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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911 - Chapter 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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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1화

태황태후는 그동안 금수 대장공주의 요구를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이례적으로 딸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쳤다.“여기서 기다리거라. 나 혼자 들어가겠다.”금수 대장공주의 얼굴에 잠깐 굳은 기색이 스쳤다. 자기 어머니는 언제나 그랬다.이토록 급박한 순간에도 그녀의 정신은 늘 또렷했다. 지금 이 와중에도 자기 딸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진국의 황위는 언제나 이 딸보다 앞에 있었다.태황태후는 유모조차 대동하지 않은 채 홀로 양심전으로 향했다.유모는 금수 대장공주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급히 태황태후를 대신해 말을 보탰다.“공주님, 노여워하지 마시옵소서. 태황태후께서는 그저 공주님께서 괜히 더 마음 졸이실까 염려하신 것뿐이옵니다.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 주시지요.”금수 대장공주는 입꼬리를 비틀듯 끌어올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신비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태황태후가 친딸조차 믿지 않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에 계산이 섰다. 그녀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양심전 안의 상황은 결코 단순하지 않을 것이라고.태황태후는 빠른 걸음으로 양심전에 들어섰다. 그리고 어서재 앞에 앉아 있는 한 줄기 명황색의 실루엣을 보는 순간, 가슴 깊이 억눌러 두었던 숨이 풀려나왔다._x000B_그러나 그 안도의 숨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황제는 붓을 멈추고 천천히 장부를 덮었다.“황조모께서는 이미 아홉 째 아우를 만나셨습니까?”태황태후의 눈이 흔들렸다.“너도 연기준이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느냐?”황제가 낮게 말했다.“짐도 방금에서야 확신했습니다. 선황께서 돌아가시기 전, 아우가 변심하면 다루기 힘들 거라 하셨지요. 결국 그 말씀이 틀리지 않았습니다.”태황태후는 다시 한 번 멍하니 굳어섰다.“네 아버지는 또 무엇을 말했느냐?”황제는 선황이 임종 직전에 남긴 말을 떠올리며 붓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변심한다면 조금의 인정도 두지 말고 남김없이 베어내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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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2화

“황제는 지금 몸이 불편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라의 기둥이 되는 중신들이니 황제의 부름이 있을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대기하도록 하거라. 그리고 후궁과 황자, 공주들은 모두 물러가고. 필요하다면 황제가 직접 부르실 것이다.”태황태후가 이렇게 말하자 대신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고 후궁들은 각자의 황자와 공주를 데리고 조용히 궁으로 돌아갔다.대신들의 속은 술렁였다. 황제가 이렇게까지 큰 판을 벌이는 것을 보니 단순한 병세는 아닐 터였다. 그들은 저마다 계산을 굴리며 특히 두 황자에게 내려진 명분 없는 배치를 곱씹었다.이 순간 황제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어떤 의미든 담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두 황자에게 각각 임무가 주어진 모양새는 겉보기엔 대등했으나 열셋 째 황자에게 군권을 맡긴 것은 황후와 대황자조차 마음이 흔들릴 만큼 무거운 조치였다.일부 사람들이 빠져나간 후, 몸놀림이 날렵한 내시 하나가 갑자기 뒷문을 통해 양심전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폐하, 궁중의 금지 구역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다만 태황태후의 명이 없어 저희가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황제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샅샅이 뒤져라. 궁 안의 어느 구석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명 받들겠습니다.”내시는 곧바로 몸을 돌려 다시 뒷문으로 사라졌다.황제는 곁에 선 사람에게 낮게 명했다.“어림군을 함께 보내거라. 연기준을 발견하는 즉시 베어내야 한다. 그리고 서인경의 목숨은 남겨 두거라.”“예.”측근 내시도 다급히 물러났다.황제는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 검게 몰려 있는 것은 조정의 중신들이었고 그 선두에는 서왕과 맹국공이 서 있었다. 이들이 있는 한, 연기준이 모습을 드러내 맞서기만 해도 역모의 죄를 뒤집어쓰게 될 것이고 황제는 정당한 명분 아래 그를 처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되면 이후, 진국에는 오직 황제만 남고 상왕이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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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3화

