’단은설의 신분은 좋게 말하면 귀비요, 나쁘게 말하면 그저 첩일뿐이었다. 그러니 이런 의례라면 후궁에서 문 닫고 조용히 치러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황제는 굳이 이 의식을 대대적으로 치러주었다.그에 서인경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가 진심으로 단은설에게 마음을 준 것 같지는 않았다.수많은 후궁을 거느렸고 음모와 술수로 살아온 중년의 황제가 단은설과 하룻밤 잤다고 진심을 품을 리는 없다고 서인경은 생각했다.단 가는 이번에 완전히 고개를 들었다. 두 딸 중 한 명은 대황자의 측비, 또 다른 한 명은 후궁 유일한 귀비였으니.서풍교와 단효산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옛날처럼 서로 적대하는 기색도 없었다. 서풍교는 콧방귀를 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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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6화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서인경은 막 꼬막이에게 젖을 먹였다. 그래서 옷에는 은근한 젖 향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이들이 유독 좋아하는 냄새였다.연기준은 서인경이 작은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며 문득 자신에게도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아이는 분명 서인경을 닮았을 것이다. 작고 아담하며 웃을 때는 지금의 열여덟 째 공주처럼 달콤하겠지.’그는 서인경을 몸 아래에 두고 있을 때마다 딸이 태어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서인경이 꼬막이를 낳을 때 겪었던 위험과 고통이 떠오르자 연기준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는 자연스레 사라져 버렸다.‘그만하자. 꼬막이 하나로도 충분하다.’대전에 들어서자 서인경은 이미 자리에 있던 신비를 보았다. 그녀는 한 빈비와 손을 맞잡고 한창 흥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열일곱 째 황자와 열다섯 째 황자는 공과가 있어 이른 아침 국자감(国子监:국가 최고 교육기관이자 학술기관)으로 보내졌다.신비는 마음이 워낙 호방한 여인이라 열여덟 째 공주를 유모에게 통째로 맡겨버린 모양이었다. 서인경이 열여덟 째 공주를 안고 다가서자 신비는 그제야 눈치를 챈 듯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어서 보자. 누가 우리 작은 열여덟 째 공주를 안고 있나?”열여덟 째 공주는 손뼉을 척척 치며 맑은 목소리로 외쳤다.“황숙모! 황숙모입니다!”신비는 웃으며 아이를 받아안았다.“상왕비께서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아이가 워낙 성미가 고집스러워서 곁에 붙은 사람 말고는 아무에게도 안기지 않는데 상왕비께는 스스럼없이 안기는 걸 보면 아주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서인경도 웃으며 열여덟 째 공주의 작은 손을 잡았다.“열여덟 째 공주가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저도 마음에 쏙 들어요.”신비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열다섯 째 황자는 공과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저더러 상왕비께 전하라고 하더군요. 자신은 궁 안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요.”서인경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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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7화

불과 며칠 사이에 열셋 째 황자는 놀랍게도 서왕과 가까워져 있었다. 서인경이 그들을 조용히 살피고 있을 때 맹은영이 들어왔다. 그녀는 맹국공을 따라왔지만 사실은 서인경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저 구경 삼아 들른 것이었다.“제가 있는 한 단은설 따위는 왕비 마마를 괴롭히지 못할 겁니다.”서인경은 담담하게 대꾸했다.“그녀가 나를 괴롭힌다면 질투한다는 뜻이네. 질투한다는 건 내가 이겼다는 뜻이고.”맹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단은설이 왕비 마마를 질투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럽니까?”그때 서인경은 막 걸어오고 있는 연기준을 바라보았다. 맹은영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기고는 즉시 엄지를 쭉 들어 올렸다.“이거라면 질투할 만하지요.”맹은영은 누구에게도 연정을 품은 적이 없었지만 여자의 눈으로만 보자면 이것은 서인경의 완벽히 승리였다.연기준은 서인경을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그녀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연기준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서인경은 조용히 대답했다.“미래요.”연기준은 잠시 멈추더니 조용히 찻잔을 들어 그녀 앞에 놓았다.“너의 미래는 본왕의 손안에 있다.”서인경은 못마땅하다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쓰읍.”연기준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즉시 말끝을 덧붙였다.“나와 꼬막이의 미래도 너의 손에 달렸지.”그 한마디에 서인경의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두 사람은 아주 가까이에 붙어있었기에 연기준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오는 은근한 젖 향기를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열여덟 째 공주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오르자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앞으로는 꼬막이에게 젖 좀 덜 먹이거라. 유모가 없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서인경은 고집스럽게 대답했다.“제가 직접 먹이는 게 꼬막이한테 좋습니다. 게다가 모유가 부족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그 말에 연기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그래. 아주 넉넉하지.”그 순간, 지난밤의 한 장면이 번개처럼 서인경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자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며 머릿속이 웅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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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8화

