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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1화

잠시 후, 침전 안에서 부끄러운 소리가 새어 나오자 문밖을 지키던 궁녀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그 소리는 오후부터 밤까지 이어졌다. 황제는 오랫동안 기운을 되찾지 못했으나 이번만큼은 단은설의 몸 위에서 사내의 만족과 존엄을 되찾았다.황제도 그녀가 어떤 신비한 매력을 지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빈비들과 비교해도 젊다는 것 외에는 별다를 게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단은설에게 빠져 끝없이 탐하듯 몸을 움직였다.그 시각, 대황자부 또한 잠잠하지 않았다. 단여월은 대황자를 따라 궁에 한 번 다녀온 후 다시금 자신이 총애 받는다고 믿었고 밤에는 온갖 수단으로 대황자를 유혹했다. 그는 단여월의 아양에 흡족해하며 두 사람은 방 안에서 쾌락에 빠져들었다.한편, 그 시각 진가이는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와 함께 방 안에서 같은 일을 벌이고 있었다. 몇 차례의 격렬한 정사 끝에 진가이는 숨을 몰아쉬며 남자의 가슴 위에 엎드렸다.“어서 가세요. 잠시 후 대황자께서 오시면 나가지 못하실 겁니다.”그녀 옆에는 철로 된 가면을 쓴 남자가 누워 있었다.“걱정 말거라. 연강헌은 지금 다른 여자 품에 빠져 있으니 오늘은 오지 못할 것이다.”연기준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과연 예정임은 경성 안에 있었다.그는 막북에서 떠난 후, 야랑국으로 돌아가는 모든 길에 연기준의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고 지금은 대황자부에 몸을 숨긴 채 진가이와 매일같이 은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진가이가 예정임의 가면을 벗기려 하자 그가 손으로 막았다.“그렇게도 본황자의 얼굴이 궁금하단 말이냐?”진가이는 고개를 저었다.“제가 의술을 조금 압니다. 만약 현빙보검을 얻지 못한다면 제가 시도해 보겠습니다.”예정임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일불락 설산의 한기가 남은 상처다. 본황자는 얼굴뿐만 아니라 무공도 함께 잃었지. 현빙을 녹여 약재로 쓰지 않는 한 다른 방법은 없다.”진가이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한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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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2화

서인경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단평안의 잔혹함에 혀를 찼다.무고한 아이까지도 가차 없이 죽이다니.“예전엔 한낱 폐물이더니 이젠 염라대왕이 따로 없습니다. 그 단평안,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닙니다.”연기준이 서인경 쪽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곁으로 끌어앉혔다.“그 아이가 살아 있는 한, 단효산은 단 가를 그 불구에게 절대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한데 이렇게까지 요란한 수를 쓸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 하나 죽이는 방법이야 수도 없이 많지요. 한데 이렇게 대놓고 화약을 터뜨리다니... 사람들이 자기 짓인 걸 모를까 봐 저러는 것입니까? 게다가 화약은 귀한 것입니다. 그걸 그토록 힘들게 손에 넣고는 여인과 아이 하나 죽이는 데 써버리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연기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조용히 죽였다면 오히려 더 의심을 샀을 테지. 이렇게 요란하게 터뜨림으로써 적어도 단소산에게 그는 건드릴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각인시킨 셈이다. 그 자의 손에는 아직 화약이 남아 있을 테니 계속 감시하거라.”연풍이 즉시 답했다.“예, 알겠사옵니다.”연풍이 물러나자 연기준은 한동안 말없이 서인경의 손을 매만졌다.그녀는 턱을 괴고 연기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조정이 불온하게 들끓고 있습니다. 왠지 마음이 불안해요. 대황자와 열셋 째 황자의 황위 다툼이 이미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황제께서는 분명 당신의 의견을 물을 것입니다. 한데 누구를 선택해도 위험합니다. 어느 쪽이든 새 황제는 자신의 사람들로 조정을 채우고 싶어 할 테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또 아무 쪽도 고르지 않는다면 즉위한 쪽이 당신을 결코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연기준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괜찮다. 새로운 상왕이 나타나겠지. 그때가 되면 본왕은 너와 꼬막이를 데리고 떠날 것이다.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일불락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본왕도 함께 하마.”그의 말은 듣기엔 달콤했지만 서인경의 마음속은 왠지 불안했다.“대황자도, 열셋 째 황자도… 제가 보기엔 둘 다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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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3화

