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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1화

이튿날 아침 일찍, 서인경은 가장 먼저 소민을 찾아갔다. 그의 다리는 너무 오래 방치된 탓에 뼈가 이미 어긋난 채로 굳어 있었다.서인경은 먼저 정골을 하고 그제야 처방을 짜 치료에 들어갔다. 그는 고통에 이마가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이를 악물고 끝까지 버티며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서인경은 그런 그를 보며 속으로 사내답다고 여겼다.통증이 한차례 가시고 나서야 소민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저는 이미 아픈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이 몇 달 동안 매일이 살을 파고드는 통증이었고 몇 번이나 죽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처럼 희망이 보이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아무리 독한 사람이라도 절망을 겪고 나면 성정이 달라지는 법이었다.서인경은 찧어 둔 약초를 그의 관절 위에 붙이며 물었다.“대황자의 어떤 비밀을 알고 있느냐?”소민은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그해 사라졌던 아이들은 사사로 길러진 뒤 저의 손을 거쳐 야랑국으로 보내졌습니다.”서인경은 일부러 손에 힘을 주었다. 소민은 억눌린 신음 소리를 내며 얼굴빛이 변했다.그는 허둥대며 변명했다.“제가 잘못했습니다! 지금은 정말로 후회하고 있습니다. 대황자를 위해 일한 것도 무고한 아이들을 해친 것도 모두 잘못이었습니다!”서인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거두었다.“전 과정이 어땠는지 자세히 말해 보거라.”소민은 한참 동안 숨 고르며 그 뼛속까지 파고드는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뒤 입을 열었다.“대황자께서는 경성 인근의 마을에서 은 오십 냥을 미끼로 어린 여자아이들을 납치하게 했습니다. 그 아이들은 동주에 있는 지하흑시로 보내졌고 남성 성주의 아들인 남궁열이 넘겨받아 남산의 비밀 연병장에 가뒀습니다. 남산에는 귀신과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산다는 소문이 돌아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그 소문 역시 대황자께서 퍼뜨린 것이었습니다. 실제로는 그들의 은밀한 근거지였지요. 그곳에서 사사들을 대량으로 길러낸 뒤 수운을 이용해 몰래 야랑국으로 보내 팔황자 예정임에게 넘겼습니다.”“그 과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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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2화

소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저도 압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왕비께서 저를 온전히 믿지 않으실 거라는걸요. 한데 앞으로 칼산이든 불바다든, 그리고 어떤 임무든 왕비 마마께서 명하신다면 저는 목숨을 아끼지 않겠습니다.”“왜지?”서인경이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예전 주군을 배반하면서까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이냐? 그저 이 다리 때문인 것이냐?”소민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끝내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했다.서인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시늉을 하자 소민은 놀라 급히 입을 열었다.“왕비 마마, 가지 마십시오.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서인경은 다시 자리에 앉았고 소민은 이번에 끝까지 이야기해 주었다.“저는 어려서 부모님과 헤어졌는데 석 달 전에서야 겨우 가족을 찾았습니다. 그제야 알게 되었어요. 집에 남아 있던 어린 누이가 이미 오 년 전에 실종되었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사라진 자리에는 은 오십 냥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부모님께서는 저희 남매를 찾겠다며 강산을 헤매다 끝내 눈까지 멀어버리고 말았습니다.”그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제가 지은 죄입니다. 제가 직접 붙잡아 넘긴 아이들 중, 어느 아이가 제 친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속죄하고 싶습니다. 왕비 마마, 기회를 주십시오. 살든 죽든 이 목숨 다 바쳐서라도 제 친누이를 찾고 싶습니다.”서인경은 다 큰 사내가 눈앞에서 숨이 넘어갈 듯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인과는 돌고 돌아 되갚아진다. 그러나 그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죄 없는 어린아이여서는 안 되었다. 상층의 음습한 권력 다툼 속에서 끝내 고통을 짊어지는 것은 늘 가장 가난한 백성들이었다.서인경은 감정을 가다듬고 다시 약을 발라 주며 말했다.“다시는 악을 거드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네 누이를 찾을 가능성도 있다. 한데 또다시 죄를 짓는다면 그때의 대가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지하흑시 대장로에게 보내진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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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3화

