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321 - Chapter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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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1화

“알겠어. 더는 안 물을게.”강준석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내가 데려다줄게. 마침 네 집 근처에 볼일도 있고.”소예지는 그 말이 핑계라는 걸 알았다. 볼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도.“강 선배, 나 운전할 수 있어.”“오늘 병원에서도 쓰러졌고 사흘 동안 밤을 거의 새웠잖아. 지금은 열 시도 다 됐는데 혼자 보내면 내가 어떻게 안심하겠어.”강준석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알겠어. 고마워.”소예지는 그 마음을 받아들였다.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초여름 밤공기는 서늘하면서도 상쾌했고 머리 위로 둥근 달빛이 비쳐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차에 올라탄 강준석이 시동을 걸자 차량은 실험실 단지를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소예지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오늘 밤만큼은 마음을 짓누르던 것들이 모두 내려앉은 것 같았고 집에 돌아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확인해 보니 고이한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아직 일해? 집에는 도착했어?]소예지가 화면을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자 강준석이 슬쩍 물었다.“고 대표가 보낸 거야?”“응. 하슬이랑 온천 리조트에 갔대.”소예지가 조용히 답했다.“예지야, 이번에 뇌-컴퓨터 프로젝트도 끝났으니까 좀 쉴 생각 없니? 너 2년 동안 제대로 쉰 적도 없잖아.”소예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일만 순조롭게 이어지면 나도 그렇게까지 무리하지는 않을 것 같아.”강준석이 피식 웃었다.“쉴 생각이 없다는 얘기네.”그때 또 알림음이 울렸다. 역시 고이한이었다.[하슬이가 영상통화하고 싶다는데 괜찮아?]소예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 급한 성격의 딸답게 기다리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전화를 받자 화면 가득 고하슬의 작은 얼굴이 들어찼다.“엄마! 저 고모랑 방금 온천 다녀왔어요. 발에 작은 물고기들이 막 달라붙어서 간질간질했어요!”발그레 달아오른 딸의 뺨을 바라보며 소예지의 눈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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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2화

강준석은 예의 바른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수고랄 것도 없어요. 당연한 일이죠.”감정을 읽기 어려운 고이한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데려다줄 사람이 있다니 안심이네. 하슬아, 엄마한테 인사해.”고하슬은 얌전하게 잘 자라고 인사한 뒤 통화를 마쳤고 화면도 곧바로 꺼졌다.강준석은 액셀을 밟으며 소예지를 힐끗 바라봤다.“고 대표 지금 질투한 거야?”소예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왜 질투를 해?”강준석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이미 이혼한 사이였으니 고이한에게는 질투할 자격이 없었다.그럼에도 조금 전 통화에서 느껴졌던 불편한 기색만큼은 분명했다. 이 늦은 시간에 자신이 소예지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상황이 영 못마땅한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강준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소예지는 동료이자 친구였고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잘 통하는 존재였다.선을 넘을 생각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었다.소예지를 아파트 입구에 내려준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확인하고서야 차를 돌렸다.집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좀처럼 조용해지지 않았다.조금 전 고이한의 말투에 스며 있던 불쾌함이 실마리가 되어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작은 단서들을 하나씩 끌어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소예지와 나눴던 채팅 기록이었다.고이한의 신분과 능력이라면 마음만 먹었을 때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확인하는 일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물론 주고받은 내용은 대부분 의학과 연구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교류가 워낙 잦았고 때로는 밤늦은 시간까지 대화가 이어지곤 했다. 남편의 입장에서 본다면 충분히 불편하게 느낄 만한 일이었다.그런데도 고이한은 소예지에게 직접 따지지 않았다. 강준석을 찾아와 문제를 만들지도 않았고 결국 참는 쪽을 선택했다.고이한 같은 성격의 사람이 그런 감정을 품고도 아무 일 없는 듯 견뎌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정말 아무렇지 않았던 것인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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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3화

