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071 - Chapter 1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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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1화

심유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윤하준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속내와 비밀이 모조리 꿰뚫린 것 같은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종호 씨, 무슨 소리예요? 윤하준 씨랑 나는 그냥 친구였다고요!”“이 상황에서도 아직 내가 당신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바보라고 생각해요?”심유빈의 온몸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하종호가 도대체 무엇을 알아낸 걸까. 어떻게 갑자기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것처럼 굴 수 있는 거지?’“아니에요, 내 말 들어봐요. 이한 오빠랑은 그냥 거래였고 윤하준 씨랑도 진짜 그냥 친구 사이였어요. 그런데 당신한테 느끼는 감정만큼은... 진심이에요. 그건 한 번도 부정한 적 없잖아요.”심유빈이 다급하게 다가서며 하종호의 팔을 잡으려 했다.하종호는 혐오스럽다는 듯 몸을 피했다.“손대지 마요.”한 발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눈 속의 혐오가 넘쳐흐를 것 같았다.“심유빈 씨,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당신한테 좋아한다는 말 듣는 것조차 사양할 거예요. 앞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 마요. 나타나면 옛정 생각 안 하고 망신을 줄 수도 있으니까.”하종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7년간의 어리석음은 인정할 수 있었고 7년간 이용당한 것도 따지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심유빈과의 모든 것을 끊어내는 것뿐이었다.“종호 씨!”심유빈이 날카롭게 외쳤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이번만큼은 연기가 아니었다. 하종호에게 버려지는 절망과 억울함이 진짜로 밀려왔다.“이러면 안 돼요.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했는데...”“감정이요?”하종호가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감정이 있긴 했나요? 내가 일방적으로 퍼부은 것과 당신이 태연하게 이용한 것, 그게 전부였잖아요. 이제 게임 끝이에요. 지난 일은 다 묻겠지만 더 이상 들러붙지는 마요.”하종호가 몸을 돌렸다. 이것으로 모든 걸 끝내겠다는 듯 단호하고 차가운 뒷모습이었다.심유빈은 그 자리에 선 채 그를 바라봤다.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던 남자가 이렇게 돌아서 버리는 날이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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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2화

하종호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내가 아직도 당신 눈물 몇 방울에 넘어가던 그 바보인 줄 알아요? 지금 그 눈물, 후회해서가 아니에요. 나라는 발판을 잃을까 봐 두려운 거잖아요. 내가 줄 수 있는 인맥이랑 돈이 아까운 거고.”심유빈의 눈가에 눈물이 아직 맺혀 있었다. 그러나 얼굴 위로는 들킨 사람의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종호 씨, 어떻게 이렇게까지...”심유빈이 분하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하종호는 가로막았다.“연기 그만해요. 당신이 선택한 길이니 당신이 책임지면 돼요. 7년이란 시간이랑 돈, 내가 잘못 쓴 거라 치겠어요. 그러니까 이번 생에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요. 더 이상 나 역겹게 하지 말고.”하종호의 말투는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그러나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유빈의 가슴에 칼처럼 박혀 들었다.어떤 위장도, 어떤 수단도 진실을 알아버린 하종호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제야 완전히 깨달았다.분노 섞인 고함보다 이 조용한 퇴장 요구가 더 깊이 상처를 냈다.심유빈은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은 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력감과 수치심이 한꺼번에 짓눌렀다.하종호는 내선 전화를 눌렀다.“경호원 두 명 올려 보내줘요. 심유빈 씨 나가시게 안내해 드리고 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회사 출입 못 하게 해요.”심유빈은 마지막 자존심을 끌어모아 바닥에서 일어섰다. 떨어진 핸드백을 집어 들고 등을 곧게 폈다. 그리고 하종호를 노려봤다.“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알아서 나갈 테니까. 당신이 이렇게 냉정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7년이란 시간, 그 시간 동안 하종호에게 공들인 것이 없지 않았다. 이런 결말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억울했다.하종호는 차갑게 바라봤다.“이렇게 될 거라는 걸 당신도 알았을 텐데요.”심유빈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살짝 열려 있는 문밖에 엄가온이 서 있었다.심유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조금 전 안에서 오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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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3화

