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281 - Chapter 1290

1440 Chapters

제1281화

고이한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며 메시지를 보냈다.[알겠어. 내가 전할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해.]소예지에게서 더 이상 답장은 오지 않았다. 고이한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하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하종호 쪽으로 걸어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하종호가 고개를 돌렸다. 고이한이 차분하게 소예지의 말을 전했다.“소예지가 직접 오지 못하는 대신 너랑 엄가온 씨한테 축하 인사 전해달라고 했어.”하종호가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괜찮아.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쪽을 소홀히 할 수 없지. 바쁜 거 끝나면 나중에 다시 보면 되지 뭐.”고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바로 그때, 엘리베이터 홀 쪽에서 또 한 무리의 하객들이 들어섰다. 고이한과 하종호가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방기성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심유빈을 데리고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강렬한 레드 드레스가 조명 아래서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심유빈은 방기성의 팔에 바짝 붙어 있다가 입구에서 하객을 맞이하고 있는 두 남자를 발견하자 얼굴이 굳어버렸다.막 도착하자마자 고이한과 하종호를 마주칠 줄은 몰랐다. 한때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두 남자가 지금 나란히 서 있었다. 한 사람은 냉정하고 반듯했고 한 사람은 밝고 잘생겼다.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세게 움켜잡히는 것 같았다. 이 두 남자 중 어느 쪽도 이제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억눌러두었던 억울함이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심유빈은 뒤흔들리는 감정을 억지로 누른 채 얼굴에 우아하고 단아한 미소를 유지했다. 특히 고이한과 하종호 앞에서는 흐트러지면 안 됐다.방기성이 호탕하게 웃으며 먼저 하종호에게 다가갔다.“하 대표, 축하해요! 신부가 아주 아름답다고 하던데!”“방 대표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혹시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 십시오.”하종호는 예의 바른 미소를 유지한 채, 방기성 옆에 선 여자는 아예 눈에 담지 않았다.방기성이 너털웃음을 치더니 이번에는 시선을 옆에 있는
Read more

제1282화

그런데 고이한은 눈길 한 번 주는 것조차 아까워했다. 그 완벽한 무관심 앞에서 심유빈의 모든 속셈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허망한 것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그때 방기성이 심유빈의 시선이 다른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눈치채고 불쾌한 듯 몰래 그녀의 팔뚝을 꼬집었다.심유빈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시선을 거뒀다. 방기성을 향해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며 그의 팔에 더욱 밀착했고 마치 인생에서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의지했다.“자기야, 우리 들어가요!”심유빈이 일부러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방기성은 역시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가자. 친구들 좀 소개해 줄게.”심유빈이 요염한 눈빛으로 방기성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자 온화하면서도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쳤다.윤하준이었다.그는 술잔을 든 채 몇몇 하객과 이야기를 나누다 이쪽을 바라봤고 심유빈과 시선이 맞닿았다.심유빈의 얼굴에 걸려 있던 요염한 미소가 순간 굳어버렸다. 민망함과 창피함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고이한이 닿을 수 없는 첫사랑이었다면 하종호는 언제나 곁을 지키던 충직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윤하준은 심유빈의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은밀한 아쉬움이었다.윤하준은 온화하고 단정했으며 집안도 능력도 최상급이었다. 고이한의 냉정함도, 하종호의 뜨거움도 아닌 마치 한 잔의 맑은 차 같은 사람이었다. 곁에 있을수록 깊은 향이 배어 나오듯 알면 알수록 더욱 매력적인 남자였다.심유빈은 여러 번 생각한 적이 있었다.‘만약 처음 내게 마음을 보인 사람이 하종호가 아니라 윤하준이었다면 고이한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그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그런데 지금 자신은 이런 자리에서 아버지뻘 되는 남자의 팔에 매달린 채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정말이지 비참했다.윤하준의 시선은 심유빈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 눈빛에는 놀라움도 경멸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옆 사람과 다시 웃으며
Read more

