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371 - Chapter 1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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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1화

소예지가 모함을 당했던 그 사건 이후 윤하준이 프로젝트를 취소하고 연구원과 엔지니어들을 해고한 것은 지유선 연구소의 마지막 명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물론 그 과정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소예지의 호감을 얻게 됐다.그 시기 윤하준이 소예지에게 품었던 마음은 분명했다.그리고 그때 고이한은 처음 느껴보는 압박감을 실감했다.윤하준은 주저하지 않고 소예지 곁에 섰고 막대한 사업적 손해까지 감수하면서 그녀를 지켜냈다.그 결단력과 흔들림 없는 태도는 고이한에게도 충격이었다.그때 윤하준은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사람이었다. 소예지에게 충분한 신뢰와 보호를 줄 수 있는 방식으로 움직였던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다시 그녀 곁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절대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말로 꺼내봤자 의미는 퇴색될 뿐이었다.고이한이 할 수 있는 건 앞으로 그녀에게 충분한 신뢰와 지지, 그리고 편애를 주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는 것, 설령 수단이 조금 떳떳하지 않더라도 방향만은 분명해야 했다.소예지는 그 사건을 떠올렸다.그 상황에서 자신을 일시적으로 격리한 조치는 프로젝트를 지키는 동시에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어차피 MD의 핵심 기술이었고 유출됐다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그래도 그때 의심받고 배제됐던 감각은 당시의 소예지를 깊게 찔렀다.“그래.”고이한이 낮게 받았다.“앞으로 윤 대표가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내가 최대한 도울게.”소예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그건 나랑 윤하준 씨 사이 일이야. 내가 직접 갚을 거야.”말끝에 담긴 뜻은 분명했다. 자신이 진 빚을 대신 갚아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고이한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당신 개인의 빚을 갚아주겠다는 게 아니야. 당신은 내 딸의 엄마고 윤하준은 내 오랜 친구야. 친구를 돕는 건 당연한 거잖아.”소예지는 말문이 막혔다.명분은 완벽했고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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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2화

고이한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마음 한쪽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이 순간 이 자리에 단 한 사람만 더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사람이 이 모습을 봤다면 분명 더없이 자랑스러워했을 것이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장인이자 소예지의 아버지, 소영욱이었다.소예지는 아버지의 재능과 단단함, 그리고 연구를 향한 열정을 그대로 물려받은 사람이었다.지금 이 순간 소예지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회의실을 장악한 채 군 측 대표들의 질문에 막힘없이 응하며 그들의 신뢰를 하나씩 쌓아가고 있었다.그때 고이한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뒤쪽 문으로 빠져나갔다.복도의 한적한 곳으로 걸음을 옮긴 뒤 전화를 받았다.“박사님.”“고 대표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스미스 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계약서에 따라 심유빈 씨에게 여러 차례 연락해 헌혈 의무 이행을 요청했는데 매번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미루더니 오늘은 아예 전화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연구소 혈액 재고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서요...”고이한의 안색이 차갑게 굳었다.“알겠습니다. 제가 처리하죠.”“감사합니다, 고 대표님.”스미스 박사의 전화가 끊겼다.소예지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했다고는 해도 연구는 계속 진행 중이었다. 고이한으로서는 이 방향의 연구를 멈출 수 없었다.고이한은 연락처를 넘겨 심유빈의 번호를 찾은 뒤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몇 번 신호가 가고 나서 일부러 나른하고 교태를 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이한 씨? 드문 일이네. 당신이 먼저 전화를 하다니.”“스미스 연구소 전화 왜 안 받았어.”고이한은 안부 같은 건 꺼낼 생각이 없었다. 단도직입적이었고 목소리는 차가웠다.심유빈이 잠시 침묵했다.“요즘 몸이 안 좋아서. 헌혈할 상태가 아니야.”“헌혈 가능 여부는 네가 판단하는 게 아니야. 나를 시험하지 마.”고이한의 목소리에는 한 줌의 온기도 없었다.심유빈의 어조가 거칠어졌다.“고이한, 나 사람이 아니야?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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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3화

