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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1화

예정임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시선을 던졌다.“아, 셋째 공주 역시 폐하께서 손에 넣고 키우신 보배 아닙니까? 부친께서도 공주가 국토를 떠나는 일을 차마 허락하지 못하실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양국 국경에, 부친께서 비용을 대어 공주부를 하나 세우는 겁니다. 두 분이 국경에서 거처한다면 국경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 고국을 찾아 문안드리기도 서로 수월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 조정에서는 다섯 째 공주 한 분을 보냈으니 귀국 또한 그에 상응하는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경 정착은 우리 쪽에서 내놓은 최대한의 양보입니다. 맹국공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말을 돌려 말했을 뿐, 요지는 분명했다. 열셋 째 황자를 수도에 머물게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야랑국과의 화친. 혼인 동맹은 본래 진국 황제가 먼저 꺼낸 제안이었다. 본디의 의도는 열셋 째 황자에게 힘을 실어 주어 대황자와 맞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나아가서는 하선준 가문과 대황자 일파가 다시 조정을 독점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황제는 조정이 어느 한 가문에 기울어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조차도 불안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지금 와서는 이 혼담이 오히려 열셋 째 황자를 더 멀리 밀어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황제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그 불쾌함은 은근히 대황자를 향해 옮겨 갔다. 야랑국과 대황자 뒤편의 결속이 이토록 깊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예정임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폐하께서는 사흘 더 생각해 보셔도 무방합니다. 본 황자는 사흘 뒤 야랑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니 그때까지 답을 주시지요. 부친께서 말씀하시길 혼인이 성사되면 양국은 영원히 우호를 맺고 국경은 길이 태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허나 혼담이 무산된다면 진국의 성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지요. 그때 양국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노골적인 말이었다. 무례를 넘어선 협박에 가까운 발언이라 해도 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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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2화

점점 더 높이 날아오르더니 마침내 자취를 감추었다.열셋 째 황자는 맑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에는 조금의 근심도 어려 있지 않았다.“이 세상에 영원한 적도, 영원한 벗도 없는 법이지. 그들 사이에 공통된 이익이 있다면 찔러서 터뜨리면 그만이다.”어떤 일들은 저 금사작처럼 이제는 세상 밖으로 풀어놓아 모두가 보게 만들어야 했다. 내관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고 열셋 째 황자는 웃으며 손짓해 그를 가까이 불렀다. 내관이 다가서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건넸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내관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당혹, 흥분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단은설이 보냈던 궁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종이 한 장을 손에 들고 단은설의 귀에 바짝 붙어 무언가를 속삭였다.“의원의 말로는, 확실히 부인병을 치료하는 명약이라고 합니다. 복용하면 잉태와 출산에 도움이 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의원에게 약방을 적게 했는데 대부분은 흔한 보혈, 안신 약재들이고 오직 두 가지만이 극히 귀하여 구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어떤 약이더냐?”“자하청, 그리고 단장홍입니다.”그 말을 듣자 단은설은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단 가가 예전엔 그래도 의약 가문이었지. 그 두 약재가 귀한 것은 맞지만 강남의 단 가 옛 저택에 이미 소장하고 있다. 서인경, 네가 이 약으로 본궁을 쥐고 흔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계산을 완전히 잘못한 거다.”그녀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약방을 곱게 접어 품에 넣었다.“한 부 더 베껴서 아버지께 전하거라. 강남 단 가 옛 저택에 사람을 보내 그 두 약을 반드시 찾아오게 해. 단 가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없는지는 이제 이 두 약에 달렸다 전하고.”궁녀는 명을 받들어 약방을 거두고 물러났다.그때, 문밖에서 내관의 고지 소리가 울렸다.“폐하께서 행차하십니다!”단은설은 곧바로 표정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할 준비를 했다.야랑국이 내건 조건은 황제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충분했고 기혈까지 거슬러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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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3화

