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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1화

진방옥의 얼굴에는 충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비록 얼굴이 붕대로 감겨 있었지만 그 놀란 눈빛만큼은 가릴 수가 없었다.“방금 산 저 두 채의 집, 돈도 꽤 들었잖아요. 그걸 그냥 터뜨려 버린다고요? 안 아깝습니까?”단평안의 얼굴에는 그 특유의 한량 기질이 묻어 있었다. 돈에 연연하지 않는, 제멋대로이면서도 당당한 표정이었다.“돈이란 건 원래 몸 밖의 물건입니다. 쓰면 다시 벌면 되는 거예요. 능력 있는 사람은 어떻게 벌지를 고민하지, 능력 없는 사람만 돈을 쌓아두는 데 집착합니다.”진방옥은 과장되게 엄지를 치켜세웠다.“와, 이거지. 형님, 전 앞으로 형님만 믿고 갑니다. 절 부자로 만들어 주세요!”연기준은 두 사람이 농담을 주고받는 걸 듣다가 말없이 등을 돌렸다.“네 말대로 진행해.”다른 곳은 괜찮았지만 입구 근처의 벽에는 금족의 무공 동작들이 그림으로 남아 있었다.연기준은 검을 들어 올렸다. 동작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동시에 벽의 그림을 모조리 베어냈다.검광은 번개처럼 번뜩였고 움직임은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칼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며 고요한 비밀 통로 안에서 하나의 리듬을 이루었다.진방옥은 통로 입구에 다리를 꼬고 앉아 폭약을 조제하며 감탄 섞인 투로 말했다.“참, 서인경은 무슨 복이 이렇게 많대? 현대로부터 오자마자 싸움도 잘하고 계략도 뛰어난 남편을 만나다니. 그것도 현 왕조의 상왕이잖아. 조상 묘에서 연기가 났나?”단평안은 할 일이 없어 옆에 앉아 있다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연이란 게 원래 그런 거지요. 당신도 너무 부러워하진 마세요. 진국으로 돌아가면 당신 인연이 나타날지도 모릅니다.”진방옥의 표정에는 별다른 기대가 담기지 않았다.“전 별로 부럽지 않습니다. 여자가 있다고 다 좋은 건 아니잖아요. 고대 여자들은 삼종사덕을 배웠다지만 제가 본 사람들 중에 딱히 현명한 사람도 없었습니다.”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리 둘째 누님만 봐도 그래요. 나중에 가면 대황자를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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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2화

진방옥은 진가이가 저질렀던 일들을 떠올릴 때마다, 특히 여국에 머물던 시절 자신을 협박하며 내뱉었던 말들을 생각할 때마다, 서늘함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어릴 적,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주고 싶었던 그 둘째 누나는 이미 기억 속의 사람이 아니었다. 학생 시절, 현대에서 읽었던 수많은 청춘 통증 소설 속에서 귀가 닳도록 보았던 단어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물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달라졌다.그때는 아무 감흥 없이 넘겼던 말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뜻이 얼마나 잔인한지 뼛속 깊이 실감하고 있었다.그럼에도 진방옥의 마음속에는 진가이를 향한 원망이 좀처럼 자리 잡지 못했다.어릴 적, 진가이의 얼굴 위로 떨어졌던 수많은 뺨, 몸 위로 내려쳤던 몽둥이, 코앞에서 쏟아졌던 모욕과 저주. 그 모든 것이 그녀를 오늘의 모습으로 몰아넣은 진짜 원인이었기 때문이었다.진가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진 가 역시 무고하지 않았다.그리고 집안에서 가장 귀한 장남으로 대접받으며 살아온 그 역시 결코 결백하지 않았다.그가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 원래의 진방옥은 진가이를 지켜 주기는커녕 함께 손을 보태어 때리고 모욕하고 짓밟았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결국 모든 것은 인과였고 각자가 짊어진 몫의 대가일 뿐이었다.진방옥은 화약을 조제하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다음에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말로, 어떤 방법으로 그녀를 돌이킬 수 있을까?부디 더 큰 죄를 짓지 않기를. 더 많은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기를.그렇지 않다면 자신조차 그녀를 어떻게 구해야 할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그 시각, 멀리 진국에 있는 진가이는 한 찻집의 조용한 별실에 앉아 있었다.맞은편에는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예정임이 자리하고 있었다.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그러나 진가이의 눈에는 그 미소 뒤에 언제든 자신을 나락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차가운 기색이 숨어 있는 듯 보였다.예정임의 시선이 진가이의 불룩한 배 위를 훑었다.“아이를 가졌으니 배짱도 붙었나 보군. 얼굴에 윤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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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3화

