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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1화

고이한의 차가운 눈빛에 심유빈은 움찔했다.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옆에 있던 유미나도 숨을 멈출 뻔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고이한을 건드리는 건 아니었다.심유빈이 소예지를 향해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하슬이랑 맛있게 먹어.”그런데 바로 그 순간 고이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유빈을 흘겨보는 눈빛에는 어떤 반론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잠깐 밖에서 얘기하자.”그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심유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고이한의 눈빛을 보는 순간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려 했다.“나 방해하려던 게 아니...”하지만 고이한은 이미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 뒤였다. 심유빈은 어쩔 줄 몰라 유미나와 눈을 마주쳤고 그 순간 소예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소예지 앞에서 물러서고 싶지 않은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언니, 나 잠깐 다녀올게.”유미나에게 짧게 말한 심유빈은 애써 침착한 얼굴을 유지한 채 고이한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유미나도 불안한 마음에 그 뒤를 따랐다.식당 밖 한적한 구석, 고이한이 서 있었다. 자세는 곧았지만 그 주변으로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심유빈은 붉은 입술을 깨물며 그의 등 뒤로 다가섰다.“이한 씨, 할 말 있어?”고이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빛이 그대로 꽂혔다.“본인 처지 명심해.”그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앞으로 소예지와 하슬이 앞에서 한 번이라도 쓸데없는 말이나 행동하면 지금까지 받은 것 전부 토해내게 할 거야.”심유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급히 해명하려 했다.“이한 씨, 나 그냥 농담으로...”고이한이 냉랭하게 그녀를 내려다봤다.“나는 농담 같은 거 한 적 없어.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네가 발붙일 곳 없게 만들어줄 테니까.”그 말은 심유빈의 가슴을 돌덩이처럼 짓눌렀다.고이한은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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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2화

지금 심유빈에게 가장 중요한 건 하루빨리 방기성의 아이를 갖고 입지를 굳히는 것이었다. 소예지와 신경전을 벌이며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었다.누구나 알 수 있었다. 고이한이 소예지를 얼마나 아끼는지.그 앞에서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든 건 스스로 망신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가방을 꽉 쥔 채 차에 오른 심유빈은 언젠가 반드시 위약금을 고이한 앞에 던지고 그 통제에서 벗어나겠다고 맹세했다.한편 레스토랑 안, 고이한이 자리로 돌아왔다. 표정은 이미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는 소예지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소예지는 딸의 스테이크를 정성스럽게 잘라주고 있었고 방금 일은 작은 해프닝일 뿐이라는 듯했다.심유빈은 끝내 레스토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이미 고이한이 정리한 뒤였고 소예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빠, 유빈 이모 갔어요?”고하슬이 궁금한 듯 물었다.“응, 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고이한이 부드럽게 대답하며 파스타를 직접 돌돌 말아 딸의 입가로 가져갔다.“자, 이것도 먹어봐.”고하슬은 눈을 반짝이며 받아먹었다.조명 아래 식탁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고 소예지는 크게 개의치 않은 듯 스테이크를 모두 먹은 뒤 디저트까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모녀가 나란히 나눠 먹었다.고하슬 입가에는 크림이 묻어 있었고 소예지는 냅킨을 들어 천천히 닦아주었다.저녁 식사가 끝나고 고이한이 계산을 마치자 고하슬이 백화점에 가자고 졸랐다. 마침 근처에 큰 백화점이 있었고 소예지는 딸을 이기지 못했다. 고이한 역시 원래부터 딸에게는 약한 사람이었다.결국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백화점으로 향했다.알록달록한 물건들이 가득한 공간은 사람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소예지는 딸의 손을 잡고 장난감 코너로 걸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고하슬이 별자리 프로젝터 조명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이며 고이한 쪽으로 달려갔다.“아빠, 이것 봐요!”고이한은 딸과 눈높이를 맞추듯 쪼그려 앉아 부드럽게 물었다.“이거 마음에 들어?”“네! 이거 프로젝터 조명이에요! 별이 막 쏟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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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3화

