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061 - Chapter 1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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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1화

그 시절의 소예지는 누구나 한 번쯤 시선을 빼앗길 만큼 맑고 청순한 미인이었다. 김경환 역시 처음 마주한 순간, 속으로 조용히 감탄했었다.‘사모님, 참으로 좋은 분이시네.’D국에서 심유빈이 돈과 명예를 끝없이 요구하던 모습과 비교하면 소예지의 바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소박했으니까.그런데 지금의 소예지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범접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완전히 변해 있었다.수액은 천천히, 아주 조금씩 고이한의 팔을 타고 흘러들었고 이내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김경환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담요를 살며시 고쳐 덮어 준 뒤, 아무 말 없이 자리로 돌아가 다시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어쨌든 김경환은 대표가 다시 소예지를 되찾아 오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고이한의 성격상 평생 혼자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오후 다섯 시 반, 소예지는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그녀는 고이한이 아프다는 사실을 딸에게 굳이 알릴 생각이 없었지만 집에 들어와 손을 씻는 짧은 순간, 양희순이 먼저 입을 열어 버렸다.“엄마, 아빠 아픈 거예요? 아래층에 있어요? 저 보러 가고 싶어요.”고하슬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애원하듯 말했다.“죄송해요, 사모님. 하슬이가 물어보는 바람에 그만...”양희순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마침 고이한을 위해 죽을 끓이고 있던 참이었다.“괜찮아요.”소예지는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양희순은 고이한 밑에서 6년이나 일해 온 사람이었으니 정이 남아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하슬아, 조금만 기다렸다가 죽 다 끓으면 엄마랑 같이 내려가서 아빠 보자.”양희순이 부드럽게 말했다.소예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고이한은 첫 번째 공여자였다. 다음 주에는 고수경에게 약물 시험을 할 계획이 잡혀 있었기에 그는 무엇보다 빠르게 몸을 회복해야 했다.십오 분 후, 고이한의 방 현관 벨이 울렸다.문을 연 김경환은 소예지와 고하슬을 보자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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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2화

“아빠, 빨리 나아야 해요! 다음 주에 가족 운동회가 있는데 아빠랑 엄마랑 같이 참가하고 싶어요.”고하슬이 말했다.고이한은 웃으며 선뜻 대답했다.“그래, 아빠 꼭 갈게.”소예지는 서재로 돌아가 밀린 업무를 마저 처리했다. 문득 아버지의 노트에 혈액병 관련 기록이 있다는 것이 떠올라 손을 뻗어 꺼내 들었다.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빼곡하게 채워진 아버지의 필체 사이에서 백혈병 관련 기록이 유독 눈에 띄었다.소예지는 미간을 찌푸렸다.‘아버지는 왜 마지막 2년을 그토록 백혈병 연구에만 매달렸던 걸까.’혈액병 기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량 자체가 많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가 마지막 시간을 쏟아부은 것은 혈액병이 아닌 백혈병이었다.소예지는 스미스 박사의 실험실 시스템을 열고 백혈병 연구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했다.그런데 그 안에도 백혈병 관련 연구 방향과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아버지가 살아 있던 마지막 해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가장 최근의 기록은 소예지가 국내에서 백혈병 연구를 이어받은 바로 그해였다.‘그렇다면 고이한이 이 혈액 실험실을 세운 목적이 단순히 어머니의 병 때문만은 아니었던 걸까.’파일을 들여다볼수록 그가 백혈병 연구에도 적잖은 공을 들인 흔적이 보였다.물론 신약 개발은 워낙 유망한 분야였다. 의약 업계에 발을 들인 이상 연구를 통해 상업적 성과를 내려 했을 수도 있었다.고신 그룹 주주들은 고이한의 의약 업계 진출을 처음부터 탐탁지 않게 여겨 왔고 이 혈액 실험실은 그의 개인 자금으로 세운 것이었다. 수익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압박이 없을 리 없었다.소예지는 생전의 아버지가 남긴 노트를 바라보다 가슴 한켠이 묵직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아버지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미간을 주무르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고수경이었다. 소예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소예지 언니, 방금 제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요. 수치가 거의 다 정상으로 돌아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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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3화