진가이는 온몸의 떨림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이번에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어떤 수를 써서라도 예정임과의 연결을 끊어내려 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 사실을 다시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예정임은 끝내 진가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요즘 그의 침상에는 하루도 여자가 끊이지 않았지만 진가이가 주는 자극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다.그는 침상에 기대어 진가이의 머리를 눌렀고 진가이는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절정의 끝자락에서, 그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여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나는 상왕비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고 믿지 않는다. 가서 대황자를 떠보거라.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진가이는 고개를 들고 몸에 남은 흔적과 수치를 지워내듯 차분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폐하께서 아직 대황자를 경계하고 계셔서 오랫동안 입궁조차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팔황자께서 그가 더 많은 걸 알아내시려면 뒤에서 한 번쯤은 힘을 실어주셔야 할 겁니다.”예정임은 낮게 웃으며 진가이의 복숭아처럼 붉어진 뺨을 집었다.“네 말이 과연 나를 위한 건지, 아니면 연강헌을 다시 끌어올리려는 속셈인지 도무지 모르겠군.”진가이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저는 오직 팔황자만을 생각합니다. 장차 우리 아이가 진국의 황좌에 오르면 팔황자께도, 저에게도 모두 이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팔황자 편입니다.”예정임은 만족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갖춰 입었다. 진가이가 혼자 옷을 입기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드물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도왔다.“내 아들을 잘 지켜라. 앞으로 네 앞날은 길 테니.”그가 방을 나서자 진가이는 그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몸이 휘청이며 물러서는 순간 갑작스러운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아까부터 참아왔던 것이었다. 방 안에 남아 있던 눅진한 기운을 이미 견딜 수 없는 상태였다.문이 닫히자마자 진가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거칠게 토해냈다.속이 뒤집히는 감각과 죽음을 면한 뒤의 공포가 뒤섞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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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4화

대황자는 진가이의 긴장한 기색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녀가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는 것도,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일을 가리려 애쓰고 있다는 것도 그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그는 진가이의 소매를 거칠게 움켜쥐어 사람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 아래, 작은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도리어 지나치게 선연해 보였다.진가이는 겁에 질려 숨이 막힐 듯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차, 찻물을 실수로 쏟았습니다.”“물?”대황자는 차갑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진가이의 옷자락을 거칠게 잡아당겼다.짧은 비명이 터졌고 피할 새도 없이 그녀는 침상 위로 밀려났다.“찻물인지 아닌지는 내가 직접 확인해 보면 알겠지.”진가이는 그제야 마음속으로 안도의 숨을 삼켰다. 아까 예정임이 아이를 의식해 선을 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대황자는 확인을 마치고서야 좁고 어색한 감촉에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전의 흔적과는 분명 달랐다. 분노로 일그러졌던 얼굴에 마침내 옅은 웃음이 번졌다.“내가 너를 오해했군. 그렇다면 이제 직접 행동으로 사과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진가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의심에 대한 공포인지, 아니면 아이에 대한 불안 때문인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그녀는 두 손으로 그를 밀어냈다.“아… 아이. 저희 아이가 있습니다.”대황자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막무가내였지만 움직임만큼은 조심스러웠다.“괜찮다. 태의에게 물었는데 조심하면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내가 알아서 하겠다.”진가이는 끝내 거부하지 못했다.그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순간, 진가이는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어릴 적 진 가에서 겪었던 모욕과 폭력. 그리고 지금 대황자의 측비가 된 뒤에도 그녀의 삶은 여전히 조심스럽기만 했다. 언제쯤이면 누군가의 손아귀에 쥐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상왕이 상왕비만을 아낀다는 이야기는 경성의 모든 여인들이 부러워하는 전설처럼 전해졌다. 자신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진가이는 속으로 되뇌었다.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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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5화