제1283화

고이한과 윤하준은 가장 중요한 들러리로서 맨 앞줄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 모두 진심으로 친구의 행복을 기뻐하고 있었다.심유빈과 방기성의 자리는 조금 뒤쪽이었다. 심유빈 역시 연회장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눈빛 깊은 곳에는 짙은 원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엄가온에게 당한 굴욕만큼은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이윽고 연회장의 묵직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아버지의 팔을 끼고 우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베일 너머로 정교한 이목구비와 수줍은 미소가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하종호는 한 걸음씩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신부를 바라보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감격과 사랑이 그의 잘생긴 얼굴 위로 한꺼번에 번져갔다.연회장을 가득 채운 박수와 환호 속에서 신부는 흔들림 없이 무대 위의 신랑을 향해 걸어갔다.고이한은 자리에 앉아 신부의 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어느 순간 시선을 잃은 듯 멍하니 바라봤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오래전의 한 장면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문득 자신의 결혼식이 떠올랐다. 기억 속의 소예지는 지금 무대 위의 엄가온보다 훨씬 어렸고 아직 앳된 풋풋함과 순수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아버지의 곁에서 한 걸음씩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때 그녀의 얼굴에는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긴장감이 어려 있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수줍음과 신뢰가 가득 담겨 있었다.서약을 마친 뒤 사회자가 신랑에게 신부에게 입을 맞춰도 좋다고 말했을 때의 일도 떠올랐다. 고이한은 고개를 숙여 소예지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키스였다.그런데 소예지는 어린 나이 때문이었는지, 수줍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감정 때문이었는지 그 자리에서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지금 무대 위에서 깊은 입맞춤을 나누는 하종호와 엄가온을 바라보던 고이한은 그날 기쁨에 겨워 울며 자신의 품에 안겼던 소예지를 떠올리자 심장이 둔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잘못한 것이 너무 많았다.그녀가
Read more

제1284화

심유빈은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랑 고이한 씨는 다 옛날 일이에요. 그냥 친구 사이였을 뿐이에요. 밖에서 도는 소문은 믿지 마세요.”두 부인은 눈을 마주쳤다.‘친구?’‘눈이 멀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그토록 고이한에게 매달렸으면서도 끝내 그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고 있으니 그 모습이 우습기만 했다.심유빈은 방기성이 있는 쪽을 향해 다정한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지금은 방 대표를 만났잖아요. 성숙하고 듬직한 데다 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줘요. 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게 제일 큰 복이라고 생각해요.”두 부인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얼굴에는 여전히 정중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그럼 진짜 사랑을 찾으신 거 축하드려요.”“맞아요. 진짜 사랑을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요. 요즘은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는 말도 하잖아요.”심유빈의 웃음이 살짝 굳었다.두 부인은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미소를 지은 채 몇 마디를 더 나누고 자리를 떴다.하지만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아까 그 말 들었어? 그냥 친구 사이였대. 예전에 고 대표 보는 눈빛이 어땠는데. 당장이라도 매달릴 것 같았잖아. 우리 눈이 먼 줄 아나.”“그러게 말이야. 예전에는 수완이 있는 줄 알았어. 나도 한때는 고 사모님 자리를 차지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꽤 신경 썼다니까.”“고이한도 이혼한 지 벌써 2년이 넘었잖아. 진짜 마음이 있었으면 진작 결혼했겠지. 그냥 잠깐 즐긴 거였던 거야. 그런데 이제 와서는 아버지뻘 되는 남자 붙잡고 진짜 사랑이라니 웃기지도 않아.”“방기성이 어떤 사람인데. 젊을 때부터 여자 문제로 유명했잖아. 옆에 두는 여자가 수없이 바뀌었는데 심유빈은 자기가 마지막일 거라고 믿는 걸까?”“서로 필요한 걸 챙기는 거지 뭐. 심유빈은 돈을 원하고 방기성은 젊고 예쁜 여자
Read more