소민은 지금이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콩 쏟듯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저는 감히 한 점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대황자께서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는 왕비 마마께서 이미 많은 것을 알고 계십니다. 다만 한 가지, 두 분 측비와 관련된 일이 있습니다. 이 일은 대황자께서도 전혀 모르고 있는 일입니다.”서인경은 다시 약을 찧으며 말없이 들을 준비를 했다.그러자 소민은 옆에서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예전부터 낯선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진 측비의 침소를 드나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진 측비는 늘 핑계를 대며 시중드는 사람들을 물렸지요. 그리고 그녀가 아이를 가진 시점도 마침 대황자께서 부재중이던 때였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대황자의 혈육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진 측비가 몰래 사람을 시켜 월 측비의 음식에 약을 타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제가 대황자부를 떠나기 전, 호기심에 그 약을 조금 빼돌려 의원에게 보여 주었는데 여인의 회임을 막는 약이라고 하더군요. 월 측비는 진 측비가 회임한 동안 매일같이 대황자를 유혹해 자신의 처소에 머물게 했습니다. 자신도 아이를 가져 진 측비에게 눌리지 않으려 한 것이지요. 한데 정작 그녀 자신은 이미 계산속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서인경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곧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진가이라는 여인은 원래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심계가 깊을 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온갖 술수로 대황자부에 들어온 인물이었으니 말이다.그런데 그런 여인의 의도가 순수할 리가 있겠는가?이전 연기준이 계책을 써 대황자가 진가이와 예정임의 밀회를 붙잡게 했던 일이 떠올랐다. 서인경은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예정임이 줄곧 대황자를 지지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대주 왕조의 적장자로 만들고자 했을 터. 이는 대주 왕조의 뿌리를 통째로 뒤흔드는 계책이었다. 그렇다면 대황자는 정말로 이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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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4화

야랑국에는 명분을 갖춘 태자가 여전히 호시탐탐 자리를 노리고 있다. 그러니 예정임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결국 운명에 달린 문제였다. 진가이는 어느 쪽이 가볍고 어느 쪽이 무거운지를 판단하는 능력은 이미 충분히 갖춰졌을 것이다.아이와 그녀 모두가 잘 살아가려 한다면 대주 왕조에 남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예정임이 대주에서 죽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예정임은 진가이에게 있어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혹여 아이의 혈통이 드러나게 된다면 그녀는 모든 것을 잃게 될 테니까.서인경은 그제야 모든 실마리가 맞물리는 것을 느꼈다.진가이는 일부러 암살극을 꾸며 서인경의 시선을 예정임에게 돌려놓았다. 예정임이 대주에서 죽기만 한다면 그녀는 두 다리 뻗고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의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대황자는 곧 그녀 아이의 유일한 아비가 될 테니 말이다.대주의 적장자가 되느냐, 아니면 야랑국으로 따라가 이름도 명분도 없는 서자를 낳을 것이냐? 후자를 택한다면 그녀의 아이는 어쩌면 사생아로 남을 수도 있었다.진가이는 이미 선택을 끝냈다.총애 받지 못하던 서녀에서 대황자의 측비가 되기까지. 겉으로는 규중의 여인에 불과해 보이지만 죽은 자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지닌 여자였다.이 한 가지만으로도 서인경은 이 여인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고 느꼈다. 방심했다간 언제든지 뒤에서 치명적인 칼을 들이밀지도 모른다.그녀는 예정임이 대주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의 혼례복이 되어 줄 생각은 더더욱 없다.진가이가 그녀의 손을 빌려 예정임을 제거하려 한다면 그 계산은 완전히 잘못된 셈이다.소민의 다리에 약을 다 바른 뒤 관가에서 사람이 와 보고했다. 궁에서 보낸 마차가 이미 오래전부터 대문 앞에 대기 중이라는 말이었다.서인경은 종이 한 뭉치와 붓을 꺼내 소민에게 건넸다.“대황자부에 관한 비밀이라면 전부 적어라. 내가 알든 말든 상관없이 모두 말이다. 돌아와서 내가 천천히 읽겠다.”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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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5화

