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081 - Chapter 1090

1154 Chapters

제1081화

심유빈은 탁자 모서리를 붙잡은 채 온몸의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자신의 모든 자존심과 계산이 고이한의 이 냉혹한 판 앞에서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허무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허, 고이한. 정말 독하네.”심유빈이 낮게 중얼거렸다. 눈 속에 억울함이 가득했다.시선이 앞에 놓인 계약서로 향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집어 들더니 있는 힘껏 찢어버리려 했다.그런데 막 찢으려는 순간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심유빈은 미친 듯이 계약서를 넘기기 시작했고 눈빛이 초조하게 훑어 내려가다가 결국 굵게 강조된 한 조항 위에 손가락이 멈췄다.‘비밀 유지 조항: 본 계약의 모든 내용은 을의 서면 동의 없이 갑이 제삼자에게 누설, 공개 또는 제시할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갑의 계약 위반으로 간주하여 상응하는 법적 책임을 지고 을의 손실을 배상해야 한다.’심유빈의 눈 속에 뒤틀린 증오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고이한이 계약을 위반했어!’방금 자신의 동의 없이 소예지에게 계약 내용을 보여줬다.심유빈은 계약서를 움켜쥐고 회의실을 빠르게 뛰쳐나갔다. 고이한을 찾아가 따져서 먼저 위약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다.그녀는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았다.“고 대표 어디 있어요?”간호사가 깜짝 놀라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방금 사무실로 가셨는데요.”눈 속에 광기가 번뜩이며 심유빈은 빠른 걸음으로 향했다.그런데 공용 휴게실에 고이한의 모습이 보였다.“고이한.”심유빈이 그의 앞으로 달려가 계약서를 탁자 위에 세게 내리쳤다.“당신, 비밀 유지 조항 위반했어. 내 허락 없이 제삼자한테 계약 내용 공개하면 안 되잖아. 방금 소예지한테 보여줬지. 이건 명백한 위약이야.”고이한의 얼굴에서 당황하는 기색이 나타나길 기대하며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러나 고이한은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차가운 기운이 눈썹 사이에 서리며 그가 천천히 눈썹을 올렸다.“계약 조항 다시 한번 잘 읽어봐.”“무슨 소리야? 또 무슨 수 쓰려는 거야?”고이한 앞에서 심유빈은 처음으로 심리적 압박을 느끼기
Read more

제1082화

진짜 고이한은 바로 이런 남자였다.냉정하고 이성적이고 빈틈 하나 없이 계산하며 모든 것을 거래의 패로 삼는 남자.그리고 자신은 스스로를 사냥꾼이라 여겼지만 결국 가장 어리석고 우스운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이한...”심유빈이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 속에 고통과 무력감이 번졌다.“당신, 처음부터 나를 속인 거야?”고이한이 눈을 내리깔아 그녀를 바라봤다.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득의양양함도 미안함도 아닌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함뿐이었다.“서로 원해서 한 거래잖아. 무슨 속임수가 있어.”그가 담담하게 말했다.“넌 원하던 인맥이랑 명성, 부를 얻었고 난 어머니 건강 지켰어. 각자 필요한 거 가져간 거야. 깔끔한 거래였지.”“깔끔한 거래...”심유빈의 목소리가 갑자기 치솟았다. 울먹임과 원망이 뒤섞였다.“오빠도 알잖아, 내가 오빠 사랑했다는 거. 꼬박 10년이야. 한 여자의 가장 소중한 청춘을 다 바쳤어. 내가 했던 모든 노력, 오빠 옆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한 거였어. 근데 당신한테 난 도대체 뭐였어?”억울함과 굴욕이 뒤범벅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이 10년 동안 단 한 순간도 나한테 마음 흔들린 적 없었어?”바로 그 순간이었다.휴게실 복도 모퉁이에서 가느다란 실루엣 하나가 갑자기 멈춰 섰다.소예지는 스미스 박사와 방안을 의논하러 가던 중이었는데 이런 장면과 마주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박사에게 가려면 반드시 공용 휴게실 옆 복도를 지나야 했고 그 길목에서 그대로 발이 굳어버렸다. 손에 쥔 서류에는 어느새 힘이 들어가 있었다.막 돌아서려는 순간 등 뒤로 고이한의 차분한 목소리가 떨어졌다.“심유빈, 난 진작에 말했잖아. 나한테 시간이나 감정 낭비하지 말라고. 우리 거래는 계약서에 다 적혀 있어.”심유빈은 고통스럽게 고개를 돌리다가 시선이 복도 모퉁이로 삐져나온 흰 가운 자락을 포착했다.누구인지 바로 알았다. 소예지였다.눈 속에 원한이 번득였다. 심유빈이 목소리를 높였다.“시
Read more