심유빈의 눈에 짜증이 스쳤다. 임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러웠다.지금 임신이라도 된 상태였다면 방기성이 법무팀 선에서 끝낼 리가 없었다.분명 훨씬 더 적극적으로 고이한에 맞서고 그 계약 자체를 끊어내려 했을 것이었다.“자기야, 나한테 제일 잘 해주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심유빈은 목소리를 한껏 부드럽게 깔았다. 지금 고이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줄 사람은 방기성뿐이었다.방기성은 심유빈이 자신에게 기대는 태도에 기분이 좋아졌다.허영심이 한껏 채워진 그는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호기롭게 말했다.“걱정 마. 고이한 하나쯤은 내 눈에도 안 들어와. 당신은 몸 관리나 잘해. 우리 방씨 집안 대를 이어줘야지.”심유빈은 그의 품에 기대어 순종적인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머릿속에는 냉정한 계산만이 남아 있었다.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가져야 했다. 그래야만 방기성 곁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리와 발언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심유빈은 결국 고이한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계약서의 마지막 기한에 맞춰 스미스 박사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스미스 박사가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심유빈 씨, 다음부터는 고 대표님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분은 굉장히 바쁜 분입니다.”차가운 형광등 아래서 심유빈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선명한 붉은 혈액이 관을 타고 혈액백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자 자신의 생명까지 그 액체에 함께 빠져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가 심장을 움켜쥐었다.그 계약을 맺은 뒤로 몇 번째 채혈인지도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번 끝날 때마다 며칠씩 온몸이 무겁고 어지러웠고 회복하는 데만도 시간이 걸렸다.그리고 이제 그녀는 스물여덟이었다.이대로 계속된다면 몸이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스며들었다.이대로는 안 되었다는 판단이 빠르게 굳어졌고 결국 어떻게든 이 계약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마음이 굳어졌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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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4화

심유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하지만 목소리는 일부러 다급하고 걱정스러운 톤으로 바꿔 방기성과 맞춰 말했다.“세상에, 어쩌다가... 자기야, 너무 걱정하지 마요. 요즘 의학이 얼마나 발전했는데요. 태준이 괜찮을 거예요.”“일단 가서 상황부터 봐야겠어. 당신은 몸이나 잘 챙겨.”방기성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심유빈은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걱정 어린 표정이 사라지고 차갑게 계산된 눈빛만 남았다.방태준이 사경을 헤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황은 충분히 달라지고 있었다. 운명이 자신 편을 들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방기성에게 방태준은 하나뿐인 아들이었고 만약 그가 정말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막대한 가업의 상속 구도는 완전히 바뀔 수밖에 없었다.결국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될 사람은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하나로 정리되어 있었고 그 답은 자신의 배 속에서 태어날 아이였다.잠시 후, 방기성은 당분간 다른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한동안 깊이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었다.심유빈은 예전에 고이한이 언급했던 새로운 계약을 떠올렸다. 자신의 결혼과 임신, 출산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지금 그 계약에 먼저 서명하면 어떨까.’그리고 방기성과 결혼해 아이를 낳는 것까지 계산이 이어졌다.방기성이 눈을 감게 된다면 그의 재산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몫이 될 것이었고 그중 일부를 고이한에게 위약금으로 넘기면 모든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구조였다.방기성의 유산은 이십조 원에 가까웠다.위약금을 고이한에게 넘기더라도 남는 것은 충분했다.눈빛에 번지던 광기와 계산이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머릿속이 빠르게 정리됐다. 모든 전제는 하나로 수렴했다.고이한을 확실히 붙잡아 두는 것, 그리고 채혈로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소모되는 상황만큼은 반드시 막아내는 것이었다.심유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기사에게 말했다.“별장으로 가지 말고 고신 그룹으로 가줘요.”유미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거긴 왜?”“고 대표한테 볼 일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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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5화

