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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1화

“대황자께서 마침내 풀려나셨다니 참으로 경사로운 일이네요. 축하드립니다. 폐하께서도 대황자께서 진심으로 뉘우치고 계시다는 걸 아셨기에 다시 한번 새 출발 할 기회를 주신 거겠지요. 폐하의 깊은 뜻을 잘 헤아리셔서 앞으로 다시는 잘못을 범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대황자의 안색이 즉각 변했다.“황숙모는 정말 말솜씨가 날카로우시군요. 아홉 째 황숙께서도 사람을 볼 줄 아십니다.”“과찬이십니다.”대황자는 마치 솜에 주먹을 내지른 듯한 기분이 들어 속이 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그때 서왕비가 급히 다가왔다.“상왕비께서 오셨군요.”서인경은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올렸다.“황숙모를 뵙습니다.”서왕비는 환하게 웃었다.“어서 일어나세요. 오늘은 집안 잔치이니 상왕비께서도 너무 격식을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편히 계세요.”“동생!”어린아이의 앳된 외침과 함께 정화가 안쪽에서 달려 나와 두 팔을 벌려 꼬막이를 안으려 했다.“황숙모, 제가 동생을 데리고 갓 태어난 작은 동생을 보러 가도 되나요?”서왕비가 말했다.“상왕비께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후원이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으니 집안의 여인들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정화에게 아이를 맡기셔도 됩니다. 저는 상왕비를 모시고 다른 손님들께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서인경은 더 말하기도 어려워 꼬막이를 봉한설에게 넘기며 평이에게 당부했다.“가보거라. 조심하고.”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꼬막이를 안고 정화를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서왕비는 서인경의 손을 이끌고 오른쪽 뜰로 걸음을 옮겼다. 주변의 술렁이는 시선과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대황자의 눈빛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고작 상왕비 주제에. 서 씨 가문도 이미 끝장났는데 저렇게까지 대접할 가치가 있나? 서왕 숙모도 이젠 정신이 흐려진 모양이지.”대황자가 입에 걸리는 대로 말을 내뱉는 바람에 자리에 있던 이들은 더더욱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상왕부도, 대황자부도, 어느 쪽 하나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마침 그때 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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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2화

앞서 서인경이 태황태후의 부름을 받아 입궁했고 문책을 당하는 데다 어림군까지 동원되었다는 소문이 이미 퍼져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첨해야 할지 말지 망설이던 이들 역시 이제야 서왕부의 태도를 분명히 읽어냈다. 그들은 일제히 웃는 얼굴로서인경을 맞이했다.서왕비가 중히 여기는 인물이라면 어느 편에 서야 할지는 명백했다. 설령 태황태후의 심기를 거슬러 화를 입게 되더라도 앞에 서서 막아 줄 이는 서왕비였다.서인경이 이런 미묘한 움직임을 모를 리 없었으나 그녀는 그저 미소만 띠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 방에 모여 앉은 이들이 모두 황친국척이라는 사실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서로 연기를 하며 상황에 맞춰 움직일 뿐, 굳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갑작스레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상왕비의 위세가 날로 커지는군요. 오기 싫으셨다면 참석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평소엔 우리와 왕래도 없으시더니 서왕부의 세례 때에도 가장 늦게 도착했지요. 다들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서인경은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도발적인 표정을 한 단여월이 서 있었다.서인경은 차분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왕야께서 출경한 뒤로는 왕부의 모든 일을 제가 직접 챙겨야 했고 어린 세자도 돌봐야 했습니다. 그러니 바쁠 수밖에 없었지요. 평소 그대들과 자주 왕래하지 못한 점은 제 불찰입니다. 이미 사과드렸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확실히 월측비와 비교하지는 못합니다. 대황자부의 일은 회임 중인 진측비께서 맡아 처리하고 계시고 친정과 시가 모두 특별히 신경 쓸 일이 없을 테니 월측비께서는 당연히 한가하시겠지요. 참으로 부럽습니다.”후원에서 여인의 지위를 가르는 것은 오직 가사 권한뿐이었다. 단여월이 아무리 둔해도 서인경의 말이 자신의 몰락한 친정과 남편 집안에서도 진측비보다 못한 처지를 비꼬는 것임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그녀는 지금 제 무덤을 판 셈이었다.단여월은 얼굴빛이 어두워진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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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3화