제1285화

결혼 피로연에서는 신랑 신부가 테이블을 돌며 답례 인사를 하는 순서를 따로 두지 않았다. 대신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하종호가 엄가온의 손을 잡고 하객들 사이를 돌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잠시 후 송가희가 며느리 엄가온을 데리고 부인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인사를 하러 왔다.부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몰려들어 엄가온에게 칭찬을 쏟아냈다.“신부가 오늘 정말 너무 예쁘네요.”“맞아요! 그 웨딩드레스 Y국 맞춤이죠? 정말 잘 어울려요.”“송 여사님. 정말 복도 많으세요! 가온이처럼 예쁜 며느리를 얻으시다니.”송가희는 정성스럽게 수놓은 연보랏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단장한 얼굴에는 오늘따라 유독 기쁨이 가득했다.“앞으로 우리 가온이 잘 부탁드려요.”“당연하죠.”엄가온은 여유롭고 당당한 태도로 칭찬을 받아냈다. 얼굴에는 신혼의 달콤함이 가득 묻어났다.“감사해요, 이모님들”그때 한 부인이 얼른 레드 와인 잔을 내밀었다.“가온아, 아까 축배 인사를 못 봤네. 이참에 우리랑 한잔하자.”엄가온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죄송해요. 지금은 술을 못 마셔서요.”옆에서 송가희도 흐뭇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가온이가 지금 좀 특별한 상황이라서요. 양해해 주세요.”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에서 더욱 뜨거운 축하가 쏟아졌다.“어머나! 이거 정말 겹경사네요! 축하드려요!”“벌써 돌잔치 봉투 준비해야겠는걸요?”“정말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어요!”부인들의 목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심유빈의 귀에도 고스란히 들어갔다.송가희와 엄가온의 표정을 확인한 순간, 심유빈은 답답한 마음에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엄가온이 벌써 임신한거야?’자신도 모르게 손이 배 위로 올라갔다. 심유빈 역시 요즘 임신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방기성 쪽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도 들었지만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엄가온이 하객들 사이로 시선을 옮기다가 마침 옆 테이블의 심
Read more

제1286화

심유빈은 속이 쓰리고 가슴이 저려왔다.한때는 저들 곁에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그런데 지금 그들은 여전히 구름 위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심유빈은 다가가 인사조차 건넬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예전에 심유빈은 하종호를 부추겨 소예지를 세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이제 윤하준과 고이한의 관계는 완전히 회복된 듯 보였고 윤하준 역시 소예지를 향한 마음을 접은 채 고이한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처럼 보였다.지난번 윤하준의 회사가 해외 사업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을 때도 고이한이 손을 내밀어 도왔다. 그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단단해졌다.반면 지금의 심유빈은 방기성 곁에 묶인 신세였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였지만 그 속사정이 어떤지는 자신만 알고 있었다.그때 방기성이 다른 하객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며 걸어왔다.“심유빈 씨, 방 대표님이 많이 드셨어요. 모시고 가서 쉬게 해드리세요. 차는 제가 준비해 뒀습니다.”방기성은 술 냄새를 풍기며 심유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유빈아, 내 천사야, 이리 와.”그 한마디는 어느새 조용해진 연회장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순간 수많은 시선이 한꺼번에 이쪽으로 쏠렸다.그 눈빛 속에는 호기심도 있었고 비웃음도 있었으며 노골적인 경멸까지 섞여 있었다.심유빈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감정을 억누른 채 방기성 곁으로 다가가 억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자기야, 많이 드셨네요. 이제 들어가요.”심유빈은 하루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방기성은 확실히 취해 있었다.술만 마시면 어김없이 드러나는 그의 고약한 버릇, 손을 함부로 놀리는 모습이 또 나타났다.방기성의 손길이 다가오는 순간 심유빈의 온몸이 바짝 굳었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밀어낼 수도 없었다.심유빈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수많은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방기성을 부축하며 연
Read more