단은설이 더 말을 잇고자 했으나 황제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그만하거라. 과연 상왕의 여인이로다. 제법 기개가 있어. 네 말이 틀리지 않다. 짐은 수년 동안 장생불사를 찾아왔다.”서인경은 낮게 냉소했다. 그녀는 추측한 것이 아니었다. 진국의 황제가 연강호를 보내 일불락으로 향하게 했고 설산에 깃든 자신의 조상들을 모조리 말살한 일을 그녀는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황제는 서인경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후회했다.어찌하여 연기준보다 한발 늦게 그녀를 알게 된 것일까?진작 알았더라면 장생불사의 비밀은 자신의 것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네가 그때 상왕과 혼인하지 않았더라면 짐은 너를 제법 높이 샀을 것이다. 그러면 상왕에게 연루되어 이런 지경에 이르지도 않았겠지.”서인경은 고개를 들고 조용히 물었다.“제가 상왕을 연루시킨 것입니까, 아니면 상왕이 저를 연루시킨 것입니까? 그 답은 폐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제 고모를 아끼셨지요. 후궁으로 들이고 비의 자리를 주셨고 한때는 육궁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하셨습니다. 헌데 결국 그분은 폐하의 계산속에서 죽지 않았습니까? 그게 어찌 아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더 이상 저를 아끼지 마십시오.”황제의 안색이 가라앉았다.“입 다물어라! 네 고모는 자발적으로 군을 이끌고 진국을 위해 싸웠다. 짐은 그 공에 깊이 감사하여 황귀비로 추봉했다. 정이 없었다면 어찌 그런 예를 갖췄겠느냐? 도대체 어디에 계산이 있었단 말이냐?”서인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생각하듯 말했다.“폐하께서 서 씨 군세가 상왕의 손에 들어갈까 염려하신 그 순간부터, 이미 계산은 시작된 것입니다. 자신이 군권을 원하면서도 그 위험한 길을 자신의 여인에게 맡기셨지요. 여인은 목숨을 바쳤고 폐하께서는 추봉 하나로 자신의 인의를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 다른 여인들을 곁에 두셨지요. 가엾은 건 제 고모와 아직 어린 열다섯 째 황자뿐입니다. 이것이 계산이 아니라면 무엇이 계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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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4화

황제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몸을 돌려 그대로 떠났다.단은설은 황제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인경을 바라보았다.“내가 널 돕지 않은 게 아니야. 네가 스스로 폐하를 노하게 만든 거지. 이런 결말은 네가 자초한 거야.”서인경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단은설을 노려보았다.“이렇게 서둘러 토사구팽을 하다니. 내가 잃어버린 반쪽 약재, 설마 네가 가져간 거야?”서인경이 언젠가는 알아차릴 거라 생각했던 단은설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래, 내가 가져갔다. 그래서 어쩔 건데? 토사구팽이라 원망하지 마. 네가 살아남을 자격이 없었던 것뿐이니까. 후궁 암뢰는 사형을 저지른 비빈들을 가두는 곳이야. 거기엔 더 다양한 재미가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여기보다 훨씬 즐거울 테니 기대해.”서인경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비열해! 이렇게까지 사람을 몰아붙이다니. 역시 단 씨 가문이야. 온몸에 너희 집안의 더러운 피가 흐르지.”욕설을 들어도 단은설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에 찬 서인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흡족해했다.그녀는 애초에 황제를 이곳으로 불러들일 생각이었고 의도적으로 서인경을 자극했다.약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방금 틈을 타 서인경이 쓰던 모든 약재와 도구를 챙겨 두었다. 그 정도만 있으면 밖에서 사람을 구해 나머지를 완성하는 건 어렵지 않을 터.이번에는 분명히 볼 것이다. 서인경이 산 채로 부서지는 모습을.“마음껏 욕해. 네게 남은 시간은 두 시진뿐이야. 밤이 깊어지면 조용히 널 그곳으로 보내 주지. 그때도 과연 욕할 힘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네.”단은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섰다.그러나 그녀가 등을 돌린 순간 서인경의 분노로 일그러졌던 눈동자는 오히려 맑게 가라앉아 있었다.단은설이 침전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태감 하나가 상소문 한 통을 들고 들어왔다.“서왕께서 보내신 장계입니다.”황제는 서왕이라는 말을 듣자 곧장 다가가 상소를 받아 들었다. 장계를 펼쳐 읽을수록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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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5화