심유빈의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렸다.나란히 서서 한목소리로 자신을 대적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걷잡을 수 없는 굴욕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독하게 노려보는 것 외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재처럼 식어버린 채, 발이 허공을 딛는 듯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하종호는 엄가온을 바라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띠었다.“다 들었어?”엄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조금 들었어요.”“나 많이 우스워 보여?”하종호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엄가온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아니에요. 조금 어리석었던 거지 우스운 건 아니에요. 그래도 제때 정신 차렸으니 다행이에요.”그 말이 따뜻한 물결처럼 하종호의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말없이 엄가온을 품에 끌어안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너 만나서 다행이야.”엄가온은 그의 품에 기대어 조용히 웃었다.차 안으로 돌아온 심유빈을 보자 유미나는 깜짝 놀랐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공들여 한 화장도 군데군데 번져 있었으며 눈 화장은 눈물에 흘러내려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었다.유미나는 서둘러 물병을 건넸다.“무슨 일이야? 하 대표랑 싸웠어?”심유빈은 본래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린 채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기어이 막아냈다. 눈 속에 남은 것은 새빨간 증오뿐이었다.알고 있었다. 지금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잘 살아야 했고 자신이 얼마나 빛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증명해야 했다.고이한, 하종호가 없어도 괜찮았다. 지금 자신이 쌓아 올린 부와 위치는 이미 많은 사람들을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앞으로 그 두 사람보다 더 나은 상대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국내가 아니면 해외로 나가면 됐고 젊고 잘생긴 남자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돈 많은 노인이라도 충분했다. 자신을 이용할 기회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렇게만 하면 다시는 누구에게도 비웃음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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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4화

이 10년 동안,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이 소예지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왔다. 고이한이 처음에 한 선택이 틀렸다는 것도 함께 증명해 왔다.그리고 지금 마침내 그것을 이루어냈다고 느끼고 있었다.소예지와 고이한을 갈라놓는 데 성공했고 고이한을 소예지가 가장 증오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비록 자신이 직접 사모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소예지가 고통받고 고이한이 가정을 잃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에서 통쾌함이 솟구쳤다.그녀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 결국 고이한이 스스로 소예지의 신뢰와 사랑을 무너뜨리도록 만들었다.“소예지, 이제 고통이 어떤 맛인지 알겠어?”심유빈은 차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처음에 네가 내 사랑을 빼앗아 갔을 때, 난 언젠가 반드시 이렇게 만들겠다고 맹세했어.”물론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니었다. 소예지에게는 아직 딸이 있었고 빛나는 커리어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고이한만큼은 완전히 잃게 만들었다. 이번 생에서 두 사람이 다시 사랑하거나 가정을 꾸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이라 여길 수 있었다.지금의 소예지는 자신의 세계에서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 앞으로 그녀의 선택에 고이한이 포함될 일은 없을 것이었고 어쩌면 그 군인을 택해 A시를 떠나 기지 어딘가에서 연구를 이어가며 여생을 보내게 될지도 몰랐다.이제 심유빈이 바라는 것은 오히려 반대였다. 고이한이 끝까지 소예지를 사랑하기를, 미치도록 걷잡을 수 없이 집착하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고이한이 평생 사랑하면서도 가질 수 없는 형벌을 안고 살아가게 될 테니까. 끝없이 후회하고 미련 속에 갇혀 살게 만들고 싶었다.반면 자신은 달랐다. 명성도 있었고 지위도 있었으며 배경 또한 충분했다. 혼자였지만 그 선택지는 전 세계의 부호들로 열려 있었다.고이한도 하종호도 자신을 떠났다면 그뿐이었다. 돌이켜 보면,그들 역시 자신의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밟고 지나온 발판에 불과했다.그때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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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5화