제1287화

저녁 다섯 시가 되자 소예지의 휴대전화에 고이한의 문자가 도착했다.저녁에 고하슬을 데리고 피로연에 갈 예정인데 함께 가겠냐는 내용이었다. 소예지는 정중히 거절한 뒤 딸 저녁만 잘 챙겨달라고 부탁했고 고이한 역시 그 답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는지 더는 권하지 않았다.저녁이 되자 윤하준도 이안을 데리고 나타났다. 두 꼬마는 나란히 앉았고 그 곁에는 고이한과 윤하준이 각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적잖은 사람들의 시선이 두 꼬마 공주에게 쏠리며 감탄을 내뱉었다.일부 사람들은 은근히 계산을 시작했다. 자기 아들이 나중에 이 두 공주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고씨 가문, 윤씨 가문과 사돈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윤하준과 고이한 같은 사람과 사돈을 맺는다면 자식들은 평생 든든한 울타리 아래에서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 인연이 가진 가치는 단순한 재산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몇 세대에 걸쳐도 쉽게 쌓기 힘든 든든한 배경이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나 다름없었다.오늘 저녁, 많은 사람들이 고이한이 딸을 챙기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았다. 평소 재계에서는 추진력 있고 냉철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딸을 돌보는 손길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세심하고 인내심이 넘쳤다. 얼굴에는 내내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식사가 한창일 때, 옆쪽 휴게 공간에서 아이들이 잠시 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아이 둘이 나타나더니 고하슬과 이안에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두 꼬마가 풍선과 블록 장난감을 가지고 둘만 놀고 있었고 멀지 않은 자리에서 고이한과 윤하준이 그쪽을 계속 살폈다.그러나 남자아이 둘이 끼어드는 순간, 두 보호자의 긴장이 한순간에 팽팽해졌다. 남자아이들은 고하슬과 이안보다 두 살 많았고 집에서 귀하게 자란 티가 역력했다.거리낌없이 다가와 함께 놀자고 하자 그나마 다정한 표정이던 고이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술잔을 쥔 손가락에도 힘이 들어갔다.그때 남자아이 하나가 음악 소리에 맞춰 고하슬의 손을 덥석 잡으
Read more

제1288화

여덟 시가 되자 두 사람은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조명 아래 나란히 선 윤하준과 고이한은 틈틈이 사업 이야기를 나눴다.여덟 시 반쯤, 소예지도 실험실에서 돌아왔다. 양희순은 고하슬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알려주었다. 하루 종일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던 소예지는 바람이나 쐴 겸 젤리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놀이터에 도착한 소예지는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가 고하슬과 이안을 발견했다. 젤리의 목줄을 잡은 채 조금 더 가까이 걸어가자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고이한과 윤하준도 눈에 들어왔다.“컹컹!”젤리는 즉시 신이 난 듯 애교 섞인 소리를 냈다. 소예지는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고이한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소예지가 눈에 들어왔다. 윤하준 역시 숨이 잠시 멎는 듯했다. 소예지가 바로 등 뒤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소예지는 이미 씻고 내려온 상태였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은 조명 아래에서 유난히 희고 맑게 빛났고 투명할 정도로 깨끗해 보였다.연한 회색 여름용 긴 티셔츠 차림에 곧고 가느다란 두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온몸에서는 집에서 쉬는 여자 특유의 편안하고 청순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풍겨 나왔다.고이한의 숨이 순간 걸렸다. 심장 박동마저 리듬을 잃은 듯 흔들렸다.윤하준의 온화한 눈빛에도 잠시 설렘이 스쳤지만 그는 곧 그 감정을 완벽하게 눌러 담았다.“예지 씨.”윤하준이 먼저 인사했다.“하준 씨.”소예지는 가볍게 웃으며 답한 뒤 고이한을 바라봤다.“하슬이 일찍 데리고 올라가서 씻겨. 난 두 바퀴만 더 돌고 들어갈게.”고이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숙여 젤리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젤리는 갈 생각이 없는 듯 버텼다. 마치 산책을 시켜줄 사람을 바꾸고 싶다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젤리! 빨리 와.”소예지가 재촉하며 다가와 목줄을 잡아당겼다.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막 씻고 난 은은한 향이 깃털처럼 스쳐 지나가며 고이한의 심장을 건드렸다
Read more