“네, 하슬이 데려올게요.”소예지가 27층으로 내려가 벨을 눌렀다. 문을 연 김경환은 그녀를 보자 반갑게 웃었다.“잘 오셨어요. 마침 제가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대표님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소예지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지금 상태는 어때요?”“지금은 미열 상태인데 오늘 밤 다시 고열이 날 수도 있다고 이 선생님이 걱정하시더라고요.”김경환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알겠어요.”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경환의 얼굴에 금세 안도의 빛이 번졌다.“그럼 부탁드릴게요. 저 먼저 가볼게요.”어깨에 얹혔던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김경환은 홀가분한 걸음으로 문을 밀고 나갔다.거실에는 고이한이 없었다. 소예지가 소리를 따라가 보니 장난감 방에서 고이한이 소파에 앉아 딸과 함께 블록을 쌓고 있었다. 젤리는 소파 위에 턱을 괴고 엎드린 채 고이한의 허벅지에 커다란 주둥이를 기댔고 그의 손길에 눈을 가늘게 뜨며 녹아들고 있었다.아빠와 딸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 꽤 따뜻한 그림이었지만 소예지는 어쩐지 눈에 거슬렸다.“하슬아, 저녁 먹으러 올라가자.”“엄마, 나 아직 배 안 고파요.”고하슬은 더 놀고 싶은 눈치였다.“밥 먹고 나서 다시 내려와서 놀면 되잖아.”소예지가 달랬다.“알겠어요...”고하슬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고이한도 거들었다.“밥 먹고 오면 아빠가 계속 같이 놀아줄게.”“그럼 밥 먹고 올게요. 아빠, 기다려요!”고하슬은 그 말에 금세 표정이 밝아지더니 엄마 손을 덥석 잡고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소예지는 딸과 함께 올라가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밥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하슬은 이미 아래층으로 내려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소예지는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위아래 층에 살다 보니 딸이 고이한 집으로 달려가는 것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고 게다가 안전을 생각하면 직접 데려다줘야 했다.다시 고이한의 집에 들어서자 고하슬은 이번에는 블록보다 만화가 보고 싶다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이한이 영상을 틀어 주자 소예지는 그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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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4화

소예지는 집으로 돌아와 서재 문을 닫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결국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아버지 때문이었다.평생을 연구에 바친 사람이, 마지막 시간을 누군가의 사업 아이템으로 소비됐다는 사실이 가슴을 후볐다.몇 분 후, 소예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흔들리던 눈빛이 서서히 단단하게 굳어갔다.지금 와서 따져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너져 있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는 어떤 사람도 어떤 방식으로도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다치게 두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아홉 시가 되자 양희순이 내려가 고하슬을 데려왔다. 고하슬은 순순히 올라왔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아빠가 며칠 자리를 비운대요. 아래층에 안 계실 거래요.”소예지가 부드럽게 달랬다.“아파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엄마가 옆에 있잖아.”“엄마, 아빠 혼자면 너무 불쌍하지 않아요? 아픈데 아무도 없잖아요.”고하슬의 말에 소예지는 잠깐 숨이 막혔다.그녀는 애써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고하슬은 이내 가족 운동회 얘기를 꺼냈다.“엄마, 아빠가 운동회에 오겠다고 약속했어요.”“몸이 안 좋으신데 그냥 엄마랑 둘이 가자.”소예지가 말했다.오늘 밤의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소예지는 딸이 고이한에게 자꾸 가까워지는 것을 본능적으로 막고 싶었고 이 남자와는 깔끔하게 끊어내고 싶었다.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품 안의 아이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소예지는 팔베개하고 누운 채, 생각이 자꾸 아래층 남자에게로 흘러갔다. 오늘 밤 다시 고열이 날 수도 있다고 했던 김경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소예지는 몸을 뒤척이며 마음을 다잡았다.‘상관하지 말자.’눈을 감았지만 생각은 오히려 더 밀려들었다.만약 고이한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딸의 미래에서 가장 확실한 공여자를 잃게 되는 셈이었다. 딸이 발병할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소예지는 그 가능성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아버지의 헌신을 사업 항목 하나로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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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5화