“하.”심유빈은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우습고도 쓴웃음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그녀가 얻은 것은 젊은 날 갈망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으니까.돈, 인맥, 명성 이 모든 것이 고이한이 준 것이었다. 10년 동안 그의 사람을 얻지 못한 것을 빼고는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그러니 이제 두 눈 똑똑히 뜨고 소예지가 고이한의 딸을 데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그날을 지켜보면 됐다. 아마 윤하준이 아닌, 임현욱이라는 그 군인일 터였다.소예지가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다른 남자 곁에 서는 순간 고이한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그때 고이한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이 떠오를까. 억울함일까, 고통일까. 후회일까, 아니면 체념일까.’그 장면이 너무 보고 싶어 기다려질 지경이었다.“그날이 오면 소예지, 내가 꼭 축하해 줄게. 그 군인과 백년해로하길 바란다고.”“그리고 고이한, 당신은 오래오래 살면서 혼자 늙어가길 바랄게.”심유빈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번졌다.소예지의 집에서는 고하슬이 몇 번이나 아래층에 내려가 문을 두드리고 싶다고 졸랐다. 소예지가 없다고 했지만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함께 내려가 고이한의 방문을 두드렸다.역시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아빠 어디 갔어요?”고하슬이 작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앞으로 여기 안 오시는 거예요?”“아마도.”소예지가 짧게 대답했다. 사실 그게 소예지가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그럼 보고 싶을 때 어떡해요?”고하슬의 입꼬리가 축 처졌다. 매일같이 아래층으로 달려가 아버지를 볼 수 있었던 요즘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것이었다.소예지가 어떻게 달래 줄까 생각하던 찰나 등 뒤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가 안 온다고 했어?”소예지가 화들짝 몸을 돌렸다. 고이한이 언제 왔는지 엘리베이터 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아빠!”고하슬이 작은 새처럼 훌쩍 날아가 그의 품에 안겼다.“아빠, 어디 갔다 왔어요? 많이 보고 싶었어요.”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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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6화

[돌아오면 제가 밥 살게요.]소예지가 답장을 보냈다.[좋아요, 기다릴게요.]임현욱의 답장이 바로 왔다.소예지는 서재로 돌아와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고 노트북을 열어 이메일을 확인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고수경이 약물 투여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상태가 심각한 만큼 다양한 데이터를 통한 면밀한 평가가 필요했다.일곱 시쯤 양희순이 올라왔다.“사모님, 저녁 다 됐어요.”“양희순, 미안한데 내려가서 하슬이 좀 데려다줄 수 있어요? 저는 안 내려갈게요.”양희순이 웃으며 대답했다.“네, 그럴게요.”그런데 문 앞에 서서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간 듯 소예지는 미간을 좁히며 먼저 말했다.“그 사람은 초대하지 않아도 돼요.”양희순의 웃음이 잠깐 굳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오 분쯤 지나자 아래층 거실에서 고하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예지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가 딸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그때 고하슬이 말했다.“엄마, 젤리가 아직 아빠 집에 있어요.”소예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이따가 데려오자.”“근데 아빠 혼자 너무 외로울 것 같아요. 젤리라도 아빠 곁에 있게 해줘요, 엄마.”고하슬이 소예지의 손을 꼭 잡으며 아버지 편을 들었다.소예지는 할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어. 일단 밥 먹자.”저녁을 마치고 소예지는 다시 위로 올라가 일을 했다. 고하슬은 또 졸라서 양희순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아홉 시가 되어 소예지가 딸을 데리러 현관문을 열려는 순간 밖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었더니 고이한이 딸의 손을 잡고 함께 올라온 참이었다.“젤리 좀 올려보내 줘.”소예지가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젤리는 자기 집 반려견이었다. 다른 곳에 맡겨 두고 싶지 않았다.“엄마, 젤리 아빠 곁에 있게 해주기로 했잖아요.”고하슬이 동글동글한 얼굴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소예지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밥 먹기 전에 애매하게 허락했던 기억에 그녀는 얼른 핑계를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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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7화

