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361 - Chapter 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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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1화

차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창밖으로 도시의 소음이 희미하게 스며드는 가운데 소예지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겉으로는 쉬고 있는 듯 보였지만 머릿속은 이미 군 측과의 협력 세부 사항을 정리하느라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고이한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길고 짙은 속눈썹이 눈꺼풀 아래로 옅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단정한 콧날과 붉고 윤기 있는 입술이 시선을 붙잡았다.자신도 모르게 목울대가 한 번 조용히 움직였다.어둑한 빛 속에서 소예지는 마치 날카로운 발톱을 거둔 고양이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그 모습이 묘하게 마음을 풀어지게 했고 고이한은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소예지가 그런 걸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래도 지금은 달랐다.관계는 조금씩 풀리고 있었고 그녀는 협력을 받아들이며 이렇게 곁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차가 고씨 저택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그 순간 소예지가 눈을 떴다. 눈 밑에 깔려 있던 피로가 아주 조금은 걷힌 듯했다.“다 왔어.”고이한이 낮게 말했다.소예지는 고이한을 따라 차에서 내려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에서는 고하슬의 신난 목소리와 고수경의 웃음소리가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들어가 보니 둘이 윷놀이판을 앞에 두고 한창 노는 중이었다.“아빠, 엄마, 돌아왔어요!”고하슬이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보자 환하게 소리쳤다.“소예지 언니.”고수경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진가영과 최현숙은 옆에 나란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할머니, 저 하슬이 데리러 왔어요.”소예지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진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예지를 바라봤다.“예지야, 피곤하면 하슬이 여기서 재워도 돼.”“저 안 피곤해요. 감사합니다.”소예지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진가영도 더는 붙잡지 못하고 시선을 손녀에게 돌렸다.“하슬아, 엄마랑 집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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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2화

고수경이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멍하니 중얼거렸다.“그럼 오빠가 그때 나름대로 마음을 쓴 거였네요?”최현숙이 코웃음을 쳤다.“그게 다 네 오빠가 소예지한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보상이었던 거야. 심유빈이 발목을 잡고 있으니 입으로는 말을 못 하고 행동으로라도 표현한 거지.”고수경이 조금 답답한 듯 투덜거렸다.“오빠 입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말을 안 한 거예요? 그때 말을 했으면 이혼까지 안 해도 됐을 수도 있잖아요.”“네 오빠한테 무슨 낯짝이 있어서 이혼 얘기를 꺼내. 이혼은 예지가 먼저 한 거잖아.”최현숙이 퉁명스럽게 말했다.고수경은 시선을 어머니 쪽으로 돌렸다.“엄마, 그러면 오빠가 대체 왜 소예지 언니랑 결혼한 거예요? 제대로 들은 적이 없어서요.”“저는 계속 오빠가 은혜를 갚으려고 결혼한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오빠가 진짜 예지 언니를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진가영은 그 말에 또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이한이가 소예지를 좋아하는지 어떤지 나도 그때는 잘 몰랐어. 내가 아는 건 둘이 반년 정도 가까이 지냈다는 것뿐이야.”“네 아버지 살아 계실 때, 소예지 아버지가 네 아버지 주치의였거든. 두 사람, 병원에서 처음 만난 거야.”최현숙도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보탰다.“둘이 첫눈에 반해 서로 좋아했던 것 같아. 아니면 이한이가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예지가 학업까지 내려놓고 병원으로 달려와 간호했겠니.”진가영이 고개를 저었다.“소예지가 이한이를 더 많이 좋아했던 것 같아. 내가 우연히 엿들었는데 소예지가 이한이한테 고백을 하더라고. 그런데 이한이 반응이 그렇게 적극적이진 않았어. 그래서 나중에 내가 소예지를 따로 찾아가서 200억을 줄 테니 다시 어린이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지.”“언니가 그때 받아들였어요?”“받아들이긴 했는데 돈은 안 받았어.”진가영은 그때 소예지의 눈빛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맑고도 단호했던 그 눈.“소예지가 그러더라. 이한이를 돌본 건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거지 돈 때문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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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3화

