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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1화

열다섯 째 황자는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그럼 당연히 열셋 째 형님이겠죠.”서인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황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조급해질 수밖에 없고. 그러니 먼저 손을 쓰려 들 거야. 너는 딱 한 가지만 하면 된다. 후궁의 황자들이 너와 마찬가지로 열셋 째 황자 편에 서도록 분위기를 이끄는 것. 그 외의 일은 전부 대황자에게 맡기거라.”열다섯 째 황자의 눈빛이 반짝였다.“산 위에 앉아 호랑이 싸움 구경하기!”서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들 사이의 갈등은 언젠가 반드시 터지게 되어 있다. 너는 단 한 걸음만 앞으로 밀어 주면 돼. 서로가 서로에게 위협이라는 걸 자각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두 호랑이가 싸우면 반드시 한쪽은 다치게 되기 마련이고 그때가 바로 네 기회다.”열다섯 째 황자는 가르침을 받은 듯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사촌 누님께서 하신 말씀은 정말 똑같군요.”서인경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무엇이 똑같다는 것이냐?”열다섯 째 황자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급히 얼버무렸다.“아, 아니요. 신 황귀비께서 하신 말씀이 사촌 누님과 완전히 똑같아서요.”서인경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다만 신 황귀비가 열다섯 째 황자를 태자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너무 노골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칫 조급함이 일을 그르칠까 염려스러웠다.하지만 열다섯 째 황자는 태연했다.“사촌 누님, 걱정 마세요. 제 선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배후에서 길을 잡아주는 인물이 있었기에 열다섯 째 황자는 그 선택에 단 한점의 의심도 두지 않았다. 그는 서인경의 처소에 한 시진가량 머문 뒤 자리를 떴다.서인경이 막 등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려던 때,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인경이 머무는 이 전각에는 궁녀 하나 배치되지 않아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적막한 공간에 울리는 노크 소리는 유난히 돌출되고 기이하게 느껴졌다.“왕비 마마, 주무십니까?”궁녀의 목소리였다.서인경은 겉옷을 걸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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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2화

서인경은 단은설의 속내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황제가 이미 이곳에 있는 이상 그녀는 더 말할 수 없어 침상 곁에 몸을 낮췄다.“설 황귀비, 손을 내밀어 주십시오. 맥을 짚어 보겠습니다.”단은설이 가느다란 손목을 내밀었다.피부가 본래도 희긴 했지만 지금은 병색이 도드라질 만큼 창백했다. 지난번 서인경이 진맥했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문득 예전에 호청과 함께 알아냈던 일이 떠올랐다. 단은설이 자신의 피로 황제를 부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서인경은 속으로 계산했다. 최근 황제가 요구하는 혈량이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단은설의 몸이 이 지경까지 쇠약해진 게 분명했다.생각을 정리하며 서인경은 다섯 손가락을 단은설의 손목 위에 얹었다. 기혈은 끊어질 듯 흩어져 있었고 이대로 몸을 혹사한다면 머지않아 백골만 남을 상태였다.그러나 단은설의 겉모습은 달랐다. 과도한 실혈 탓에 피부가 지나치게 희어졌을 뿐, 기운만 놓고 보면 오히려 왕성해 보였다.서인경은 즉시 짐작했다. 단은설은 억지로 정신을 끌어올리는 약물을 복용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래서 얼굴빛과 실제 몸 상태가 따로 노는 것이리라.이런 맥이라면 태의가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유일한 가능성은 하나였다. 황제가 태의들에게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지시했을 터.서인경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거두었다.“상왕비, 본궁의 몸 상태는 어떠하냐? 요즘 자주 구역질이 나고 잠도 많아졌는데… 혹시 내 뱃속에 폐하의 혈맥이 자리한 것이냐?”서인경은 속으로 냉소했다. 이미 움직이는 혈고가 되어 거의 말라붙은 몸이라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인데 회임이라니. 이 생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러나 태의들조차 진실을 말하지 않는 상황이고 황제까지 곁에 있는 지금, 서인경이 굳이 사실을 들춰낼 이유는 없었다.“마마께서는 과로로 인한 허증이 있으신 듯합니다. 잠시 침상에 누워 쉬시며 기혈을 보하는 약을 드시고 조리를 하시면 차차 회복되실 것입니다.”단은설은 마지막까지 품고 있던 기대가 꺾이자 얼굴에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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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3화