서인경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오늘은 마마께서 귀비로 봉해지신 경사로운 날입니다. 전장의 피비린내 나는 일들은 너무 잔혹하기에 이런 자리에선 실로 불길한 화제이지요.”서인경이 굳이 말을 아끼자 단은설은 오히려 그것을 기회 삼아 더 신이 나서 얘기했다.“본궁은 개의치 않습니다. 오늘은 모두가 함께 모였으니 상왕비의 무용담을 들어야 식사도 흥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오늘의 이 자리가 너무 심심할 것 같습니다.”순간, 서인경의 단정한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갔다.“전장은 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곳입니다. 그 시절 저는 날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여러 차례 귀문관을 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할아버지께서 목숨을 걸지 않으셨다면 전 이미 설산에 묻혔을 것입니다. 지금도 자주 악몽에 시달리고 눈만 감으면 피에 물든 설산과 눈앞에서 숨이 끊기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한데 그런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마마께서는 반찬거리 삼으시겠다니... 그건 너무 부적절하지 않습니까? 만약 정말 궁금하시다면 언젠가 직접 전장에 나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럼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서인경의 말이 끝나자 무관들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그들은 목숨 걸고 싸우며 나라를 지켰지만 어떤 이들은 사치와 안락 속에서 그들의 생사를 그저 식사 전의 농담거리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분노가 억눌린 숨결처럼 번졌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온 자들이란 말인가?순간, 단은설의 얼굴빛이 단숨에 변했다.“상왕비, 본궁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상왕비가 걱정되어 물었을 뿐인데 왜 사람들로 하여금 본궁을 오해하게 만드는 것입니까?”서인경은 그저 천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먼저 여쭤보신 건 마마이시잖아요. 저는 그저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단은설은 분노로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황제가 처음으로 불쾌한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자 단은설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곳은 황궁이고 자신의 신분은 이제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단은설은 할 수 없이 치밀어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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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9화

연기준이 서인경에게 쏟는 그 편애와 긴장감, 그리고 그녀를 위해 조심스레 생선 가시를 골라내는 모습을 보며 열셋 째 황자는 깨달았다. 서인경과 열다섯 황자를 노린 자신의 수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는 것을.연회가 끝난 후, 서인경은 일찌감치 상왕부로 돌아갔다. 그녀의 마음속엔 온통 꼬막이 걱정뿐이었다. 갓 경성으로 돌아온 터라 유모들이 아무리 달래도 아이는 제대로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연기준은 자신보다 아들을 더 신경 쓰는 서인경의 모습에 질투 아닌 질투가 속에서 올라왔다. 그러나 겉으론 아무렇지 않게 황제에게 미리 작별을 고하고 그녀를 데리고 궁을 나섰다.돌아오는 길에 서인경은 제약방에 들러 연기준이 보는 앞에서 피임약을 몇 봉지 샀다. 그는 눈썹만 살짝 올리고 아무 말 없이 값을 치렀다.서인경의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아이를 가져서는 안되었다. 연기준 또한 아이를 더 낳을 생각은 없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오늘 그녀가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그렇게 두 사람 모두 그 약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왕부에 돌아오니 꼬막이는 예상대로 울며불며 떼를 쓰고 있었다.봉한설과 평이가 번갈아가며 달래 보았지만 아이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연기준이 문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꼬막이는 금세 울음을 그쳤다.“본왕이 서재로 데려가겠다. 너는 잠시 쉬거라.”서인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기준이 한 팔로 아이를 안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한편, 맹경운은 이미 서재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연기준이 들어서자 그는 급히 다가와 말했다.“저희 쪽 사람들이 야랑국에서 진방옥의 행방을 찾아냈습니다.”연기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야랑국? 예정훈이냐, 아니면 예정임이냐?”“단서는 예정훈 쪽에서 준 것입니다. 한데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아마 예정임은 진방옥의 화약 제조 능력을 알고 그를 숨긴 것 같습니다.”연기준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그 예정훈은 참으로 쓸모없는 놈이군. 본왕이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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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0화

후궁.오늘은 단은설이 귀비로 책봉된 큰 경사였기에 황제는 당연히 그녀의 궁에 머물렀다.궁녀들을 물러나게 한 뒤, 단은설은 찻잔을 들고 직접 황제를 모셨다.“폐하, 피곤하시지요. 어서 차 한 모금 드시고 쉬시옵소서.”그러나 황제의 얼굴엔 미녀를 바라보는 기쁨의 기색이 전혀 없었다.단은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오히려 경고가 서려 있었다.“짐은 안다. 너는 줄곧 상왕부에 들어가고 싶어 했고 그 때문에 상왕비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걸. 오늘부로 너는 짐의 비가 되었으니 쓸데없는 마음은 단 한 점도 품지 말거라. 다음에 또 잔꾀를 부려 조정 대신들의 불만을 산다면 짐은 결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단은설은 깜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신첩이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사옵니까! 폐하께서 신첩을 오해한 것이옵니다. 신첩은 그저 서회윤 장군의 시신을 찾지 못해 마음이 불안하여 폐하를 도와 상왕비를 떠보려 한 것이옵니다. 결코 상왕을 향한 다른 뜻은 없었사옵니다.”황제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가까이 다가섰다.“정말 없단 말이냐?”단은설은 당황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정말로 없사옵니다. 예전에 신첩이 상왕을 흠모했던 것은 상왕께서 상왕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옵니다. 상왕비 또한 줄곧 상왕과 화이하겠다 하지 않았사옵니까? 한데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까지 두었는데 신첩이 어찌 상왕의 첩이 되려 하겠사옵니까? 신첩의 지위는 모두 폐하께서 주신 것이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신첩은 오직 폐하의 사람이지요.”그토록 급하게 충성을 맹세하자 황제는 미소를 띠며 그녀의 턱을 놓아 주었다.“그리 알아두거라. 짐은 단 가를 높여줄 수도, 진흙 속에 처박을 수도 있다. 짐을 위해 충성스럽게 일한다면 짐 또한 너를 결코 홀대하지 않을 것이다.”단은설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폐하, 염려 마옵소서. 신첩은 결코 두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옵니다.”황제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단은설은 이번 위기를 넘겼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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