소예지의 아름다움은 화려한 종류가 아니었다.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턱을 괸 채 밤하늘을 바라보던 소예지는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고집스럽고 완고했던 아버지가 지금도 살아 있었다면 지금의 나를 보고 조금이라도 자랑스러워했을까.’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늘 엄격했지만 동시에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소예지가 세 살이었을 때부터 품에 안고 의학서를 읽어줬다고 했는데 어린 딸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지식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다.소예지는 그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어린 자신은 영문도 모른 채 동그란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봤을 테고 아버지는 그런 딸에게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을 것이다.‘만약 고이한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아마 순탄하게 대학을 졸업한 뒤 대학원을 거쳐 박사 과정을 밟았을 것이고 이후에는 연구계에 뛰어들어 자신의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살다가 어느 순간 고이한을 다시 만났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사람과 인연을 맺었을 가능성도 있었다.하지만 임현욱만큼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그가 살아온 세계는 자신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까.‘반대로 고이한이 나랑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아마 심유빈과 결혼했을 것이다. 심유빈은 수완도 좋았고 계산도 빨랐으며 미모와 재능까지 갖춘 여자였다. 아무리 싫어도 피아노에 대한 재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때 문득 고이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먼저 마음이 움직인 쪽은 자신이었다고 했지만 소예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아버지가 자신이 고이한의 병상을 지키며 간병하던 모습을 담은 영상을 들고 그를 찾아갔기에 결혼이 성사된 것은 아닌지, 자신에게 진 은혜를 갚기 위해 결혼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잇달아 떠올랐다.그 이상의 감정이 정말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도대체 그날 아버지와 고이한 사이에 어떤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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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4화

사흘 후 소예지는 병원을 찾았다. 임현욱이 곧 경주로 돌아가 요양할 예정이었기에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온 길이었다.조용한 병실 안에서 임현욱은 기력은 눈에 띄게 회복된 상태였다. 짧게 깎인 머리 오른쪽에는 칩을 이식했던 자리가 보였고 머리카락이 조금만 더 자라면 흔적조차 거의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경주에 주 총장님이랑 조 박사님이 계시니까 안심이에요.”소예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임현욱 역시 소예지를 바라봤다. 며칠간 충분히 쉰 덕분인지 안색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고 대표는 아직 안 돌아왔어요?”임현욱이 물었다.소예지는 그가 고이한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아버지 쪽 인연으로 이어진 일이긴 해도 임현욱은 은혜를 반드시 갚는 사람이었다.“아직이에요. 일주일 일정으로 갔거든요.”소예지가 고개를 저었다.임현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다음에 만나면 그때 직접 인사할게요.”그 말에는 은근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임현욱은 이번 은혜를 마음에 새겨 두고 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갚을 사람이라는 것도 소예지는 느낄 수 있었다.이후 병실에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가 흘렀다. 소예지는 과일을 깎아 접시에 담았다. 이번 뇌-컴퓨터 기술의 돌파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임현욱이 임상 수혜자로 참여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이번에 돌아가면 다음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임현욱이 말했다. 어조에는 아쉬움이 살짝 묻어 있었다.“하슬이한테 맛있는 거 사주고 싶었는데.”“나중에 기회 있을 거예요.”소예지가 사과 한 조각을 건네며 말했다.“완전히 회복되면 언제든 놀러 오세요. 환영해요.”두 사람은 더 이상 연인 관계는 아니었지만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로 남아 있었다.임현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럴게요. 부대 복귀 전에 한 번 꼭 들를게요.”임현욱은 소예지를 바라보며 쉽게 꺼내지 못한 말을 마음속에 삼키고 있었다.고이한이 내민 손길이 단순히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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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5화

