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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1화

열다섯 째 황자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고개를 숙여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그 태도에 금수 대장공주는 오히려 한숨 돌릴 수 있었다.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가 이토록 많은 변고를 겪었고 이제는 의지할 만한 혈육조차 곁에 없었으니 아비에게 매달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내가 너무 앞서 걱정한 모양이구나.’대장공주는 황자들이 야심을 품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그 마음이 그릇된 곳으로 흐르는 것이 두려웠을 뿐이었다.“그만 일어나거라. 내가 뭐라 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열다섯 째 황자는 이마의 땀을 훔치고서야 식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온 태감의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대장공주 마마,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시옵소서. 곧 폐하께서 나오실 듯합니다.”금수 대장공주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치 태감의 몸에 구멍이라도 낼 듯한 시선이었다.“안에서 대신들과 국사를 논하고 있는 것이냐?”태감은 얼굴이 굳은 채 고개를 저었다.“아, 아닙니다…”대장공주의 표정이 단숨에 바뀌었다.“그럼 안에 누가 있는지 숨기지 말고 말하거라.”대장공주가 귀경하자마자 궁 안을 뒤집어 놓았다는 소문은 이미 퍼질 대로 퍼져 있었다. 황제조차 예외가 아니었는데 태감이 어찌 감히 그녀를 속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설, 설 황귀비 마마께서 폐하를 모시고 계십니다.”금수 대장공주는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설 황귀비. 상인의 딸로 태어나 하루아침에 황귀비 자리에 오른 여자. 누가 보아도 신들린 듯한 출세였다. 후궁에서 그녀의 기세와 총애는 한때 황후조차 압도할 정도였다.태감의 허둥대는 모습을 보자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대장공주는 그런 요사스러운 여인들을 무엇보다도 혐오했다. 요동에 있던 시절, 바로 그런 여인 하나 때문에 정실이던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었고 국사를 논해야 할 장소에서조차 추잡한 짓을 일삼던 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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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2화

설 황귀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동안 총애를 잃은 상태였다. 황제가 신 황귀비의 지위를 높여 주자 그녀는 분명한 위기감을 느꼈다.그 뒤로는 묘하게도 황제가 신 황귀비를 찾는 날이면 어김없이 설 황귀비가 앓아눕는 일이 반복됐다. 예전의 황제라면 이런 노골적인 수법을 가장 혐오했을 터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혐오는 설 황귀비에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황제는 다시금 그녀의 처소를 자주 찾았고 급기야 설 황귀비를 어서재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한 번 들어가면 반나절씩 나오지 않았다. 곁에서 시중드는 이조차 필요 없을 만큼이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짐작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었다.태황태후와 황후는 이를 모른 체했고 다른 후궁들은 감히 나서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하필이면 금수 대장공주에게 현장을 들키고 만 것이다.대장공주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설 황귀비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어서재는 국사를 논하는 곳이다. 감히 이런 곳에서 더러운 짓을 벌이다니! 과연 상인의 딸답구나. 규범도, 예의도, 가르침도 없는 여인 주제에 후궁을 다스릴 자격이 어디 있느냐!”설 황귀비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누가 들어왔는지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황제의 얼굴에 잠깐 분노가 스쳤다. 이 고모는 귀궁한 뒤로 줄곧 그의 체면을 짓밟고 있었다. 이미 충분히 참고 있었는데 이제는 무단으로 어서재에 침입해 그의 침실 일까지 간섭하려 들었다.황제는 허둥지둥 옷을 걸치며 차갑게 말했다.“황고모, 도가 지나치십니다. 어느 후궁을 총애하고 어디서 총애하는지는 짐의 사사로운 일이지 고모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닙니다.”금수 대장공주는 황제에게도 조금의 체면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벽에 걸린 현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성조 선제가 친히 쓴 네 글자가 걸려 있었다.근정애민.“이 여인은 군주를 유혹해 국사를 돌보아야 할 시간에 음탕한 짓을 벌였다. 그것도 성조 선제께서 직접 내리신 현판 아래에서. 