휠체어에 앉아 있는 단평안의 얼굴에는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 오직 차분하고 냉정한 빛만이 깃들어 마치 아버지 단효산의 노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그 담담한 눈빛에 단효산은 순간 숨이 막혔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여색에 빠져 집안을 들썩이게 하던 그 한심한 자식과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의 시선을 읽은 듯, 단평안은 입꼬리를 비틀며 끌어올렸다.“아버지께서는 지금 의아하실 겁니다. 제가 언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실 거예요.”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들춰낸 말에 단효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단평안은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에는 오만과 냉소 그리고 깊은 원망이 뒤섞여 있었다.“아버지께서 두 딸을 싸고돌며 저를 총알받이로 세웠을 때부터, 첩과 낳은 아들을 집안에 들이고 저 대신 앉히려고 했을 때부터, 그리고 저를 후원에 내팽개치고 살든 죽든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을 때부터 저는 변했습니다.”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어떻습니까, 아버지. 이제야 배신당한 기분이 어떤지 아시겠습니까?”단효산은 숨이 가빠 올랐고 목덜미의 핏줄이 불거졌다.“너… 너 이놈이…!”하지만 단평안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저는 이제부터 예전의 단평안이 아닙니다. 제겐 화약을 손에 넣을 능력도 있고 아버지 눈앞에서 아버지께서 가장 아끼는 사람을 죽일 능력도 있습니다. 앞으로 단 가가 이 경성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저 하나만 믿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도 더 이상의 자비는 베풀지 않을 겁니다.”단효산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으나 목에서 막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들어왔다.서풍교였다.그녀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단효산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오히려 기쁜 듯 곧바로 단평안 앞으로 다가갔다.“아가, 드디어 방에서 나왔구나. 다리는 좀 어떠느냐? 괜찮아졌느냐?”예전엔 눈만 뜨면 단효산을 찾던 여자였는데 지금은 그의 존재 따윈 없는 듯했다.단평안은 그 눈빛을 보고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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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4화

“에이, 자네 그 얘기 들었나? 이번 단 가 사건 말이네. 전부 다 그 집 큰아들, 단평안이 벌인 짓이라더군. 불구 주제에 일을 참 크게도 벌였지!”“단평안? 예전엔 그저 한량이었지 않은가? 이런 수가 있을 줄은 몰랐네. 난 그자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줄 알았는데 말이지.”“그러게... 사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니까! 누가 마지막에 웃을지는 모르는 일이네.”“한데 말이야... 단평안은 왜 다리를 절게 된 겐가? 난 이제 막 경성에 돌아와서 그 일은 전혀 모르네.”“허, 그게 벌써 몇 달 전 얘기인데... 단평안이 상왕비 곁의 시녀를 희롱한 것 때문에 상왕비가 화가 나 칼로 몇 번 베어 불구로 만들었다지. 그때 동복객잔 바닥이 피로 흥건했다더군. 본 사람도 아주 많았다네. 다들 혼비백산했지.”“상왕비가 그렇게 대단한가?”“대단하기는 무슨! 그건 거의 무자비한 것이지! 사내한테 그런 짓을 하다니! 저런 여인을 상왕이 어떻게 감당하나 몰라.”“글쎄, 어쩌면 상왕은 그런 여자가 취향인지도 모르지.”“역시 전장을 누빈 사내는 다르네. 우린 다들 온순하고 현숙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나? 상왕비 같은 여인은 우리 마을에선 아무도 데려가지 않을 것이네.”“자네 마을? 상왕비는 자네 마을이 어딘지도 모르네! 제발 거울 좀 보시게. 전왕비가 여덟 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자네한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걸세.”“이보게. 자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겐가?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 다 물어보시게. 누가 온순하고 현숙한 여인을 마다하겠나? 남편과 시부모를 잘 모시며 집안 살림을 챙기는 여자가 최고지. 칼 휘두르고 총 잡는 여인은 제명에 살지도 못 할 걸세.”“그건 너무 심한 말이네. 어쨌든 상왕비는 우리를 위해 능지국의 침략을 막은 게 아닌가? 그러니 진국의 영웅이지.”“그래, 서 씨 사람들은 다들 훌륭하지.”“훌륭하긴 한데... 그래도 그런 여인은 싫네.”“누가 자네더러 데려가라고 했는가! 꺼지시게!”서인경과 맹은영은 처음엔 그저 재미 삼아 귀를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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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5화