고이한이 허리를 굽혀 가볍게 딸을 안아 올리더니 소예지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가방 줘. 내가 하슬이 어린이집 데려다줄게.”소예지는 반사적으로 거절하려 했다.“괜찮아, 내가...”“괜찮아.”고이한이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거스를 수 없는 온화한 힘이 실려 있었다.“아침이나 제대로 먹고 실험실 가.”“엄마, 아빠가 데려다줘도 돼요. 나 아빠랑 같이 어린이집 가고 싶어요.”고하슬이 소예지를 올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작은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했다.그 빛나는 눈망울을 마주하자 소예지는 입가까지 올라왔던 거절의 말을 결국 삼켜버렸다.“엄마한테 인사해.”고이한이 딸에게 말했다.“엄마, 잘 다녀올게요!”고하슬이 신이 나서 손을 흔들었다.젤리는 열린 문안으로 쏙 들어오더니 소예지를 향해 꼬리를 신나게 흔들었다. 소예지는 젤리를 흘겨봤다.고이한이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쳐 놓은 경계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특히 딸이 갈수록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소예지는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올리고 가방을 들어 실험실로 향했다.오전 열 시, 실험실에서 한창 일하고 있을 때 고수경이 문밖에서 손을 흔들었다. 소예지가 육중한 실험실 문을 열며 미간을 좁혔다.“무슨 일이에요?”“언니, 그 여자 왔어요.”고수경의 눈빛에 순간 증오가 스쳤다.“스미스 박사님을 찾아왔더라고요.”소예지는 바로 알아챘다. 심유빈이 스미스 박사를 찾아왔다면 기증 계약을 해지하려는 것이 분명했다.“언니, 설마 실험실에서 행패 부리려는 건 아니겠죠?”고수경이 주먹을 꽉 쥐며 분개했다.“가 보자고요.”소예지가 차분하게 말했다.스미스 박사의 사무실 문 앞에 다가서자 안에서 심유빈의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왜 결정을 못 한다는 거예요? 계약할 때는 그런 말이 없었잖아요. 지금 몸에 문제가 생겼다고요. 더 이상 기증을 못 하겠다는데 이게 저한테 죽으라는 것과 뭐가 달라요?”스미스 박사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돌아왔다.“심유빈 씨, 계약 조항에 따르면 일방적인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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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8화

스미스 박사가 전화를 걸기 위해 나오다가 복도에 서 있는 소예지를 발견했다. 그는 이미 고이한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고 대표님, 실험실로 잠깐 와주실 수 있을까요? 심유빈 씨가 계약 해지를 요청하고 있는데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하시네요.”잠시 후 전화를 끊고 스미스 박사가 소예지를 향해 말했다.“소 박사님, 심유빈 씨가 안에 있어요. 계약 해지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하네요.”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수경을 돌아봤다.“병실로 돌아가서 쉬어요. 여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고수경은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 뛰어들어 심유빈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소예지의 말을 거스를 수가 없어 억지로 감정을 눌러 삼키고 몸을 돌렸다.이십 분 후 고이한이 실험실 로비로 걸어 들어왔다. 짙은 색 수트를 입고 안정된 걸음걸이로, 차가운 표정과 함께 권위를 내뿜으며 다가왔다.스미스 박사가 마중을 나갔다.“고 대표님, 오셨어요. 심유빈 씨가 안에 계세요.”고이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밀고 들어갔다.“이한 오빠.”심유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소리에 반가움이 묻어났다.“드디어 왔네.”“박사님, 소예지 씨도 불러서 회의실에서 같이 얘기해요.”말을 마친 고이한이 심유빈을 무표정하게 한 번 훑어봤다.심유빈의 눈에 순간 노기가 번뜩였다.“이런 건 우리끼리 얘기하면 되잖아. 왜 소예지 부른 거야? 그 사람이랑 무슨 상관이야?”고이한은 그 말을 흘려들으며 이미 문밖으로 나가고 있었다.소예지는 사무실에서 자료를 작성하고 있다가 문 쪽으로 고개를 내미는 간호사를 봤다.“소 박사님, 스미스 박사님이 1호 회의실로 오시래요.”소예지는 잠깐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안 논의인 줄 알고 노트북을 들고 향했다.그런데 회의실 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세 사람이 이미 있었다. 소예지는 잠시 미간을 좁혀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때 스미스 박사가 먼저 입을 열며 말했다.“들어와요.”심유빈의 원망 가득한 시선이 소예지를 향해 날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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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9화