“제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상왕의 핏줄입니다. 언니께서는 응당 잘 살펴보셔야지요. 혹여 무슨 탈이 있는데도 일부러 말하지 않아 세자의 목숨에 해라도 미친다면 그 책임을 언니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봉한설이 더는 참지 못하고 튀어나왔다.“아직 정식으로 혼인도 안 했으면서 배에 야생종 하나 품고 있는 게 뭐가 그리 자랑입니까? 상왕의 아이라고요? 우리는 단 한 번도 인정한 적 없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그건 전부 당신이 자초한 거지, 우리 왕비 마마와는 눈곱만큼도 상관없어요!”유가영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어디서 굴러온 버릇없는 계집종이 감히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냐? 언니, 이게 당신이 하인을 가르치는 방식입니까?”서인경은 담담하게 일어나 약상자를 봉한설에게 건넸다.“유가영 아가씨, 언니니 동생이니 하는 말은 삼켜 두세요. 제 어머니께서는 저 하나만 낳으셨습니다. 그러니 저에겐 여동생이 없지요. 그리고 제 곁의 사람은 제가 다스립니다. 유가영 아가씨께서 나설 일은 아닙니다.”유가영은 빈정만 상한 채, 얼굴빛이 음울해졌다.“당신이 인정하든 말든, 이 아이는 상왕의 아이예요. 지금은 황후 마마의 전각에 머물며 안태하고 있을 뿐이지 머지않아 당신이 직접 대문을 열고 저를 맞이하게 될 날이 올 겁니다.”연기준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는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황제가 뒤에 있으니 앞으로 그녀는 꽃길만 걸을 것이다.서인경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확신에 찬 눈빛 속에서 두려움이나 동요의 흔적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모든 것을 쥔 듯한 노골적인 득의뿐이었다.그 순간, 서인경은 확신했다. 자신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황제는 이미 움직였을 가능성이 컸다.서인경은 심장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떨림을 눌러 담고 황후를 향해 몸을 낮췄다.“황후 마마, 신첩은 아직 다른 전각의 마마들의 맥을 보아야 하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황후는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수고가 많다, 상왕비. 안상재과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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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6화

“궁 안에서 아이를 가졌다는 말은 여태 들은 적도 없는데 어째서 이번엔 왕비 마마더러 직접 진맥을 보러 다니라 하시는 겁니까? 하나같이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서인경은 점점 더 인적이 드문 길로 접어드는 것을 보며 마음 한구석에 묘한 불안을 느꼈다.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곁에서 길을 안내하던 내시를 향해 물었다.“어디로 가는 길이냐?”앞장서던 내시는 낯선 얼굴이었다. 오는 내내 말수가 적었고 질문을 받자 그제야 예를 갖춘 태도로 답했다.“안상재 마마와 흔귀인 마마께서는 품계가 낮아 거처가 다소 외진 곳에 있습니다. 한데 왕비 마마께서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앞이거든요. 저 모퉁이만 돌면 도착할 겁니다.”서인경은 시선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궁인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이자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렸다. 아마도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해진 탓일 것이다.안상재와 흔귀인은 함께 입궁한 뒤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말 그대로 동병상련의 사이였다. 몇 해가 지나도록 총애와는 거리가 멀었고 늘 조용히 지내왔다. 그런데 얼마 전, 안상재가 무슨 수를 썼는지 황제의 눈에 들었고 마침내 패를 받게 된 것이다. 총애를 얻은 뒤에도 그녀는 자신의 벗을 잊지 않았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나란히 아이를 품게 되었다.서인경은 두 사람이 서로를 질투하지도, 경계하지도 않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치 아이만 있으면 이 생은 더 바랄 것이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황제가 있는 곳과는 팔백 리나 떨어진 이 외진 궁에서 다시 황제를 뵐 수 있으려면 기약도 없었다. 그러니 아이 하나를 마음의 의지처로 삼는 것만으로도 후궁의 공허한 나날을 견디는 데에는 충분할 터였다. 다만 불쌍한 것은 자신의 이 두 다리였다. 앞으로 매일같이 이렇게 멀고 한적한 곳까지 걸어와 이 두 사람의 맥을 짚어야 할 테니 말이다.건강한 태맥임을 확인한 뒤, 서인경은 맥진용 베개를 거두었다.“두 분 모두 몸 상태가 좋습니다. 태를 잘 보살피시면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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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7화