고수경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었다. 그랬다면 그런 멍청한 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지난 일은 지난 일로 두자꾸나. 진심으로 미안하다면 앞으로는 그 아이를 존중하고 도와줘라. 예지는 옹졸한 애가 아니니까.”“맞아요. 저도 수경이도 소예지한테 큰 빚을 진 거잖아요. 이한이도 나름대로 만회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둘을 도와주는 거예요. 더 이상 발목 잡는 일은 없어야죠.”진가영도 이제는 마음을 정리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오빠랑 소예지 언니, 다시 잘 될 수 있겠네요?”고수경이 기대에 찬 얼굴로 손뼉을 짝 쳤다.최현숙이 그런 손녀를 흘끗 바라봤다.“깨진 거울 붙이는 게 말처럼 쉬운 줄 아니. 네 오빠가 속이 깊은 건 맞지만 그나마 이번엔 방향은 제대로 잡은 것 같아. 그래도 고이한이 소예지 마음을 돌리려면 계산이나 물질 같은 걸로는 택도 없어. 진심을 써야지.”“근데 오빠 성격에 진짜로 사람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고수경은 솔직히 의심스러웠다.자기라면 남편감으로 오빠 같은 사람은 절대 고르지 않을 것 같았다. 속이 너무 깊어서 하루 종일 그 마음을 읽으려다 머리만 아플 게 뻔했다.어릴 때부터 오빠의 두뇌에 치여 살았던 탓이였다.수학 숙제를 몰래 베끼려다 들킨 것도 눈빛 하나로 꿰뚫어 봤던 사람이었으니.앞으로는 되도록 성격 좋고 말 잘 통하는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었다. 예를 들자면 윤하준 같은 사람.물론 그건 애초에 바라는 것부터가 과한 생각이었다. 그런 남자가 자기 같은 사람을 봐줄 리가 없었다.소예지는 딸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 앞에 서자 고하슬이 뒤를 돌아보며 고이한을 올려다봤다.“아빠, 이제 아래층 집으로 가요?”“응, 아빠는 아래층에 있어.”고이한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우리 집에 빈방 있잖아요. 아빠 올라와서 자면 안 돼요?”고하슬이 고개를 번쩍 들고 소예지에게 물었다.소예지는 신발을 갈아 신으면서 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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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4화

자료 조회를 마친 소예지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자신의 연구에 가치가 있는 한 시장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소예지는 알고 있었다. 실력으로 발판을 마련해 나간다는 이 감각은 생각보다 단단했고 동시에 묘하게 든든하게 느껴졌다.고이한과의 관계는 지금처럼 선을 유지하면 충분했다. 딸의 아버지이자 연구 프로젝트의 후원자라는 위치. 그 정도 거리감이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그러다 소예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도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소예지는 서재의 불을 끄고 침실로 돌아왔다. 딸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통통하게 오른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자 은은한 아이 특유의 포근한 체온이 퍼졌다.가슴 깊은 곳이 따뜻하게 차올랐다. 소예지는 딸의 보드라운 뺨에 코끝을 살짝 묻었다. 아마도 엄마라면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일 것이다.딸이 태어난 뒤로 소예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얼굴만 봐도 저절로 손이 가는 이 감정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이었다.그 후 며칠 동안 소예지는 이지원과 함께 자료를 정리하며 군 측 이관 작업에 집중했다. 이호연은 별도의 연구 계획에 착수했는데 소예지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신경세포 활성화 연구였다. 머지않아 임상 실험으로 이어질 예정이었다.소예지는 주경호가 송세아의 다리 치료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송세아가 반드시 나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기술은 이미 충분히 무르익어 있었고 시간만 지나면 현실이 될 것이었다.소예지는 송세아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저런 생명력 있는 사람이 좋았고 전투기를 몰고 하늘을 가르는 그 모습은 소예지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그녀가 지금의 어려움을 벗어나 다시 하늘로 돌아가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하길 바랐다.그 주는 고이한이 중요한 일정으로 해외 출장을 떠난 상태였고 소예지 역시 바쁜 일정에 쫓기며 한 주를 보내고 있었다.전날 밤 구온에게 연락이 왔고 오늘 이른 아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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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5화