임현욱은 고개를 끄덕인 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잠시 멈춰 서서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소예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예지 씨.”낮고 다정한 목소리였다.소예지는 그 소리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창문으로 스며든 햇살 한 줄기가 그의 몸 위로 내려앉으며 금빛 테두리를 만들었고 그 안에 선 임현욱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눈빛은 맑고 흔들림 없이 진심을 담고 있었다.“이제 친구가 된 만큼 앞으로 뭐든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제가 곁에 있을게요.”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군인 특유의 단단하고 묵직한 울림이 실려 있었다.연애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남녀 관계를 넘어선 더 무거운 약속이었다.소예지는 그 자리에서 그를 바라봤다. 햇빛을 등지고 선 눈빛 맑은 남자의 모습에 잠시 코끝이 시큰해졌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눈가가 젖어들었지만 입술에는 미소가 남아 있었다.“알아요. 고마워요, 현욱 씨.”임현욱 역시 웃었다. 여전히 밝고 시원한 웃음이었고 등 뒤로 비치는 햇살처럼 환하고 따뜻했다.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녀를 바라본 뒤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 발걸음은 여전히 크고 단단했다.주경호는 그런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소예지에게 돌렸다. 조금 전 두 사람이 친구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입을 열었다.“저 아이는 언제나 저렇게 의리가 있어요.”이어 시선을 다시 소예지에게 옮기며 다정하게 말했다.“소 박사, 저번에 내가 말했던 세아 기억하지요?”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송세아 역시 뇌-컴퓨터 기술의 도움이 필요한 케이스였다.“네, 기억해요.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이호연 박사는 여기 남겨서 연구를 계속하게 할 생각이에요. 세아 케이스도 그쪽으로 넘기고. 진행하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의견 좀 부탁해도 되겠어요?”이번 송세아 건은 더 이상 소예지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물론이죠. 저도 신경 쓸게요.”소예지는 바로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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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6화

시내 중심가의 조용한 카페에서 두 사람이 마침내 마주 앉았다.박시온은 소예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여전하네. 이제 재벌이 됐으니 온몸을 보석으로 휘감고 더 화려해졌을 줄 알았는데.”소예지는 오늘도 단정한 차림이었다. 아이보리색 니트에 청바지, 긴 머리는 느슨하게 묶여 있었고 화장은 옅었다. 손목의 시계 외에는 별다른 장신구도 없었다.그 모습을 본 박시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진짜 한결같다.”소예지도 찻잔을 가볍게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내가 한결같은 거 알잖아.”“맞긴 하지.”박시온은 웃음을 터뜨리다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몸을 기울였다.“그 한결같은 사람이 고이한이라는 과거는 어떻게 할 건데? 계속 그렇게 둘 거야?”찻잔을 젓던 소예지의 손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곧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그 사람은 처리해야 할 물건이 아니야. 우리 사이는 진작에 끝났고 지금은 일하고 하슬때문에 얼굴 보는 정도야. 사적인 생활은 각자 따로지.”박시온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심유빈은 요즘 조용하더라. 성양 그룹 파산 소식도 봤어. 고이한이 안 도와준 거 보면 완전히 끝난 거 아니야?”소예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요즘은 너무 바빠 그 일까지 깊게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심유빈이 유일한 혈액 공급자였다는 점, 그리고 고이한과 멀어진 뒤 방기성 쪽으로 붙었다는 사실만 간단히 설명했다.그 말을 들은 박시온이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뭐? 자기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남자한테 바로 갔다고? 고이한 그렇게까지 좋아하더니?”소예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그 사람한테 사랑은 원래 우선순위가 아니야. 항상 이익이랑 냉정한 타산이 먼저야. 고이한이 더 이상 원하는 걸 줄 수 없게 되자 망설임 없이 돌아선 거지.”“진짜 현실적이다.”박시온이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온갖 수단으로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을 땐 진짜 사랑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그냥 거래였네. 근데 고이한은 왜 그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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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7화