심유빈의 눈에 타협의 빛이 어렸다.“이한 씨, 생각해 봤어. 새 계약 서명할게. 대신 내 결혼이랑 임신, 출산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계속 연구소에 협조하고 정기적으로 헌혈할게.”고이한의 깊은 눈빛이 그녀의 얼굴 위에 몇 초간 머물렀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김 비서.”옆에 대기하고 있던 김경환이 즉시 서류를 들어 심유빈 쪽으로 밀었다.“기존 계약 조항에 새 조건을 추가한 계약서입니다. 결혼과 출산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으니 잘 읽어보시고 문제없으시면 서명하시면 됩니다.”심유빈은 계약서에서 ‘종신 헌혈’이라는 문구를 확인하는 순간, 심장을 찌르는 듯한 감각에 숨이 턱 막혔다.회의 탁자 아래에서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고이한은 역시 단단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태도였다. 결국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겠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고 칠십, 팔십이 되어도 고씨 가문을 위해 피를 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강렬한 굴욕과 억울함이 올가미처럼 심장을 휘감았다.심유빈은 알고 있었다.고이한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이유는 결국 자신의 혈액에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한편으로는 고씨 가문만을 위한 연구의 자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한 보험이었다.그 생각까지 미치자 숨이 턱 막혔다.자신의 목숨이 소예지의 후손 건강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서명해도 되고 거부해도 돼.”고이한이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심유빈이 고개를 들었다.빛을 등진 그는 신전 안에 모셔진 차가운 신상처럼 그녀를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선택지는 서명뿐이었다.심유빈은 위약금 조항을 넘겨보다가 분노가 치밀어 고개를 들었다.“위약금이 왜 두 배야?”“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어. 서명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고이한이 등받이에 가볍게 기대며 말했다.목소리에는 여전히 어떤 감정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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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6화

새 계약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고이한은 심유빈의 결혼과 출산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누구에게 붙어살든 계약 조건에만 영향이 없다면 그 이상은 문제 삼지 않는다는 태도였다.김경환은 속으로 생각했다.만약 그때 심유빈이 선을 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대표가 그녀에게 적당히 안정된 삶을 마련해줬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심유빈은 이미 자원과 물질적인 이익을 누리면서도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고씨 사모님의 자리, 그리고 고이한의 마음까지 욕심냈다.심유빈은 새 계약서를 손에 쥔 채 차에 올랐다. 서류를 꽉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앞으로 얌전히 있는 한 고이한이 먼저 문제를 만들 일은 없었다.하지만 계약을 벗어나려는 순간, 천문학적인 위약금과 고신 그룹 법무팀이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현실로 보여줄 것이었다.심유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유미나에게 말했다.“지난번에 말했던 그 한의원으로 가줘.”몸부터 바로잡아야 했다. 시험관 시술 준비에 들어가야 했고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그날 저녁, 소예지는 딸과 함께 글자 공부를 하고 있었다.지난번 한 번 가르쳐준 뒤로 며칠 동안 제대로 봐주지 못했는데 책을 펼치자마자 고하슬이 먼저 뿌듯한 얼굴로 나섰다.“엄마, 이 글자 다 알아요!”소예지가 피식 웃었다.“그래? 그럼 한번 읽어봐.”고하슬은 소예지가 짚어주는 글자들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열 페이지가 넘어가도 막힘이 없었고 낱말 만들기까지 정확하게 해냈다.소예지는 적잖이 놀라며 감탄했다. 이 모든 것이 고이한이 가르쳐준 결과였다. 자신이 연구에 몰두해 있는 동안 고이한이 묵묵히 하나씩 가르쳐온 것이었다.아버지로서의 역할만 놓고 보면 충분히 합격점 이상이었다.소예지는 생각을 거두고 딸을 진심으로 칭찬했다.“진짜 잘했어.”“엄마, 지금 저 칭찬하는 거예요, 아빠 칭찬하는 거예요?”고하슬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소예지는 잠시 멈칫했다가 부드럽게 대답했다.“둘 다 잘했지.”“예!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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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7화