그 안에 누군가 살고 있기는 한 걸까?그 시각, 정채의 침실.잠들어 있던 연기준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단숨에 상반신을 일으켜 앉았다. 세차게 뛰는 가슴은 한참이 지나도 진정되지 않았다.그로부터 두어 장 거리 떨어진 다른 침상 위. 달빛에 어렴풋이 드러난 실루엣 하나가 아직도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잠들지 않고 있었다.연기준의 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사정없는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당신처럼 평생 전장을 전전한 사람이 갑자기 악몽에 놀라 깨다니요? 전장에서 죽인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귀신이 찾아온 겁니까?”연기준은 그를 보지 않았고 시선은 창밖으로 쏟아지는 밝은 달빛 위에 머물러 있었다.“그녀에게 일이 생긴 꿈을 꿨다.”그 말에 어둠 속 그림자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누구 말입니까? 왕비 마마?”연기준은 침상에서 내려와 화접을 불어 밝히고 촛불을 켰다. 흔들리는 불빛이 옆 침상 위의 사람을 비췄다.실종된 지 오래된 진방옥이었다. 다만 그의 얼굴 반쪽은 붕대로 감겨 있었고 안색은 몹시 수척했다.폭발이 일어났던 그날, 그는 폭심 한가운데에 있었기에 미처 피할 틈도 없었다. 연기준이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미 불바다 속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서인경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자 조롱하던 기색은 단숨에 사라졌다.“꿈에서 그녀가 어떻게 됐다는 겁니까?”연기준의 얼굴은 무거웠다.“폐하에게 갇혔다. 서둘러 진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본왕에게 일이 생겼다는 걸 알면 폐하께서는 상왕부를 그냥 두지 않을 거다.”그 말을 듣자 진방옥은 다시 맥없이 몸을 눕혔다.“말은 쉽지요. 지금 야랑국 황제가 밖으로 뭐라 떠들고 있는지 압니까? 왕야께서 군사 기밀을 훔치다 폭사했다고 공표했습니다. 진국 폐하께서는 조사해 보지도 않고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고요. 이건 두 나라 모두가 왕야를 원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왕야께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야랑국을 벗어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갈 거예요. 돌아가고 싶으면 당신 혼자 가십시오. 전 엮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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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4화

서인경은 자신이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눈을 떴을 때,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음울한 밀실이었다. 숯불 위에서 흔들리는 불빛이 방 안을 어둡게 비추고 있었고 그 불빛 아래에는 녹이 슨 형구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었으며 벽면에는 이미 오래전에 말라붙은 핏자국들이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공기에는 썩은 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는데 이곳은 완전히 밀폐된 취조실이었다.서인경은 후궁이 깨끗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장소까지 존재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녀는 철사슬에 묶인 채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고요한 공기 속에서 쇠사슬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그 소리에 반응하듯 밀실 밖의 사람이 움직였다. 곧 맞은편의 벽이 회전하듯 열리더니 단은설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왔다.“서인경, 드디어 내 손에 떨어졌구나.”그녀의 손에는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가 들려 있었다. 단은설의 얼굴에는 광기 어린 쾌감이 서려 있었다.서인경은 눈을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앞에서 결코 기죽을 생각은 없었다.“나는 상왕비다. 이유 없이 사라지면 곧 누군가 알아차릴 거다. 단은설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어디 한번 나를 건드려 봐.”단은설은 전혀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하! 아직도 꿈을 꾸는구나, 서인경. 연기준은 야랑국에서 죽었고 상왕부의 여주인 자리도, 네 아들이 가진 세자 신분도 곧 유가영과 그녀 배 속의 아이에게 넘어갈 거야. 너와 네 아들은 곧 세상에서 잊힐 것이고 영원히 이 좁은 공간에 갇혀 폐하께서 쥐고 노는 개미가 되는 거지. 설령 네 실종을 누군가 눈치채더라도 폐하에게는 의심을 잠재울 방법이 얼마든지 있어.”서인경은 단은설의 광기에 찬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폐하께서는 왜 나를 잡는 것이지?”그 말을 들은 순간, 단은설의 표정은 더없이 만족스러워졌다.“물론 내 공이지. 내가 폐하께 말했거든. 네가 화사독을 해독할 수 있다고. 그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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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5화