대황자는 코웃음을 쳤다.“예정임과 진가이가 밀통한 것도 결국 속셈은 하나 아닙니까? 자기 아들을 진국에 남겨 두고 언젠가 이 나라의 황좌를 차지하게 하려는 거지요. 그가 그 정도 배짱을 부렸는데 저라고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 아이가 정말 예정임의 자식이라면 그 목숨을 담보로 삼아 열셋 째 황자의 목을 바꿔 오면 됩니다. 만약 제 아이라 해도 제가 예정임의 아들이라 하면 그게 곧 진실이 되지요. 훗날 야랑국의 황위를 잇게 한 뒤 다시 제 핏줄로 되돌려오면 됩니다. 그러면 두 나라의 천하가 모두 우리 것이 되겠지요.”황후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 말에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그래, 이제야 네가 조금 영리해졌구나. 네가 큰일을 도모한다면 어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돕겠다.”모자는 스스로의 계책이 빈틈없다고 여겼다.그러나 그 시각, 열셋 째 황자 역시 자신의 책사와 함께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었다.열셋 째 황자의 궁.연기준은 상석에 앉아 있었고 열셋 째 황자는 공손히 차 한 잔을 바쳤다.“오늘 제가 군권을 얻게 된 것은 모두 아홉 째 황숙의 계책 덕분입니다. 이 은혜, 깊이 감사드립니다.”연기준은 사양하지 않고 찻잔을 받아 들었다.“네가 총명해서 그런 것이다. 내가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알아듣지 않았더냐. 다만 황후와 대황자, 그리고 하선준의 집안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쪽의 움직임을 늘 살피는 것이 좋겠다.”열셋 째 황자는 몸을 거의 직각으로 숙였다.“저는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큰 형님과는 달리 황후 마마와 하선준 대인 같은 가문도 없지요. 부디 아홉 째 황숙께서 길을 밝혀 주십시오.”연기준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열셋 째 황자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단언했다.“훗날 제가 뜻을 이루게 된다면 반드시 아홉 째 황숙을 섭정왕으로 모시겠습니다. 천하 만인 위에 서게 하겠습니다. 아니, 저조차도 모두 황숙의 뜻을 따르겠습니다.”연기준의 입가에 옅은 만족이 스쳤다.“그 마음이면 충분하다. 이제부터 할 말은 잘 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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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4화

금지 구역의 뜰에는 잡초가 허리 높이까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서인경은 그 속에 몸을 낮춘 채, 수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쇠사슬이 풀리는 소리를 들었다. 쾅 하고 던져진 자물쇠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문이 열리더니 한 줄기 햇빛이 먼저 안으로 흘러들었다.서인경은 문가의 풀숲에 몸을 숨긴 채, 무리를 이루어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한 곳도 남기지 말고 샅샅이 수색하거라.”그러나 어림군이 움직이기도 전에, 밖에서 유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멈추십시오. 지금 무엇을 하는 겁니까?”앞장서던 어림군이 돌아보자 태황태후의 곁을 지키는 유모가 엄숙한 얼굴로 들어오고 있었다.“이곳은 태황태후의 명 없이는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당신들, 무슨 자격으로 들어오려는 겁니까?”어림군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저희는 폐하의 명을 받아 중범을 수색하러 왔습니다.”유모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여기에 귀신이 나온다는 건 알고 있습니까? 범인은 못 찾고 귀신부터 깨우면 후궁은 앞으로 어찌 살라는 겁니까?”어림군의 통령은 이곳의 사연을 모르는 듯 코웃음을 쳤다.“귀신이라니요. 그런 걸로 겁주지 마십시오. 저희도 명을 받들어 왔을 뿐입니다. 이곳이 크지도 않으니 한 바퀴만 돌고 바로 나가겠습니다.”“안됩니다!”유모가 막아 나서려는 순간, 쏴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뽑히더니 은빛 칼날이 눈앞을 스치며 유모의 앞에 멈춰 섰다. 조금 전, 양심전에 나타났던 내시가 어느새 문가에 서 있었다. 그는 장검을 들어 유모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황제의 명입니다.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 베어라고 하셨습니다.”유모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방해물이 사라지자 어림군은 그대로 안으로 들이닥쳤다.서인경은 빽빽한 잡초 사이로 그들의 발걸음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들었다. 그녀는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숨소리조차 죽였다. 이대로라면 들키고 말 것이다.그녀의 손안에는 이미 미약이 쥐어져 있었다.그때, 한 자루의 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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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5화