제1289화

고이한이 돌아서며 윤하준을 바라봤다.“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윤하준은 그 말에 담긴 진짜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다. 눈을 살짝 내리깔며 홀가분한 웃음을 지었다.“일단 이안이 잘 돌보고 회사도 잘 챙겨야지. 개인적인 건 나중에 생각하려고.”고이한은 한동안 윤하준을 바라보다가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2년 전 그 일, 아직 제대로 고맙다는 말을 못 했어.”윤하준은 잠시 멈칫했다. 곧 그가 말하는 것이 소예지가 수영장에 빠졌던 일을 가리킨다는 걸 알아차렸다.고이한의 눈빛에는 짙은 죄책감과 후회가 어려 있었다.“네가 그 자리에서 바로 뛰어들지 않았더라면...”“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야.”윤하준이 나직하게 답했다.“그 상황이었다면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달빛 아래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고이한의 목젖이 천천히 움직였다.“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윤하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감사는 굳이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어떤 우정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법이었다.그날 밤, 고이한이 심유빈을 구하러 뛰어든 지 채 3초도 지나지 않아 윤하준 역시 물속으로 뛰어들었었다.“왜 예지 씨를 먼저 구하지 않은 거야?”윤하준이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그날은 사람이 많은 자리였다. 누군가 물에 빠졌다 해도 곧바로 큰 사고로 이어질 상황은 아니었다. 고이한이 소예지를 먼저 구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심유빈은 다른 누군가가 구했을 수도 있었으니까.고이한은 눈을 내리깔았다.생각은 자연스럽게 그날 식사 자리로 돌아갔다.사건이 일어나기 10분 전, 그는 전화 한 통을 받았었다. 고이한은 고개를 들고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일 터지기 10분 전에 엄마 혈액병이 수경한테 50퍼센트 확률로 유전됐고 하슬이한테도 30퍼센트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고이한의 목소리에는 억눌러온 감정이 묻어났다.“심유빈이 그 당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맞는 공급자였어. 그 순간에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Read more

제1290화

엘리베이터가 27층에 멈췄다.차가운 색감의 인테리어는 밤이 되자 더욱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고이한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뒤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헬스룸에 들어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러닝머신 위에 올라섰다.후텁지근한 여름밤의 열기와 마음속 공허함이 뒤섞여 있었다. 무언가를 쏟아낼 출구가 절실했다.러닝머신이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사이, 그의 등은 금세 땀으로 흠뻑 젖었다.이혼한 지 2년.어느새 이런 밤이 익숙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낮에는 재계를 움직이는 사람이었지만 밤이 되면 운동으로 체력을 바닥까지 소진시키는 것 말고는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특히 이런 여름밤이면 공기 속에 떠도는 묘한 들뜸과 불안함이 마음속 가장 예민한 곳을 더욱 자극하곤 했다.머릿속에는 방금 전 마주친 소예지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고 함께했던 날들의 기억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한 세트 끝낸 뒤, 고이한은 운동 기구에 몸을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구릿빛 피부 위로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허리 양옆을 따라 선명하게 드러난 근육 선과 운동복 아래로 이어지는 복근이 시선을 끌었다.숨을 고르며 몸을 일으키자 넓게 펼쳐진 어깨와 탄탄한 등이 드러났다.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가 만들어내는 비율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고이한은 곧장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차가운 물줄기가 몸을 적셨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불씨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라도 그 감정을 눌러보려 했다.다음 날 아침.소예지는 전화 한 통을 받고 잠시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주경호가 임현욱을 A시로 이송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었다. 뇌-컴퓨터 접속 프로젝트 진행 일정에 맞추고 임현욱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프로젝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결정이었다.소예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었다.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그럼에도 마음을 가라앉힐 수는
Read more
PREV
1
...
127128129130131
...
144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