“이 교수님, 상석에 앉으시죠.”주현우가 재빠르게 다가와 이 교수를 안내했다. 이 교수는 그 성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소예지는 아무 의자나 하나 끌어다 주현우 옆에 앉았다. 구온 팀에게 인사를 마친 고이한이 자연스럽게 소예지 옆자리 의자를 빼고 앉았다.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고이한 곁의 자리는 언제나 소예지의 자리였고 소예지 옆자리를 함부로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하슬이는 말 잘 듣고 있어?”고이한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게서 옅고 청아한 특유의 향이 번졌다.소예지는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바라봤다. 눈가에 실핏줄이 몇 가닥 비쳐 있었고 이번 출장에서 제대로 쉬지 못한 듯 보였다.“응.”소예지는 고개를 숙인 채 짧게 답했다.식사 자리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고이한은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간간이 입을 열어 날카로운 제안을 덧붙이며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분위기는 좋았고 모두가 가볍고 유쾌하게 식사를 이어갔다.이 자리에서 유일한 여성인 소예지에게 서빙 직원이 디저트를 하나 더 가져다 놓았다. 따로 추가된 팥빙수였다.“손님, 고 대표님께서 특별히 주문하신 겁니다.”소예지는 순간 멈칫하며 고이한을 바라봤다. 고이한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식당 신메뉴래. 한번 먹어봐.”남자 손님들은 보통 단 음식을 즐기지 않으니 이 배려는 자연스럽게 그들과는 무관했다.소예지는 정갈한 그릇에 담긴 팥빙수를 바라봤다.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였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토론은 계속 이어졌고 당분간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소예지는 메인 요리를 마친 뒤에야 팥빙수에 천천히 손을 댔다.한 숟가락씩 떠먹는 동안 옆의 남자는 별다른 반응 없이 대화에 집중하는 듯 보였지만 시선의 끝자락은 은근히 그녀가 얼마나 먹는지 따라가고 있었다.정갈한 디저트인 만큼 양은 많지 않았고 소예지는 금세 그릇을 비웠다.그제야 고이한이 시선을 돌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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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6화

소예지는 안채린을 알아채지 못한 채 일행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홀 쪽으로 향했다.“세상에, 저분 소예지 씨 아니야?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완전히 실력으로 올라온 사람이잖아.”“과학계는 결국 실력 없으면 아무 말도 못 하지.”“맞는 말이야.”동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고 안채린은 손에 쥔 자료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한때 안채린은 소예지가 아버지와 강준석, 그리고 고이한의 영향이나 운 덕분에 지금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가 실력으로 올라섰다는 사실만큼은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방금 눈앞에서 본 장면은 날카로운 가시처럼 가슴에 박혀 들었고 그 괴리감에 숨이 막혔다.“안채린 씨?”동료가 그녀를 불렀다.“왜요?”안채린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얼굴빛은 이미 좋지 않았다.“올라가죠.”동료가 옆을 힐끗 보며 말했다.안채린은 자료를 안은 채 그들을 따라 걸었다. 그때 다른 동료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안채린 씨, 소예지 씨랑 같은 학번에 같은 반이었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학교 다닐 때 어떤 사람이었어요?”그 말에 안채린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었다.그녀는 동료들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내뱉었다.“그 사람이 어떻든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동료 두 명이 화들짝 놀라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괜히 건드렸다는 듯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도윤재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오늘 저녁 시간 있어? 밥 한번 먹자.]안채린의 눈에 짙은 혐오감이 스쳤다. 도윤재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었다.그녀는 답장을 무시했다.곧이어 또 메시지가 도착했다.[채린아, 오늘 저녁에 네 아버지 관련해서 할 얘기가 있어. 분명히 관심 있을걸.]이번에도 무시했다.그러자 다시 메시지가 이어졌다.[진짜 궁금하지 않아? 네 아빠에 관한 비밀인데.]안채린은 아버지가 바람을 자주 피운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또 그 더러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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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7화