당년, 금수 대장공주가 요동으로 원혼하여 두 나라의 전쟁을 잠재웠고 그로써 수만 장졸과 백성들의 목숨을 구했다. 그 선택은 양국 백성의 존경을 받았고 훗날까지도 사람들의 찬탄 속에 남았다. 또한 그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 태평성대 덕에 세상은 성조 선황제를 명실상부한 명군으로 받들었다.단은설은 성조 선황제의 현단을 예로 들었고 황제의 마음은 그 순간 크게 흔들렸다.그는 즉위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한때 연도현라는 이름이 위세를 떨치며 그의 존재감을 가려 왔다. 심지어 선제께서 한때 황위를 연도현에게 넘기려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적지 않았다.그 일이 무산된 것은 그가 미리 손을 써 두었기 때문이었다.이후에는 연기준이 일전에서 이름을 떨치며 진국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백성들은 연기준만 알 뿐 황제의 존재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허울뿐인 군주가 되어 버렸다.황제는 너무도 간절히 증명받고 싶었다. 그 갈증을 그는 수년간 참고 또 참아 왔다.마침내 그늘에서 벗어나 세상이 자신을 황제로 바라보기 시작한 이때, 만약 이번 일로 다시 백성들의 비난을 산다면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 터였다.황제의 마음은 분명 흔들렸지만 여전히 다른 계산도 함께 굴러가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단은설을 가만히 살폈다.“애비가 혹 대황자를 돕기 위해 이런 말을 꺼낸 건 아니겠지?”그 말이 떨어지자 단은설은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신첩은 결코 그런 뜻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물으셨기에 감히 아뢴 것뿐입니다. 신첩은 슬하에 자식이 없습니다. 훗날 어느 황자께서 대통을 잇든, 신첩은 태비로서 누릴 존귀함에 차별이 있을 리 없습니다. 대황자의 측비가 신첩의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신첩이 그를 편든다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신첩을 크게 오해하신 것입니다. 입궁한 이래, 신첩의 마음에는 오직 폐하뿐이었습니다. 황귀비의 신분으로 단 가를 위해 사사로운 이익을 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폐하의 성명을 더럽힐까 늘 두려워했습니다.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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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6화

창밖의 태감은 황제가 그런 대답을 내놓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잠시 머뭇거렸다.“잠깐만요.”단은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급히 황제의 소매를 붙잡았다.“폐하, 오늘은 폐하와 황후 마마께서 동침하셔야 하는 날입니다. 신첩이 아무리 총애를 받는다 하나 감히 그 분수를 넘어서 황후 마마의 체면을 상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부디 황후의 침궁으로 거둬 주십시오.”단은설의 말은 대의를 알고 분수를 아는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황제는 몸을 옮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지만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즉위 이래 초하루와 보름마다 황후의 침궁을 비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 밤 이곳에 머문다면 내일 후궁은 발칵 뒤집힐 것이 분명했다.단은설은 밀실 쪽을 힐끗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상왕비 쪽은 신첩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폐하께서 이곳에 오래 계시면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혹여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합니다.”황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다. 상왕비의 일은 반드시 제대로 처리하거라.”황제가 떠나자, 단은설은 눈에 깔려 있던 공손함을 거두고 차갑게 웃었다.“한 번 어리석었던 걸로 충분해. 다시는 화살받이가 되지 않을 거야.”한밤중, 주위가 완전히 고요해졌을 무렵, 밀실에 오래 갇혀 있던 서인경은 마침내 다시 달빛을 보게 되었다. 보름달이 둥글게 떠올라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고 그 아래로 몇 가닥의 그림자가 마치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단은설의 침궁 뒤문으로 빠져나온 후 어화원을 돌아 거의 쓰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오솔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갔다.신 황귀비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막 열여덟 째 공주를 재우고 난 직후였다. 태감의 설명을 들으며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화원 동쪽 끝의 그 길은 그녀조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기억 속에서 그 길은 오직 한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냉궁.“폐하께서 즉위하신 뒤로 폐비를 낸 적이 없었다. 냉궁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버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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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7화