제1083화

협박이 담긴 그 말에 심유빈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고이한이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언젠가 성양 그룹을 파산시킬 수도 있다는 그 생각이 스치자 심유빈은 몸이 휘청거렸다.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를 바라보며 그가 한 번 결정한 일은 반드시 해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한 오빠, 내가 잘못했어. 아까 그런 말로 소예지 자극한 건 옳지 않았어. 제발 우리 아버지 회사는 건드리지 마.”심유빈이 고이한의 소매를 붙잡으며 간절하게 애원했다.고이한은 팔을 차갑게 빼냈다. 눈 속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스쳐 지나가는 것은 오직 혐오뿐이었다.고이한의 시선이 소예지가 사라진 복도를 향했다.“그 저열한 속셈은 집어치워. 다시 한 번 나랑 소예지 사이에 끼어들었다간 성양 그룹이 A시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거야.”그 말에 심유빈은 공포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을 느꼈다. 울먹임이 배어든 목소리로 말했다.“이러면 안 돼! 내가 잘못했어. 10년 동안 어머니 위해 헌혈한 거 생각해서라도 성양 그룹이랑 우리 아버지는 봐줘...”심유빈이 다시 그의 팔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고이한은 능숙하게 피했다. 온몸에서 천 리 밖으로 사람을 밀어내는 냉기가 흘러나왔다.“나가.”말을 마친 고이한은 그녀를 다시 보지 않고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 단호한 뒷모습이 심유빈을 그 자리에 못 박아 놓았다.아까 소예지를 향해 내뱉은 도발과 이간질이 후회됐지만 동시에 소예지의 가슴에 칼 한 자루를 더 꽂아 넣었다는 것에 묘한 통쾌함도 남아 있었다.심유빈은 눈물을 닦고 몸을 돌려 가장 가까운 화장실로 들어갔다.칸막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간호사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까 봤지? 고 대표님 머리카락에 흰머리 부쩍 늘었더라. 나중에 완전 은발 되는 거 아니야?”“소 박사님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갔던 날 밤 있잖아. 그날 이후로 하룻밤 사이에 흰머리가 그렇게 생겼다더라.”“고 대표님이 소 박사님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것 같지?”“그러게. 근데 소
Read more

제1084화

노크 소리에 소예지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들어와요.”고이한이 문을 밀고 들어오자 소예지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책상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고이한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소예지.”그의 목소리에 미세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아까 심유빈이 한 말들, 나 다 설명할 수 있어.”“그럴 필요 없어.”소예지가 차분하게 고개를 들었다.“지난 일은 그냥 지난 일로 두자.”눈앞의 여자는 더없이 평온한 말투였다. 하지만 고이한의 가슴은 보이지 않는 손에 세게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그녀의 평온함이 어떤 비난보다도 더 깊이 파고들었다.소예지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덮으며 말을 이었다.“당신 입장에서는 잘못한 거 없어. 어머니 위해서 그리고 여동생이랑 하슬이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이해해. 하지만 심유빈이랑의 거래는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고이한이 갑자기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녀의 눈 속에서 조금이라도 흔들림을 찾으려는 듯 눈빛이 간절하게 그녀를 붙잡았다.“다른 일 없으면 나가. 당신 어머니 치료 방안 준비해야 하니까.”소예지의 퇴장 명령은 명확하고도 단호했다.고이한은 그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며 준비했던 모든 말들이 목구멍에서 막혀버린 것을 느꼈다. 앞으로 무슨 말을 해도 그녀에게 그저 궁색한 변명으로 들릴 뿐이였다.그녀가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억누르고 있었다. 고이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 깊은 곳에 끝없는 황량함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알겠어.”고이한은 겨우 한 마디만 내뱉었다.“일해.”그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고수경이 고이한의 사무실로 달려왔다.“오빠, 소예지 언니한테 심유빈이랑 일 제대로 설명했어? 하나도 빠짐없이 오해 다 풀어야 해.”고이한은 미간을 손가락으로 주무르며 눈을 감았다.“안 들으려 해.”“안 들으면 억지로라도 말해야지. 나도 지난번에 심유빈이랑 나눈 대화 녹음한 거 들려주려고
Read more