소예지가 막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김경환이 다급하게 말했다.“소 박사님, 고 대표님 부탁드려요. 저희 아버지가 방금 입원하셔서 제가 자리를 뜰 수가 없어서요.”소예지는 잠깐 멈칫하다 짧게 대답했다.“알겠어요.”문을 밀고 들어서자 거실에는 전등 하나만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고이한은 소파에 누운 채 잠들어 있는 듯했다. 소예지가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숨이 살짝 가빠 보였고 굳게 다문 눈썹이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었다. 편안한 잠이 아니었다.손을 뻗어 이마를 짚으니 역시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소예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 찬 수건을 꽉 짜서 가져다 이마에 얹었다. 탁자 위의 약을 집어 들고 확인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잠긴 목소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흘러나왔다.“소... 예지?”“마지막으로 약 먹은 게 몇 시야?”소예지가 돌아보며 차갑게 물었다.고이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네 시쯤이었던 것 같은데.”예상대로 제때 약을 먹지 않아서 다시 고열이 오른 것이었다. 소예지는 물 한 잔을 떠다 약과 함께 탁자 위에 내려놓고 소파의 남자를 향해 말했다.“약 먹어.”고이한은 몇 초간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일어나서 약 먹으라고.”소예지가 다시 한번 말했다.고이한은 손으로 소파를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순순히 물컵을 들어 약을 한꺼번에 털어 넣고 몇 모금을 삼켰다.다만 약을 삼키는 그 내내, 그의 시선은 소예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억눌리고 복잡한 감정이 눈 안에 가득 고여 있었고 마치 약을 다 먹고 나면 그녀가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운 것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약을 다 먹고도 고이한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예지를 바라봤다.“난 당신이 다시는 나한테 오지 않을 줄 알았어.”소예지는 대답 대신 체온계를 내밀었다.“재봐.”고이한이 체온계를 건네받아 체온을 잰 뒤 다시 돌려주었고 소예지가 확인하자 39도를 훨씬 넘었다.그녀는 말없이 물컵을 들고 가 물을 다시 채워 왔다.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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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6화

소예지는 정말이지 장인을 빼닮은 사람이었다. 연구에 한번 빠져들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 유전자까지 그대로 닮아 있었다.지난번 사흘 밤낮을 매달리다 쓰러졌을 때, 응급실 앞에 서 있던 그 순간, 고이한은 오늘의 대답을 이미 결정했었다.그래도 괜찮았다. 그냥 미워하게 두면 됐다.그 연구 과제는 이미 그녀가 풀어냈기에 더 이상 무거운 짐처럼 그녀의 가슴을 짓누를 필요가 없었다. 짊어진 짐 하나를 덜어내고 조금 더 가볍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고이한은 다시 눈을 감고 밀려드는 모든 감정을 깊숙이 눌러 묻었다.열한 시가 되자 고이한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들어가서 쉬어. 나 괜찮아.”소예지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로 나가려 했다.고이한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문 쪽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가슴 한복판이 숨이 막힐 듯 조여들다 거의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소파에서 일어섰다.“소예지...”잠긴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벌떡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고열이 앗아간 기력과 현기증이 그의 예상을 훨씬 넘어섰다. 너무 급하게 일어선 탓에 눈앞이 순식간에 캄캄해지더니 몸이 제멋대로 앞으로 쏠렸다.발소리에 돌아선 소예지의 눈에 고이한이 자신을 향해 쓰러지는 모습이 들어왔다. 소예지는 거의 반사적으로 앞으로 달려가 기울어지는 그의 상체를 힘껏 받쳐 들었다.묵직하고 뜨거운 몸이 그대로 쏟아져 내리면서 숨이 턱 막힐 만큼 무거웠다.“가지 마...”남자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긴 팔이 천천히 펼쳐지며 그녀를 감쌌다. 꽉 끌어안고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듯한 집념이 느껴졌다.잠기고 낮은 목소리에 거의 애원에 가까운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조금만 더 있어 줘. 잠깐만, 응?”소예지의 몸이 굳었다.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밀려나지 않았다.분명 앓고 있는 몸인데 힘은 무섭도록 셌다.“놔.”소예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의 뜨거운 숨결을 피하며 차갑게 명령했다.“싫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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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7화