오후, 고이한이 소예지에게 문자를 보냈다.경주에 잠시 다녀올 일이 생겼으며 시간이 맞지 않으면 고수경을 보내 고하슬을 데려오겠다는 내용이었다.소예지는 얼마든지 시간이 되는 상황이었다. 현재 인계 업무가 많지 않아 정시에 출퇴근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한편, 소예지는 퇴근 후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고하슬은 하루 종일 어린이집에 있었음에도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나오자마자 참새처럼 통통 뛰며 소예지에게 달려왔다.소예지는 딸을 받아 안고 손을 잡아 차에 태웠다. 자리에 앉자마자 고하슬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엄마, 나 오늘 아침에 아빠한테 말했어요. 엄마가 아빠 칭찬했다고요.”차 시동을 걸려던 소예지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어젯밤 무심코 내뱉은 말을 딸이 고이한에게 전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별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전해지길 바란 말도 아니었다.소예지는 뒤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그랬구나. 그런데 앞으로는 그런 말은 굳이 아빠한테 전하지 않아도 돼, 알겠지?”고하슬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왜요? 아빠가 엄청 좋아했는데요.”소예지는 순간 말이 막혔다.순수한 얼굴을 바라보니 어른들의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더 말하지 않고 가볍게 넘어갔다.“아빠는 어디 갔어요? 왜 데리러 안 왔어요?”고하슬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아빠 경주에 일 보러 갔어.”소예지가 대답했다.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최근 국제 상업 동향과 관련된 일정일 가능성이 높았다.이후 이틀 동안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이 이어졌다. 연구소와 집을 오가는 단조로운 흐름이었다.사흘째 되는 날 아침, 고이한에게서 문자가 왔다.[오전에 돌아가.]소예지는 잠시 멈칫했다.그날 오후 두 시에는 상공회의소 전문 재단 출범 기념식이 예정돼 있었다. 고이한은 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다.소예지는 이미 상공회 측과 일정 조율을 마쳤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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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8화

“응.”소예지가 짧게 대답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고이한은 그녀가 눈을 피하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눈가에 옅은 웃음기가 스쳤다가 곧 사라졌다.그는 더 이상 압박을 주지 않고 몸을 돌려 담당자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러 갔다.소예지가 바깥으로 나오자 박시온이 옆에서 샴페인 한 잔을 건넸다.“아직 시간 있으니까 목이나 좀 축여.”소예지가 잔을 받아 한 모금 홀짝이자 박시온이 말했다.“아까 고이한 들어오는 거 봤어.”“응.”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두 시 정각, 출범 기념식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사회자의 간략한 개막 인사가 끝나자 고이한이 여유롭고 차분한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연단으로 향했다.조명 아래 그의 자태는 곧고 단단했다. 말끔한 정장이 그 특유의 귀하고 냉정한 기품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상공회 회장으로서 그의 축사는 원대한 시각과 간결하고 힘 있는 언어로 채워졌다.고이한의 축사가 끝나자 사회자가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다음으로, A시 의과대학 소예지 박사님을 모시겠습니다.”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소예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자연스럽고 침착한 걸음으로 연단을 향해 걸었다.마침 자리로 돌아가던 고이한과 스치듯 어깨를 지나쳤다. 고이한이 살짝 몸을 틀었고 두 사람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소예지는 그의 눈 속에 담긴 옅은 격려를 읽었다.그녀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무대 위로 올라섰고 마이크 앞에 선 뒤 높낮이를 조정하고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그 미소가 번지는 순간 객석은 잠시 숨을 죽였고 어딘가에서는 누군가의 시선이 그녀에게서 쉽게 떨어지지 못했다.소예지의 미소에는 자신감과 여유가 깃들어 있었으며 연구자 특유의 고요한 무게감까지 더해지면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끌림이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소예지가 발언을 시작했다. 화려한 수식어 없이 촘촘한 논리와 깊이 있으면서도 쉽게 풀어낸 연구 이야기가 이어졌다. 듣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흐름을 따라 과학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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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9화