제1085화

고수경은 오빠의 우울한 표정을 보며 마음이 더욱 아팠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오빠, 소예지 언니가 설명을 안 들으려 하면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잖아. 진심으로 다가가서 언니가 다시 오빠를 볼 수 있게 해.”고이한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여동생을 바라봤다.“내가 알아서 해. 네가 걱정 안 해도 돼.”고수경이 입을 삐죽거렸다.“오빠, 혹시 나 또 쓸데없이 끼어들까 봐 알려주기 싫은 거지?”고이한이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네 일이나 잘해.”고수경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한마디 덧붙였다.“오빠, 꼭 행동으로 보여줘야 해. 절대 거만하게 굴면 안 돼. 소예지 언니 요즘 얼마나 인기 많은지 오빠도 알잖아.”고이한이 어이없다는 듯 여동생을 바라봤다.“응.”고수경이 갑자기 오빠 쪽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솔직하게 말해 봐. 오빠랑 심유빈이 혹시...”그다음 말은 삼켰지만 고이한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고이한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차가운 눈빛이 여동생에게로 향했다.“무슨 말 하고 싶은 거야?”“아, 오빠 화내지 마!”고수경이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웃었다.“그냥 너무 궁금해서.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야.”“없어.”고이한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목소리였다.“단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거래였을 뿐이야.”“근데 오빠가 심유빈 안아주는 거 몇 번 봤거든. 그리고 설 연휴에 심유빈이 전화 한 통 하니까 오빠가 바로 나갔잖아. 그날 하슬이가 울면서 오빠 뒤쫓아 갔는데.”고이한의 주먹이 조용히 쥐어졌다. 이를 악물며 그날을 떠올렸다.“그날 밤 그 여자가 손목을 그었어.”“뭐? 손목을 그어서 오빠 협박한 거야? 그러면 그렇지. 왜 손목에 흉터가 그렇게 많나 했더니 다 오빠 협박하는 데 쓴 거였네. 진짜 너무하다!”고수경이 분을 참지 못하고 탁자를 탁 쳤다.심유빈도 너무했다. 전 세계 유일한 공여자라는 위치를 이용해서 오빠를 그런 식으로
Read more

제1086화

진가영이 떨리는 손을 뻗어 소예지의 손을 잡으려 했다. 소예지는 잠깐 망설이다가 피하지 않았다.“미안해, 내가 하슬이한테도 이 병을 물려줬을 수도 있고 너한테 약 개발까지 신경 쓰게 만들었잖아. 우리 고씨 집안이 너한테 너무 많은 빚을 졌어.”소예지는 조용히 손을 거뒀다.“더 이상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 지난 일이에요. 지금은 치료에 집중하셔서 빨리 회복하시는 게 먼저예요.”옆에 있던 고수경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그녀는 어머니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말했다.“엄마, 소예지 언니도 있으니까 이참에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소예지는 고수경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지금은...”지금 이 상황에서 진가영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언니, 이제 때가 된 것 같아요. 엄마도 알아야 해요. 말하게 해줘요.”고수경이 간절하게 부탁했다.진가영은 딸의 심각한 표정에 불안감이 밀려왔다. 소예지를 바라보다가 다시 딸에게로 눈을 돌렸다.“수경아,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야?”고수경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엄마, 엄마 병이 10년 전에 발병한 거 맞죠? 희귀 혈액병이라 오빠가 전 세계에서 공여자 찾아서 줄기세포 기증받은 거 알고 계시죠?”진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빛에는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알고 있어. 그런데?”“그 공여자가 누군지 아세요?”고수경이 어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그건 네 오빠가 말해주지 않았어. 비밀 유지 협약 같은 게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소예지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 상황이 진가영에게 감정적인 충격을 줄 수 있었기에 곁에서 지켜봐야 했다.고수경이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그건 비밀 유지 협약 때문이 아니에요. 그 공여자가 스스로 오빠한테 자기 신분 숨겨달라고 요구한 거예요. 엄마한테도 저한테도 소예지 언니한테도 말 못 하게 했어요. 일부러 신분 숨기면서 언니랑 오빠 결혼 망가뜨리려고 했던 거예요. 사모님 자리 노리고 있었거든요.”진가영이 소스라치게 놀랐다.“그 사람이 누구야?”고수경이 소
Read more