서인경은 맹은영에게 당부했다.“그대는 먼저 상왕부로 돌아가 있게. 한 시진 뒤에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 일을 즉시 연기준에게 알려야 하네.”맹은영은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했다. 서인경을 막을 수 없으니 그녀의 마음속엔 불안함과 초조함이 뒤섞였다.서인경은 결국 하인을 따라 위로 올라갔고 맹은영은 부리나케 달려 상왕부로 향했다.찻집 2층.긴 복도를 지나 한쪽 끝에서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굽이진 골목을 돌고 돈 끝에 서인경은 깊숙한 곳에 배치되어 있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방에 들어서니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하인이 벽에 걸린 그림을 젖히자 그 안에는 숨겨진 공간이 드러냈다. 그 속에는 흰 그릇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하인이 그것을 돌리자 바닥 한 칸이 슥 하고 열리더니 그 아래로 한 사람 들어갈 만한 좁은 밀실이 나타났다. 하인은 촛대를 밝히며 서인경에게 건넸다.“왕비 마마, 저희 주인께서 왕비 마마만 내려가 달라 하셨사옵니다.”서인경은 하인이 일련의 조작을 하는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다가 촛대를 받아 들었다.“밖에서 지키고 있거라. 상왕께서 오시면 그분도 함께 들이면 된다. 그게 아니라면 이 찻집은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사라질 것이다.”그녀는 맹은영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한 시진을 기다리지 못할 성격이었다.연기준은 곧 이곳으로 올 것이다. 만약 그가 서인경을 찾지 못한다면 이곳을 아예 부술 수도 있다. 그녀는 촛불을 손에 들고 천천히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어두웠던 길은 한 모퉁이를 돌자마자 시야가 탁 트였다. 작지 않은 밀실 중앙에 흰옷을 입은 사내의 뒷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는 말없이 홀로 흰 돌을 바둑판 위에 놓고 있었다.그러다 소리가 나자 그는 고개를 돌렸고 서인경은 드디어 그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오랜만에 마주한 야랑국 태자, 예정훈이었다.“야랑국의 첩자를 저희 진국에 배치하다니요.”예정훈은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상왕의 첩자는 이미 태자부에 들어와 있습니다. 상왕에 비하면 제 편이 조금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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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6화

예정훈은 치약을 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지만 서인경의 눈빛에 번지는 분노는 알아챘다. 그는 웃으며 바둑돌을 치웠다.“상왕은 능지국을 멸했지만 능지국의 백성들은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능지국의 단 씨 가문도 포함되어 있지요. 이번에 예정임이 귀면부장 행세를 하며 서 노장군을 인질로 삼고 능지국을 선동해 진국에 전쟁을 일으키려 한 건 전부 그의 단독 계획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능지국은 멸망했고 단 씨 가문은 1등 작위에서 추락해 평민으로 전락되었지요. 그뿐인 줄 아십니까? 집안의 재산까지 모두 몰수 당해 비참한 신세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정임을 죽일 만한 충분한 동기를 갖고 있는 셈이지요.”서인경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능지국의 단 씨 가문이 그렇게 몰락했는데도 진국에 와서 예정임에게 복수하려 든단 말입니까?”예정훈은 서인경을 바보 보듯이 쳐다보았다.“당당한 상왕께서 어쩌다 그대처럼 아둔한 여인을 아내로 맞았는지 모르겠습니다.”아니... 잘 얘기하다가 왜 갑자기 욕을 하고 그러는 것이지?예정훈은 짜증 난다는 듯한 기색으로 설명을 이어갔다.“단 씨 가문은 지파가 많아 그 아래 자손이 몇이나 되는지 헤아리기조차 어렵습니다. 진짜로 분에 못 이긴 극단적인 이들이 두어 명정도 달려와 그에게 보복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지요. 사람이 그리 많은데 보복한 자가 누구인지 어찌 알겠습니까?”서인경은 마침내 이해했다.예정훈은 자신이 직접 손을 쓴 후, 그 책임을 능지국 단 씨 가문에 뒤집어씌우려는 것이었다.확실히 태자나 한 나라의 군주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서인경은 스스로도 순진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권모술수에서는 아직 초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관심은 여전히 현빙보검에 쏠려 있었다.예정훈이 몸을 일으키자 서인경은 재빨리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정말로 할아버지의 오래된 일까지 다 아는 것입니까? 말해보세요. 현빙보검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정말 태자의 어머님께서 저희 할아버지에게 준, 어떤 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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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7화