서인경은 한참이나 걸어온 것 같다고 느꼈다. 단은설은 폐허처럼 버려진 한 뜰 앞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돌아서며 서인경의 입을 막고 있던 누더기 천을 잡아당겨 빼냈다.“폐하의 뜻이다. 앞으로 네가 머물 곳은 여기야. 그리고 폐하께서 너를 위해 꽤 재미있는 선물도 준비해 두셨지. 자, 들어가서 직접 봐.”서인경은 두 손이 등 뒤로 단단히 묶여 있어 몸부림칠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궁인들에게 떠밀려 감옥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안쪽은 빛이라곤 전혀 없었지만 들어서는 순간 공기 속에 짙게 깔린 눅눅함이 피부에 와닿았다. 몇 걸음 더 옮기자 갑자기 거대한 물결이 뒤집히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 사이로 목구멍 깊은 곳에서 짜내는 듯한 거친 울음이 섞여 들렸다.서인경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마치 예전, 현대에서 실리콘으로 만든 노란 오리 장난감을 밟았을 때 나던 그 괴상한 소리와 닮아 있었다.단은설 역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무슨 소리지? 안에 뭐가 있는 거야?”궁인이 급히 앞으로 나서며 몸으로 길을 막았다.“설 황귀비 마마, 염려 마십시오. 이 안에는 악어 네 마리가 있습니다. 물속에서만 지내도록 되어 있어 밖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물가에만 가까이 가지 않으시면 해를 입지 않으실 겁니다.”악어?단은설은 황제한테서 이곳의 물건이 서인경의 입을 열게 만들 것이라는 말만 들었을 뿐, 이 암뢰에 악어까지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서인경의 심장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 창 너머로 스며든 달빛에 물속에서 뒤집히는 거대한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그래서 저 소리가 그렇게 익숙했던 거구나.’이 시대에서 그녀가 악어를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은 바로 도팔천의 약왕곡이었다.악어의 흉포함이 어떤 것인지는 그녀가 직접 목격한 바 있었다. 그때 연기준의 암위가 곁에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약왕곡에 발을 들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궁인이 등불을 밝혔다. 곧 암뢰 안에 불빛이 번지며 서인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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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8화

서인경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그 순간, 단은설의 눈 밑에 숨길 수 없이 넘실대는 증오가 그대로 드러났다.단 가는 이미 가문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흩어졌다. 한때 쥐고 있던 장사의 판도는 모조리 경성의 다른 상인들에게 빼앗겼고 단 가에는 더 이상 예전의 영화가 남아 있지 않았다.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단은설의 입에서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연기준에게만 집요하게 매달려 있었다. 단은설이 품은 가장 깊은 증오는 결국 연기준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서인경은 속으로 씁쓸하게 탄식했다. 미색이 사람을 망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여자의 미색만이 아니라 남자의 미색도 사람을 홀릴 때는 가차없었다. 정말이지 여자들 사이의 경쟁이나 개입조차 무의미해질 정도이니 말이다.그때, 궁녀가 바깥의 달빛을 힐끗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마마,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곧 순찰하는 호위들이 지나갑니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발각될 수 있습니다.”단은설은 일그러졌던 표정을 거두고 몸을 곧추세웠다.“문을 단단히 잠가라. 밖의 수비들에게도 분명히 일러 두고. 이 안에는 폐하께서 직접 필요로 하신 사람이 있다. 조금이라도 탈이 나면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명 받들겠습니다.”단은설이 사람들을 이끌고 떠나자 곧이어 문이 닫히고 굵직한 자물쇠가 걸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만 들어도 평범한 자물쇠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방 안에는 이제 서인경과 악어 네 마리만 남게 되었다.여러 쌍의 눈이 서로를 마주했다. 악어들은 오래 굶주린 듯, 하나같이 서인경을 탐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한 걸음만 더 다가가면 곧바로 먹잇감이 될 것처럼.암뢰는 규모만 따지면 후궁의 전각 하나와 다를 바 없었으나 내부는 거의 전부 물로 차 있었다. 육지는 서인경의 발밑, 고작 한 자 남짓한 가장자리뿐이라 움직일 곳도 없었다.서인경은 그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낮췄다.네 마리의 악어가 여전히 사납게 노려보고 있는 상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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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9화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형님들의 늙은 팔다리가 움직임이 둔해진 게 제 탓입니까? 제가 늦었으면 진작 형님들께서 먼저 채 갔을 거 아닙니까!][둘째 형, 넷째가 우리 늙었다는데 어쩌지?][패버려!]금방이라도 네 마리의 악어가 서로에게 달려들 기세였다.[그만해!][다 같은 식구인데, 누가 먹든 배로 들어가는 건 다 똑같아. 인간들 앞에서 먼저 내분부터 보이지 말자고!]말을 하며 아까부터 한 번도 움직이지 않던 그 악어가 줄곧 서인경을 응시하고 있었다.[뭔가 이상해. 저 인간… 우리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순간, 네 마리의 시선이 동시에 서인경에게 꽂혔다.서인경은 마치 담장 너머 엿듣다 들킨 사람처럼 조용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러고는 시선도 자연스럽게 비켜냈다.[형, 형이 착각한 거 아냐?][이 멍청한 인간들이 우리 말을 알아들을 리가 있겠어? 고작 이빨 사이에 끼워 넣을 먹잇감일 뿐인데!]서인경은 속으로 잠시 말을 잃었다. 자기애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그것도 그렇네.][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니 끌어들이는 것도 귀찮아.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내일 다시 보지 뭐.][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다시 빠져나갈 길은 없어.][형 말이 맞아. 우리가 설산에서 내려온 뒤로 여기 들어온 여자들 중에 살아서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잖아.][아, 하나 있긴 했다. 남자 하나. 그건 우리 형제들 인생 최대의 오점이었지.]설산?서인경은 순간 숨을 삼켰다. 이곳에서,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 동향을 만날 줄이야.하지만 설산의 악어들이 어떻게 진국의 후궁 깊숙한 암뢰까지 오게 된 걸까? 도팔천이 약왕곡 흑수암에서 길러 놓았던 것들과 혹시 같은 종이 아닐까?그때, 더 중요한 말이 이어졌다.[그 얘긴 그만하자.][듣자 하니 그 인간은 진국의 상왕이라던데.][상왕 손에 패했다면 우리 체면이 깎일 일도 아니지.]서인경의 속눈썹이 세차게 떨렸다.상왕?연기준?아니면 연도현?혹은 아직도 설산에 남아 있다는 연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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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0화