서인경은 기가 차 말문이 막혔다.“네 피로 봉한설을 치료한 건, 네가 스스로 동의한 일이었어. 그 대가로 단 가가 경성에 발붙일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고 온갖 편의를 제공했지. 그건 명백한 보상이었어. 엄밀히 말하면 너희는 서로 합의한 거래 관계였던 거지. 네가 봉한설을 완전히 치료하지 못했기 때문에 연기준이 다른 방법을 택한 거야. 그때 이미 네가 쓸모 없어졌다고 해도 그는 단 가에 준 것들을 단 한 번도 거둬들이지 않았어. 너희가 스스로 만족할 줄 몰랐기 때문에 단 가가 오늘의 처지에 이른 거지. 그리고 네가 황궁에 들어와 폐하의 혈고가 된 것도 단 가와 네 후궁 자리를 위해 스스로 선택한 일이지 않아? 결국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릴 수는 없어.”서인경의 말은 조리 정연했지만 단은설이 그 말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단은설에게 지금의 비극과 추락은 모두 서인경 때문이었다. 서인경만 없었다면 자신이 바로 상왕비가 되었을 것이고 사랑하는 남자와 혼인해 아이를 낳고 평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서인경이 빼앗아 갔다고 단은설은 굳게 믿고 있었다.억울함, 분노,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증오가 뒤엉켰다.단은설은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를 집어 들고 서인경의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흑백을 전도하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군. 오늘 여기서 네 이 얼굴을 망가뜨려 주겠어. 황천에 가서도, 다음 생에 가서도 연기준이 널 알아보지 못하게 말이야!”타들어 가는 열기가 밀려왔다. 서인경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네 몸은 이미 몇 달도 남지 않았어. 나 말고는 아무도 네 목숨을 이어 줄 수 없지.”단은설의 동작이 멈췄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서인경을 노려보았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그 순간, 서인경은 확신했다.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단은설은 자신의 몸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서인경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과도한 실혈로 이미 몸이 망가졌어. 이 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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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6화

단은설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예, 폐하.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그제야 황제는 서인경을 바라보았다. 이전의 형식적인 예의는 온데간데없었고 그 눈빛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짙은 욕망이 깔려 있었다.“상왕비. 상왕의 체면을 봐서 짐은 너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장생불사의 술법을 내놓거라. 그러면 남은 생은 결코 박대하지 않을 것이니.”서인경은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했다.“어떻게 박대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상왕을 다시 살려 주실 겁니까? 아니면 저를 다시 상왕부로 돌려보내 우리 가족이 다시 모이게 해주실 겁니까?”황제의 얼굴이 굳어졌다.“짐이 성밖에 따로 저택 하나를 마련해 주겠다. 그 안에서 나오지 말거라. 외부에 존재를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비단옷을 하사하고 진수성찬을 차려주며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마. 상왕은 이미 죽었고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세자는 네 곁에서 키워도 좋다. 다만 자신의 출신을 알아서는 안 되고 아비가 누구인지도 알아서는 안 된다. 이를 어기면 즉시 참수다.”서인경은 마치 천년 묵은 농담을 들은 듯했다.“폐하의 뜻은 저희 모자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라는 말씀이군요. 그런 삶에 부귀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거처만 바뀐 감옥일 뿐이지요.”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상왕비. 상왕은 타국의 군사 기밀을 훔치는 중죄를 저질러 천하의 공분을 샀다. 그럼에도 짐이 그대들 모자의 목숨을 남겨둔 것만으로도 은혜를 베푼 것이지. 분수를 알고 얘기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짐은 언제든 상왕부의 치료를 끊고 역병에 걸린 그 아이를 불태워 없앨 수 있다.”서인경은 속이 뒤집히는 듯한 혐오를 느꼈다.“상왕이 야랑국의 군사 기밀을 훔쳤는지 아닌지는 폐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상왕 연기준이 없는 진국을 외적이 침범하면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설령 폐하 한 분만 장생불사한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황제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연기준 하나 없다고 해서 진국에 외적을 막을 자가 단 한 명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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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7화