유리창 너머로 고이한이 의자에 조용히 앉아 팔을 뻗은 채 채혈하는 모습이 보였다. 간호사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절차를 이어갔다.창밖의 시선을 느낀 듯, 고이한이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평소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맞닿는 순간, 소예지는 몸을 돌려 그냥 걸음을 옮겼다.간호사가 바늘을 뽑고 솜으로 바늘 자국을 누르자 고이한은 간호사에게 낮은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예지가 막 사무실 문을 열려는 순간, 등 뒤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녀는 자연스레 몸을 돌렸다.고이한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 있었다.“소 박사.”그가 입을 열었다. 격식을 갖춘 호칭이었다.소예지는 담담하게 눈을 들어 그를 봤다.“할 말 있어?”“이번 주 채혈하러 왔어.”고이한이 낮게 말을 이었다. 눈빛은 그녀에게 고정된 채였다.“실험 일정에 차질 주지 않을게. 하슬이 미래도 내가 책임질게.”그 말은 고이한이 아프던 날 밤 소예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준 것이었다.소예지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혹시 내 말이 언짢아서 그래?”“아니, 맞는 말이야. 다 따를게.”고이한이 짧게 웃었다.“실험실 일은 다 당신 말대로 할게.”소예지는 말없이 몸을 돌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회의 소집 통보를 받은 소예지가 회의실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고이한은 이미 상석에 앉아 있었다.스미스 박사가 최근 데이터를 들고 와 월요일에 고수경의 치료 방안을 확정 짓기로 했다.“두 분의 결정을 전적으로 믿어요.”고이한의 시선이 소예지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소예지는 의도적으로 그 시선을 피하며 스미스 박사의 분석에 집중했다.회의가 끝나고 소예지가 노트북을 정리하며 자리를 뜨려 할 때, 고이한이 말을 걸었다.“월요일 하슬이 가족 운동회, 내가 참가할게. 괜찮지?”소예지는 별다른 감정 없이 대답했다.“그래. 나는 빠지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당신이 같이 가줘.”“알겠어.”고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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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8화

고수경의 마음가짐도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 병을 알게 됐을 때의 그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지금은 완전히 마음을 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자신이 회복된다는 것은 어머니의 병도 치료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는 의미였다.한편, 심유빈의 빌라.그녀는 막 어머니와 통화를 마쳤고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유미나가 방금 들어온 광고 계약서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요즘 기분이 안 좋은 거 알아. 근데 굴러들어 온 돈인데 우리가...”심유빈은 계약서를 훑어보다 눈살을 찌푸렸다.“이게 무슨 광고야? 나한테 기저귀 광고 모델을 하라고?”“아니, 내 말은...”유미나가 해명하려 했지만 심유빈은 계약서를 탁자 위에 내팽개쳤다.“내가 지금 아무 광고나 다 잡아야 할 만큼 궁해 보여? 이런 식으로 내 격을 떨어뜨리는 광고는 앞으로 가져오지도 마.”유미나는 한숨을 내쉬며 차분하게 말했다.“이제 예전이랑 달라. 우리한테 들어오던 고급 브랜드 계약이 거의 다 빠져나갔잖아. 이 브랜드는 이제 막 생긴 곳이긴 해도, 모델료가 생각보다 꽤 되거든.”심유빈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주물렀다.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게 아니었다.그날 밤 하종호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가 아무 말도 없이 끊어버렸을 때부터 이미 낌새가 이상했다. 분명 고수경이 먼저 손을 써서 자신의 이미지를 망가뜨려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 뒤로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봤지만 하종호는 끝내 받지 않았고 결국엔 번호까지 차단해 버렸다.불길한 예감이 가슴 한켠을 짓눌렀다. 하종호가 어디 있는지도, 지금 어떻게 된 건지도 알 수 없었다.고이한 쪽은 오히려 기대조차 하지 않게 됐다. 지금 심유빈이 기다리는 것은 고이한이 먼저 연락을 해 거래를 끝내자고 말해 주는 것이었다.심유빈은 채혈이 너무 무서웠다.그날 채혈을 하고 난 뒤로, 몸 상태가 영 회복되지 않았고 빈혈로 혈당까지 떨어진 데다 정신적 스트레스까지 겹쳐 두통이 심각한 수준이었다.최근 들어 심유빈은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쓸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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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9화