암뢰에 갇힌 첫날밤, 서인경은 최근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그녀는 믿고 있었다. 연기준은 죽지 않았다고.그에게는 수차례의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그녀가 직접 마련해 둔 수많은 보명책이 있었고 왕부에 남아 있던 암위들 또한 모두 풀어 그를 찾게 했다.그때 그녀는 연풍에게 분명히 일러 두었다. 연기준에게 어떤 변고라도 생기면 반드시 사람을 보내 경성으로 소식을 전하라고.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그에게 알리겠다고도 했다.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쪽에서도 소식이 오지 않았다.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연기준은 살아 있다. 그리고 연기준 역시 그녀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서인경은 바랐다. 연기준이 꼬막이와 합류해 다시는 진국으로 돌아오지 않기를.이 세상에 정말로 상왕 연기준이라는 사람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이 나라의 황제는 그가 목숨을 걸 만큼의 가치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 나라의 존망 역시 그 한 사람의 어깨 위에 얹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그리고 꼬막이. 그 아이는 그녀의 삶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사람이었다.시기를 헤아려 보니 꼬막이는 이 무렵에 이미 설산에 도착했을 터였다. 설산에만 들어가면 그곳 사람들의 보호를 받게 될 테니 서인경에게 더는 미련도, 걱정도 없었다.다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꼬막이를 무사히 안착시킨 뒤 상왕부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반드시 경성으로 돌아와 그녀를 구하려 들 것이다.그 전에 서인경은 반드시 이곳을 떠나야 했다.황제의 눈에 들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부터는 누구에게도 두 번째 탈출은 허락되지 않는다.그리고 그녀가 일불락의 후예라는 사실 역시 더는 숨길 수 없게 될 터였다.단은설은 한밤중에 서인경을 냉궁으로 옮겼다. 아무도 모르게 처리했다고 믿었지만 그 움직임은 결국 외부의 눈에 띄고 말았다.신 황귀비뿐만 아니라 금수 대장공주 역시 단은설의 행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설 황귀비가 상왕비를 냉궁 암뢰로 데려갔다고?”궁녀가 놀라 되물었다.“그 사람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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