예정훈은 분노보다 웃음이 먼저 튀어나왔다.“그러니까 상왕비 마음속에서 본태자는 믿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동맹이란 말입니까? 예전에 서로 터놓고 말하던 우정은 다 어디로 간 것입니까?”서인경은 예정훈이 방금 따라준 차를 들어 올리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전쟁에는 속임수가 많을수록 좋지요.”그 말에 예정훈은 더 크게 웃었다.“상왕, 가끔은 그대가 참 부럽습니다. 이렇게 좋은 왕비를 얻었으니까요.”서인경은 잠깐 멍해졌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어둠 속에서 연기준이 걸어 나왔다.“본왕도 야랑국 태자가 참 부럽습니다. 일은 하나도 못 했으면서 감히 본왕의 땅에서 본왕의 왕비를 납치해 갈 배짱을 보이니까요.”서인경은 눈을 깜빡였다.“무슨 일을 못 했다는 것입니까?”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일이 오간 것이 분명했다.예정훈은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상왕비가 아니라면 제가 이리도 빨리 상왕을 불러올 도리가 없지요. 그러니 우리 서로 거래를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연기준은 손을 내밀어 서인경을 자기 곁으로 끌어당겼다.“태자께서 진방옥을 살아있는 채로 진국에 돌려보내신다면, 본왕 또한 그에 응하여 예정임이 진국의 땅에서 살아 나가는 일은 결코 없게 해드리요.”진방옥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서인경은 또 한 번 놀랐다.“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방옥은 죽지 않았고 지금 야랑국에 있단 뜻입니까?”연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서인경은 순식간에 예정훈을 향해 불을 뿜듯 말했다.“그럼 당장 데려오지 그러십니까! 태자 땅인데 사람 하나 못 데려오는 겁니까?”예정훈은 단 일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어렵습니다.”서인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예정훈은 억울하다는 듯 설명했다.“정말로 제가 데려오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비록 예정임은 지금 진국에 와 있지만 야랑국 쪽의 세력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황후와 단 가가 그를 위해 버티고 있단 말입니다. 그가 사람을 숨기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본태자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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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8화

예정훈은 어쩔 수 없이 비장의 패를 꺼냈다. 그는 탁자 아래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서인경에게 건넸다.“이건 모비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게 주신 물건입니다. 훗날 진국에 오게 되었을 때 믿을 만한 서 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전하라 하셨지요. 이 정도 성의면 상왕부와 협력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서인경은 잠시 멍해졌고 이내 상자를 받아 열어보았다.그 안의 내용물을 본 순간 서인경은 가장 먼저 연기준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상자 안에는 서인경이 설산에서 가져온 것과 똑같은 용두반지가 들어 있었다. 다만 이 반지는 크기가 더 큰 것으로 보아 남성용인 것 같았다.그 생각이 스치자 서인경은 즉시 목걸이를 꺼내 자신의 용두반지와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았다. 모양은 완전히 같았고 크기만 달랐다.서인경은 남성용 반지를 꺼내 연기준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크기와 윤곽이 마치 그의 손에 맞춰 특별히 제작된 것처럼 꼭 알맞았다.두 사람은 반지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서로를 쳐다보았다.“이 물건이 한 쌍으로 존재한단 말입니까? 게다가 남녀 짝으로요?”연기준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일불락의 수장은 늘 한 명이었다. 부부가 함께 다스렸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지. 설산에 남아있던 것은 분명 여성이었고 그 또한 마지막 수장이 여자였다는 말과 일치하다.”예정훈은 서인경이 같은 반지를 꺼내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더욱 그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그녀 목에 걸려 있던 또 다른 물건이었다.혈적자.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더니 깜짝 놀란 기색이 얼굴에 비쳤다.연기준은 말없이 반지를 빼서 원래의 상자에 조용히 넣었다.서인경의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뿐이었다.“이게… 어떻게 태자의 모비한테 있었단 말입니까?”예정훈은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고 어깨를 으쓱했다.“저도 모릅니다. 모비께서는 마지막 순간에 꺼내 주셨고 다른 사람에게 절대 들키지 않도록 잘 숨기라는 말만 했으니까요. 그리고 반드시 서회윤 노장군의 후손에게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설마, 현빙보검과 이 용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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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9화