소예지가 아직 밴드를 살펴보고 있는 사이 고이한이 어느새 앞까지 걸어왔다.소예지가 밴드를 바라보던 시선을 정확하게 포착한 그는 입꼬리를 거의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살짝 올린 채 낮게 말했다.“맞아. 당신이 사준 거야.”그 말에 소예지는 숨이 잠깐 멎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옆에 있던 박시온의 눈빛에는 구경꾼의 흥미가 반짝 스쳤고 그는 곧바로 자연스럽게 핑계를 만들었다.“예지야,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두 사람 먼저 얘기해.”소예지가 대답하기도 전에 박시온은 이미 빠르게 자리를 비켜났다.고이한이 이어서 덧붙였다.“셔츠 소매가 좀 헐렁해서 밴드를 하니까 딱 맞더라고.”소예지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결혼했을 때는 그의 옷 치수며 취향, 색상까지 전부 자신이 직접 챙겼었다. 하지만 자신이없다고 지금의 고이한이 몸에 맞는 셔츠 하나 제대로 못 맞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소예지는 더 이상 이 화제에 시간을 쓰지 않기로 하고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그런데 진 선생님은 왜 안 보이지?”전문 재단 투자금의 80퍼센트를 댄 투자자가 이 자리에 없을 리 없었다.고이한의 눈 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자연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진 대표님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못 왔어.”소예지는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아, 그렇구나.”고개를 끄덕인 소예지는 박시온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확인하고 말했다.“나 먼저 갈게.”“저녁에 같이 밥 먹자. 하슬이도 데리고 나가서 바람 좀 쐬고.”고이한이 불쑥 말했다.“하슬이가 좋다면.”소예지가 담담하게 받아쳤다.“그래, 오후에 내가 하슬이 데리러 갈게.”고이한은 말을 마치고 정장 소매를 걷어 올리며 몸을 돌려 한 어르신에게 인사를 건네러 갔다.잠시 후 박시온이 종종걸음으로 돌아와 소예지의 어깨를 툭 쳤다.“고이한이 일부러 그런 거지? 그렇게 오래된 걸 어떻게 찾아냈어?”“셔츠가 안 맞는다고 했어.”소예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박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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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0화

“엄마 집에 있어!”소예지가 대답했다.“그럼 엄마도 같이 밥 먹을 거예요?”“그게...”“엄마, 같이 가요 같이 가요!”고하슬은 거절당할까 봐 먼저 말을 끊듯 붙였다. 한껏 응석을 부리는 목소리였다.소예지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알겠어, 엄마 갈게.”“엄마, 그럼 주차장으로 내려와요! 아빠가 데리러 왔어요.”소예지는 딸과 함께 나가 잠깐이라도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다. 양희순에게 한마디를 남기고 아래로 내려갔다.주차장에 도착하니 고이한의 차가 막 자리에 들어서는 참이었다. 차창이 내려가자 고하슬이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엄마, 빨리요!”소예지는 딸의 조급한 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차 문을 열고 탔다.자리에 앉자마자 고이한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뭐 먹을래. 한식, 양식?”“아무거나 괜찮아.”소예지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래, 내가 알아서 할게.”고이한이 낮게 말했다.차는 한 레스토랑 앞에서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자 고하슬이 소예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나 너무 배고파요.”소예지가 딸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고이한도 손을 뻗어 고하슬의 반대쪽 손을 잡았다. 어느새 세 사람이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있었다.소예지는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고하슬이 너무 꽉 잡고 있어서 그대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직원이 반갑게 맞으며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고하슬은 고이한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메뉴를 들여다봤다.소예지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고 맞은편에 앉은 고이한은 오후에 입었던 옷 그대로였다. 왼쪽 팔에는 여전히 밴드가 감겨 있었으며 조명 아래서 보니 어딘가 절제된 분위기가 더 짙어 보였다.바로 그때 입구 쪽에서 두 사람이 들어섰다. 심유빈과 그녀의 매니저 유미나였다.소예지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가 곧바로 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심유빈도 세 사람을 발견했고 잠시 굳어진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이렇게 넓은 A시에서 하필 이 레스토랑에서, 그것도 소예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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