제1087화

“엄마, 오빠는 엄마 때문에 그리고 이 병의 유전 가능성 때문에 심유빈의 모든 조건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어요. 이 10년 동안 얼마나 힘들고 억울했겠어요. 그런데 아무한테도 말 못 하고 혼자 다 감당했어요...”고수경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진가영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앉아 있었다. 심유빈이 아들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했다.정신을 차리고 나서 그녀는 소예지를 바라보며 더욱 깊은 미안함이 밀려와 눈가를 붉히며 말했다.“나는... 정말 어리석었어.”목소리에 후회와 자책이 가득했다.“나는 늘 심유빈이 능력 있고 집안도 좋아서 이한이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그러면서 너는... 가정을 위해 학업을 포기했다고, 이한이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얕봤어...”진가영은 흐느끼며 눈물을 쏟아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소예지에게 한 모든 말들과 행동들이 다 상처였다. 죽어도 갚을 수 없는 빚이었다.차갑게 내뱉었던 말들, 심유빈을 추켜세우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를수록 부끄럽고 가슴이 아팠다.“미안해, 소예지... 정말 미안해.”진가영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나는 네 시어머니 자격도 없고 하슬이 할머니 자격도 없어. 내가 정말 죽을 죄를 지었어...”소예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가슴 속에 복잡한 감정이 뒤엉키는 것을 느꼈다. 소예지가말없이 티슈를 뽑아 건넸다.“다 지난 일이에요.”소예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원망이 아니라 담담한 내려놓음이었다.“치료에 집중하세요. 다른 얘기는 이제 하지 않아도 돼요.”사실 소예지도 알고 있었다. 진가영이 처음부터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건 비단 자신 때문만이 아니었다. 고이한이 그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편의 시신을 연구에 기증한 것에 대한 응어리도 있었을 것이었다.아내의 입장에서 그건 분명 깊은 상처였을 테니까.이제 와서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바라보면 누구도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소예지에게 중요한 건 하나였다. 과거를 내려놓아야만 앞을
Read more

제1088화

손녀가 두 살에서 네 살이 되는 동안 심유빈은 정말 많은 부분에 깊숙이 관여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진가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토록 속이 검은 여자에게 손녀를 맡겼다니, 만약 그 여자가 아들과 결혼하기 위해 손녀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다면 만 번 죽어도 속죄가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그 시절 심유빈과의 사이는 모녀나 다름없었다. 딸 고수경도 심유빈과 사이가 좋았고 심유빈은 마치 고씨 집안의 반쪽 가족 같았다.소예지는 국내에 있었고 아들은 반년마다 그녀 곁에 있어야 했다. 밤늦게까지 일에 치이는 아들의 모습은 눈에 보였다. 그런데 아내인 소예지는 국내에서 편하게 살며 남편도 딸도 나 몰라라 하는 것처럼 보였고 진가영은 그게 못마땅했다.소예지를 향한 편견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이제야 알았다. 심유빈이 계약서에 소예지를 데려오지 말라는 조항까지 집어넣었다는 것을. 그러지 않았다면 또 어떤 수단을 썼을지 몰랐다.그리고 심유빈이 보여준 화려한 학력,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 그 모든 것이 아들이 뒤에서 받쳐줬기에 가능했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수경아, 그 사람 진짜 출신이 어떻게 되는 거야?”진가영이 물었다. 정작 이 사실은 몰랐던 것이었다.“D국 빈민가 출신 사생아예요.”고수경이 옆에서 말했다.“오빠 만난 덕분에 지금 그 자리까지 올라간 거죠.”진가영은 그제야 기억이 났다. 아들이 여러 번 심유빈을 집에 데려오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악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손녀도 좋아한다고 무시해 버렸고 아들의 경고를 단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던 것이다.“내가 잘못한 거야. 이한이랑 소예지가 이혼하게 된 건 결국 내 탓이야. 내가 하슬이를 그 여자랑 가깝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소예지가 오해하게 된 거잖아. 만약 그 여자가 처음부터 하슬이한테 나쁜 마음 품었으면...”진가영은 생각만 해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고수경은 어머니가 얼마나 심유빈을 좋아했는지, 얼마나 믿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수양딸로 삼겠다는 말까지 꺼낼 정도였으니까. 그때 어머
Read more