문이 닫히는 순간, 밖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터져 나왔다.“어디로 사라진 거지?”“수색해. 이 근처의 처소 하나도 남기지 마.”서인경이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이곳이 안상재가 머무는 궁전의 뒷문이라는 걸 알았다.그녀가 사는 곳은 초라했다. 뒷문은 오랫동안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낙엽과 먼지가 쌓여 하인들의 숙소와 다를 바 없었다. 문안에는 안상재뿐 아니라 똑같이 배가 어느정도 불러있는 흔귀인도 함께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얼굴빛은 괜찮았지만 처음 이런 일을 겪는 탓인지 손과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했다.조금만 표정이 흔들려도 들킬 만큼 긴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그들은 서인경을 데리고 곁전의 침소로 들어갔다.흔귀인이 궁녀의 옷 한 벌을 꺼내 들었다.“상왕비, 서둘러 갈아입으세요. 어림군이 곧 이곳까지 뒤질 겁니다. 제대로 숨길 수 있는지는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어요.”총애를 받지 못한 채 밀려나 있는 두 후궁이 서인경을 숨겨 주는 것은 곧 목숨을 건 선택이나 다름없었다.서인경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바로 옷을 벗어 궁녀 복장으로 갈아입었다.“지금 저를 넘기면 폐하의 눈길을 얻을 수도 있고 아이들의 앞날도 바꿀 수 있을 겁니다. 헌데 왜 저를 돕습니까? 들키면 모두 목이 달아나게 될 텐데요.”흔귀인과 안상재는 이 질문을 이미 예상한 듯 서로를 한 번 바라보았다.“황자든 공주든 다를 게 없어요. 황자는 다음 황제를 위해 싸우다 버려지고 공주는 정략결혼으로 팔려 가게 됩니다. 결국 똑같은 결말인데 왜 그런 박정한 사내의 비위를 맞춰야 합니까?”서인경은 그 말에 잠시 말을 잃었다.이 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마음이 식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황제가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질렀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이토록 많은 여인들에게 버림받는 군주라니. 모두 자업자득이었다.막 궁녀 옷으로 갈아입었을 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두 분 마마, 황제의 측근 내시와 어림군이 들어와 중대한 도망자를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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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6화

공기가 얼어붙었다.서인경은 손바닥 안에 쥔 치명적인 독약을 더 꽉 움켜쥐었다.잡히는 순간 끝이었기에 그녀는 이미 함께 죽을 각오를 마친 상태였다.내시는 서인경에게 다가와 갑자기 어깨를 움켜잡았다.그녀가 막 손을 뻗어 반격하려는 순간,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이어 문밖으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번쩍 스쳤다. 순간 병사들과 내시들이 적을 맞닥뜨린 듯 긴장했다.“찾았다, 추격하거라!”둔중한 발소리가 한꺼번에 밖으로 쏟아져 나가자 곁전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안상재가 급히 서인경을 일으켜 세웠다.“지금입니다. 곧 다시 돌아올 테니 얼른 뒷문으로 나가세요.”서인경은 그림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일부러 그들을 끌어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아마도 연기준의 수하일 것이다. 연기준이 이 근처에 있다는 생각에 서인경은 곧장 뒷문으로 몸을 돌렸다.“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훗날 필요하시면 목숨을 걸고라도 갚겠습니다.”막 뒷문을 나서는 순간, 옆쪽에서 한 줄기 그림자가 날아내렸다. 방금 자신을 뒤쫓던 이들과 같은 차림을 한 어림군의 병사였다.서인경이 먼저 공격을 날리자 병사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는 서인경에게 손끝 하나 닿지 않으려 애썼다.“저는 왕야, 아니 상왕의 사람입니다.”서인경이 믿지 않을까 두려웠는지 그는 허리에서 낡고 못생긴 향낭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것은 예전에 서인경이 연기준에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솜씨가 형편없어 맹은영에게 한참 놀림을 받았던 물건이었지만 연기준은 줄곧 몸에 지니고 다녔다. 익숙한 그것을 보는 순간, 서인경은 공격을 멈췄다.“연기준은 어디 있느냐?”“상왕께서는 다른 일에 묶여 계십니다. 대신 제가 왕비 마마를 안전한 곳으로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그의 엄호 덕분에 서인경은 어림군의 포위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양심전.황제는 내시의 보고를 들으며 얼굴이 일그러졌다.“후궁 전부를 뒤졌지만 흔적조차 없습니다.”“무능한 것들!”황제는 분노에 차 탁자를 쓸어버렸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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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7화