“이 안에 얽힌 사연은 아마도 노장군을 만나야만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다.”그 말에 서인경의 표정은 한껏 들떠 있었다.그녀는 연기준에게 바짝 몸을 붙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게 무슨 뜻입니까? 저… 정말로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겁니까?”연기준은 즉시 대답해 주었다.“태황태후의 회갑연이 끝나면 본왕은 방도를 써서 잠시 경성을 떠날 것이다. 그때 네 손을 잡고 노장군을 뵈러 가마.”서인경은 애초부터 태황태후의 회갑연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 말을 듣자, 차라리 오늘 밤 당장 생신을 치러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두 사람은 상왕부로 돌아왔고 연기준은 걸려있던 현빙보검을 꺼냈다. 날은 여전히 서늘한 빛을 내며 날카롭게 번들거렸다. 수많은 적의 피를 머금은 검이라 그런지 지금 손에 다시 쥐어도 그 위압은 변함없었다.서인경이 돌아오자 꼬막이는 금세 엄마 품에 안기려 팔을 벌렸다. 그녀는 꼬막이를 안은 채 연기준에게 다가갔다.“뭘 하려고 그러는 겁니까?”연기준은 현빙보검을 눈에 바짝 대고 살폈다.“예정훈의 말로는 이 칼날의 재질이 천년현빙이라더군. 녹이면 약재가 되어 백병을 고치고 만독을 풀 수 있으니 매우 귀하다고 했지. 현빙한철이 약이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서인경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옛 서책에 기록된 게 있습니다. 심신을 누그러뜨리고 간기를 고르게 하며 종기를 가라앉힐 뿐만 아니라 독도 풀어줄 수 있다고 했어요. 경련, 광증, 종독 같은 것도 다스린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이긴 한가 봅니다.”“본왕이 사람을 붙여 단 가를 감시하고 있다. 단 가 중 아픈 사람은 없고 최근 의원이 드나든 적도 없지. 한데 대황자부 쪽은 다르다. 요 며칠 진가이의 시녀가 약을 사러 자주 나왔다고 하더군. 게다가 전부 해독약이었다.”서인경은 그 말만 듣고도 바로 짚어낼 수 있었다.“아까 말했었지요? 예정임은 대황자부에 숨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럼… 중독된 사람이 예정임이라는 뜻입니까? 단 씨 부인을 부추겨 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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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0화

“이게 갖고 싶은 것이냐?”꼬막이는 더욱 신이 나서 큰소리로 외치며 두 손을 힘껏 흔들었다.서인경은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다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연기준은 꼬막이가 지나치게 들뜬 모습을 보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눈빛을 띠었다.그는 서인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피를 조금 써야겠다.”그 역시 원치 않았다. 만약 자신의 피로 가능하다면 결코 서인경을 다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 뜻을 곧바로 이해하고는 망설임도 없이 손가락을 내밀었다.“하십시오.”검날은 쇠를 자르듯 부드럽게 들어갔다. 검이 손가락에 닿았지만 서인경은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현빙은 그녀의 피를 머금자마자 즉시 금빛으로 번쩍였다. 곧이어 외부의 현빙층이 스르륵 벗겨지듯 떨어져 나가더니 안에서 황금빛 단도 하나가 드러났다. 얇고 투명했으며 현빙보검보다 더 날카로운 빛을 띠는 금색의 단검이었다.서인경은 넋을 잃은 듯 바라보았다. 이런 투명한 단검은 난생처음 보았던 것이다.“그러고 보니 팔대 장로들께서 말해준 게 있습니다. 검은 옷의 사내를 보호하는 홍하수(红河水)는 독이라고 했거든요. 아마… 이 현빙이 바로 그 해독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단검은... 또 다른 용도가 있겠지요.”연기준은 그 단검을 조심스레 거두어 넣었다.“본왕이 칼집을 만들어오게 하겠다. 그때는 방어용으로 네가 지니고 다니거라.”서인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의 현빙 파편을 주워 담았다.“전 이걸로 해독약을 만들어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이 물건이 제 손에 들어왔다는 건 나중에 큰 쓰임이 있다는 뜻일 겁니다.”자신이 걸어온 모든 길이 마치 보이지 않는 천명이 이끌어온 듯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현빙보검 문제도 해결했으니 이제 남은 건 남성용 용두반지였다.서인경은 잠시 생각하더니 반지를 연기준에게 건넸다.“이건 당신이 보관하세요. 제가 여의치 않는 상황이 된다면 당신이 이걸로 설산의 모든 생령을 통솔할 수 있을 테니까요.”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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