제1089화

소예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창밖의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들어 책상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한때 사랑 하나 믿고 학업을 포기했던 젊은 여자가 이렇게 하나씩 학계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그때 휴대폰에서 알림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고이한이었다.[수상자 명단 봤어. 축하해.]소예지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곧이어 또 다른 알림이 왔다. 다만 고이한인 줄 알았는데 임현욱이었다.[시상식 끝나고 같이 밥 먹어요?]소예지는 잠깐 멈칫했다.‘벌써 귀국한 건가? 시상식은 아직 다음 주 금요일인데.’[돌아왔어요?]소예지가 답장을 보냈다.[아니요, 시상식 전후로 맞춰서 들어갈게요. 경주에서 꼭 한번 만나요.]임현욱의 답장이 바로 왔다.그 순간 소예지는 사무실 문 앞에 기다란 실루엣이 조용히 선채 유리 벽 너머로 안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며 오랜만에 보는 환한 웃음이 얼굴에 번졌다.‘누구의 연락이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고이한은 고개를 내리깔아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알림이 오면 알아서 뜰 텐데 그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면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고이한의 시선이 다시 소예지의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향했다. 빠르게 무언가를 타자하는 내내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그때 자료를 들고 온 간호사 한 명이 그를 발견하고 의아한 듯 물었다.“고 대표님, 안 들어가세요?”고이한은 시선을 거두면서 짧게 숨을 들이켰다.“아니, 괜찮아요.”그는 사무실 안의 여자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보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간호사가 소예지의 문을 두드리고는 안으로 들어가 자료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아까 고 대표님이 문 앞에 계시던데 박사님 찾아오신 줄 알았어요.”소예지가 고개를 들어 유리 벽 너머를 바라봤지만 이미 아무도 없었다.간호사가 나간 뒤 소예지는 고이한의 메시지로 다시 돌아가 잠시 바라보다가 짧
Read more

제1090화

주말이 되자 소예지는 딸과 양희순을 데리고 소풍을 나갔다.고하슬이 아빠도 부르고 싶다고 졸랐지만 소예지는 부드럽게 달랬다. 고이한은 요즘 실험실과 회사를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그의 시간을 일부러 빼앗고 싶지 않았다.공원 잔디밭에서 고하슬이 젤리와 함께 신나게 뛰어놀았다.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고 공기는 유난히 맑고 투명했다. 소예지도 오랜만에 마음이 느슨하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주말이 끝나고 월요일이 되었다.소예지는 실험실에 출근하자마자 진가영 치료 방안에 몰두했다. 스미스 박사는 그녀의 상태에 맞춰 약물 용량을 조금씩 조정하며 가장 적합한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었다. 진가영의 신체 상태를 다루는 데 있어서는 그가 가장 권위 있는 전문가였다.사무실로 돌아온 소예지는 실험실 내부 데이터베이스를 열어 과거 기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폴더를 하나씩 넘기던 중 암호화된 문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파일명은 날짜뿐이었고 12년 전에 생성된 파일이었다.심장이 순간 빠르게 뛰었다. 아버지가 이 실험실에서 연구를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망설임 없이 클릭했다.그러나 곧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권한이 부족합니다. 시스템 관리자에게 문의하세요.’소예지는 곧바로 스미스 박사 내선으로 전화를 걸었다.“박사님, 데이터베이스에서 암호화된 파일을 발견했는데요. 열람 권한을 받을 수 있을까요?”전화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 파일 나도 알아요. 그런데 잠금 권한이 고 대표님한테 있어요.”소예지의 미간이 천천히 좁혀졌다. 고이한이 잠가 둔 파일이라는 뜻이었다.“박사님, 혹시 그 안에 아버지 연구 노트가 들어 있는 건가요?”“그 파일은 실험실이 처음 세워질 때 생성된 거예요. 안에 뭐가 있는지는 나도 몰라요. 암호화 관리 상태라서요. 확인하려면 고 대표님한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어요.”스미스 박사는 솔직하게 말한 뒤 덧붙였다.“그리고 그게 특별히 중요한 자료는 아닐 거예요. 소 박사가 백혈병 연구할 때 필요한 데이터는 이미 전부 제공했으
Read more
PREV
1
...
107108109110111
...
116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