심유빈은 휴대폰을 꽉 쥐었다. 이게 김경환의 핑계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고이한이 애초에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김 비서님, 성양 그룹이랑 한성 협력 건 때문에 고 대표한테...”“심유빈 씨.”김경환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사업 협력 관련 사항은 담당 부서로 직접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 대표님은 그런 사안은 직접 관여하지 않으세요. 다른 용건이 없으시면 먼저 끊겠습니다.”“잠깐만요, 김 비서님...”심유빈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낮췄다.“한 번만 연결해 주시면 안 돼요? 아니면 지금 어디 계시는지라도요. 제가 직접 찾아갈게요.”“죄송합니다, 고 대표님의 일정은 알려드리기 어렵습니다. 이만 끊겠습니다.”김경환은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심유빈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앉아 있었다. 귓가에 울리는 연결음이 마치 조롱처럼 들렸다. 걷잡을 수 없는 굴욕감과 무력감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평생 이런 냉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이제는 김경환조차 저런 태도야?’심유빈은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고 눈빛에 원망이 가득 차올랐다.“고이한, 진짜 이렇게까지 할 거야?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굴 거야?”그러다 문득 하종호가 떠올랐다. 하종호라면 뭔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예전에 힘들 때마다 하종호는 언제나 제일 먼저 달려와 곁에서 달래주고 감싸줬으니까.심유빈은 다시 휴대폰을 들어 하종호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심유빈 씨. 무슨 일이세요?”심유빈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하 대표님 계세요? 지금 회사에 있나요?”“죄송합니다, 심유빈 씨. 대표님은 요즘 국내에 안 계세요.”“국내에 없다고요? 어디 가셨는데요?”“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른 용건 없으시면 끊겠습니다.”비서는 깔끔하게 전화를 끊었다.심유빈은 손끝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종호의 비서조차 자신을 피하는 걸까.뭔가에 고립되고 버려지는 것 같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도대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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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0화

심유빈의 웃음이 순간 굳었다.그녀는 이내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엄가온 씨, 미안한데 저 먼저 하 대표랑 개인적인 얘기 좀 나눠도 될까요?”엄가온은 잠깐 멈칫했다. 약속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기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먼저 올라가세요. 저는 이따가 만날게요.”심유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하종호가 왜 자신을 피하는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엄가온이 옆에 있으면 제대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없었다. 먼저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정말 고마워요, 엄가온 씨. 마음이 넓으시네요.”심유빈이 감사한 듯 말했다.“저는 로비에서 기다릴게요. 먼저 올라가세요.”엄가온이 말했다.심유빈은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프런트 직원들은 이 두 사람을 감히 막을 수 없었다. 심유빈은 예전부터 하종호의 단골손님이었다. 그녀가 오면 예약 없이도 언제든 드나들 수 있었다.엄가온 역시 요즘 하종호와 함께 자주 보이는 터라 직원들도 낯설지 않았다. 프런트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대표님 개인 휴게실에서 기다리시겠어요?”막 자리에 앉으려던 엄가온은 반색했다. 몸이 살짝 피곤하던 참이었다.“좋아요, 안내해 주세요.”엘리베이터 문이 딩 하고 열렸다.심유빈은 핸드백을 고쳐 쥐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하이힐 소리를 내며 우아하게 하종호의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비서실을 능숙하게 지나쳐 곧장 하종호의 사무실 두꺼운 원목 문 앞에 섰다.하종호는 서류에 파묻혀 조항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비서가 들어오는 줄 알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거기 두고 나가.”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때 낯익은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고개를 번쩍 든 하종호의 눈앞에 핸드백을 든 채 요염하게 웃고 있는 심유빈이 서 있었다.하종호의 표정이 순간 굳어지면서 혐오와 거부감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어떻게 들어온 거예요?”하종호는 펜을 내려놓고 책상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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