그런 생각이 미치자 대황자는 돌아가면 태의를 불러 단여월의 몸부터 살펴보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정말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면 굳이 측비의 자리를 계속 지켜줄 이유도 없을 테니 말이다.한편 그 시각, 단여월은 후궁 안에 있는 자신의 처소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가올 일을 알 리 없는 그녀는 오히려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진가이, 이번엔 완전히 끝장입니다.”단은설은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무슨 말이야?”단여월은 숨길 생각도 없이 말했다.“오늘 누군가가 문틈으로 쪽지 하나를 밀어 넣었습니다. 진가이가 찻집 별실에서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내용이었지요. 마침 저도 직접 봤습니다. 진가이가 찻집에 들어가더니 곧장 별실로 올라가더라니까요.”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누군지는 못 봤지만 대낮에 찻집, 그것도 제일 은밀한 방으로 들어간 거면 뻔하지 않습니까? 분명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한 겁니다.”이야기가 거기까지 가자 단여월의 얼굴엔 흥분이 가득 찼다.“그래서 제가 직접 쪽지를 써서 대황자 서재에 몰래 두고 왔어요.”말을 하며 그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언니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전 찻집에서 그 난리 나는 꼴을 구경하고 있었을 겁니다. 진가이는 분명 현장에서 붙잡혔을 테고 아이도, 측비 자리도 다 날아갔겠지요. 그럼 이제 대황자부의 여주인은 저 하나뿐입니다.”단여월은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듯 들떠 있었다. 하지만 단은설은 들을수록 불안해졌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말했다.“직접 그 남자를 본 것도 아닌데 증거도 없이 네가 직접 쪽지를 써서 보냈다고? 만약 일이 어그러져 진가이가 되려 너를 물고 늘어지면 어떡하려고?”하지만 단여월은 자신만만했다.“그럴 리 없습니다. 대낮에 찻집 별실이에요. 그것도 그렇게 몰래 들어가는데 남자와의 밀회가 아니고 뭐겠습니까?”그녀는 태연하게 덧붙였다.“게다가 그 쪽지. 제 손글씨도 아니라 저를 추궁하지 않을 겁니다.”단은설은 더 불안해졌다.“누가 쓴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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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6화

지하의 밀실.서인경은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물 한 모금조차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기운은 이미 바닥났고 입안은 바싹 말라 혀조차 움직이기 힘들었다. 온몸이 축 늘어져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황제는 분명히 그녀를 길들이려 했다. 단은설에게 명을 내려 이틀에 한 번씩만 소박한 밥상을 들여보내게 했다.이틀. 사람의 몸이 겨우 버틸 수는 있으나 결코 죽지는 않을 만큼의 시간.황제는 서인경의 육신을 조금씩 갈아내듯 괴롭혀 끝내는 스스로 입을 열어 장생불사의 비밀을 토해내게 만들 작정이었다.단은설이 밥상을 들고 들어왔을 때, 서인경은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제는 말 한마디, 눈을 한 번 뜨는 것조차 몸속에 남은 마지막 열기를 깎아내는 일처럼 느껴졌다. 발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단은설은 밥과 나물을 서인경이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놓고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한때 천하의 여인들이 부러워하던 상왕비가 지금은 쇠사슬을 찬 채 초라하게 웅크린 모습으로 눈앞에 있었다.복수의 쾌감은 이미 며칠 사이에 희미해져 있었다.“폐하께서 전하라 하셨다.”단은설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이제 너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고 새 상왕부에는 유가영이 들어가 살고 있다. 그러니 이제 너를 구하러 올 사람도, 너를 기억해 줄 사람도 없을 거야.”그러다 잠시 말을 고른 뒤 덧붙였다.“장생불사의 술법만 내놓는다면 폐하께서 목숨 하나는 살려주겠다고 하셨어.”그때 서인경은 밥 냄새를 맡고 천천히 눈을 떴다. 쇠사슬이 묶인 손으로 그릇을 들어 올려 말없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잠시 후,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고기가 없네.”그러고는 피곤한 투로 덧붙였다.“이틀에 한 번 밥을 주면서 고기 한 점도 없다니. 황궁 살림이 그렇게까지 궁한 건가? 죄수한테 이럴 정도로 말이야.”아직도 먹을 것을 따지는 그녀를 보며 단은설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네 남편과 아들은 이미 죽었어.”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그런데도 먹을 걸 가린다고? 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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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7화