안채린은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를 몇 마디 달랜 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도윤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디서 볼 거야?”감정을 눌러 담은 채 물었다.아버지에 관한 일을 알아내려면 결국 도윤재를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도윤재는 아버지 회사에서 1년간 일했던 사람이었고 그만큼 아버지의 사생활을 적지 않게 알고 있을 것이었다.도윤재는 그녀가 이렇게 선뜻 나올 줄은 몰랐는지 잠깐 놀란 기색을 보이다가 곧 집 근처 식당 이름을 말했다.“저녁 일곱 시. 꼭 나와야 해.”전화를 끊은 뒤 안채린은 다시 의자에 앉았고 도윤재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아버지에게 정말 사생아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 아이 때문에 이제는 가정까지 버리려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이어졌다.결국 그런 집안에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버지에게 딸은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현실만 또렷하게 남았다.그때 휴대폰이 다시 울렸고 발신자는 어머니였다. 안채린은 망설일 틈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엄마.”“나쁜 자식, 네 아버지가 해외 은행에 몰래 2천억을 숨겨놨어.”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안채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2천억을 해외 은행에... 아버지가 정말 그 많은 돈을 몰래 빼돌려놨다는 말이야?’“엄마, 잘못 본 거 아니에요?”충격에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틀림없어. 네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금고 비밀번호를 알아냈는데 계좌가 여러 개로 나뉘어 있고 전부 합치면 2천억에 달하는 예금증서들이야. 여권 사이에 끼워져 있더라고.”장인화의 목소리가 울음 섞여 무너져 내렸다.“채린아, 이건 처음부터 다 계획이었어. 우리 모녀를 버릴 준비를 진작부터 해온 거야. 저 2천억으로 자기 새 인생을 살겠다는 거잖아.”발밑에서부터 싸늘한 기운이 기어올라 온몸으로 퍼졌다. 아버지는 밖에서 혼외 자식을 낳아놓은 것도 모자라 이미 오래전부터 거액의 재산을 은밀하게 빼돌리고 있었던 것이다.이대로라면 이혼을 하더라도 자신과 어머니는 실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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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8화

처음 관계를 맺은 이후로 안채린은 도윤재에게 몇 차례 더 같은 요구를 받아왔다.경찰에 신고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도윤재의 손에는 아버지에 관한 증거뿐 아니라 MD에서 있었던 일을 감춰준 약점까지 쥐고 있었다.게다가 도윤재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어 최대한 거리를 두며 피해 왔다.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달랐다. 아버지의 사생아에 대한 정보를 반드시 얻어내야 했고 어머니 몰래 아이를 낳은 그 여자가 누구인지까지 확인해야 했다.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저녁 식사를 겨우 마친 뒤, 안채린은 도윤재의 암시와 협박이 뒤섞인 시선에 결국 그 혐오스러운 아파트로 따라 들어갔다.모든 게 끝난 뒤, 안채린은 온몸을 덮치는 불쾌감을 억누르며 급히 옷을 챙겨 입고 도윤재를 바라봤다.“이제 말해줄 수 있지?”도윤재는 목적을 달성한 사람답게 만족스러운 얼굴로 침대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네 아빠 그 사생아 엄마, 너도 아는 사람이야.”안채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누구야?”“예전에 성양 그룹 재무부 팀장 했던 유춘화. 듣자 하니 네 어머니 쪽 친척이라던데.”안채린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수축했다. 머릿속에 한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살갑게 “채린아”라고 부르던 얼굴, 어머니 외가 쪽 먼 친척의 딸로 어머니의 사촌 동생 격이었고 거의 오십 가까운 나이에도 미혼이었던 사람이다.명절마다 선물을 들고 찾아와 어머니에게 유난히 다정하게 굴던 모습이 떠오르자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밀려왔다.바로 그 여자였다.유춘화.대학을 졸업한 뒤 어머니가 직접 성양 그룹에 데려다 심어둔 사람이었고 재무부에 넣은 것도 아버지의 자금 흐름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안채린은 황당함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하마터면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싶었다.어머니가 아버지를 감시하려고 들여보낸 사람이 아버지의 내연녀가 되고 결국 아이까지 낳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그 애 몇 살이야?”안채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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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9화