“상왕비는 오늘 처음으로 입궁했지. 상황은 어떠하더냐?”내시는 공손히 답했다.“왕비 마마께서는 먼저 황후전으로 가셔서 유가영 아가씨를 살피셨고 이후에는 안상재 마마와 흔귀인 마마를 찾아가 진맥하셨습니다.”황제가 다시 물었다.“그녀가 따로 한 말은 없었느냐?”내시는 고개를 저었다.“별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평온했습니다.”황제는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과연 내 아홉째 아우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구나. 헛눈질한 것이 아니다. 제법 머리가 있는 걸 보니 무지한 부녀자들과는 확실히 다르다.”그렇게 말하며 황제는 이 상왕비라는 인물에게 점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지금은 어디에 있느냐?”“현재는 어화원에서 금수 대장공주를 진맥하고 계십니다.”“금수 대장공주는 무슨 일이지?”“밤마다 흉민하고 숨이 가쁘다 하십니다. 막 경성으로 돌아오신 터라 물이 맞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 상왕비께 처방을 부탁하셨다고 합니다.”황제는 무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아마도 황조모와의 노기가 아직 풀리지 않은 모양이군.”금수 대장공주는 경성에 돌아온 첫날부터 태황태후를 노하게 해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아예 문전에도 들이지 않았다.이 일은 이미 후궁 전반에 퍼져 있었으니 황제가 모를 리 없었다.내시는 황제의 속내를 읽고 조심스럽게 물었다.“폐하, 상왕비를 불러 폐하께서도 진맥을 받아보시겠습니까?”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아니다. 조금 더 지켜보자. 괜히 풀숲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할 필요는 없지.”내시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어화원.호숫가의 정자에는 산들바람이 잔잔히 불고 있었다. 이미 유월에 접어든 시기였으나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였다. 두 사람은 호숫가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서인경은 금수 대장공주의 맥을 짚고 있었다.“갑작스레 식사가 바뀌고 환경이 달라졌으니 그런 것입니다. 비위를 조리하는 약을 며칠 드시면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금수 대장공주는 손목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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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8화

금수 대장공주가 어찌 알아채지 못하겠는가?서인경이 열다섯 째 황자와 서 가를 다시 엮어 말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서 가는 이미 사라졌다. 이제 열다섯 째 황자는 영원히 열다섯 째 황자일 뿐, 더는 서 가의 외손자가 아니었다.“그렇게까지 단정 지을 필요는 없지.”금수 대장공주의 시선이 깊어졌다.“모후께서는 서 가를 원망하시지만 본궁은 그렇지 않다. 본궁의 그 외삼촌이란 자는 겁을 먹고 제 잇속만 챙기다 나라까지 팔아먹은 자였다. 서 노장군이 아니었더라도 본궁은 언젠가 반드시 그자를 처리했을 것이다.”서인경은 말을 받지 않았다. 금수 대장공주의 말이 자신을 떠보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흘려보낸 말인지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금수 대장공주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숨길 것도 없지. 본궁은 요동에 있을 때 이미 조정의 문무백관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겐 별 흥미가 없었지만 유독 내 상왕 조카만은 한 번쯤 보고 싶었거든. 한데 아쉽게도 요동을 떠난 뒤에야 그 아이가 야랑국으로 사신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말을 마치며 그녀는 서인경을 바라보았다.“차라리, 네가 세자를 안고 입궁해 본궁에게 며칠 맡겨 보는 게 어떠냐? 아비를 못 본다면 아들 얼굴이라도 보면 되지 않겠느냐?”서인경의 마음에 즉각 경계심이 일었다.“세자는 아직 어려 신첩의 손을 떠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자라면 기회가 되는대로 모시고 와 대장공주께 문안드리겠습니다.”금수 대장공주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본궁이 아이를 잡아먹기라도 하겠느냐? 그저 며칠 품어 키우자는 것뿐이다. 너는 어차피 매일 입궁하니 들러서 몇 번 보는 것이 뭐 그리 큰일이겠느냐?”서인경은 소매 아래 손을 꽉 움켜쥐었다.“세자는 성미가 활달하여 자칫 대장공주를 놀라게 할까 염려됩니다. 부디 신첩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서인경의 태도는 끝내 완강했고 한 치의 여지도 없었다.금수 대장공주는 한참이나 호의를 보였지만 끝내 미소 하나 얻지 못했다. 그녀는 흥이 식은 듯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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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9화