황제가 내세운 설명은 이러했다.상왕부에 큰 화재가 났던 그날 밤, 서인경이 마침 상왕부로 돌아가 세자를 살피다 함께 불길에 휩싸여 숨졌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열다섯 째 황자는 그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서인경은 분명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꼬막이의 역병은 애초에 꾸며낸 허상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서인경이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궁을 나가 상왕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그는 몇 차례나 어서재에 뛰어들려 했으나 그때마다 신 황귀비와 운 유모에게 가로막혔다.“폐하께서 일부러 숨기고 계신 일이니 네가 가서 묻는다 한들 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일을 크게 벌여 사람들이 이 일에 주목하게 되면 오히려 상왕비가 더 불리해질 수도 있다.”열다섯 째 황자는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아버지께서는 도대체 사촌 누님을 어디에 가둔 겁니까? 혹시 위험한 건 아닐까요?”운 유모가 다가와 열다섯 째 황자의 어깨를 짚었다.“걱정이 지나치면 판단이 흐려진다. 폐하께서 공을 들여 인경이를 데려간 데에는 분명 노림수가 있을 거야. 그 노림수를 이루지 못하게만 한다면 인경이는 당장은 안전하다.”이 순간, 침전 안에는 그들 셋뿐이라 운 유모는 더 이상 신분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비록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몸가짐에는 여전히 대장의 기개와 침착함이 배어 있었다.“요 며칠 폐하께서 잦은 풍한을 앓고 계신다고 들었다. 이 틈을 타 어서재에 자주 들러 문안을 드리거라. 폐하의 몸을 염려하는 척하며 어떤 이들을 만나고 무엇을 꾸미는지 살펴보거라. 알아낸 것은 돌아와 우리에게 전하고 함께 돌파구를 찾자꾸나. 결국 길은 있을 것이다.”운 유모의 말에 열다섯 째 황자의 마음은 빠르게 가라앉았다.“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신 황귀비가 말을 보탰다.“부엌에 막 열여덟 째를 위해 끓인 빙당 설리수가 있다. 한 그릇 들고 어서재로 가거라.”열다섯 째 황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물러났다.침전에는 신 황귀비와 운 유모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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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8화

이 대목에 대해서는 두 사람 모두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서인경을 직접 찾아내기 전까지는 진실을 알 수 없을 터였다.그러나 유가영이 연기준의 아이를 품었다는 말만큼은 운 유모는 단 한 치도 믿지 않았다.“저는 인경이와 그녀 아버지의 안목을 믿습니다. 그들이 봐둔 남자는 사신으로 떠나는 길 위에서도 여자를 탐할 만큼 경박한 인간 쓰레기가 아닙니다. 유가영의 뱃속 아이에는 분명 문제가 있어요.”신 황귀비는 그 말을 따라 차분히 생각을 이어갔다.“유가영은 귀경하는 길에 지방 관아의 아전들이 호송했습니다. 도성에 들어온 뒤에도 유씨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태황태후께서 후궁으로 들이셨지요. 지방의 아전들이야 유가영이 경관의 딸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 아무리 눈이 멀어도 손댈 배짱은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후궁 안에서 가능한 남자는…”신 황귀비의 생각이 그 지점에서 멎자 눈빛이 순식간에 굳어졌다.“폐하…?”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 공기 속에 매달렸다. 차마 믿기 힘든 추측이었다. 그러나 지난 일들이 하나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부정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유가영은 처음엔 태황태후의 침전에 머물렀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황후에게로 옮겨졌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지요. 황후께서는 이 후궁에서 아이들을 직접 해친 적도, 정을 쏟아부은 적도 없었습니다. 헌데 갑자기 한 왕야의 아이에게 그렇게 마음을 쓰는게 이상하다 싶었어요. 그 직후, 폐하께서 대황자를 지하 감옥에서 풀어주셨고 금수 대장공주께서 친정에 돌아온 일을 계기로 하선준의 가문이 다시 중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폐하와 황후가 무언가 거래를 했다고 의심했지만 그 화살이 유가영에게로 향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요.”운 유모는 그 말을 들을수록 등골이 서늘해졌다. 황제가 직접 나서서 상왕부의 아이를 만들어냈다는 발상 자체가 상상 밖이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유가영의 뱃속 아이가 상왕의 친혈육이라 믿게 만들었다. 그래서 상왕부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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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9화