박시온은 약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중요하지 않을 수가 있어. 네가 받은 상처들은 진짜였잖아. 당시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심유빈 때문에 연기를 해야 했다고 해도 그게 너한테 차갑게 굴었던 이유가 될 수는 없지. 심유빈이 없던 시절에 둘은 분명 서로를 사랑했었잖아.”소예지는 턱을 괴고 담담하게 말했다.“지금 이대로도 충분해. 그 사람은 그 사람 갈 길이 있고 나는 내 삶이 있어. 오해를 푼다는 건 다시 잘해보겠다는 뜻이기도 한데 나는 이제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해.”박시온은 친구를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은 듯 몸을 앞으로 조금 기울였다.“너 진짜... 마음 정리된 거야?”그 표정을 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오기도 아니고 원망도 아니었다. 이미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의 얼굴이었다.“나는 그냥 내 삶을 잘 살고 싶어. 일도 있고 하슬이도 있고 그리고 이렇게 가끔 너랑 차 마시면서 수다 떠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소예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그 미소를 본 박시온은 확신할 수 있었다. 소예지는 이미 과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고, 그 안에서 고이한은 더 이상 중심에 남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한때 그렇게 깊이 사랑했던 사람이었음에도 그렇게 느껴졌다.“좋아.”박시온이 찻잔을 들었다.“그럼 새 출발 기념으로 건배하자. 옛날 사람, 옛날 일은 다 과거로 던져버리는 걸로.”소예지도 웃으며 잔을 맞댔다.“건배.”박시온은 그래도 마음이 덜 풀린 듯 투덜거리듯 말을 이었다.“내 생각엔 고이한도 옛날에 네가 그를 좋아했던 것처럼, 다시 너한테 매달려봐야 해. 그 불안하고 애태우는 기분을 제대로 느껴봐야 한다고. 그러고 나서 네가 딱 잘라 거절해 버리면 그제야 네 마음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네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었는지 깨닫게 될 거야.”소예지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내 시간하고 에너지가 얼마나 소중한데 그런 데 쓰고 싶진 않아.”박시온이 콧방귀를 뀌었다.“나라면 절대 그냥 안 넘어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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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8화

소예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어이없다는 듯 찻잔을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우리 둘 다 앞을 봐야지.”그때 연달아 메시지 알림이 네다섯 번 울렸고 사진이 함께 도착한 듯했다.소예지는 바로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딸이 사진을 보내왔을 거라 짐작했다.예상은 맞았다. 고하슬의 귀여운 사진 몇 장이 이어져 있었고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신나게 놀고 있는 게 분명했다.“하슬 사진이지? 나 오랫동안 못 봤는데 보여줘.”소예지가 휴대폰을 건넸고 박시온은 사진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때 새 메시지가 다시 들어왔다.[하슬이 당신을 많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이쪽으로 와서 쉬다 가는 건 어때?]고이한이었다.박시온은 눈을 깜빡이며 소예지를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돌려줬다.“고이한 또 메시지 보냈어.”소예지는 받아서 내용을 확인했고 미간이 아주 잠깐 좁혀졌다.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미안하지만 지금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 하슬이 잘 부탁해.]아까까지 잠잠하던 박시온의 호기심이 다시 살아났다. 방금 고이한의 말투는 어떻게 봐도 단순한 아이 이야기만은 아니었다.보고 싶다는 말이 과연 아이만을 의미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섞여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소예지가 답장을 보내고 고개를 들자 박시온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또 무슨 생각 하는 거야?”“고이한 지금 너한테 들이대는 거 아니야?”심문하듯 던진 말에 소예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혼자 너무 앞서 생각하는 거야. 그냥 하슬이가 나를 보고 싶어서 그래.”박시온은 그 말이 전부는 아니라고 느꼈다. 고이한 성격상 아무 이유 없이 저런 식으로 초대를 제안할 사람은 아니었다. 분명 소예지가 오기를 바라는 의도가 깔려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소예지도 사실 그가 과거를 보상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그때 고이한에게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았어.]두 사람은 다시 아이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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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9화