“야랑국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야랑국의 한 군화고가 폭발했는데 그때 왕야께서 그 안에 계셨다고 합니다.”서인경의 시야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봉한설이 재빨리 몸을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왕비 마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왕야께서는 복이 크고 명이 질기신 분이니 분명 무사하실 겁니다.”서인경의 손바닥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식은땀이 가득 맺혀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안포에게 고정한 채 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 주거라.”안포의 얼굴은 잿빛이었고 눈가에는 붉은 기가 어려 있었다.“전언에 따르면, 왕야께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야랑국의 군화고에 잠입하셨고 그 과정에서 양측 병사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혼전 중에 누군가가 폭약에 불을 붙였고 군화고가 폭발해 사상자가 대거 발생했습니다. 우리 쪽 인원들이 현장을 수색했지만 왕야의 행적은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계속 수색하려 했으나 야랑국 측이 왕야께서 그들의 군사 기밀을 무단으로 침입했다는 이유로 우리 사절단 전원을 억류했습니다. 폐하께서 다시 사람을 보내 협상하지 않으면 양국 전쟁으로 번지겠다고 압박해 왔어요.”서인경의 머릿속에는 단 한 문장만이 맴돌았다.연기준은 죽지 않았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그녀는 연기준이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 한 적이 없었다.서인경은 지금 당장 야랑국으로 달려가 직접 그를 찾고 싶었다. 자신의 눈으로 그가 멀쩡히 살아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황제가 결코 그녀를 쉽게 떠나게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안포는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우리 쪽에서 먼저 소식을 받았습니다. 팔백 리 급보가 늦어도 내일이면 경성에 도착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조정 전체가 이 사실을 알게 되겠지요. 왕비 마마, 아직 하루가 남아 있습니다. 그전에 반드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서인경의 마음은 위아래로 뒤집히며 천근만근처럼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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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0화

꼬막이는 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서인경이 아이를 안으려 다가갔을 때, 꼬막이는 큰 침상 위에 앉아 희태비가 남긴 비단 상자를 손에 쥐고 장난치고 있었다. 그 상자의 열쇠는 예정연이 가져가 버린 탓에 서인경은 한 번도 열어 보지 못한 물건이었다.그런데 그 순간, 꼬막이의 작은 손가락에서 말라붙어있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리고 아이의 피가 묻은 작은 자물쇠는 어느새 열려 있었다. 열쇠 말고도 꼬막이의 피 역시 자물쇠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상자는 열린 채였고 그 안에서 꼬막이는 익숙한 모양의 패 한 장을 꺼내 들고 있었다. 꼬막이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리 없었으나 마치 공을 세웠다는 듯 서인경에게 자랑하듯 내보였다.서인경은 급히 아이의 손을 살폈다. 희고 여린 손가락 끝에 작은 상처가 하나 나 있었고 피는 이미 굳어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이내 시선을 상자에로 옮겼다.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서회윤가 남긴 것과 똑같은 패 한 장이었다.금빛 패 위에는 불로 찍어낸 듯한 큼직한 글자 하나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금’.희태비는 예전에 말했었다. 이 상자 안의 물건이 연기준을 그의 진짜 혈육에게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그 말은 결국 사실이었다. 연기준의 진짜 혈연은 정말로 금족이었던 것이다.서회윤이 같은 금패를 남겼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서인경의 머릿속에서 오래 묻혀 있던 조각들이 하나둘 맞물리기 시작했다. 일불락이 멸망한 뒤 그 후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금족 역시 둘로 갈라졌고 한 갈래는 야랑국으로 흘러 들어가 희태비와 덕비의 계통이 되었다.다만 희태비는 알 수 없는 연유로 고산국까지 떠돌다 끝내 열셋 째 왕야 연도현에게 구해져 인연처럼 진국의 후비가 되었다.그리고 금족의 또 다른 갈래는 진국에 남았다. 그들이 바로 서 가였고 한때 이름을 떨친 대장군 가문이 되었다.훗날 서 가는 어머니 봉예빈을 발견해 곁에 숨겨 두었고 일불락이 다시 일어설 그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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