금수 대장공주의 이름이 나오자 신비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그녀는 열여덟 째 공주와 가까워지는 금수 대장공주가 늘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껴 왔다. 후궁의 다른 황자와 공주들에게는 늘 날이 서 있던 사람이 유독 열여덟 째에게만은 친딸처럼 다정했기 때문이다.예전에는 단지 아이가 귀여워서 그렇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최근에 금수 대장공주에 대한 여러 소문을 들었고 전조와 요동, 그리고 진국 사이의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는 이야기 또한 알고 있었다. 요동 측이 유난히 강경하게 나오는 것 역시, 금수 대장공주의 뜻이라는 말이 뒤따랐다. 그 모든 사실을 떠올리자 이번에 그녀가 경성으로 돌아온 것이 단순한 친정 방문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신비는 두 아이를 더욱 세심하게 지켜야 했기에 조금의 틈도 허락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열여덟 째 공주를 안아 품에 끌어당겼다.“요즘 황고모 할머니께서 몹시 바쁘시니 우리가 괜히 방해하지 말자꾸나. 알겠지?”열여덟 째 공주는 아쉬운 듯 입술을 내밀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문밖에서 지켜보던 낯선 얼굴들은 하루 종일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다. 해가 지고 신비의 처소에 불이 하나둘 꺼지며 고요가 내려앉자 감시하던 자들도 점차 긴장을 풀었다.세 사람은 서로 다른 위치에 서서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소리 없이 문을 빠져나갔다.양심전.하루 종일 사람을 찾지 못한 탓에, 황제의 불안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는 연기준과 서인경이 아직도 궁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 둘이 살아 있는 한 그는 단 하루도 편히 눈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장생불사의 약은 아직 손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서인경은 황제가 붙잡고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다.초조함이 극에 달한 그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쓸모없는 것들! 후궁이 얼마나 넓다고 사람 하나를 못 찾는단 말이냐? 설마 날아서 나가기라도 했다는 것이냐!”내시가 차를 들고 다가와 황제 곁에 내려놓았다.“폐하, 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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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8화

황제는 이 옥패를 기억하고 있었다. 선황이 살아 있을 때, 그와 연기준에게 각각 하나씩 만들어 준 것이었다. 연기준의 것은 흰색, 자신의 것은 회색. 두 개를 맞대면 하나의 완전한 팔괘 태극이 되도록 만들어진 짝이었다. 형제가 한마음으로 끝까지 화목하기를 바란 선황의 뜻이 담긴 물건이었다.그런데 지금, 왜 연기준의 옥패가 자기 곁에 있는 것인가? 연기준은 언제 그에게 다가왔던 것인가? 그리고 언제 이 옥패를 그의 몸에 옮겨 놓았단 말인가?황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한 채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마치 어딘가 어둠 속에서 연기준의 시선이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극도로 긴장한 탓에 귀 안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머리가 팽창하는 듯 아파지더니 어느 순간 시야가 캄캄해졌다.황제는 그대로 용좌에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의식을 잃기 직전, 그의 눈앞에는 연기준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듯했다.양심전 안에서 둔중한 소리가 울리자 내시들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 잠시 후 전각 안에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폐하께서 쓰러지셨다. 태의, 어서 태의를 부르거라!”곁전에 대기하던 태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소란이 커지자 밖에 있던 대신들까지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맹국공과 서왕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전각 안으로 향했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내시들은 이미 정신을 잃을 만큼 혼란스러웠다.그때, 서왕이 명령했다.“어서 태황태후와 황후를 모셔 오거라.”그제야 내시가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갔다. 태의들은 한참을 매달린 끝에 황제의 이마에 꽂혀 있던 은침을 뽑아냈다.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 지나 있었다.서왕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어떠하냐?”태의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폐하께서는 어떤 강한 자극을 받아 급히 심화가 치솟아 혼절하신 듯합니다. 당장은 목숨에 지장은 없으나 다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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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9화