그녀는 늘 냉담한 태도로 어느 후궁과도 가까이 지내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열여덟 째 공주와는 나이를 잊은 벗처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마치 이유조차 알 수 없는 망년지교 같았다.마침 금수 대장공주의 사람이 열여덟 째 공주를 데려간 지 반 시각쯤 되었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어화원에서 놀고 있을 터.열다섯 째 황자는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소주방에 들러 열여덟 째 공주가 좋아하는 부용떡 몇 개를 챙겼다.“어화원으로 돌아서 가자.”어화원에서는 열여덟 째 공주가 금수 대장공주와 한창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러다 익숙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오자 아이는 공을 내팽개치고 날아갈 듯 달려왔다.“열다섯 째 오라버니!”맑고 환한 목소리에 듣는 이라면 누구라도 안아올려 입 맞추고 싶어질 법했다.열다섯 째 황자는 식함을 내려놓고 열여덟 째 공주를 품에 안았다.그리고 먼저 금수 대장공주에게 예를 올렸다.“황고모께 문안드립니다.”금수 대장공주의 시선이 땅에 놓인 식함으로 옮겨갔다.“어디를 가려는 길이냐?”열다섯 째 황자는 열여덟 째 공주를 내려놓고 식함에서 부용떡 한 접시를 꺼냈다.“부친께서 풍한에 드셨다는 말을 듣고 원래는 어서재로 약선을 전해드리려던 길이었습니다. 신 황귀비께서는 열여덟 째 공주가 배고플까 염려되어 이 아이가 좋아하는 부용떡을 챙겨 가라 하셨습니다.”부용떡을 보자 열여덟 째 공주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아이는 까치발을 들고 하나를 집더니 종종걸음으로 금수 대장공주 앞에 달려갔다.“황고모님, 드세요!”그 모습에 금수 대장공주의 마음이 단번에 풀어졌다. 아마도 이것이 그녀가 열여덟 째 공주와 함께 있는 걸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어리고 순수해 마음이 맑았고 누가 잘해 주면 그대로 마음을 내주는 아이였다. 다른 황자들처럼 황위만을 노리며 속셈을 겹겹이 숨기지도 않았다.금수 대장공주는 열다섯 째 황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어미와 서 씨 집안을 잃은 후 상왕부마저 사라진 이 손자 조카의 속내가 과연 다른 황자들과 다를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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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0화

좋게 말하면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것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한없이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예전에 그를 지켜 주던 혈육의 장례조차 감히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황제에게 잊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후궁들 눈에 열다섯 째 황자는 이미 황제에게서 버림받은 존재였다. 어서재의 태감들조차 그를 대할 때면 얼굴빛이 차갑게 변했다.“열다섯 째 황자께서는 돌아가시지요. 설 황귀비께서 안에서 폐하를 모시고 계시니 지금은 들어가기 곤란합니다.”열다섯 째 황자는 군말 없이 그 자리에 서서 태감 앞에서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알려 줘서 고맙다. 부친께서 풍한에 드셨다는 말을 듣고 직접 빙당 설리수를 달였는데 지금 뵙기 어렵다면 번거롭겠지만 대신 전해 줄 수 있겠느냐? 그저 자식 된 도리로 마음을 다하고 싶을 뿐이니.”태감은 팔짱을 낀 채, 눈에 띄게 업신여기는 시선을 던졌다.“폐하께서는 병환 중이시고 태의가 진맥하고 처방을 올렸으며 설 황귀비께서 친히 시중을 들고 계십니다. 황자께서 가져오신 이런 물은 필요 없습니다. 다시 가져가시지요.”열다섯 째 황자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그저 폐하의 안부가 염려되어서 그런다. 멀리서라도 한 번 뵙고 큰 탈이 없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면 마음이 놓일 것 같구나. 빙당 설리수를 전하지 못해도 괜찮다. 나는 여기서 폐하께서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태감이 다시 무어라 말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열다섯 째 황자는 더욱 고개를 낮췄다.“부디 나를 쫓아내지 말거라. 나는 이미 어머니를 잃었고 지금은 사촌 누님마저 잃었다. 부친께서는 이 세상에서 내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다. 그저 한 번만 뵙게 해 주거라. 폐하를 방해하지도, 너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겠다.”이만큼 몸을 낮추자 태감도 더는 몰아붙이지 못하고 난처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그럼 멀찍이 서 계십시오. 잠시 후 폐하께서 나오실 텐데 성가시게 굴면 우리 둘 다 무사치 못할 겁니다.”열다섯 째 황자는 순순히 물러나 어서재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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