이것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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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3화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순간이었지만, 금수 대장공주는 놓치지 않았다. 후궁이라는 존재는 황제의 총애를 얻기 위해 누구나 몸과 얼굴을 극진히 가꾼다. 천하절색까지는 아니라 해도 살결만큼은 희고 고운 것이 기본이었다.그런데 설 황귀비의 팔은 달랐다. 여기저기 남은 상처 자국이 너무도 선명했다. 그 흔적은 병이나 타박이 아니라 마치 날붙이에 베인 듯한 자국처럼 보였다.다만 대장공주가 서 있던 자리는 조금 멀었고 단은설은 서둘러 옷을 입었기에 그녀는 상처의 방향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자해인지, 타인의 짓인지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 태도는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아무런 반응도 없다는 점에서 이 일은 황제와 무관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금수 대장공주는 어쩌면 후궁 생활이 너무 무료해진 나머지 작은 단서 하나에도 파고들고 싶어졌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사소한 이야깃거리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단은설은 이미 옷을 다 갖춰 입고 얼굴도 들지 못한 채 어서재에서 쫓기듯 물러나갔다.대장공주가 이렇게 판을 뒤집어 놓은 이상, 황후와 태황태후도 더는 모른 체할 수 없었다. 대장공주는 열여덟 째 공주의 손을 잡고 걸었고 그 뒤로 열다섯 째 황자가 따랐다.세 사람이 어서재를 막 벗어나려는 순간, 마주 오는 태황태후와 황후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대장공주는 태황태후가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곧장 황후를 향해 말했다.“요즘 황후가 몸이 편찮다고 들었다. 후궁의 일을 두 황귀비에게 맡겼다지만 젊고 경험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 이런 추태가 다시 벌어진다면 이는 황후의 책임이다. 궁중의 기강이 무너지고 성상의 위신이 손상되는 일을 다시는 두고 볼 수 없다.”황후는 이 사태가 이렇게까지 번질 줄 몰랐다는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녀의 태도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대장공주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제가 직접 살피겠습니다.”그때 태황태후의 시선이 황후 뒤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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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4화

태황태후가 이를 갈며 쏟아낸 질책을 듣자 금수 대장공주는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어머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그저 후궁을 어지럽히고 황제를 미혹해 조정을 흐트러뜨리는 짓이 눈에 거슬렸을 뿐입니다. 아버지 황제께서 남기신 조훈까지 잊은 채 방종을 일삼는 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어머니와 황후는 이 일을 철저히 외면하셨지요. 헌데 저도 나서지 말라는 겁니까?”끝까지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태도에 태황태후의 분노는 더욱 치밀어 올랐다.“호의 같은 소리 하지 말거라. 이 후궁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네 눈을 피해 간 것이 단 하나라도 있었느냐? 겉으로는 열여덟 째 공주와 놀아주는 척하면서 실상은 황자들의 동태를 줄곧 지켜보고 있었겠지. 전면에서는 두 나라의 신하들이 화평을 논하는 동안 너는 후궁에서 한가할 틈이 없었을 게다. 오늘 네가 어서재를 뒤집은 것도 이 진국에서 네가 아직 발언권을 쥐고 있다는 걸 황자들에게 보여주려는 수작 아니었느냐?”금수 대장공주는 고개를 저으며 태연하게 부인했다.“아니에요. 그런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머니, 오해하셨어요.”“오해라고?”태황태후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고 눈빛은 불길처럼 타올랐다.“네가 이 몸에서 태어났는데 네 속내를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요동은 이미 네 손에서 국력이 강성해졌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해 진국까지 넘보는 것이냐? 예전에 내가 하지 말라 했던 일, 너는 끝내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한 게지?”말이 이쯤 이르자 금수 대장공주의 표정은 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듯 차분해졌다.“어머니, 그때 어머니께서는 제 능력을 믿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제 일생의 행복을 대가로 제가 아버지의 다른 자손들보다 뛰어나다는 걸 증명해 보였죠. 헌데 왜 아직도 믿어주시지 않는 겁니까? 저는 어떤 나라든 제대로 다스릴 수 있어요.”대장공주가 정면으로 인정하자 태황태후의 얼굴은 핏기가 몰리며 창백해졌다. 분노이기도 했고 두려움이기도 했다.“너, 네 아비를 관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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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5화