소예지는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고 돌아서서 문을 밀고 들어갔다.고이한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안씨 가문 저택.그날 밤 안영수는 집으로 돌아왔다.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고 눈물을 질질 흘리는 장인화에게는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은 채 이혼 협의서에 서명하라고 압박하기 위해 돌아온 것이었다.안채린은 방 안에 있었다.그때 가정부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아가씨, 어서 가보세요! 부모님이 싸우시는 것 같아요.”안채린은 곧장 방에서 뛰쳐나가 안방으로 달려갔다. 문을 밀어젖히는 순간 어머니가 침대 위에 눌린 채 서명을 강요당하고 있는 장면 눈에 들어왔다.안채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꼼짝없이 눌린 채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번져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진 채 서류를 들이밀며 소리쳤다.“좋은 말로 할 때 서명해.”“아빠, 지금 뭐 하는 거예요!”안채린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앞으로 달려가 힘껏 아버지를 밀쳤다.안영수는 갑작스럽게 밀려 비틀거리다가 안채린임을 알아채고는 오히려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채린아, 여기 네가 끼어들 일 없어. 저리 가.”“무슨 권리로 엄마한테 이래요?”안채린이 어머니 앞을 가로막으며 온몸을 떨었다.“무슨 권리?”안영수는 코웃음을 치며 손에 든 서류를 흔들었다.“이 집에서는 내가 결정권자야. 오늘 네 엄마가 이 이혼 협의서에 서명해야 끝나는 거야.”장인화는 침대 위에서 흐느꼈다.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안채린은 냉혹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다 마음이 얼어붙었다. 내연녀와 혼외 자식을 데리고 하루빨리 해외로 나가려는 것이 분명했다.“엄마, 잠깐 나가 계세요. 아빠랑 얘기할 게 있어요.”장인화가 안영수를 한 번 원망스럽게 쏘아보며 방을 나갔다.“이 양심 없는 인간아! 내가 몇십 년을 당신 곁에서 살았는데...”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둘만 남았다. 안영수는 이미 짜증스러운 얼굴로 안채린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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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4화