비록 대황자부에서 아이를 품고 있는 이는 그녀였지만 그럴수록 서인경은 오히려 더 경계했다. 도무지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이 여인은 결코 겉으로 보이는 만큼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단여월이 서왕부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은 곧바로 대황자의 귀에 들어갔다.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그는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멍청한 것. 뒷수습할 능력도 없으면서 감히 본황자에게 화를 끌어들이다니. 가서 전해라. 다시는 함부로 사고 치지 말라고.”대황자는 귀부하던 날, 진가이가 문 앞에 나와 맞이하지 않았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그는 진가이에게 적잖은 불만을 품고 있었고 아이를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든 것을 눈에 거슬려 했다.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그는 오히려 진가이가 상황을 아는 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서인경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지 않았던가?그 이야기를 들은 대황자의 속은 더욱 들끓었다. 그 머리, 언젠가는 반드시 서인경이 되돌려 갚게 만들겠다고 그는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한편, 여인들이 모인 자리.단여월이 쫓겨난 뒤로는 더 이상 누구도 서인경에게 무례를 범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세례가 막 시작되려는 순간, 갑자기 장엄한 의장 행렬이 서왕부 대문 앞에 멈춰 섰다.하인들이 황급히 안으로 뛰어들어와 고했다.“태황태후 마마와 폐하, 그리고 황후 마마께서 친히 오시어 서왕부의 경사를 축하하신답니다.”서왕과 서왕비 역시 뜻밖의 일에 놀랐다. 보통 대신들의 집에 자손이 태어나거나 혼사가 있을 때, 황제는 예물만 보내고 오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직접 행차까지 했다. 이유를 헤아릴 겨를도 없이 그들은 모든 하객을 이끌고 앞마당에 나가 까맣게 늘어서 무릎을 꿇었다.황제와 황후가 태황태후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왔고 그 뒤로 태감과 궁녀들이 길게 늘어서 산처럼 쌓인 하사품을 들고 따라왔다.궁중에서 내려온 물건들이니 하나같이 귀한 것들이었고 다른 이들이 가져온 예물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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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4화

유가영은 몹시 난처한 듯 서인경을 힐끗 바라보며 어색한 얼굴로 급히 분위기를 수습했다.“가영은 태황태후께서 신첩을 아끼고 계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데 상왕부에서 가장 존귀한 분은 어디까지나 언니와 적장자이니 신첩이 감히 분수를 넘을 수는 없습니다. 훗날 언니께서 마음을 푸시어 신첩을 다시 부로 들여주시고 신첩과 뱃속 아이에게 명분을 허락해 주신다면 신첩은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그녀는 말을 잇는 동안 당장이라도 눈물을 쥐어짜낼 듯 눈가를 붉혔다.이 일련의 말은 서인경을 더욱 곤란한 처지로 몰아넣었다. 마치 모든 사람들에게 상왕의 총애를 받은 여인과 그 아이가 부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가 정실인 그녀의 질투 때문이라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태황태후의 궁으로 옮겨져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식이었다.옛 예법에서 질투는 여인에게 가장 큰 죄악이었다.서인경은 유가영의 연기를 바라보며 콩이가 태의원에서 전해 온 소식을 떠올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연기하고 있는데 대체 무엇을 믿고 이런단 말인가?서인경은 차라리 그녀가 황실의 혈통을 혼란스럽게 했을 가능성을 믿을지언정 연기준이 정말로 그녀를 건드렸다는 사실만큼은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황실 혈통을 속이는 일은 일가를 모조리 멸하는 중죄였다. 그런데 그녀가 과연 그런 짓을 했을까?태황태후는 차갑게 서인경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지금 눈앞의 이 여인이 몹시도 못마땅했다.“상왕부의 일은 서 씨 성을 가진 네가 좌우할 일이 아니다. 상왕비, 다시 말하겠다. 이 아이는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서인경은 정신을 가다듬고 태황태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태황태후의 말씀이 옳습니다. 만약 정말로 왕야의 아이라면 신첩은 마땅히 온 힘을 다해 보살필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사람을 보내어 왕야께 서신을 띄웠습니다. 왕야께서 친필로 이 아이가 자신의 혈육임을 인정하신다면 유 아가씨는 곧장 상왕부로 들어올 수 있을 것입니다. 신첩이 이토록 조심스러운 것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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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5화