며칠만 더 지나면 그는 완전히 안전해질 터였다. 그때가 되면, 서인경 역시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조금만 더 버티자. 그녀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그때였다. 앞쪽 문이 갑자기 열렸다.서인경은 단은설이 온 줄 알았다. 하지만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낯선 얼굴이 있었다.가슴이 순간 조여 왔다. 그녀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이곳에 갇힌 뒤로, 이 안에 들어온 사람은 단은설과 황제뿐이었다.눈 앞의 낯선 사람이 적일지, 아군일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작은 체구의 내시가 안으로 들어오고는 쇠사슬에 묶여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고작 몇 걸음뿐인 서인경의 모습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그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허리를 깊이 숙였다.“왕비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 소인은 맹국공부 사람으로, 맹 아가씨의 부탁을 받아 찾아왔습니다. 마마께서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신지 또 무엇을 도우면 되는지 여쭙고자 합니다.”말을 하며 그는 소매 속에서 비녀 하나를 꺼냈다.서인경의 시선이 그 위에 멈췄다. 그것은 예전에 서로 웃으며 함께 골랐던 절친 비녀였고 그녀 자신 역시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서인경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맹은영을 통해 소식이 닿을 줄은 몰랐다.그날, 맹은영이 분노에 차 문을 박차고 나간 뒤로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서인경은 그녀가 아직도 자신에게 화가 나 있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가장 먼저 그녀의 위험을 알아차린 사람이 맹은영이었다.서인경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물었다.“밖은 지금 어떤 상황이냐?”내시는 최근의 일을 차분히 하나하나 전했다.“서왕께서 직접 국경으로 나가 야랑국과 담판을 벌이고 계십니다. 시간을 계산해 보면 곧 결과가 나올 시점입니다. 상왕부는 화마에 휩싸여 전소되었고 폐하께서는 새로 상왕부를 세우셨습니다. 유가영 아가씨를 그곳으로 들여보낸 후 그녀의 뱃속 아이가 상왕의 유일한 혈육이라 공표하셨습니다. 과거 상왕을 따르던 이들은 잇달아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 아이를 상왕처럼 받들어 지켜 키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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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6화

서인경은 어린 내관이 들키는 것이 걱정되었다.황제와 단은설이 경계를 늦추지 않게 되는 순간, 이곳은 더는 숨 쉴 틈조차 없어질 터였다. 그래서 바깥 상황에 대해 몇 가지 더 당부한 뒤 서둘러 그를 내보냈다.밀실의 문이 다시 닫히자 벽에 걸린 촛불만이 고요히 타들어 갔다.서인경은 황제가 언제까지 자신을 살려 둘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제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했다.한편 단은설은 이미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한 시각 내내 꿇어앉아 있던 벌은 거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다. 그녀는 사실상 들것에 실려 침전으로 옮겨졌다.막 돌아오자 곁을 지키던 궁녀가 급히 태의를 부르려 했지만 단은설이 손을 들어 막았다.“그만두고 다들 물러나거라. 잠시 쉬면 괜찮아질 것이다.”궁녀는 여전히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허나 마마,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십니다. 태의를 부르기 싫으시다면 전에 단 대감께서 밖에서 믿을 만한 의원을 알아보라 하셨던 것, 기억하시지요? 그 의원이 이미 몰래 궁에 들어와 대기 중입니다. 마마께서 괜찮으시다면 지금 맥을 보게 할까요?”서인경이 몸이 완전히 상해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뒤 태의들이 그 사실을 숨겼다는 점을 단은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곧장 단 가로 서찰을 보내 부친 단효산에게 신뢰할 만한 의원을 구해 달라 부탁했고 단효산은 큰 위험을 무릅쓰고 마침내 사람 하나를 궁 안으로 들여보냈다.그리고 바로 오늘 그 의원이 도착한 참이었다.단은설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어서 들이거라.”잠시 뒤, 궁녀가 다시 들어왔고 그 뒤를 따라 내관 차림의 사내 하나가 들어섰다. 고개를 숙인 모습은 다른 내관들과 다를 바 없었으나 유난히 큰 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사내는 잔뜩 굳은 얼굴로 덜덜 떨며 다가왔다. 아직 절하라는 말도 듣기 전에 무릎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소인, 마마를 뵙습니다.”단은설은 그를 내려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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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7화