“여보세요, 채린아. 나 보고 싶었어?”수화기 너머로 도윤재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안채린의 눈 속에 짙은 증오가 스쳤지만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도윤재, 우리 아빠가 당신 손에 증거가 있다는 거 알아. 현금 10억 줄 테니까 증거 넘기래.”“뭐라고? 10억?”도윤재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높아졌다. 믿기 어렵다는 듯하면서도 그 안에는 광기 어린 기쁨이 섞여 있었다.“진짜야? 채린아, 나 속이는 거 아니지?”“내가 왜 속여.”안채린이 낮게 말했다.“아빠가 엄마랑 이혼하려는 거잖아. 어차피 아빠 돈은 내 돈도 아닌데 받을 수 있는 만큼 받아.”“좋아, 알겠어. 문제없지.”도윤재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10억은 그에게 있어 횡재나 다름없었다.밤 아홉 시쯤, 인적이 끊긴 폐쇄된 부두 근처.안영수는 제시간에 차를 몰고 도착했다. 운전석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폭스바겐 한 대가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차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자신의 옛 부하 도윤재였다. 뒤에서 자신을 배신한 놈이라는 생각에 안영수는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이를 악물며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도윤재는 차에서 내리며 안영수를 보고 일단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안 대표님, 오셨군요.”안채린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오늘 밤 10억을 손에 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스쳤다.안영수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가방을 앞으로 내밀며 다가왔다. 그러자 도윤재가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 돈 가져오셨어요?”안영수는 가방을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육천만 원이야. 받고 증거랑 녹음 파일, 백업 전부 내놔.”도윤재의 얼굴에 서려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굳었다. 가방을 열어 확인해 보자 역시 육천만 원뿐이었다.안채린이 말한 10억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육천만 원이요? 대표님, 내가 거지도 아니고!”도윤재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하며 가방을 홱 내던졌다.“안채린이 10억 준다고 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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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5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안채린은 핸들을 쥔 손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조금 전 아버지가 도윤재의 차를 들이받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 재생됐다.도윤재가 미웠던 것은 사실이며 두 사람을 서로 충돌하게 만들 생각도 있었지만 도윤재가 실제로 아버지 손에 죽게 될 줄은 몰랐다.그 공포감은 그러나 오래 머물지 못했고 곧 더 강한 자기보호 본능에 덮여버렸다. 자신이 일부러 금액을 부풀려 말하며 갈등을 키웠고 결국 아버지를 살인까지 몰아간 셈이었다.‘사실을 들킨다면...’안채린은 다시 한번 몸서리를 쳤다.아버지가 그동안 해온 일들이 떠올랐다.어머니에게 이혼을 강요했고 2천억을 빼돌려 내연녀와 혼외 아들을 데리고 해외로 도망치려 했던 과거까지 겹치며 안채린의 마음은 점점 더 단단하게 굳어졌다.그런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었다.안채린은 차를 길가에 세웠다.떨리는 손으로 다른 휴대폰을 꺼낸 안채린은 방금 전 찍은 영상을 익명으로 경찰청 온라인 신고 시스템에 전송했다.전송이 모두 완료되자 유심칩을 뽑아 단번에 부러뜨린 뒤 창문을 내려 밖으로 던졌다.오늘 밤 어머니는 이미 외갓집으로 떠났고 안채린도 집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결국 밖에서 어떻게든 버티기로 했다.안씨 가문 저택.안영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떨리는 손으로 술을 한 잔 따랐고 몇 잔을 연달아 들이킨 뒤에야 겨우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도윤재라는 위험 요소를 처리한 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아내와 이혼만 성사되면 유춘화와 아들을 데리고 훌훌 떠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정리했다.안영수가 이생에서 유일하게 못내 아쉬운 것은 그 아들을 당당하게 안씨 가문으로 데려올 수 없다는 점이었고 이혼 후 유춘화와 결혼하면 아들도 더 이상 손가락질 받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머릿속을 채웠다.그때 현관 밖에서 급하게 초인종이 울렸다. 안영수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 늦은 시간에 누가 왔는지 크게 의심하지는 않았다.오늘 밤 자신이 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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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6화

심유빈은 몸에 달라붙는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오늘 밤 고이한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며 떠나지 않았고 이름조차 부를 자격이 없다는 듯한 그 철저한 무시와 굴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분하고 억울했지만 정면으로 맞설 힘조차 없었다.“언니, 나 어디가 소예지보다 못해?”심유빈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원망이 뒤엉켜 있었다.“내가 십 년을 곁에 있었잖아. 십 년이나. 근데 왜 그 사람 눈에는 소예지밖에 없는 거야?”유미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유빈아, 지금 이런 말 해봤자 달라지는 거 없어. 고이한 마음은 애초에 너한테 없었어. 십 년을 더 매달려도 결과는 똑같아.”“내 말 좀 들어. 이제 그만 내려놔. 지금 너한테 제일 중요한 건 방 대표야.”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도 명확한 일이었다.처음부터 끝까지 심유빈 혼자 고이한에게 빠져 있었고, 그의 여자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상상하며 집착해 온 것에 가까웠다.“방기성.”심유빈이 피식 웃었다.“돈 좀 있는 거 말고는 고이한이랑 비교가 돼?”“하지만 방 대표님은 너한테 명분을 줄 사람이야. 아이도 낳게 해줄 사람이기도 하고. 유빈아, 이제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해.”유미나가 간절하게 말했다.“아들만 낳으면 방씨 집안에서 네 자리는 흔들리지 않아. 그때 가면 돈도 있고 지위도 있는데 굳이 고이한을 건드려서 뭐가 남겠어?”“방 대표님이 언젠가 먼저 가면 그 돈 쥐고 고이한보다 잘생긴 남자 찾는 게 뭐가 어려워?”심유빈이 유미나를 흘겨봤다.“언니는 몰라.”고이한이 가진 매력은 단순한 외모나 재력의 문제가 아니었다.무엇이든 장악할 것 같은 여유와 날카로움, 눈빛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숨을 멎게 할 만큼의 기운은 다른 남자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유미나는 더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이한이 아무리 좋아도 그의 마음이 심유빈에게 향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오늘 레스토랑에서도 분명했다. 고이한의 마음은 온전히 소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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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7화