세례가 정식으로 시작되자 맹은영과 서인경은 나란히 서 있었다.두 사람은 인파 한가운데 선 서왕비가 갓 태어난 세자를 위해 직접 목욕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향안 위에는 열세 분의 낭랑 신상이 모셔져 있었고 서왕비가 물을 적신 뒤에는 사람들도 차례로 대야에 붉은 대추와 용안, 땅콩 같은 것들을 넣었다. 산파는 길상스러운 말을 이어 갔고 자리는 온통 경사와 웃음으로 가득 찼다.꼬막이는 서인경의 품에 엎드린 채, 기운 없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그 멍한 표정은 마치 왜 저 작은 동생에게는 있고 자기에게는 없느냐고 묻는 듯했다.맹은영도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꼬막이가 만약 경성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세례와 만월연은 전부 서왕부보다 훨씬 성대하게 진행했을 겁니다.”봉한설과 평이는 뒤에서 의식의 절차 하나하나를 유난히도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무엇을 먼저 하고 그다음에 무엇을 하는지 작은 소리로 되뇌며 꼼꼼히 적어 두듯 기억하고 있었다. 열세 분 낭랑 신상의 이름만 해도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한참을 외워야 할 정도였다.서인경은 두 사람의 중얼거림을 듣다 물었다.“너희 둘, 지금 뭐 하고 있는 것이냐?”평이는 당당하게 대답했다.“남의 집 아이에게 있는 건 우리 세자에게도 다 있어야죠.”봉한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자 서인경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건 세례다. 태어난 지 사흘째에 하는 거지. 꼬막이는 사흘이 몇 번이나 지났으니 이미 늦었다.”그러나 봉한설과 평이는 끝까지 고개를 저었다. 누가 꼭 사흘이어야 한다고 했는가? 어차피 둘 다 돌도 안 지난 아기들인데 무슨 차별이냐는 태도였다.두 사람은 끝까지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서인경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꼬막이 역시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아이는 엎드린 자세에서 갑자기 몸을 꼿꼿이 세우더니 눈빛이 단번에 살아났다.서인경은 웃으며 아이의 볼을 가볍게 만졌다.“이렇게 어린데도 의식은 제법 챙기는구나.”꼬막이는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마치 자신이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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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6화

진국의 관리가 분노에 차 얼굴을 붉혔다.“대장군께서 이토록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니 팔황자 같은 패륜아가 길러질 수밖에 없었겠지요.”“누가 패륜아라는 것입니까!”야랑국의 관리도 물러서지 않고 탁자를 세차게 내리쳤다.“팔황자께서 잘못을 저질렀다면 가르칠 이는 우리 야랑국의 황제입니다. 언제부터 진국이 여기서 훈계질을 할 자격을 가졌단 말입니까? 당장 팔황자를 돌려보내세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야랑국도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란 걸 보여드리겠습니다.”양측이 팽팽히 맞서자 대전 안의 공기는 금방이라도 칼날이 부딪칠 듯 날카로워졌다.그 와중에도 예정민은 시종일관 한 나라의 군주다운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았다.“모두들 조금만 진정하시게.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을 텐데 상왕은 우선 관리들을 데리고 역관으로 가 쉬도록 하시게. 이 일은 얽힌 바가 많으니 짐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고 반드시 원만한 해결책을 내놓도록 하겠네.”연기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럼 폐하께서 수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팔황자께서는 우리 조정에 큰 민원을 일으켰고 딸을 잃은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이 그를 증오하고 있습니다. 팔황자께서 우리 조정에 하루 더 머무는 만큼, 위험 또한 커질 것입니다. 부디 폐하께서 조속히 결단을 내려 팔황자의 안위를 보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대전을 떠났다. 남겨진 야랑국의 대신들은 그 자리에 굳은 듯 서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이건 협박입니다. 저 상왕은 사람을 너무 얕잡아보는군요.”예정훈은 입전한 뒤로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연기준이 떠난 뒤에야 황제는 대전 한쪽에 서 있는 그를 발견했다.“훈아, 너는 방금 진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느냐? 이 일을 어떻게 보는지 말해보거라. 진국의 백성들이 정말로 정임을 해치려 하는 것이 사실이더냐?”예정훈이 그제야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아뢰옵니다, 폐하. 상왕의 말은 사실입니다. 딸을 잃은 부모들은 진상을 알고 나서 하나같이 여덟 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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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7화