상왕이라는 말이 떨어지자 곁에서 시병하던 황후와 대황자, 그리고 열셋 째 황자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황후와 대황자의 가슴에는 불길한 예감이 일제히 치솟았다. 그들이 연기준과 어떤 관계였는지 생각해 본다면 그가 자신들을 지지해 줄 리 만무했다. 만약 연기준이 정말 죽음에서 돌아와 이 판에 끼어든다면 대황자의 제위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반면, 열셋 째 황자는 겉으로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속은 환희로 가득 찼다. 그는 잘못된 편에 서지 않았다. 연기준은 정말로 움직이고 있었다.태황태후는 잠시 얼어붙어 있다가 천천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놀란 기색은 이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떤 생각이 스친 듯, 그녀는 갑자기 옥패를 들어 바닥에 내던졌다. 옥이 산산이 부서지며 흰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참으로 잘도 길러 놓은 손자구나. 그 어미와 한 치도 다르지 않게 인륜을 저버리고 대역을 꾀하다니. 이 몸이 살아 있는 한, 누가 감히 진국의 근본을 흔들겠느냐? 설령 전공으로 이름을 떨친 상왕이라 해도 감히 반역을 꾀한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태황태후는 이 한마디로 연기준의 모든 행동을 역모로 규정해 버렸다.그녀는 연기준이 야랑국에서 무엇을 겪었는지, 죽음에서 돌아와 이곳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이 아이가, 자신이 길러 낸 손자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지조차 보려하지 않았다.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진국의 황위. 그리고 이 아이가 황위를 지키는 데 쓸모가 있는지, 자신을 바쳐 나라를 떠받칠 수 있는지뿐이었다.서인경은 양심전의 암실에 숨어 태황태후의 말을 모두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곁에 있는 연기준을 바라보았다.어두운 암실 안에서 마침 한 줄기 빛이 그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연기준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서인경은 그의 손이 차갑게 식어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뺨을 그의 손등에 가만히 대었다. 말 없는 위로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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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0화

두 사람은 각각 그릇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잠시 후, 용상 앞에서 고른 숨소리가 두 갈래로 울려 퍼졌다.풍 내관은 다가가 두 사람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 서재 앞으로 갔다. 그는 화병 하나를 살짝 돌렸다. 서재가 소리 없이 틈을 벌리며 움직였고 안쪽의 암실로 등불 빛이 스며들었다. 그 빛 속에는 서로 기대앉아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왕야, 왕비 마마. 연풍이 궁 밖에서 전해 온 소식입니다. 진방옥이 대황자에게 납치되었다고 합니다.”연기준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서인경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자네 말로는 그 사람 손에 아직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인장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게 대황자 손에 넘어가면 곤란해지네.”연기준은 한동안 말없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어 풍 내관을 보았다.“폐하는 멍청하지 않다. 우리가 그의 양심전에 숨어 있다는 걸 곧 알아차릴 것이니 더는 시간을 끌어서는 안돼. 내일 아침, 계획대로 움직인다.”풍 내관의 얼굴에 근심이 스쳤다.“헌데 성 밖 병력이 정말 대황자에게 넘어가면 왕야와 왕비 마마께서 위험해집니다.”연기준은 고개를 내려 서인경을 바라보았다.“두렵느냐?”서인경은 언젠가 황제와 맞설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오래 쫓기기만 했기에 이제는 반격하고 싶었다. 그녀는 황제가 자신에게 무릎 꿇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서인경은 연기준의 손을 꽉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당신과 함께라면 저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연기준의 얼굴에 뜻밖의 미소가 번졌다. 늘 냉정하던 얼굴이, 얼음이 녹아 꽃이 피듯 부드러워졌다.“다시는 네 손을 놓지 않겠다.”“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함께 아들을 만나러 가야 하니까요.”연기준은 떠나올 때 말도 하지 못하던 그 아이를 떠올렸다. 이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를 줄 안다고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한 기운이 차올랐다.“그래. 함께 아들을 만나러 가자.”멀리 설산에서, 눈더미 속을 굴러다니던 꼬막이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남쪽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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