심유빈의 안색이 굳었다. 입을 열어 반박하려다 결국 말을 삼켰다. 유미나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소예지와 같은 파티 자리에 있었다면 자신은 분명 어떻게든 자신의 위치를 증명하려 들었을 것이고 소예지를 깎아내리거나 밀어내며 망신을 줬을 가능성이 컸다.유미나가 말을 이었다.“고이한이 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소예지를 자기 사교 모임에 데려가지 않은 거야. 너랑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고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소예지를 집에 두고 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둔 건 오히려 그만큼 아꼈기 때문이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유미나의 말이 심유빈의 가슴을 세게 내려쳤다.오랫동안 스스로를 지탱해 오던 믿음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했고 머릿속에서 정당화해 왔던 생각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었다.자신이 끝까지 붙들고 있던 ‘소예지는 애초에 그 자리에 어울릴 수준이 안됐다’는 확신이 사실은 고이한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보호하기 위한 방식이었다는 말이었다.억울함이 치밀어 오른 심유빈이 결국 반박했다.“그렇게 사랑했으면 왜 이혼한 거야?”유미나가 차분하고 단호하게 대답했다.“그건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고이한이랑 소예지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둘 문제고 더구나 고이한이 이혼하면서 재산 절반을 소예지한테 줬잖아.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심유빈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유미나가 이어 말했다.“그건 고이한이 소예지랑 완전히 끝낼 생각이 없었다는 거야. 여덟 개 회사를 나눠준 건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장기적인 계산이었고 결국 소예지를 자기랑 끊어낼 수 없게 묶어둔 거야.”“포기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더 깊게 판을 깔아놓은 거지.”유미나의 말은 심유빈의 가슴을 찔러 들어왔다.결국 고이한과 소예지의 세계에서 자신은 처음부터 철저한 외부인이었고 언젠가 버려져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였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흥.”심유빈이 자조하듯 웃었다.“그 말대로라면 고이한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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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8화

유미나가 심유빈을 한 번 바라본 뒤 차분하게 분석을 이어갔다.“진짜로 재결합하려면 고이한이 완전히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해. 소예지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신뢰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고 소예지를 동등한 관계로 두는 걸 넘어서 자신을 한없이 낮출 수 있어야 해.”“그래야 소예지가 마음을 돌릴 가능성이 생겨.”심유빈은 듣자마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차갑게 비웃듯 말했다.“고이한 같은 사람이 자기를 그렇게까지 낮출 수 있을 것 같아? 언니가 그 사람을 너무 모르는 거야.”“소예지가 과학계에서 이뤄놓은 성과를 보면 눈이 높은 남자들도 쉽게 넘볼 수 없어. 고이한이 그 독단적인 버릇을 고치지 못하더라도...”“최소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약한 모습을 보일 줄은 알아야 해. 그러지 않으면 이번 생에서는 소예지를 되찾을 수 없어.”그 말에 심유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질투가 번지며 올라왔고 하늘 위에 군림하던 고이한이 소예지 앞에서는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마음을 구걸해야 할 수도 있다는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그 장면만으로도 속이 비틀리는 듯했다.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어쩌면 고이한이 정말로 그런 모습까지 보일 수도 있다는 예감 때문이었다.옆에서 유미나가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심유빈이 단호하게 끊었다.“그만해. 더 듣고 싶지 않아.”유미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이 모든 이야기는 심유빈을 깨우치게 하려는 의도였다.고이한과 소예지 사이 세계에는 더 이상 발을 들이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고 건드릴수록 상처만 남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심유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 불빛에 비친 얼굴은 다소 창백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야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고개를 돌린 채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세상에 뛰어난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고이한이 꼭 소예지한테만 매달릴 것도 없잖아.”유미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세상엔 뛰어난 여자 많지. 그런데 지난 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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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9화