황제는 서인경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잠시 후, 냉소가 새어 나왔다.“상왕비, 헛된 꾀는 거두는 것이 좋겠다. 짐을 속일 생각은 하지 말거라. 일불락 후인의 의술이 밖으로 전해질 리 없다. 설령 그 강호 의원이 정말 일불락의 후손이었다 해도 결코 너에게 의술을 전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거 연 씨의 조상 연강호가 홀로 설산을 넘을 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온 것은 아니다. 짐이 일불락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 말거라.”서인경의 심장은 크게 요동쳤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감정을 눌러 담아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했다. 끝까지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폐하께서 그렇게 단정하신다면 저로서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서 씨 가문은 이미 멸문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폐하께서 의심하시는 일불락의 후손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부모의 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길도 없지요. 존재하지도 않는 장생불사의 술법 하나 때문에 친동생을 죽이고 천하의 백성을 외면한 군주라면 세상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황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격분이 치밀어 올라 그는 손바닥을 휘둘렀다.찰싹!서인경의 뺨에 날 선 통증이 번지더니 머릿속이 울리듯 웅웅거렸다.“참으로 대담한 상왕비로다! 감히 짐을 협박하는 것이냐? 상왕의 자식이 죽든 말든 개의치 않겠다면 짐이 소원을 들어주마. 장생불사의 술법을 내놓기 전까지 이곳에서 평생 빛 한 점 없는 세월을 보내게 해주겠다. 짐에게는 그대를 괴롭힐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황제는 등을 돌려 그대로 자리를 떴다. 서인경은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천 번을 계산하고 대비했으나 마지막에 발목이 잡힐 줄은 몰랐다.화사독 하나가 그녀의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할 줄이야.황제가 상왕부로 보낸 사람들은 공기 속에 가득 찬 소독약 냄새만 맡고도 감염될까 두려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황제는 분명히 명했다. 상왕부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있는지 확인하라고.그러나 그들은 감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담장 너머로 기름과 횃불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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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8화

연기준은 고집스럽게 서인경을 이 시대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그는 더 기다릴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진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이튿날, 방 안에서 갑작스러운 소음이 울렸다.이내 한쪽 벽이 회전하듯 열리며 단평안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음식 함이 들려 있었다.그는 탁자 앞으로 다가가 함을 열고 안에 든 찐빵과 절임 반찬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두 분, 일단 이걸로 허기만 달래십시오. 요즘 성 안의 경계가 너무 삼엄해서 출입할 때 가져가는 물건 하나하나까지 다 검사합니다. 제대로 된 음식을 가져왔다간 어디서 났는지, 어디로 가는지 꼬치꼬치 캐물을 겁니다. 그래서 성 밖에서 밭일하는 백성들에게서 그들이 한낮에 밭두렁에 앉아 먹는 점심을 샀습니다. 일단 배부터 채우는 게 우선이니까요.”그는 말을 마치고는 품속에서 하얀 도자기 병 하나를 꺼내 진방옥 곁으로 다가갔다.“이건 새로 구해 온 약입니다. 상처 치료에 가장 좋다고 하더군요. 제가 갈아 드릴까요?”진방옥은 손을 내저으며 일어나 찐빵부터 움켜쥐었다.“됐습니다. 그대가 가져온 것들이 왕비 마마의 약보다 좋을 리 있겠습니까? 괜히 흉터나 남기면 이 잘난 얼굴을 어쩌려고요. 진국으로 돌아가면 왕비 마마를 찾을 겁니다. 그 사람 손이라면 제 미모를 반드시 되돌려 줄 테니까.”연기준은 그를 힐끗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목숨보다 얼굴이 중요하다면 그냥 내버려 두거라.”단평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인정합니다. 이 약이 왕비 마마의 것만 못한 건 사실입니다. 한데 이게 제가 구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더 좋은 약을 찾으려면 움직임이 커지고 그러면 분명 조정의 눈에 띌 겁니다. 얼굴을 논하기 전에 우선 살아서 진국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진방옥은 속이 답답했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단평안에게 붕대를 풀게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연기준은 소박한 점심을 먹으며 물었다.“밖의 상황은 어떠냐?”단평안은 진방옥의 붕대를 풀면서도 한편으로는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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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9화