“마마!”궁녀가 놀라 달려와 단은설을 부축했고 의원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엎드렸다.“마마, 부디 노여움을 거두소서. 소인은 그저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단은설은 그제야 서인경이 했던 말들이 모두 사실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저 약간의 피를 썼을 뿐이었다. 예전에 봉한설에게 피를 주었을 때에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황제한테 쓰고 나서부터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단은설은 의원을 똑바로 노려보며 물었다.“말해 보거라. 내가 피를 너무 많이 써서 이리 된 것이냐, 아니면 여러 해 동안 사람들에게 피를 주어서 누적된 결과더냐?”만약 그렇다면 그건 연기준이 그녀에게 진 빚이었다. 그렇다면 저승에 가서라도 그를 붙잡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하지만 의원의 말은 그녀가 붙들고 있던 마지막 기대를 산산이 부수었다.“마마의 체질은 특이합니다. 어릴 적 오랜 시간 어떤 약물에 몸을 담가온 흔적이 보입니다. 그 약은 체력을 보강하고 혈질을 개선하는 작용을 했을 겁니다. 마마의 타고난 바탕은 결코 약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반년 전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거예요.”의원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헌데 지금의 맥을 보면 최근 들어 갑작스럽게 많은 양의 혈을 잃은 흔적이 뚜렷합니다. 아무리 보약을 써도 보충되는 속도가 빠져나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부디 더는 몸을 해치지 마시옵소서.”반년 전까지는 무사했다. 그 말은 곧 이 모든 일이 연기준과는 무관하다는 뜻이었다.단은설의 눈빛이 텅 비었다. 그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이 순간까지도 그 남자와 어떤 식으로든 얽히길 바라고 있었던 자신이 서글펐다.그녀는 정말로 그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궁녀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마마, 이 일을 폐하께 아뢰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마의 몸 상태를 폐하께서도 아셔야…”단은설이 피를 쓴 일은 이 궁녀 역시 알고 있었다. 궁녀는 혹시라도 황제가 알게 된다면 조금은 절제하고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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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8화

단은설은 온몸에 분노를 감아 쥔 채 서인경에게 성큼 다가오더니 아무런 예고도 없이 손을 들어 올려 세차게 뺨을 후려쳤다.서인경은 미처 피하지 못했고 순식간에 반쪽 얼굴이 얼얼하게 타들어 가며 감각이 마비됐다.“재밌어?”단은설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지금 이 상황이 그렇게 통쾌하냐고.”서인경은 어금니를 한 번 핥듯이 굴리고는 입술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미쳤어?”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난 여기 얌전히 갇혀 있는데 내가 뭘 잘못했지?”단은설이 갑자기 서인경의 목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며 얼굴이 음울하게 일그러졌다.“내가 고른 남자는 내 피를 마셔가며 목숨을 이어 왔어. 그 대가로 날 평생 아이도 못 낳는 몸으로 만들어 놓고 마지막엔 죄를 뒤집어쓰는 희생양으로 만들었지.”단은설의 눈에 서린 감정은 이미 분노만이 아니었다.“헌데 넌?”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네가 고른 남자는 항상 너부터 생각했어. 여자도 오직 너 하나뿐이었고 끝까지 지키려 했지. 정말이지, 일생일대의 인연이더라.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삶.”쌓여 있던 비참함과 분노가 갈 곳을 잃고 터져 나왔고 서인경은 그 분출구가 되어 버렸다.“그래도 결과는 같아!”단은설이 거의 울부짖듯 소리쳤다.“연기준은 죽었어. 서 씨 가문도 사라졌고 예전의 상왕부도 불탔지. 어디 그뿐이야? 네 아들까지 함께 묻혔어!”그녀의 얼굴에 비뚤어진 웃음이 걸렸다.“지금 남은 건 너 하나야. 내가 묶어 둔 죄수인 셈이지. 개처럼 여기 갇혀 있는 너 말이야. 서인경, 결국 네가 진 거야!”서인경은 목이 조여 와 숨이 막혔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으나 입가에 힘을 주어 말했다.“네가…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지금 이렇게 분노할 이유도 없지!”그 말에 단은설의 안에서 팽팽히 당겨져 있던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손아귀의 힘이 빠졌다.서인경의 말이 옳았다. 정말로 자신이 이겼다고 믿었다면 기뻐해야지 이렇게 분노로 이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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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9화