사흘 뒤 금요일, 소예지는 구온 팀과 일부 인계 작업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주말이 다가왔다는 실감을 했다.인계 속도를 더 높여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딸의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올 생각도 하고 있었다.2년 반 동안 제대로 쉰 기억은 거의 없었다. D국 스키 여행도 일을 함께 들고 간 일정이었고 경주 출장 역시 매번 업무가 중심이었다.짐을 챙기며 퇴근 준비를 하던 소예지에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강준석 이름이 떠 있었다.“여보세요, 강 선배.”소예지가 가볍게 전화를 받았다.“예지야, 오늘 저녁 시간 있어? 같이 밥 먹자. 이지원이랑 이서연도 올 거야. 오랜만에 한 번 모이자고.”강준석의 목소리에는 여유와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소예지는 잠시 멈칫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무언가 좋은 소식이 있는 듯했다.“선배, 무슨 좋은 소식 있어?”강준석이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못 속이네. 민간 프로젝트 첫 번째 출시 제품이 예약 주문부터 예상치를 훨씬 넘겼어.”“시장 반응도 좋고 팀에서 조촐하게 축하 자리 가지려는 거야. 초기에 중요한 역할 한 사람 빠지면 안 되잖아.”소예지는 그 말을 듣고 진심으로 기뻐졌다.“정말 잘됐네. 축하해, 선배.”그리고 망설임 없이 답했다.“어디야? 좀 늦게 갈 수도 있는데.”강준석이 주소를 알려줬고 위치는 시내 중심가였다.“알겠어. 아이 맡겨놓고 여섯 시 반쯤 갈게.”“그래, 기다릴게.”전화를 끊은 소예지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네 시 오십 분이었다. 딸을 어떻게 맡길지 고민하던 순간 다시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고이한이었다.예감처럼 전화를 받은 소예지는 짧게 말했다.“여보세요.”“오늘 밤 축하 자리에 당신도 와. 하슬이는 수경한테 부탁해서 우리 엄마 집에서 저녁 먹게 할게.”고이한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소예지는 이미 그가 모든 상황을 정리해 두었다는 것을 알았다.마침 바깥 공기를 쐬고 기분 전환을 하고 싶던 차라 나쁘지 않았다.“알겠어. 고마워.”“오늘 저녁은 푹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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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0화

“예지야, 왔어.”강준석이 소예지를 발견하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다.“와, 소 박사님 오셨다!”강준석 팀원들이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소예지는 웃으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그냥 이름으로 불러요.”“나이 어린 사람은 이름, 나이 많은 사람은 선배님으로 부르면 되지.”강준석이 웃으며 말했다.소예지를 처음 보는 팀원들이 하나둘 다가와 자기소개를 했고 소예지 역시 차분하게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어울렸다.분위기는 편안하고 유쾌했고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들끼리 프로젝트 성공을 화제로 삼으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그때 한 남자 팀원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다가 빠진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안채린이었다.그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안채린 씨, 오늘 밤 모임에 왜 안 오셨어요?]잠시 후 답장이 왔다.[오늘 밤에 모임이 있었어요? 저는 왜 몰랐죠?]남자 팀원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이메일 못 받으셨어요? 이번 프로젝트 성공 축하 자리예요.]잠시 뒤 또 답장이 왔다.[강 선배님이랑 소 박사님 팀도 다 왔어요.]집에 있던 안채린은 그 메시지를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렇게 큰 자리에서 자신만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제외된 건가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소예지도 참석했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마음을 흔들었다. 강준석의 판단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뜻인지 알 수 없었다.안채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결국 강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강준석은 팀원들의 웃음소리 사이에서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밖으로 나갔다.“여보세요, 강 선배. 오늘 저녁 모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한테 연락 안 온 건 실수야? 나는 왜 몰랐지?”강준석이 잠시 망설이다가 차분하게 답했다.“이번 자리는 고 대표님이 마련한 건데 연락 안 한 것도 고 대표님 뜻이야. 구체적인 이유는 나도 잘 몰라. 다음 팀 행사 때는 꼭 연락할게.”집 거실에 앉아 있던 안채린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고 얼굴이 순식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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