안채린이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초췌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평소 꼼꼼하게 가꿔온 얼굴이 하루 만에 몇 년은 더 늙어 보일 정도였다.지금은 냉정해야 했고 어머니와 함께 이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아버지와 유춘화가 돈을 챙겨 해외에서 편하게 살아가도록 내버려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안채린의 눈에 차갑고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아버지는 노련한 사람이고 유춘화 역시 머리가 비상한 여자였다.하지만 도윤재가 쥐고 있는 것들, 아버지의 과거 뇌물 수수와 불법 자금 해외 이전 증거는 아버지에게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었다.머릿속에서 계획이 빠르게 윤곽을 잡아갔다.도윤재를 이용해 아버지를 압박하고 거액의 입막음 돈을 받아내는 것이었다.아버지와 도윤재를 서로 물고 뜯게 만들면 된다.그 과정에서 둘 다 타격을 입겠지만 결국 끝까지 살아남는 건 자신이었다.아버지는 몰락하거나 감옥으로 갈 수도 있었고 도윤재 역시 공갈 협박죄로 처벌받을 수 있었다.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2천억 자산을 손에 넣을 방법을 찾으면 된다.어머니는 이 충격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안채린은 결국 어머니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 일은 자신이 직접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뜨거운 물이 오래도록 몸을 감쌌지만 씻어내도 씻어내도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였다. 집안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생각들이 끊임없이 밀려왔다가 다시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그 끝자락에서 결국 떠오른 것은 오늘 군 측 대표들 사이에 서 있던 소예지의 모습이었다. 여유로운 태도와 단정한 분위기, 그 모든 것이 유난히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돈보다 명성, 이 바닥에서 진짜로 갖고 싶은 것은 결국 그것이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소예지가 현관문을 열었다.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한 준비를 막 끝낸 순간, 고이한이 벽에 기댄 채 기다리고 있었다.“아빠!”고하슬이 재잘거리며 달려가 품에 안겼다.“아빠가 어린이집에 데려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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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0화

그는 소예지의 인생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었고 결국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질 관계였다.진작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가슴 어딘가에서 옅은 쓴맛이 번졌다.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결국 같지 않았다.소예지의 재능은 훌륭했고 그 단단한 의지는 존경스러웠다.전문 분야에서 빛을 발하는 그 자신감에 자신도 모르게 끌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윤하준은 알고 있었다.소예지가 자신에게 허용하는 거리는 언제나 일정했고 친구로서의 존중과 감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방금 교문 앞에서 고이한이 자연스럽게 소예지의 조수석에 올라 함께 떠나는 모습을 봤다. 그 사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호흡과 유대는 윤하준이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었다.고이한이 상공회의소를 통해 전문 재단을 설립하고 4조 원을 출연해 소예지 연구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었다.고신 그룹의 이전 투자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소예지가 독립적으로 연구를 이어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금액이었다.윤하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앞을 바라봤다. 시선은 다시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고 있었다.그에게는 그가 걸어야 할 길이 따로 있었다.소예지와 고이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소예지에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친구로서 기꺼이 손을 내밀 생각이었다.그녀가 연구의 길에서 더 큰 성취를 이뤄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 둘 사이에 가장 어울리는 결말일지도 몰랐다.소예지의 차 안.고이한은 소예지 곁에 앉아 도로 상황을 살폈다.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대화는 없었지만 차 안의 공기는 묘하게 평온하고도 편안했다.고이한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 윤하준의 차를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묘한 질투심이 치밀어 올랐다. 낯설지 않은 감정이었다.강준석이든 임현욱이든 윤하준이든 소예지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라면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반응했을 것이다.“오후 군 측 회의 준비됐어?”고이한이 먼저 말을 꺼내 침묵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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