고이한의 손이 물속에서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가슴 안쪽에서 뭉근하게 눌려 오던 통증이 점점 더 선명해졌고 동시에 밀려오는 무력감 때문에 숨이 조금 거칠어졌다.고이한은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그녀가 선택한 행복을 담담하게 지켜봐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은 아니었다.고이한은 온천 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방울이 단단한 몸선을 타고 흘러내렸고 밤바람이 스치자 서늘한 감각이 뒤따랐다.그는 가운을 걸친 뒤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거실 바닥에는 딸이 가지고 놀다 둔 장난감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천천히 쪼그려 앉아 하나씩 정리했다.이후 술 선반으로 걸어가 위스키 한 잔을 따랐다. 호박빛 액체가 잔 안에서 흔들렸고 그 위로 생각이 무거운 눈빛이 어른거렸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김경환이었다.[대표님, 임 대위가 경주로 돌아갔습니다.]고이한의 눈빛이 순간 굳었다. 그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누구한테 들었어?”“이 박사님이 보내신 목록 확인하다가 제가 소 박사님 병원에 계시냐고 여쭤봤는데, 이미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임 대위는 오늘 오후에 경주로 올라가셨다고 했고요.”‘임현욱만 경주로 간 건가. 소예지는...’그 상태라면 당연히 소예지의 돌봄이 필요했을 것이고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고려해도 이 시점에 그녀가 자리를 비울 이유는 없어 보였다.“대표님, 더 여쭤볼 게 있으신가요?”김경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없어.”고이한은 짧게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잔에 남아 있던 술을 단숨에 비웠다. 창가로 걸어가 유리창 너머를 바라봤지만 시선은 어디에도 고정되지 않았다.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 임현욱을 살려낸 소예지가 왜 가장 필요한 시점에 그를 따라가지 않았는지였다. 딸 역시 자신이 데려온 상태였고 남아 있는 일정도 그다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은 아니었다.‘그렇다면 혹시...’고이한의 눈동자가 순간 수축했다. 머릿속에 하나의 가능성이 스쳤다.소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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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0화

소예지는 휴대폰을 쥔 채 통화 종료음을 듣고 있었다.미간이 몇 초간 가볍게 좁혀졌고 곧 휴대폰을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책을 다시 펼치지는 않았다. 지금은 생각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었다.이번에 임현욱을 살리면서 어느새 고이한에게 신세를 지고 말았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신이 아플 때 곁을 지켜준 일도 있었고 칩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임씨 가문이 직접 움직였다면 그 역시 도왔을 것이 분명했지만 자신이 먼저 찾아가 부탁한 이상 그 신세는 결과적으로 본인이 진 셈이 되었다.이번에 임현욱이 제때 깨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 칩이었다.고이한이 즉시 전용기를 띄워 칩을 가져온 판단에는 개인적인 감정이 섞여 있었고 그 사실을 소예지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에 대한 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먼저 그에게 부탁을 건넨 건 그녀였으니까.이미 이혼한 사이였다. 그렇다면 은혜와 원망은 분명하게 정리해 두는 편이 맞았다. 앞으로 그에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그때 상황에 맞게 갚으면 되는 문제였다.온천 리조트에서는 고이한이 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잔은 이미 비어 있었고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소예지의 마지막 말이 가슴을 눌렀다. 그러나 그 통증 속에는 이상하게도 설명하기 어려운 기대감이 함께 섞여 있었다.그 질문에 대해 그녀가 끝내 명확히 답하지 않고 피해 간 것 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다.7일째 오후 네 시 반, 고이한의 전용기가 국제공항에 도착했다.그날 저녁, 실험실을 나온 소예지는 고이한의 전화를 받았다. 고씨 저택에서 저녁을 함께하며 할머니도 뵙고 가자는 제안이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만큼 소예지는 흔쾌히 승낙했다.다섯 시 무렵 실험실을 나서며 최현숙이 좋아하는 과일을 사 들고 고씨 저택으로 향했다.고씨 저택의 여름 저녁 정원에는 최현숙이 심어 둔 장미가 만개해 있었고 짙은 향이 공기 전체에 퍼져 있었다.소예지는 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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