황후는 이번에야 손을 멈췄지만 예정훈이 일부러 억울한 사람처럼 굴고 있는 모습을 보자 속에서 분노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폐하, 저 아이에게 속지 마십시오. 저자는 어릴 적부터 약한 척하며 연민을 사는 데 능했습니다. 겉보기와 달리 속셈이 가장 깊은 자입니다.”예정훈은 옷자락을 들어 올리며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모후의 말씀이 옳습니다. 죄를 인정합니다.”예정훈이 이처럼 나올수록 황후는 더욱 격분했고 반대로 황제의 눈에는 그가 점점 더 억울한 존재로 비쳤다.서인경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한마디 했을 것이다. 정말 잘도 연기한다고.결국 황후는 궁으로 돌아가 자숙하라는 명을 받았고 예정훈은 야랑국을 대표해 진국과의 모든 교섭을 전권으로 맡게 되었다. 반드시 이 일을 원만히 처리하라는 당부와 함께였다. 특권을 손에 쥔 예정훈은 궁을 나서자마자 곧장 역관으로 향했다.그 무렵, 연기준은 서신을 펼쳐 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음울함이 내려앉았다.무현은 바닥에 꿇어앉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분명 부하들이 관아의 역졸 몇을 붙여 그녀를 경성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한데 그녀가 감히 왕야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예정훈은 기미를 알아차리고 앞으로 나와 편지를 읽어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어이쿠, 이거 뒷마당에 불이 제대로 났군요.”연기준은 차갑게 그를 훑어보았다.“사흘 안에 예정임의 일을 해결하세요. 그리고 덕비와 본왕이 만날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예정훈은 편지를 다시 접어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태연하게 자리에 털썩 앉았다.“정말 저를 왕야의 심부름꾼쯤으로 아는 건 아니겠지요? 여긴 야랑국의 땅입니다. 상왕께서 부탁을 하려면 그에 걸맞은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연기준은 냉소를 머금고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조정 전체가 팔황자의 사람들로 가득한데도 스스로를 태자라 부를 수 있습니까? 당신이 야랑국에서 쥔 힘은 본왕만도 못합니다.”정곡을 찔리자 예정훈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알겠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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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8화

그날 밤, 야랑국의 황궁은 등불로 환히 밝혀졌다.황제는 연기준 일행을 연회에 초대했지만 팔황자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는 끝내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짐이 듣기로는 귀국의 열셋 째 황자가 아직 혼인하지 않았고 귀국 황제께서도 우리 야랑국과의 혼인을 고려하고 계신다 하더군. 마침 짐에게도 혼기가 찬 공주가 한 명 있으니 상왕이 오늘 한 번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는가?”연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두 나라의 우호를 잇는 일이라면 양국 모두에게 경사일 것입니다.”황제는 내관에게 눈짓을 보냈다.“공주를 들이도록 하라.”말이 끝나자 측전에서 젊고 고운 여인이 걸어 나왔다. 여인은 황제 곁으로 다가와 예를 올린 뒤 그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곧이어 황제가 그녀를 소개해 주었다.“이 아이가 짐의 육공주 예정서네. 나이도 귀국의 열셋 째 황자와 비슷하고 생모는 짐이 가장 총애했던 가비지. 상왕이 보기에 어떠한가?”연기준은 눈길을 한 번 스치듯 보냈다.“아주 좋습니다. 열셋 째 황자와 무척 잘 어울립니다.”육공주는 연기준을 바라보다가 수줍게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황제는 흡족한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좋네! 이 일은 이렇게 정하도록 하지. 오늘부로 진국과 야랑국은 혼인으로 맺어진 사이가 되어 두 나라는 형제의 나라로 오래도록 우의를 나눌 것이네!”양국의 대신들이 잔을 들어 축하했다. 서너 마디 말로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 없는 두 남녀의 일생이 그렇게 정해졌다.술잔이 몇 순배 더 오가자 황제는 살짝 취기가 오른 기색이었다. 오늘 밤은 육공주의 혼사를 정한 날이니 황제는 향귀비를 찾아 위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는 진국의 일을 예정훈에게 맡기고 자리를 떠났다. 황제가 물러나자 양측의 관리들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긴 지는 이미 오래였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싸울 수도, 욕설을 퍼부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모두 마음속에 쌓인 것을 술로 풀며 상대를 쓰러뜨릴 생각뿐이었다.대전 안은 곧 잔이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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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9화