금족은 예로부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비밀 통로를 파두는 걸 즐겼다. 이 사실은 연기준이 서인경이 설산에서 가져온, 일불락과 관련된 책을 읽다가 알게 된 것이었다.연기준은 처음 밀도를 통해 들어왔을 때부터 이 지하 통로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단평안에게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라고 당부해 두었는데 뜻밖에도 정말 성과가 있었던 것이다.연기준은 반쯤 먹다 만 찐빵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지금 가자.”“저도 갈 겁니다. 잠깐만요.”진방옥은 아직 배가 덜 찼는지 따라나서며 찐빵 하나를 더 움켜쥐었다.연기준의 등을 바라보며 단평안은 이날 아침 진국에서 전달받은 소식을 떠올렸다. 마음이 가라앉았지만 잠시 고민한 끝에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했다.단평안은 두 사람을 데리고 밀도의 중간 지점까지 갔다. 주변과 다를 것 없는 검은 벽면은 겉보기엔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였다.그는 벽 모서리를 더듬어 내려가다 아주 미세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찾아냈다. 그곳을 힘주어 누르자 옆의 벽면이 갑자기 안쪽으로 꺼져 들어가더니 새로운 밀도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와, 진짜 있네요. 왕야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이렇게 숨겨 놨는데 대체 어떻게 찾은 겁니까?”단평안이 말했다.“여긴 다른 곳보다 바람이 조금 더 셉니다. 완전히 밀폐된 공간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세히 살펴봤는데 역시나 맞았어요. 일단 들어갑시다.”그는 옆에 놓여 있던 횃불을 집어 들고 새로 열린 밀도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반대편 밀도는 훨씬 넓었고 바닥도 고르고 반듯했다. 벽면 역시 단순한 흑색이 아니라 장식이 더해져 있었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진방옥이 절로 혀를 찼다.“족장이 살던 곳은 지하까지도 남다르네요. 격이 달라요, 격이.”연기준의 시선이 벽면의 문양 위를 훑었다. 자세히 보니 무공의 초식이나 비결서 같은 형상이었다. 금족은 야명주를 산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만의 독문 무공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오히려 금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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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0화

연기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생각을 바꿨다.그래, 그냥 안기게 두자. 남자한테 한 번 안긴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까.세 사람은 긴 내리막길을 한참이나 걸어 내려갔다. 중간중간 벽이 움푹 파인 공간들이 나타났지만 그 안에는 나무 침상 하나씩만 놓여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진방옥은 볼수록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침상들이 빈 상태로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습이 오히려 섬뜩했다. 사람이 누웠던 흔적조차 없이 텅 비어 있다는 점이 더더욱 그를 오싹하게 만들었다.손발이 얼어붙을 듯 차가워지고 더 내려가면 사람 자체가 얼음덩이가 될 것 같다고 느낄 즈음, 앞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빛이 꺾이는 모퉁이를 지나자 지금까지 지나온 곳들 가운데 가장 넓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들은 그 광경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공간은 넓었지만 한가운데에는 침상 하나만 놓여 있었다. 앞서 보았던 것들보다 훨씬 크고 재질 또한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고급스러웠다. 상등의 황화리 목재로 만든 침상이었다. 그리고 그 침상 위에는 한 노인이 누워 있었다.그는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평온했고 두 눈은 가지런히 감겨 있었으며 두 손은 배 위에서 차분히 포개져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깊은 잠에 든 사람 같았다.노인은 진홍빛 수의를 입고 있었고 옷차림은 흠 하나 없이 단정했다. 천의 질만 봐도 값비싼 물건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빛의 근원은 노인의 머리 위에 놓인 거대한 야명주였다.연기준은 천천히 다가가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가슴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얼굴은 기억 속 어머니의 얼굴과 점점 겹쳐 보였다.연기준은 확신했다. 이 사람은 금족의 족장이며, 어머니의 친부. 곧, 자신의 외조부일 것이라고.금족은 토장을 하지 않는다. 대신 족내의 풍수 좋은 곳에 지궁을 만들어 그곳에 안치한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바로 이곳처럼 말이다.족내에서 숨을 거둔 사람들은 모두 이 지궁으로 들어온다. 지위가 높을수록 안치되는 위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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