스미스 박사가 옆에서 계약서 사본 세 부를 꺼냈다. 한 부는 소예지 앞에, 다른 한 부는 심유빈에게 건넸다.“심유빈 씨, 진정하세요. 저희가 일부러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니에요. 계약 조항은 양측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는 거예요. 게다가 이 부속 조항들은 처음에 직접 요청하셔서 넣은 것들이잖아요.”소예지는 무심코 손을 뻗어 계약서를 펼쳐 들었다.두 장을 넘기는 순간 뜨겁고 다급한 시선이 날아들었다.고이한이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곧추세웠다. 소예지가 계약서를 넘기는 하얀 손가락에 눈길을 고정한 채 숨을 죽이고 그녀가 다음 장을 넘기기를 기다렸다.바로 그 순간 심유빈은 맞은편에서 계약서를 들여다보는 소예지를 발견했다. 가슴이 격렬하게 요동쳤다.이 계약서가 소예지의 손에 들어가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그런데 소예지는 계약서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고 훑어보는 둥 마는 둥 두 장을 넘기더니 덮어서 옆으로 밀어냈다.고이한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탁자 아래의 손이 무의식중에 꽉 쥐어졌다가 이내 천천히 힘이 풀렸다.스미스 박사가 심유빈을 향해 말을 이었다.“심유빈 씨, 이 계약서의 의미를 잘 아시잖아요. 계약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심유빈은 계약서를 노려봤다. 한때 그토록 흔쾌히 서명했던 이름이 지금은 이렇게 씁쓸하게 느껴질 줄 몰랐다.물론 내용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몇 가지 불합리한 조항들은 자신이 직접 요구해서 넣은 것들이었으니까.반년마다 D국에 머무르며 동행하고 학업과 공개 행사에는 반드시 함께하며 필요에 따라 상업 홍보와 사교 활동에 동행할 것.D국 최고 예술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전력으로 지원하고 중요한 기념일에는 억 단위 이상의 선물을 증정하며 가능한 한 직접 참석할 것.하얀 종이에 검은 글씨로 또렷하게 적힌 그 조항들은 심유빈이 공여자라는 특수한 위치를 이용해 고이한에게 감정적으로, 물질적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했는지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었다.소예지 앞에는 그 계약서가 펼쳐져 있어 마음만 먹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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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0화

‘봐, 고이한.’‘그렇게 공을 들여 소예지를 불러들이고 이 계약서로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증명하려 했겠지.’‘그런데 결과가 어때? 소예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잖아.’심유빈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비웃음을 머금고 고이한을 바라봤다.“이한 오빠, 봤지? 우리 사이 증거를 다 펼쳐놔도 그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잖아. 왜 혼자 착각하고 있어?”고이한의 눈빛에 경고가 번득였다.“말 가려서 해.”심유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그냥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그러더니 스미스 박사를 향해 말했다.“박사님, 이한 오빠랑 잠깐 단둘이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스미스 박사가 고이한을 바라봤다. 고이한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스미스 박사는 그래도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것이 낫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회의실 문이 닫히자마자 심유빈은 의자를 고이한 쪽으로 살짝 당기며 목소리를 한껏 부드럽게 가다듬었다.“이한 오빠, 아까 내가 너무 흥분했어. 계약 문제는 잘 얘기해 볼 수 있어. 근데 우리 아버지 회사는 좀 도와줄 수 있어? 한성 주문이 아버지한테 정말 중요하거든.”말을 마치며 그녀는 손을 뻗어 고이한의 소매를 잡으려 했다. 그런데 손이 반쯤 올라가는 순간 차가운 눈빛 하나가 그 손을 공중에서 멈춰 세웠다.심유빈은 멋쩍게 손을 거두면서 애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부탁이야, 이번 한 번만 도와주면 앞으로 시키는 대로 다 할게.”고이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갑게 내려다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욕심에도 한계가 있어야지. 난 너희 집안의 야망과 미래를 위해 돈 댈 의무 없어.”심유빈이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처음에 오빠가 자발적으로 도와준 거잖아.”고이한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돌아가서 아버지한테 전해. 더 이상 어떤 도움도 없을 거야. 계약은 네가 선택해. 계속할 건지 아니면 위약금을 낼 건지.”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심유빈은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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