연기준의 미간에는 차가운 기운이 가득 서려 있었다.“본왕은 평생 단 한 사람만을 부인으로 맞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시 꺼낼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본왕이 이 자리에 온 이유는 모후와 당신이 아직 혼인하지 않았던 시절의 일을 묻기 위해서입니다.”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이었건만 돌아온 것은 이렇게 노골적인 거절이었다. 그러자 덕비의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 그러나 곧 예정연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덕비는 마음속의 불쾌함을 잠시 눌러 두었다.“미리 말해 두겠지만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연기준은 그 말의 뜻을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앞으로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그의 일생에서 단 한 번도 저버리지 않을 사람은 오직 서인경뿐이었다.연기준은 자리에 앉았지만 덕비가 건네준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그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본 덕비는 웃으며 말했다.“역시 언니의 아들이군요. 언니와 똑같이 신중합니다. 예전에도 제가 언니에게 가장 좋아하던 과자를 가져다주면 겉으로는 기뻐하면서 방으로 돌아가서는 바로 버리곤 했지요. 언니는 언제나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만든 음식만 드셨습니다. 참 정도 없는 사람이지요. 친여동생인 저에게조차 온갖 경계를 다 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경계하며 사는 삶이 힘들지는 않았을까요?”연기준은 그 말 속에서 묘한 단서를 포착했다.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아이라면 결코 자신처럼 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자신이라 해도 형제가 건넨 음식을 모조리 버릴 만큼까지 조심스럽지는 않았다. 더구나 기억 속 진국의 후궁에서 모후는 누구에게나 불신을 품고 있던 인물도 아니었다.연기준은 다시 덕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모후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덕비는 그의 눈에 떠오른 의문을 알아챘다. 남들이 모르는 사실을 쥐고 있다는 느낌은 상대의 숨통을 움켜쥔 듯한 쾌감을 주었다. 하필 그 상대가 자신이 한때 가장 질투했던 여인의 아들이라면 더더욱 그랬다.덕비의 마음은 한없이 시원해졌다.“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당신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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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0화

“저는 당신의 외조부가 마음을 돌려 그 좋은 것들을 저에게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가 저를 가문의 계승자로 선택해 주기만 했다면 그때 당신 모후의 행방을 알려주었을 거예요. 한데 그는 그 모든 것을 무덤까지 가져갔지 저에게는 손톱만큼도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에 둔 건, 당신 모후를 찾는 일과 우리 자식들을 혼인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말해 보십시오. 참 우습지 않습니까?”덕비는 말을 마칠 즈음, 얼굴에 떠오른 감정이 슬픔인지 허탈함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연기준은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미 분노를 억누르기 힘든 상태였다.“한순간의 질투 때문에 친언니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만약 아무도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면 그 결말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덕비의 얼굴에는 놀랍도록 후회의 기색이 없었다. 이 수십 년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그것도 다 그녀의 운명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저는 평생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야 했어요. 당신은 모릅니다. 당신의 모후가 있던 그 몇 해 동안, 사람들은 금 가에 천재적인 장녀만 있는 줄 알았지 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았거든요. 한데 저는 그녀보다 못한 게 없어요! 당신이 제 입장이었다면 과연 그걸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금 가… 금족.연기준의 사고가 그 단어에 멈췄다. 짐작은 했지만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졌다.그는 더 이상 이 자리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그날, 만약 고산국의 그 부부가 모후를 구하지 않았다면 황량한 산속에 홀로 남겨진 모후가 어떤 운명을 맞았을지 그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짐승에게 찢겼을까? 아니면 흉악한 자들의 손에 떨어졌을까?지금 떠올려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다행히 그녀를 거둔 이는 선한 사람들이었고 훗날 열셋 째 황숙을 만났다. 그 모든 것은 불행 중 다행에 속했다.연기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때 모후를 금 가에서 내쫓은 건 당신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모후와 당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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