“정말로 내 몸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이야?”서인경은 담담하게 말했다.“태의들은 진심으로 너를 치료하지 않을 거야. 밖에서 데려온 의원은 후궁에 오래 머물 수도 없고. 지금 이 상황에서 너의 선택지는 나 하나뿐이야. 그게 싫다면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할 각오를 하든지.”단은설은 아이를 낳아야 했다. 그래야 그 아이를 발판 삼아 후궁에서 다시 설 수 있는 자리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잠시의 침묵 끝에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좋아. 이번 한 번은 또다시 널 믿어 주지. 헌데 네가 감히 날 속인다면 나는 네 뼈를 가루로 만들어 혼백조차 남기지 않을 거야.”연기준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단은설은 애초에 서인경을 곱게 죽일 생각이 없었다. 뼈까지 갈아 없애 윤회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다음 생에서 연기준 곁에 설 사람은 오직 자신이어야 했으니까.서인경은 그때의 단은설이 아직도 철저한 연정에 사로잡힌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실과 무관하게 자신의 결말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치료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신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거래가 성립된 뒤 서인경은 밀실에 갇힌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한편, 변장한 큰 귀 의원은 단은설의 처소를 나온 뒤 곧장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그대로 궁문을 향해 달렸고 거의 다다랐을 즈음 그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마차에서 내렸다.그리고 몸에 걸쳤던 내시 복장을 벗었다.잠시 후, 한 명의 내시가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깐 사이에 궁녀 한 명이 되어 나왔다.궁녀는 쟁반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신 황귀비의 처소를 향했다.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운 유모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어떻더냐?”정전에 들어서자마자 신 황귀비가 다급히 물었다.큰 귀 의원은 이제 궁녀의 모습이었지만 입을 열자 여전히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설 황귀비의 처소에 밀실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람 소리가 일반 건물과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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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0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자기 궁에나 얌전히 있거라. 짐의 곁에는 네가 아첨하듯 들락거릴 필요가 없다. 오늘 일도 다 네가 약선을 들고 와 괜히 나섰기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니더냐.”열다섯 째 황자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예,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저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 아버지뿐이라 여겼고 병환이 있으시다는 말을 듣고 그저 효심을 다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돌아가면 제 궁에 틀어박혀 스스로를 반성하겠습니다.”그래도 한때는 아끼던 아들이었다. 황제는 열다섯 째 황자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숙귀비가 세상을 떠난 뒤, 이 아이는 점점 자신과 멀어졌다. 하지만 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에게 과연 무슨 속셈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오늘 금수 대장공주가 어서재까지 들이닥친 일이 우연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의도인지 황제는 분간하지 못했다. 그는 높은 자리에서 열다섯 째 황자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앞의 상소문으로 돌렸다.“몇 해 뒤엔 작위를 내려 궁 밖으로 나가 살게 해주겠다. 얌전히 제 분수만 지킨다면 짐이 너를 박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쓸데없는 마음을 품는다면 부자지간의 정도 모두 버릴 것이다.”열다섯 째 황자가 이마를 땅에 박았다.“아뢰옵니다, 저는 이제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 뜻에 따르겠습니다. 감히 다른 마음은 품지 않을 겁니다.”“오늘 한 말을 잊지 말거라.”황제는 상소문을 덮었다.“물러가거라.”“예.”열다섯 째 황자는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나, 뒤로 걸음을 옮기며 밖으로 나갔다.황제 역시 피로를 느꼈는지 남은 상소문들을 들어 올려 열셋 째 황자에게 건넸다.“이것들은 네가 대신 살펴보고 정리되는 대로 다시 들이도록 하거라.”“명 받들겠습니다.”열셋 째 황자는 두 손 가득 상소문을 안고 공손히 물러났다.어서재 밖.열다섯 째 황자가 몇 걸음 가지 않았을 때 뒤에서 열셋 째 황자가 따라붙었다.“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부황께서 잠시 노기가 있으셔서 말씀이 거칠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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